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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13화 (13/813)

〈 13화 〉 013 수해­대호수

* * *

퍼어억­!

‘우욱.’

밀려온 첫 파도에 맞은 순간 과장 보태지 않고 압착기에 깔린 듯한 압박과 충격이 밀려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상태였는데 하마터면 공기를 죄다 내뱉을 뻔했다.

쿠쿵­ 쿠쿠쿵­…….

파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

구르르르­ 중전차가 지나가는 듯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와 함께 밀려온 파도가 등을 후려칠 때마다 내장이 흔들리고 압력에 헛구역질이 튀어나오려 한다.

자칫하다간 손발에 힘까지 풀릴 지경.

점입가경으로 파도에 절벽이 조금씩 깎여나가며 나무뿌리의 노출 범위가 늘어나 몸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무뿌리를 놓치고 파도에 휩쓸렸다간 대호수 중심까지 끌려갈지 모른다.

파도가 부딪쳐오며 자신도 끌고 가려는 것을 환인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다행히 웨이브는 길지 않았다.

얻어맞을 때마다 파도의 높이가 줄어들더니 일곱 번 맞은 뒤에는 발밑으로 수위가 내려갔고, 그 후 두어 번 더 밀려왔던 파도는 다가올 때만큼이나 빠르게 물러갔다.

촤르르르르…….

“허억, 후욱! 후우!”

파도가 물러나며 자갈밭을 흔드는 소리에 환인은 속이 저릿저릿한 감각을 떨쳐내기 위해, 부족해진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꽥.

가슴께를 내려다보니 비상식량이 쫄딱 젖은 모습으로 푸르르 고개를 턴다.

혹시 파도에 끈이 끊어질까 나무뿌리와 몸 사이에 끼워놨는데 그게 정답이었던 것 같다.

그냥 어깨에 메고 있었다면 격렬한 파도에 줄기로 만든 끈이 끊어졌겠지.

고개를 흔들어 물기를 턴 환인은 언제 쓰나미가 몰아쳤냐는 것처럼 자갈밭을 빠르게 물러나는 물결을 보고 대호수 저 먼 곳도 보았다.

더 이상의 해일은 없는지 잔잔하게 물결치는 대호수.

앞뒤 재지 않고 자갈밭으로 뛰어내린 환인은 근처의 경사도가 낮은 절벽을 찾아 부리나케 기어올랐고 근처에서 절벽 높이가 가장 높은 곳으로 피신했다.

“후우우…….”

진이 다 빠졌다.

수풀에 반쯤 몸을 숨긴 채 주저앉은 환인은 물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대호수 먼 곳을 쳐다보았다.

여러 괴물을 만난 이후 이 세계에 상식을 바라는 것은 포기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좀 심했다.

“해일을 일으킬 수 있는 고래라니.”

호수에서 일어난 해일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턱을 쓰다듬으니 꺼끌꺼끌한 수염이 옅게 만져진다. 환인은 턱을 만지며 생각했다.

뿔비늘고래…… 괴생물체는 빛의 산란으로 대상이 조금 흐릿하게 보일 만큼 먼 거리에 있었다.

그만한 거리에서도 주먹만큼 컸다면 크기를 미터 단위로 재야 할 거다.

학교에서 배웠던 관측 대상의 크기 측정법을 생각하며 대강 계산해본다면…… 60~80m 정도인가.

어떻게 수면에서 수백 미터를 뛰어오른 건지 모르겠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지며 일어난 해일의 규모와 위력을 생각해봤을 때 못해도 그 정도라고 봐야 할 거다.

“후…….”

수십 미터 전함급의 거구가 수백 미터는 족히 뛰어올랐다는 것도 놀랍고, 그런 괴생물체가 대호수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도 놀랐고, 대호수의 수심이 얼마가 되는지 짐작도 되지 않아서 또 놀랐다.

“…….”

