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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12화 (12/813)

〈 12화 〉 012 각성

* * *

색계통을 볼 수 있게 된 덕분에 식량을 많이 확보한 환인은 사흘간 은신처에서 최대한 몸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힘썼다.

원기가 상한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래서 처음 하루는 잠으로 보내며 체력을 회복했고, 이틀째는 팔굽혀펴기와 균형잡기, 창으로 찌르기 연습을 하면서 잃어버린 감각과 근력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이러한 행동은 효과가 있어 멀쩡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힘이 돌아왔고, 전신의 타박상과 관절통도 많이 완화되었다.

문제는 오른쪽 허벅지.

불로 지진 자리는 다행히 곪진 않았지만 열기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근처의 땅이 체온보다 훨씬 낮았기에 셔츠에 흙을 담아 아이스팩 대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심각한 염증으로 번졌을 것이다.

염증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몇 가지 알고 있는 환인이지만 지금 상황에는 쓰지 못하는 방법들 뿐.

그나마 실행 가능한 것은 점토를 써서 식히는 방법인데 근처에는 물이 없어서 점토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역시 대호수 근처로 자리를 옮겨야겠군.’

점토를 만들어 염증을 식히고 깨끗한 물로 상처 부위를 닦는다면 상태는 훨씬 나아지겠지.

식량은 충분하다. 버섯류는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놔두었더니 점차 말라가며 색이 빠져나가는 중이다.

나중에 가면 말린 버섯이 되어서 휴대식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버섯 외에 풀뿌리나 나무 속껍질도 마찬가지로 유통기한이 길다. 땅을 파면 식용 벌레도 나오고 호숫가에도 먹을 수 있는 게 있으니…….

결론을 내린 환인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크고 넓고 긴 나무이파리로 식량을 싸고 4장의 짐승 가죽도 둘둘 말아서 끈으로 묶는다. 그리고 무기를 살펴본다.

돌도끼와 흑곤봉은 이제 생활용으로 쓰게 되겠지.

2m 남짓한 흑색 나무 막대기에 단검을 달아놨을 뿐인, 명색만 창인 무기는 예상보다 더 강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몸 상태가 최악이었을 때도 녹색 괴물 2마리와 짐승 머리 괴물 3마리를 수월하게 해치웠을 정도니까 말이다.

숏소드도 통짜 철제 무기인 만큼 살상력은 가진 무기 중에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남은 것은…….

환인의 시선이 지팡이로 향한다.

지팡이를 볼 때마다 초능력을 쓰던 녹색 괴물이 생각나는 환인이었다.

이성은 그저 나무 막대기일 뿐인 지팡이이고 무겁기만 한 짐이니 버리라고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미련이라는 감정이 발목을 잡는다.

만약 이 지팡이가 그 초능력의 매개체라면?

“…….”

결국 숏소드와 돌도끼, 흑곤봉에 지팡이까지 가죽으로 감아 묶은 환인은 마지막으로 비상식량까지 챙기고 일주일 넘게 신세를 진 은신처를 나왔다.

키키키키.

키륵. 키이긋.

키에에.

‘저놈들…… 뭐 하고 있는 거지.’

직선으로 대호수를 향해 나아가던 환인은 수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녹색 괴물 다섯 마리가 아파하는 몸짓을 하며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베이거나 찔리거나 물리거나 한 상처들. 짐승 머리 괴물과 싸우기라도 한 걸까.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소리 없이 괴물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만약 녹색 괴물들이 향하는 곳이 대호수와 반대되거나 다른 방향이었다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가던 길을 갔을 것이다.

그러나 대호수 쪽으로 향하는 것을 눈치챘더니 이상하게 그 뒤를 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상식량이 울지 않게끔 부리를 잡고 1시간가량 뒤를 쫓던 환인은 녹색 괴물들이 넓게 퍼져있는 꽃밭에 도착한 뒤 하는 행동에 눈을 가늘게 떴다.

녹색 괴물 다섯 마리는 들고 있던 몽둥이와 나무토막을 팽개친 채 꽃밭으로 퍼지더니 넓적한 갈대잎에 금색 꽃망울이 맺힌 꽃만 긁어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꽃밭에는 여러 꽃이 자생 중이었다. 괴물들은 그중에서도 은방울꽃과 비슷한 금색 꽃망울과 이파리만 모은다.

