〈 14화 〉 014 수해강줄기
* * *
왜 갑자기 유령이 보이기 시작한 걸까.
사슴과 말을 닮은 동물은 그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건가.
조금씩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따스함과 서늘함의 정체는 뭐지?
몸 안을 돌아다니는 훈기와 한기는 뭐고?
한동안 생각에 빠져있던 환인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슴뿔 지팡이를 들고 나타났던 녹색 괴물의 초능력과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연관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환각 시야와 유령을 볼 수 있는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먼저 동물 유령.
사슴과 말을 섞은 듯한 다리 6개의 동물 유령이 괜히 자신의 주변을 서성거리다 사라진 것은 아닐 테지.
시험 삼아 사슴뿔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쥔 환인은 마음속으로 방금 그 6개의 다리를 가진 동물을 불러보았다.
“…….”
동물 유령은 오지 않았다.
좀 더 강한 바람을 가져야 하나 싶어서 명상할 때처럼 정신집중을 해가면서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처음 동물 유령을 느꼈을 때처럼 갑작스러운 서늘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식은 아닌 건가.”
행동하고 보니 실소가 나온다. 지구에 있었을 때는 유령이나 귀신은 미신으로 치부하며 조금 믿지 않았었는데.
동물 유령을 부르는 데 실패한 뒤에는 몸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신경을 쏟았다.
일단 따스함과 서늘함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현상은 지팡이를 손에서 놓아도 중단되지 않는다.
몸 안을 훈기와 한기가 흐르는 것 같지만 그 감각이 워낙 옅어 확실하지 않았고, 또 두 가지 감각이 불쾌하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두 감각에 집중하고 있자니 오히려 심신이 안정되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피부에 닿고 있는 서늘함이 동물 유령에게서 느꼈던 서늘함과 비슷한 듯 한데…….’
무엇 하나 명확한 해답이 없는 의문들이라 조금 답답하다.
하나의 예시만 주어진다면 머릿속이 개운해질 것 같은데.
사슴뿔 지팡이와 몸에 일어난 현상을 두고 씨름하는 사이 식량과 옷가지가 모두 말랐기에 환인은 벌려둔 것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식량을 모두 챙겨서 재차 꾸러미로 만들고 짐승 가죽으로 둘둘 감아 봇짐처럼 만든다.
분해해놓은 멀티툴을 다시 조립해 챙기고 침수된 스마트폰도 회수한다.
그 후에는 창날의 교체를 시도했다.
우선 돌도끼와 흑곤봉, 멀티툴을 이용해 숏소드의 힐트와 자루를 분해한다.
분해된 숏소드의 슴베, 자루를 조립하는 부위는 원통형이 아닌 길쭉한 1자형이었다.
거무튀튀한 봉 끝에 매어져 있던 녹슨 단검을 뗀 환인은 숏소드 슴베의 길이만큼 창대 끄트머리를 반으로 쪼갠 다음 슴베의 굵기 정도로 단면의 중심을 긁어낸다.
슴베가 들어갈 곳을 파내는 것이 좀 힘들었는데 멀티툴의 나이프로 죽죽 그어서 틈을 내고 일자 드라이버로 깎아내듯 긁어서 파낼 수 있었다.
거무튀튀한 나무의 내구와 강도가 상상 이상이어서 솔직히 힘든 작업이었다.
만약 멀티툴이 없었다면 단검이 묶여있던 방식으로 대충 묶어서 썼겠지.
그 후 숏소드의 날 뒷부분을 파놓은 홈에 끼우고 조립, 못구멍에 맞춰 낸 구멍으로 길게 잘라놓은 가죽을 끼워 있는 힘껏 감아서 절대 풀리지 않게 매듭지어놓았다.
이렇게 만들고 보니 정말 스피어 계통의 창처럼 보인다.
이전에 비해 날이 4배가량 길어진 창을 휘두르고 찔러보니 상당히 만족스럽다.
꽥.
비상식량을 묶고 있는 끈도 조금 헐거워졌기에 덩굴 줄기로 끈을 새로 만들어 교체하고 보니 2시간가량 시간이 흘렀다.
“…….”
정장 상의와 코트를 챙겨입은 환인은 잠시 대호수의 잔잔한 수면을 응시했다.