사람을 말 그대로 개미만도 못하게 만드는 생물이 넘쳐흐를 듯한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의문과 함께 회의감이 고개를 든다.

흥분도, 새로운 감정과 감각을 느끼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싸움이 성립될만한 대상이라야 좋은 게 아닌가.

녹색 괴물이나 짐승 머리 괴물을 일방적으로 학살할 땐 흥분은커녕 무의미한 반복 노동을 하는 기분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비슷할 것이다.

……혹시 이 세상에 거인도 있는 게 아닐까.

담수에서 사는 길이 수십 미터의 뿔비늘고래도 있는 마당이다.

거인을 만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거 같다고 중얼거리는 환인이었다.

옷은 비싼 값을 해서 몇 번이나 파도에 얻어맞았지만 그리 심하게 젖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쪽 셔츠라거나 옷 안으로 밀려들어 온 물 때문에 약간은 젖은 상태.

무지개가 뜬 푸른 하늘 아래에서 정장 코트와 정장 상의만 벗어 햇빛이 비치는 곳에 널어놓은 환인은 주머니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철벅.

“…….”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환인은 손에 닿는 물의 감촉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직사각형으로 네모나게 각진 그것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들어 올린다.

물이 뚝뚝 흐르는 스마트폰.

방수 효과가 이런 식으로 작용하다니, 파도에 여러 차례 얻어맞지만 않았어도 스마트폰은 살았을 텐데…….

못쓰게 된 스마트폰을 그냥 버릴까 생각 해봤지만 금방 지웠다.

여기는 다른 세계다. 문명이 있다면 스마트폰을 오버테크놀로지, 오파츠로 속여서 팔아먹는다는 방법도 있겠지. 선물용으로 쓸 수도 있을 테고.

그나마 시계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스마트폰을 그늘의 바위 위에 둔 환인은 다른 주머니에서 멀티툴을 꺼내 분해한 뒤 물기를 닦아놓고 스마트폰 옆에 내려놓았다.

이 사태의 원흉이 된 금화도 멀쩡하다.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금화를 잠시 만져보던 환인은 금화를 다시 주머니에 넣어두고 허리춤에 매놨던 마비 구슬 주머니를 확인하려 했다.

“……후우.”

어이없음과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나온다.

끈이 부실했는지 주머니 자체가 없어졌다. 파도에 얻어맞으며 벽에 이리저리 몸이 부딪쳤는데 그때 끊어져 분실한 것 같다.

이럴 줄 알았다면 8마리 녹색 괴물과 마주쳤을 때 다 써버릴 것을.

잊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미련을 버린 환인은 젖은 짐승 가죽을 펼쳐 식량 꾸러미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으음.”

죄다 젖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물에 푹 젖을 줄은 몰랐기에 적당히 묶어놓았었는데 그 틈으로 물이 스며들었다.

담수에 젖었으니 말린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테지만 이곳은 지구와 상식이 미묘하게 다르다.

만에 하나라는 생각으로 환각 시야를 써서 식량을 하나하나 확인해본다.

“그나마 다행인가.”

꾸러미를 펼쳐 식량을 전부 확인했지만 색계통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없었었다.

아쉬운 것은 거의 다 말라가던 산호 버섯이 젖어버린 것일까.

마지막 꾸러미는 금방울 꽃과 잎을 모아놓은 거였다.

금방울 꽃도 물에 젖긴 했지만, 꾸러미가 가장 안쪽에 있었기 때문인지 많이 젖지는 않았다. 색계통도 유백색 그대로였기에 햇볕에 말리기 위해 펼쳐놓는다.

허벅지의 상처에 붙여놓은 것은 서서히 황색 계통으로 변하고 있었다.

“…….”

이 색계통의 변화는 아직도 그 메커니즘이 이해되지 않는 환인이었다.

청록색계의 연두색에 가까운 게 아니면 몸에 해로운 것일 텐데 상처에 붙여놓은 으깬 금방울 초가 황색계로 변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지구산 음식에도 그런 게 있었다.