잠시 후 각자 한 줌 정도 되는 꽃망울과 몇 장의 이파리를 가져온 괴물들은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꽃망울을 돌멩이나 자갈로 으깼고, 그렇게 만든 것을 상처 부위에 펴서 바른 뒤 이파리를 붙였다.

키캭. 캬그르르.

키엑? 캬캿.

캬우우…….

모든 상처에 으깬 금방울 꽃을 바른 괴물들은 한동안 시시덕거리듯이 떠들다가 아까보단 덜 아픈 모습으로 떠나가 버렸다.

“…….”

녹색 괴물들이 모두 사라진 뒤 꽃밭으로 들어간 환인은 환각 시야를 켜고 꽃을 살폈다.

꽃은 대다수가 청록색 계통이었지만 드문드문 새까만 꽃도 있었고 적색 계통과 자색 계통도 보였다.

그리고 금방울 꽃은 특이하게도 유백색을 띠고 있었다.

무채색 계통의 유백색 꽃.

유백색은 사흘 전 식량을 모을 때도 몇 번 목격했었다. 새싹 비슷한 풀과 대낮에 날아다니는 반딧불과의 풀벌레 비슷한 곤충들이었다.

“이게 상처 치료에 효과적인 색인가…….”

생각해보면 죽인 녹색 괴물 중 몸에 상처가 아문 듯한 자국을 가진 것들이 꽤 있었다.

그땐 별생각이 없었는데, 방금 목격한 것을 대입해보면 이 꽃으로 상처를 치료했다는 뜻이 된다.

‘식성도 비슷하고 환각 색도 비슷하다. 이것도 내게 통할지 몰라.’

짐을 내려놓은 환인은 꽃밭의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금방울 꽃을 채취해 녹색 괴물이 했던 것처럼 으깬 뒤 바지를 내리고 허벅지의 상처 부위에 발랐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 효과가 있나?’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금방울 꽃 이파리를 괜히 붙인 게 아닌가 싶어 갈대잎 비슷하게 생긴 이파리로 상처 부위를 덮는다.

그리고 1분 정도 기다리자 은은한 열기와 통증으로 거슬리던 상처 부위가 갑작스럽게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모기 물린 곳에 물파스를 바른 것 같은 시원하고 짜릿한 감각이 통증과 열기를 모두 뒤덮는 느낌.

잠시 기다리자 으깬 금방울 꽃은 물론이고 이파리도 접착제를 붙인 것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신기하군.”

으깬 금방울 꽃의 즙이 이파리와 화학반응을 일으킨 건가.

치유 효과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잠시 고민하던 환인은 주변 수풀에서 크고 싱싱한 이파리를 따서 금방울 꽃의 꽃망울과 이파리를 적당량 채취했다.

치유 효과가 없어도 상관없다. 계속 냉찜질 효과를 주는 것만으로도 상처 부위에 바를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상황을 봐가면서 또 발라볼 생각으로 코트 안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챙기던 환인은 비상식량이 갑자기 꽤괙거리며 경보음을 울리는 것을 듣고 주변을 황급히 살폈다.

키갸악­!

캬갸갸갸­!!

저 멀리서 떠나갔던 다섯 마리의 녹색 괴물이 달려오고 있었다.

환인은 그 어떤 표정도 없이 창을 들고 일어섰고, 달려오던 다섯 마리의 녹색 괴물들은 느닷없이 꽃밭 속에서 기다란 창을 꺼내든 환인의 모습에 움찔하며 멈춘다.

키, 키긱?

키이…….

“……?”

그동안 수십 마리의 녹색 괴물을 잡으며 괴물의 습성을 적지 않게 이해한 환인은 저 앞에서 보여주는 다섯 마리의 행동이 의아했다.

녹색 괴물은 전형적인 약강강약의 성향이다.

약한 적에겐 강하고 강한 적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자신처럼 적당한 사이즈의 대상이 홀로 있고 자신들은 서넛이라면 일단 덤비고 본다.

그러다 몇 마리가 순식간에 죽어 나가면 겁먹고 도망치는 식.

그런데 저 다섯 마리는 압도적인 수적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달려들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며 어쩌지?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환인은 말없이 발밑에서 돌멩이를 집어 놈들을 향해 힘껏 던졌다.

쉬익­ 퍽!

캭! ……끼요오오옷!!

별로 맞출 생각은 없었는데. 날아온 돌멩이에 생식기를 맞은 녹색 괴물 한 마리가 눈이 뒤집혀서 덤벼든다.

