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011 각성
* * *
“…….”
추위 그리고 갈증으로 따끔따끔한 목의 느낌에 눈을 뜬 환인은 회색으로 보이는 구덩이 내부를 보며 두어 차례 눈을 끔뻑였다.
나무뿌리 틈으로 보이는 밖에 햇빛이 내리쬐지 않으니…… 밤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밝을까.
보통은 손의 윤곽만 겨우 보일 정도인데 흙벽의 무늬까지 보이는 회색빛 세상에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코로나 베리 하나를 꺼내 먹었다.
몇 번 씹으니 달콤새콤한 과즙이 울컥거리며 흘러나와 메마른 목을 적신다.
꽥.
자기도 달라는 듯이 우는 비상식량을 퀭한 눈으로 쳐다본 환인은 씨를 뱉은 뒤 주머니에서 약간 뭉개진 코로나 베리 두 개를 꺼내 비상식량의 부리에 물려주고 품에 끌어안았다.
꾸엑?
……따뜻하다. 오리털 파카가 이유 없이 비싼 게 아니었다고 생각한 환인은 품속에서 꾸물거리는 비상식량의 등을 토닥였다.
환인의 손짓에 조용해진 비상식량을 안은 채 좀 더 몸을 웅크린 환인은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몸 상태가 조금 양호해진 것 같다.
양호해진 건지 감각이 무뎌져 모르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고통이 덜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자다 깨서 코로나 베리를 먹고 다시 잠들기를 반복, 21개의 코로나 베리를 다 먹고 비상식량의 먹이로 따둔 코로나 베리까지 떨어졌을 때 환인은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죽다 살아났군…….”
철인 3종 경기에 나갔다가 복싱 12라운드 경기까지 뛰면 이럴까 싶을 만큼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팔도, 다리도, 얼굴도 거죽밖에 만져지지 않는다. 손가락도 관절이 드러날 지경이다. 배를 눌러보니 쑥 들어간다.
몸을 치료하느라 에너지란 에너지는 모두 소비한 듯한 몰골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다. 하루가 지난 건 아닐 테고…… 이틀? 아니면 사흘?
꽥…….
다리 사이에 놓여있던 비상식량이 힘없이 운다.
배가 고파서 그런 듯 한데 사흘 정도 지났다고 보면 될까.
환인도 허기가 지고 있었기에 비틀거리면서 지팡이에 기대 몸을 일으켜 은신처를 빠져나왔다.
눈이 부셔서 눈썹을 찡그린 환인은 은신처 입구에 쓰러져있는 창을 챙기고 비상식량도 꺼내 어깨에 멘다.
“…….”
비상식량의 무게가 지긋이 어깨를 누르는 감각에 환인은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 깨달았다.
고작 2kg 정도 밖에 안될 비상식량의 무게가 이렇게 부담되다니.
거기에 자신의 마음이 조금…… 이상해졌다? 변했다? 아무튼 바뀐 것을 느꼈다.
전에는 비상식량을 도축하려는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는데, 지금은 비상식량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하면 조금이지만 거부감이 드는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생각해본다면 조금 위험하더라도 은신처에서 비상식량을 구워 먹고 체력을 보충하는 게 정답이다.
그런데 환인은 비상식량을 잡아먹는 게 아니라 나가서 먹을 것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은신처를 나오지 않았는가.
잠시 생각해보던 환인은 비상식량의 존재에 적지 않은 위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학생 시절 기억의 조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 왜, 악몽을 꾸다가 깼을 때 옆에 누가 있으면 엄청나게 안심되잖아. 인이 넌 그런 거 느껴본 적 없어?
없어.
진짜?
악몽 자체를 꿔본 적 없다.
헐, 너 진짜 대박이네.
중학교 때였던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지금이라면 그 안심이라는 감정을 알 것 같다는 거다.
품 안의 살아있는 자그마한 온기에 그렇게나 안도감을 받을 줄은.
먹을 것을 찾는 것처럼 고개를 기웃거리는 비상식량을 보던 환인은 조용히 생각했다.
밀림을 탈출하거나…… 탈출에 실패해 죽을 상황에 부닥치면 비상식량을 놓아주어야겠다고.
창을 지팡이 삼아 땅의 갈라진 틈을 빠져나온 환인은 작게 혀를 찼다.
은신처는 지진으로 사람 2명이 다닐 만큼 벌어진 틈에 있다 보니 빠져나오려면 3m 정도 되는 벽을 타고 올라오던가 빙 둘러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100m도 걷지 않았는데 숨이 차다니.’
도무지 나무뿌리를 잡고 기어오를 체력이 되지 않아 우회해서 걸어가는 루트를 골랐건만, 100m 정도를 걸어 완만한 비탈로 빠져나왔더니 색색거릴 만큼 숨이 거칠어진 것이다.