조금만 먹으면 약이지만 많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것들.

먹는 것으로는 몸에 해가 안되지만, 피하지방 아래 혈관에 닿으면 독이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의 환각 색은 무엇일까.

환각 시야를 고찰하다 보니 이 수상하기 짝이 없는 현상에 재차 의문이 피어오른다.

환인은 이 능력을 쓸 수 있게 된 뒤로 어째서 이런 능력이 생긴 걸까 그동안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았었다.

빛의 강을 보았던 꿈. 그게 현실의 자신에게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

밀림에서 구해다 먹은 것들의 독성으로 인한 현상일 가능성.

미지의 병균, 세균으로 인한 신체 기관의 변이일 가능성.

환인은 객관적으로 세 번째 가설인 미지의 균으로 인한 신체 변이를 보고 있지만, 초능력이 존재하는 세상인 만큼 빛의 강을 봤던 꿈의 영향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꽥. 꾸엑.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깃털을 말리던 비상식량은 근처에 있는 산호 버섯에 정신을 팔고 있었는데, 비상식량의 울음소리에 그쪽을 보려던 환인은 스쳐 지나가는 스마트폰의 액정에 반사된 자기 얼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

액정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응시하다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액정을 들여다본다.

……그대로다.

수염이 드문드문 나고 있는 턱. 움푹 들어가고 튀어나온 볼살과 광대뼈. 피로와 영양부족으로 퀭한 눈자위.

그리고 흐리게 빛나는 눈동자.

“뭐지 이건.”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들고 눈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눈가를 만져본다.

확실하다. 그때 지팡이를 든 녹색 괴물과 그 부하들처럼 눈동자가 옅게 빛나고 있다.

환인은 생각나는 게 있어 환각 시야를 막아보았다. 그러자 빛이 눈동자에서 사라진다.

“……….”

꺼슬꺼슬한 턱수염을 만지며 나무 그늘 아래 세워놓은 지팡이를 응시한다.

지팡이를 짚자마자 두통에 쓰러진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의 강을 본 것도 이상한 꿈을 꿨다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이나 두 번 정도는 어떻게 우연이 겹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생물의 또 다른 색채를 볼 수 있게 된 것과 눈이 그 녹색 괴물들처럼 빛나게 된 것을 더하면 더 이상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혹시 그 녹색 괴물처럼 초능력을 쓸 수 있다면 어떨까.

형체 없는 폭발까진 바라지 않는다. 눈이 빛나던 녹색 괴물처럼 빠르게 움직일수 있다면…….

지팡이를 잡아본다. 색은 평범한 나무처럼 갈색이지만 감촉은 이게 정말 나무막대기가 맞나 싶을 만큼 굉장히 좋은 촉감을 자랑했다.

벨벳 옷감만큼은 아니지만, 살짝 부드러운 감각이 지팡이를 한층 쉽게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뒤틀린 나무막대기 끝에 장식된 사슴 두개골(치고는 작았지만)을 잠시 살펴보던 환인은 녹색 괴물이 했던 행동을 떠올리며 흉내 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흔들었던가.

투명한 폭발 공격을 하기 직전의 행동을 떠올리며 비슷하게 움직여 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리저리 휘둘러보기도 하고 잡는 방법을 바꿔보거나 잡는 위치를 옮겨보거나 하면서 지팡이를 휘둘러보지만 붕­ 붕­ 나무 휘두르는 소리만 날 뿐이다.

“…….”

잠깐. 지팡이를 그냥 휘두르는 게 아니라 환각 시야를 열면?

지팡이를 든 채로 막아놨던 환각 시야를 열자 훈기??와 한기??, 정전기를 버무린 듯한 감각이 지팡이에서 흘러들어와 명치 부근을 거치더니 사지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환인은 흠칫 놀라면서도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목을 타고 올라온 감각은 턱에서 좌우 귀 뒤쪽으로 갈라져 뻗어나가더니 목덜미 지점에서 만난다. 이어 눈자위를 치고 코 안쪽에서 퍼졌다가 미간에서 약간 위쪽 지점에 맺혀간다.