키, 키긱!

캬아아!!

그러자 남은 네 마리도 별수 없다는 듯이 억지로 괴성을 지르며 다 함께 달려들었지만.

“흡! 후웁!!”

푸욱­

켁.

푸슛­

크르르레렉…….

환인의 번개 같은 찌르기에 가장 먼저 달려든 녹색 괴물이 심장에 구멍이 난 채 자빠졌고, 뒤이어 두 번째로 도착한 녹색 괴물은 휘두르기에 목이 1/4가량 잘린 채 주저앉아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단검을 떼고 숏소드를 묶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군.”

키힉?!

힉…….

목을 쳐 날릴 요량으로 휘둘렀지만,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에 환인이 중얼거리자 남은 세 마리가 겁먹은 모습으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두고 볼 환인이 아니다.

적을 살려 보내 후환을 둘 생각은 하나도 없었던 환인은 멀쩡한 왼발로 땅을 박차며 날듯이 달려가 3연 찌르기로 세 마리의 가슴에 각각 한 번씩 칼침을 놓아주었다.

“흠…….”

세 번 중 한 번은 빗나갈 거라 생각하고 후속 공격도 염두에 뒀는데, 세 번의 공격이 빨려 들어가듯이 녹색 괴물의 가슴에 꽂혀 살짝 놀란 환인이었다.

아무튼. 제대로 된 장병기의 유무는 생각보다 차이가 크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준 결과다.

이건 일방적인 살육이지 않은가.

흥분조차 일어나지 않은 싸움이었기에 금방 신경을 돌린 환인은 오른쪽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조금이지만 격한 움직임을 했는데도 고통이 거의 없다.

시원한 청량감 속에 약간의 미열이 올라오지만, 청량감을 뚫지 못하는 것을 보면 상처가 덧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환인은 짐을 챙겨 들고 좀 더 편해진 걸음으로 대호수를 향해 나아갔다.

“후우…….”

금방울 꽃 으깬 것을 바른 뒤로 걸음이 한결 편해졌지만, 그래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창으로 지팡이 짚듯이 걷다 보니 떨어진 체력과 맞물려 숨이 차오른다.

그래도 눈앞에 탁 트인 하늘과 바다 같은 비취빛 호수가 드러나니 속이 뻥 뚫리는 느낌과 함께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촤르르륵­

20분 정도 수풀 속에 숨어 주변을 살피던 환인은 아무 위협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가 자갈 해안에 내려섰다.

금방울 꽃의 효능을 알게 되어 가장 큰 목적인 점토와 냉찜질의 필요성이 사라졌지만, 식량 확보라는 2차 목적이 남아있다.

일단 밀려오는 파도에 식량이 젖지 않도록 잘 챙겨둔 환인은 붕대로 쓰던 찢은 러닝셔츠를 깨끗하게 씻어서 따끈따끈한 자갈밭에 널어놓고 별조개와 비취게를 노획했다.

“흠.”

환각 시야로 본 비취게와 별조개의 색계통은 각각 하엽색(청록색계)에 매우 옅은 장단색(적색계)이었다.

주황색에 가까운 장단색의 별조개는 불에 익혔더니 색이 많이 빠져 한없이 백색에 가까운 주황색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먹고 약한 복통에 시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먹어라.”

구운 별조개 6개는 전부 비상식량에게 주었다.

녀석은 먹어도 아무렇지 않았기도 했고, 자신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만큼 별조개를 먹었다간 탈이 날 것 같아서였다.

별조개와는 반대로 비취게는 쪘더니 완전한 백색으로 변해 부담 없이 섭취할 수 있었다.

쪄서 붉게 변한 비취게를 비상식량에게 주지 않고 혼자 먹고 있으니 별조개의 껍질을 모두 박살 낸 비상식량이 환인을 빤히 바라보다가 엽기 노란닭처럼 목청껏 울었다.

꾸에에엑!

“넌 별조개를 먹지 않았냐.”

꽤애액!

“…….”

점점 가축화되어가다 못해 말까지 알아듣게 되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조금 기가 막혔지만, 어차피 먹을 것은 많다.

환인은 보관 테스트용으로 쪘던 3마리 중 1마리를 꺼내 비상식량의 앞에 놓아주었다.

팍! 파직, 콰득! 콱콱!

그러자 정신없이 부리로 비취게의 껍질을 부수고 속살을 쪼아먹는 비상식량.