지금 괴물과 마주쳤다간 어떤 꼴이 벌어질지 뻔하다. 환인은 최대한 소리죽여 먹을 것을 찾아 밀림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목적지 없이 무작정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목표는 코로나 베리, 위치는 정체불명의 맹수가 서식하는 숲 쪽이다.
이 근방은 녹색과 짐승 머리 괴물이 코로나 베리를 다 먹어 치워버려서 구할 수가 없다.
구하려면 놈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곳까지 갈 필요성이 있다.
코로나 베리의 보관 기간은 대략 3일 정도. 나온 김에 최대한 챙겨서 은신처로 돌아간 뒤 며칠 더 요양할 생각인 환인이었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우…….
숨소리도 작게 억눌러가며 이동하던 환인은 불현듯 찾아온 현기증에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잘게 숨을 쉬어서 산소 공급이 부족했나.’
입과 코로 폐를 부풀려 공기를 빨아들인다는 느낌으로 조용히 숨을 쉰다.
몸이 워낙 힘들어서일까, 심호흡만 하고 있는데도 잡념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깨끗해진다.
대입 시험을 대비해 산속 절에서 스터디를 한 적이 있었는데 스케줄에 따라 명상을 처음 했을 때 느꼈던 그 감각이다.
왠지 머리와 마음이 편안해진 것을 느끼며 눈을 뜬 환인은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뭐지.”
세상에 또 다른 색이 덧입혀졌다. 아주 옅은 안개 필터를 세상에 씌우고 그 위에 다른 색을 덧입힌 느낌.
갈색의 나무 기둥은 적토색으로 보였고 녹색의 수풀, 나무 이파리는 호박색과 자황색, 담황색으로 보인다.
왜앵
“…….”
원래는 청색인 벌 같은 게 녹색 계통의 색을 띤 채 눈앞을 날아간다.
꽥.
비상식량도 그 곤충을 봤는지 작게 울었고, 얼떨결에 비상식량을 본 환인은 눈썹을 크게 찌푸렸다. 초록색이던 비상식량도 옅은 양록색에 물들어있었다.
비상식량뿐만 아니라 자기 몸도 연녹색에 물든 상태.
연녹색 너머로 원래 색의 손과 흙투성이의 코트 색이 보였기에 드물게 당황한 환인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
그러자 비상식량이 제 색을 찾았고 세상도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잠시 굳어있던 환인은 정신을 차리고 절뚝절뚝 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리고 쥐었다 폈다 하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헛것까지 보다니, 몸 상태가 생각보다 더 말이 아니군.’
환인은 부디 멀지 않은 곳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속도를 조금 늦출지언정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1시간 정도 걸음을 옮기고 있더니 조금씩 몸이 움직이기 편해졌다.
자상을 입고 불로 지진 오른쪽 허벅지와 그 아래는 여전히 감각이 무디지만, 다른 곳은 감각이 깨어난다고 할까.
‘며칠간 죽은 듯이 지내서 몸이 굳었던 건가. 그게 걸으면서 좀 풀린 거고.’
어쨌든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심호흡하다가 헛것, 환각을 본 이후부터 가끔 집중력이 떨어져 머리가 멍해질 때마다 세상에 또 다른 색이 몇 번이나 덧씌워졌다.
그러더니 이제는 눈에 조금만 힘을 줘도 세상의 기본색이 덧칠된다.
“……몸에 마약 반응이 일어나고 있나.”
허벅지의 상처에 뭔가 미지의 병균이 침입해서 머리가 맛이 간 건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색이 덧칠되면 온갖 종류의 색으로 인해 시야가 조금 부담스러워지는 것을 빼면 나쁜 점은 없다.
환각이 멋대로 날뛰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제어도 된다.
“신경 쓰이는군.”
지팡이를 든 녹색 괴물과 만난 순간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몸에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는 현상도 그 일의 연장선 같은데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어쨌든.
중간에 괴물과 마주치는 일 없이 계속 나아가던 환인은 3시간째가 되었을 때 첫 코로나 베리가 맺힌 덤불을 발견했다.
속으로 안도하며 먹을 수 있는 코로나 베리를 채취하면서 허기를 채운다.
꽥꽥.
조금 덜 익은 것들은 비상식량에게 주고 완전히 익은 것만 먹으면서 부지런히 따 모으던 환인은 무심결에 눈에 힘을 주었고, 코로나 베리의 색에 미간을 좁혔다.
‘연녹색?’
주황색의 코로나 베리에 덧칠된 색이 자신의 색과 똑같은 색이라는 것.
환인의 머리에 한 가지 가설이 스쳐 지나간다.
얼른 덤불로 시선을 돌려 열매를 살폈다. 막 맺히기 시작한 것은 벽옥색이지만 새끼손톱 크기 정도가 되면 명록색이 되었고 그보다 조금 더 자라면 유록색에서 유청색으로 변하다가 10원짜리 크기부터 연녹색이 되었다.