그 고래 비슷한 괴생물체는 왜 해일을 일으켰을까.
지구의 고래가 점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 곳에 있는 동족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라거나 몸에 붙어있는 유해 생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등등
그만한 덩치가 수백 미터를 뛰어올라 떨어지는 데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그 괴생물체가 그런 이유로 막대한 에너지를 낭비하진 않을 거라고 보는 환인이었다.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나.’
타당한 가설이라고 하면 역시 싸움이다. 그 고공 점프가 적을 죽이기 위한 공격이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다.
“호숫가에서 먹을 걸 구할 때 조심해야 할 게 하나 더 생겼군.”
상식 밖의 존재를 목격했지만, 환인은 무섭다거나 두렵지 않았다.
담수 해일이 위협적이긴 하지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다. 괴생물체는 덩치만 수십 미터니 수심 얕은 호숫가에 접근하지도 않을 테고.
괴생물체의 존재 때문에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식량을 포기하긴 아깝다.
금방울 꽃과 잎의 진통 효과는 환인의 기대 이상이었다.
허벅지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사슴뿔 지팡이로 하중을 분산해가며 걷고 있다지만 상처가 거의 아물어가고 있는 것처럼 편안했던 것이다.
거기다 비취게 찜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워서인지 힘도 나는 것 같고 족히 10㎏은 넘을 짐의 무게도 부담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은 지 4시간째.
평소였다면 괴물과 한 번은 마주칠 시간이지만 작은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싱그러운 평온한 시간만 이어졌다.
혹시 괴물들도 호수에 사는 괴생물체를 알고 있고, 그 괴생물체를 무서워해서 가까이 오지 않는 걸까.
그런 거라면 이곳도 나름대로 안전한 장소일 거 같은데.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타나지 않는 괴물의 존재가 아쉽다.
‘죽인 괴물이 유령이 되어 나타날지 아닐지 확인하고 싶은데.’
눈에 띄는 곤충을 몇 마리 잡아서 죽여봤지만, 그 혼은 나타나지 않았다.
빛의 강에서 느꼈던 고통의 차이를 생각해본다면 영혼의 출몰 여부도 다를 거라고 짐작되지만, 확인을 위해서 괴물을 죽여보고 싶은 환인이었다.
하나 걱정이라면 빛의 강에 다시 발을 디뎠을 때다.
킬 카운트가 차곡차곡 누적된다면 다음 빛의 강에서는 정말로 죽을 테니까.
‘하지만 그 빛의 강을 다시는 못 볼 것 같단 말이지…….’
근거는 없지만, 왠지 그럴 거라는 생각이 믿음 수준으로 계속해서 들고 있다.
물론 그런 게 아니더라도 괴물을 죽이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온갖 사방에 괴물이 서식하고 있는 밀림이다. 살생하지 않고 숲을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만큼 환인은 천연이 아니다.
그렇게 멈추지 않고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던 환인은 오후 3시 즈음이 되었을 때 호수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강이 되어 흐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긴 지대가 높은 곳이었나.”
강의 폭은 눈대중으로 60여 미터. 가장 깊은 수심은 4m에 강물이 얼마나 맑은지 강바닥에 팔뚝만 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이 보일 정도다.
강변으로 10m가량의 자갈밭이 형성되어있었고 호숫가와 마찬가지로 낮은 절벽이 절벽 계곡처럼 강의 좌우로 형성되어있다.
절벽의 높이는 대충 4층 정도로 호숫가보다 이쪽이 좀 더 높았으며, 흙벽인 호숫가와 다르게 이쪽은 돌벽이었다.
물살이 그리 빠르지 않지만, 수심이 깊은 곳은 키를 훌쩍 뛰어넘어 헤엄쳐서 넘어가긴 힘들어 보인다.
수영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10kg이 넘어가는 짐을 지고 할 정도로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강 건너편으로 던질 만큼 강폭이 좁지도 않고.
‘통나무를 튜브 삼아 넘어가는 방법도 있지만……. 강폭이 좁아지는 곳이 나올 수도 있으니 일단 강을 따라 남하해야겠군.’