잘 보면 비상식량의 부리 강도도 굉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찐데다 비취게의 껍질 자체가 약하다곤 해도 부리로 저렇게 박살 내면서…….

비상식량의 파괴적인 먹방을 잠시 구경하던 환인도 다시 비취게를 섭취하기 시작했다.

후루룩­

“음.”

등딱지를 따서 하얗게 잘 익은 살점과 내장을 마시자 바다의 비린맛이 아니라 뭔가 맑고 깨끗한 탕을 먹은 듯한 감칠맛이 입안에 퍼진다.

이렇게 걱정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도 환각 시야 덕분이라 생각한 환인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환각 시야가 오동작하면 어쩌나, 색계통으로 파악하는 정보가 다르면 또 어떻게 하나, 이런 정보가 다른 세계의 생물인 자신에게 적용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등등.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환인은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보고 외워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바삭해진 비취게 등딱지를 씹어먹었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운 환인은 먹고 남은 별조개, 비취게 껍질 잔해를 파묻고 흔적을 지운 뒤 물가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호수에도 괴물이 살고 있을 거라 짐작한 환인은 최대한 호숫가에서 떨어져 낮은 절벽을 따라 움직였다.

자갈밭은 폭이 70m 정도. 호수에서 괴물이 뛰쳐나오더라도 60m 정도면 충분히 밀림으로 피할 수 있겠지.

쏴아아아­ 철썩.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는 소리가 맑고 청아하다.

백사장의 파도 소리와 다르게 자갈이 파도에 구르면서 나는 소리가 뭔가 ASMR처럼 고막 안쪽까지 자극한다고 할까.

“…….”

이 자갈 호숫가에서 유일하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자갈에 수초나 물이끼 같은 것이 전혀 끼어있지 않다는 거였다.

언제고 부모님과 함께 인천 영흥도의 몽돌해변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자갈에는 녹색 이끼가 잔뜩 끼어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곳은…….

뿌오오오오­

“?!”

대호수 쪽에서 들려온 코끼리 울음 비슷한 소리에 흠칫 놀라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환인은 이내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거리가 가늠되지 않을 만큼 먼 곳의 수면에서 주먹만 한 크기로 보이는 고래…… 비슷한 생물이 수면 위로 뛰쳐 오르고 있었던 거다.

삼지창 같은 거대한 뿔, 그리고 머리를 감싸는 바위 같은…… 비늘? 갑각질?

아무튼 우둘투둘한 머리를 가진 생물은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하늘 높이 치솟았고.

콰아아아……!

다시 물로 떨어져 어마어마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핵폭탄이 수중에서 터지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괴생물체가 일으킨 것도 그와 비슷한 버섯구름 형태의 물보라가…….

“……헉.”

곧 다가올 파도의 높이를 뒤늦게 깨달은 환인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허벅지가 아픈 것도 잊고 부리나케 절벽으로 뛰어간 환인은 절벽의 단면에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붙잡고 곧장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절벽의 높이가 주변에서 가장 높은 8미터가량이다. 거기다 절벽의 각도 또한 수직에 가까워 오르기가 어렵다.

유격 훈련의 로프 등반 코스를 떠올리며 어떻게 2m가량 기어오른 환인은 힐끔 뒤를 돌아봤다가 심장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젖 먹던 힘을 다해 나무뿌리를 잡고 몸을 끌어올렸다.

자신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쓰나미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뚜둑!

“크윽!”

잡았던 팔뚝 굵기의 뿌리가 끊어지며 하마터면 추락할 뻔한 환인은 허벅지 굵기의 뿌리에 매달린 채 주변 절벽을 황급히 살폈다.

길이 없다.

방금 잡았던 나무뿌리가 끊어지며 환인이 매달려있던 3m 지점에서 위로 1m가량의 공백이 생겼다.

저 위쪽에 훨씬 굵고 튼튼한 나무뿌리가 절벽 밖으로 빠져나와 있지만 팔이 닿지 않는다.

손가락을 밀어 넣어 체중을 지탱할만한 크랙도 없고 발을 디딜 장소도 없다.

애초에 그럴 만큼 벽이 단단하지도 않고.

결국 환인은 이를 악물고 일부 벽 밖으로 드러난 나무뿌리에 왼쪽 다리를 감고 두 팔로 뿌리를 꽉 끌어안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직후 다가온 맹렬한 파도가 환인을 머리부터 집어삼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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