두개골을 열고 물파스를 뿌리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만큼 시리고 짜릿하면서도 후끈한 감각.

어렸을 때 젓가락으로 콘센트를 건드려보다가 약하게 감전당한 직후처럼 정신이 멍하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툭, 지팡이를 놓치자 몸을 점령하던 감각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 이…… 감각은 대체?”

놀랐다는 수준을 넘어 혼란스러운 상태로 팔을 쓸어내리던 환인은 문득 노출된 피부, 얼굴이나 손에 따스하고 서늘한 감각이 슬쩍슬쩍 스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햇볕의 따스함이나 바람의 서늘함하고는 전혀 다르다.

지구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이라 비유나 비교가 안 된다.

굳이 표현하라면 불기운, 훈기와 차가운 기운, 한기 정도.

“……!”

그때, 갑작스레 뒤에서 느껴진 서늘함에 환인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흠칫하며 서너 걸음 뒷걸음질 쳤다.

말도 아니고 사슴도 아닌, 다리가 6개에 뿔이 왕관처럼 멋지게 난 동물이 있었다.

그냥 동물이었다면 이 정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환인이 놀란 이유는 그 동물이 회백색 반투명한 모습이어서였다.

────…….

“…….”

동물 유령은 울음을 한차례 길게 뽑아내더니 환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성이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를 분명 들었지만…… 듣지 못했다. 이 기괴한 느낌에 환인의 심장이 방망이질 친다.

꽥?

유령이 안 보이는 것처럼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비상식량의 모습에 환인은 빠르게 침착을 되찾았다.

이번에야말로 환각을 보는 중일 가능성은?

없다. 저렇게 뚜렷한 존재감, 유령에게 존재감이라고 하니 이상하지만, 동물 유령은 지금도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다.

지팡이를 쥐고 환각 시야를 연 순간 느껴졌던 그 감각도 착각이 아니다.

지팡이를 잡은 순간 느낀 훈기??와 한기?? 그리고 정전기??? 같은 감각은 사라졌지만, 몸 안에 그 감각의 길이 남은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지금 피부에 닿고 있는 따스함과 서늘함이 바로 그 훈기와 한기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아기가 자연스럽게 엄마의 젖을 빠는 것처럼 그냥 알게 되었다.

“아.”

환인이 계속 딴생각을 해서일까. 왕관뿔 말사슴 유령은 폴짝폴짝 뛰며 환인에게서 멀어지다가 그대로 연기처럼 흩어졌다.

“…….”

마른침을 삼킨 환인은 두어 번 주먹을 쥐었다 펴며 지금 상황을 분석했다.

땅에 떨어트렸던 지팡이, 사슴뿔 지팡이를 쥐고 환각 시야를 열자마자 이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지.

빛의 강에서 유령을 잔뜩 본 것도 그렇고 유령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그렇고, 자신이 유령과 관련된 초능력을 얻게 된 것은 80% 확률로 맞는 듯하다.

그렇다면 방금 동물 유령은…… 내가 부른 건가? 아니면 지팡이가?

동물 유령은 마치 내가 명령을 내리길 바라는 것처럼 서성였었다. 그러다 밀림으로 사라졌지.

작게 심호흡한 환인은 사슴뿔 지팡이를 다시 쥐고 조심스럽게 환각 시야를 열었다.

그러나 대비하고 있던 세 가지 감각이 몸을 침범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지팡이를 통해 따스함과 서늘함이 몸 안으로 조금씩, 정말로 미약하게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환인은 약간 놀라긴 했지만 그 기운을 거부하고 저항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이 현상이 내게 해가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 걸까. 그리고 이런 현상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팡이를 든 채 생각에 잠겨 드는 환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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