절벽 위에서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던 환인은 이상함이 느껴질 정도로 맑은 강을 보며 아까 자신이 겪은 해일을 생각했다.
그만한 파도라면 이 강줄기에도 여파를 끼쳤을 텐데 자갈밭만 젖어있고 물은 투명하리만치 깨끗하다.
‘흙탕물이 되어있어야 정상일 텐데. 바닥에 깔린 자갈과 바위 때문인가.’
강이지만 여느 강처럼 대다수의 진흙과 수초로 적당히 이루어진 강이 아니다. 흙은 아예 보이지 않고 자갈과 바위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어른 몸집만 한 것도 많고 때때로 집채만 한 바위도 보인다.
지식으로는 물살로 자갈끼리 부딪치며 잘게 부서지고 마모되어 작아야 정상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하하던 환인은 서서히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짐승 머리 괴물을 볼 수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양쪽 절벽 중 환인이 있는 쪽의 한쪽 귀퉁이가 무너진 것처럼 완만한 경사 지대가 나타났고, 짐승 머리 괴물 아홉 마리는 물을 마시기 위해서인지 그곳을 통해 강에 접근하고 있었다.
창날의 길이를 늘려 공격력과 적중 범위를 늘렸기에 아홉 마리라도 상대할 자신이 있는 환인이었지만,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 속에 납작 엎드려 숨은 후 수풀을 약간만 젖혀 짐승 머리 괴물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평범하게 물을 마시러 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경계하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강가에 도착한 짐승 머리 괴물은 세 마리가 먼저 물을 마시고 나머지 여섯 마리는 주변을 경계하는 식으로 번갈아 가며 물을 마신다.
목을 축인 뒤에는 세 마리가 경계 상태에 들어가고 나머지 여섯 마리는 주변 자갈밭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기 시작했다.
크르릉.
캥!
우르르르.
경계가 무색하게 비취게나 별조개 등을 찾아내며 떠드는 모습이 환인의 눈에 비친다.
적을 경계하고 있는 거라면 조용히 찾을 것만 찾고 떠나는 것이 좋을 텐데. 저건 적을 부르는 행동이 아닌가.
‘짐승 머리 괴물의 지능은 높아 보이지 않았으니…….’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짐승 머리 괴물과 가까운 쪽의 강 수면이 부자연스럽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위에서 보지 않으면 안 보일 정도로 미세한 파문이다.
‘물고기?’
물고기 형태의 괴물인가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배가 지나간 흔적처럼 좌우로 투명한 물결이 사르르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파문이 이는 곳 근처를 눈 씻고 봐도 습격자가 없다.
수심이 가장 깊은 강 한복판의 바닥도 보일 정도인데 습격자가 안 보인다니.
“…….”
환인은 환각 시야를 열고 나서야 습격자의 형태를 볼 수 있었다.
‘카모플라주인가.’
맑고 투명한 물속, 옅은 청색의 색계를 가진 존재가 몸체만큼이나 기다란 꼬리를 너울거리며 천천히 짐승 머리 괴물에게 접근 중이었다.
도마뱀처럼 길쭉한 머리 형태. 사람처럼 사지가 있고 엉덩이 부근에서 시작된 기다란 꼬리가 존재하는 괴물.
‘환각 시야가 적외선 열화상 카메라 비슷한 기능도 해주는군.’
환각 시야를 연 채 눈에 보이는 강 전체를 훑어본 환인은 오싹, 한기를 느꼈다.
자신이 지나왔던 길의 강변과 강 속에 청색의 그림자가 곳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눈에 보이는 숫자만 6마리나 된다.
‘강 전체가 저놈들의 서식지인가.’
그중 몇몇은 짐승 머리 괴물을 향해 카멜레온처럼 둠칫둠칫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이족 보행처럼 두 발로, 혹은 엎드려서 사족 보행으로.
만약 강변 쪽으로 이동했다면 꼼짝없이 저것들의 기습을 받았겠지.
습격자의 덩치는 성인 남성 정도다. 꼬리를 저토록 잘 움직이니 채찍처럼 휘두르는 것도 가능할 테고, 꼬리 길이도 어림짐작으로 2m가량이니 싸운다면 만만치 않은…….
생각하는 사이 강 속의 습격자는 강변에 도달, 빼꼼 머리만 내밀더니 방심하고 있는 짐승 머리 괴물들을 향해 혓바닥을 쏘았다.
‘빠르다.’
어느새 개구리 혓바닥 같은 게 3m 가까이 늘어나 짐승 머리 괴물 하나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주둥이를 벌리는 것까지는 보였는데 혀가 날아가는 것이 안보였다.
깨애애애앵!!
공격해서인지 위장이 풀린…… 도마뱀 인간이 츄르릅 혓바닥을 회수하며 짐승 머리 괴물을 물속으로 끌어당긴다.
짐승 머리 괴물은 끌려가지 않으려 발톱을 뽑아 버티려 하지만 자갈밭만 애꿎게 긁을 뿐이다.
‘혀의 힘이 대단하군.’
짐승 머리 괴물의 무게는 족히 30kg에 가깝다. 그런 걸 저리 수월하게 끌어당기다니.
온몸이 허연 비늘로 덮인 도마뱀 인간은 버둥거리는 짐승 머리 괴물의 두 팔을 잡은 채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식사가 개시되는 동시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다른 도마뱀 인간들도 겁에 질려 달아나려는 짐승 머리 괴물을 덮쳤다.
“…….”
포식자와 피식자의 구분은 명확했다.
캉캉 짖으며 저항하는 짐승 머리 괴물을 손쉽게 제압해 물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짐승 머리 괴물들은 도망치기 위해 우왕좌왕하며 날뛰다 하나둘씩 도마뱀 인간에게 붙잡혀 물속으로 끌려 들어갈 뿐이다.
환인은 도마뱀 인간의 싸움방식을 유심히 눈여겨보았다.
위장색으로 평상시에 숨어있다는 것은 이동 또한 느리다는 뜻.
그것을 증명하듯 도마뱀 인간의 이동 속도는 게으른 고양이처럼 느릿느릿했다. 그나마 튕기듯이 점프해서 이동하는 식이 빨랐고.
그렇다고 얕볼 것은 아니었다. 공격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둘 다 환인의 동체시력으로 포착하기 힘들 정도였던 거다.
하나는 혀를 쏴서 때리는 것.
혀는 개구리처럼 끝에 뭉툭한 살덩어리가 붙어있었는데 그것에 머리를 맞은 짐승 머리 괴물이 단숨에 뇌진탕에 빠져 행동 불능이 되었다.
위력만 보면 권투글러브를 끼지 않은 프로 복서의 펀치 정도다.
다른 하나는 끝이 가느다란 2미터가량의 꼬리.
핑 소리가 날 정도로 휘둘러진 꼬리에 맞은 짐승 머리 괴물이 수 미터를 날아간 것을 보면 몸의 어느 부위든 맞으면 최소 골절임을 알 수 있는 위력이었다.
‘다행인 건 공격 직전의 동작이 크고 눈에 띈다는 건가.’
도구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을 보면 도마뱀 인간의 지능도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다.
깨개갱! 깨애앵!!
혀에 허리가 묶인 짐승 머리 괴물이 강으로 끌려가면서 앞발톱으로 도마뱀 인간을 마구 할퀴지만, 비늘에 약간의 흠집만 날 뿐이다.
그렇게 물속으로 끌려들어 간 짐승 머리 괴물은 잠시 버둥거리다가 질식한 것처럼 부글부글 거품을 내뿜으며 축 늘어졌고, 도마뱀 인간은 그런 괴물을 물속에서 천천히 뜯어먹기 시작했다.
강의 곳곳에서 피가 물감처럼 번져 나온다.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환인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도마뱀 인간과 짐승 머리 괴물의 색계통은 전혀 다른데도 익숙한 것처럼 먹는군. 괜찮은 건가.’
독을 먹어 체내에 독을 축적하는 생물도 있다지만…….
‘……나는 안전을 장담 못 하니 연녹색의 생물만 먹어야겠군.’
7마리의 도마뱀 인간이 각각 1마리씩 짐승 머리 괴물을 포획하고 나서야 사냥은 끝이 났다.
살아서 도망간 짐승 머리 괴물은 2마리뿐.
그리고 잠시 후, 환인이 기대하던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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