일단 연녹색을 띠는 열매는 전부 따서 주머니에 집어넣고 덤불 주변을 살폈다.
있다. 생김새는 느타리버섯과 비슷했지만 갓 부분이 청색인 버섯.
야생 버섯은 제대로 된 지식이 없다면 지구에서도 먹으면 안 되는 대표적인 생물이다.
코로나 베리 덤불 근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지만, 위험성 때문에 손도 대지 않았던 거였는데 아무튼 버섯은 자색 계통이었다.
그걸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창의 끄트머리로 버섯을 일부 떼어낸 뒤 나뭇가지에 버섯을 찔러 비상식량의 부리에 가까이 대보았다.
꾸엑. 꽥.
치우라는 듯이 부리를 팩팩 돌리며 먹기를 거부하는 비상식량.
청색이지만 자색을 띠는 버섯을 버린 환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의 나무둥치에 자라고 있는 산호 모양의 버섯을 발견했다.
원래 색은 노란색이지만, 환각에서는 연녹색에 가까운 청록색이다.
그걸 똑같이 창 끄트머리로 떼어낸 뒤 비상식량의 부리에 가져다 대니 아까완 다르게 번개같이 뜯어먹었다.
“……!”
환인은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환각에서 보는 색은 생명체의 본질을 정하는 고유의 색이다.
자신과 색계통이 다른 것을 먹으면 독이 되고 비슷한 계통의 색을 띠는 것은 먹어도 몸에 별 탈이 없다.
이 가설은 비상식량의 도움으로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생물은 전체적으로 다섯 가지 계통의 색을 띤다.
적색계赤色?.
황색계?色?.
청록색계色?.
자색계?色?.
무채색계無?色?.
자신과 비상식량은 청록색계 중 연녹색, 연두색이다.
물론 연녹색이지만 환인 자신은 한없는 녹색에 가까운 연녹색이고 비상식량은 청색이 살짝 스며든 연녹색 계통.
비상식량은 청색부터 녹색을 기준으로 청색이 10%가량 섞인 수준까지는 무엇이든 먹었다.
녹색이나 유청색, 취람색, 양록색의 곤충, 열매, 나무껍질, 뿌리까지 전부다.
하지만 청벽색이나 청색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끼히이익!
키르르악!!
색계통이 다른 것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테스트는 녹색 괴물이 해주었다.
가설을 확인하는 도중 두 마리의 녹색 괴물과 마주쳤던 환인은 압도적인 리치로 두 마리를 단숨에 제압한 후 생체 실험을 해본 것이다.
끼… 끄르륵…… 웨에엑…….
키, 키키히…… 키킥…….
피부색만큼이나 환각색도 진한 녹색이던 놈들에게 억지로 덤불 근처에서 자라는 청색 버섯(환각색은 자색)을 먹였더니 5분도 지나지 않아 구토와 설사, 혈뇨를 지르다 혼수상태에 빠지더니 구토물에 기도가 막혀 죽고 말았다.
가설은 정확했다.
“이제 식량 문제는 없다고 봐도 괜찮겠군.”
몸은 무척 무겁고 힘들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백색을 띠게 된 것을 먹어도 몸에 해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열매나 버섯, 곤충을 불에 구우면 색이 어떻게 변할까 궁금했던 환인은 최대한 많은 종류의 버섯, 열매, 나무뿌리와 껍질, 곤충 등을 모아서 실험했는데 구우면 색은 주로 무채색으로 변했다.
적당히 구우면 원래 색이 점점 옅어지다가 어느 순간 백색으로 변하는데, 거기서 좀 더 구우면 점차 흑색이 많아지다 새카맣게 태우면 완전한 흑색으로 변한다.
무채색 계통의 실험은 모닥불로 찾아온 짐승 머리 괴물 세 마리가 해주었다.
놈들은 청색에 가까운 녹색이었는데, 새까맣게 탄 산호 버섯을 먹은 짐승 머리 괴물은 극도의 복통에 시달리며 괴로워했고 잘 구워서 백색으로 변한 산호버섯(환각색은 청록색)을 먹은 짐승 머리 괴물은 멀쩡했던 거다.
“괴물은 못 먹겠군.”
환각색이 청록색 비슷하기에 짐승 머리 괴물을 구우면 먹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했지만, 짐승 머리 괴물의 피와 내장은 자색계였던데다 죽였더니 색이 점차 흑색에 물들었다.
앞발을 잘라 구웠더니 자색이 사라지긴 커녕 구워지면서 나는 연기가 희미한 자색을 띄기 시작해서 황급히 흙을 덮어 꺼버렸다.
만약 괴물을 먹을 수 있다면 정말 식량 걱정은 안 해도 됐을 텐데.
그렇게 검증 작업을 끝낸 환인은 환각 시야를 통해 본격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채집하기 시작했다.
나무 속껍질과 코로나 베리, 이름 모를 풀의 뿌리와 여러 가지 버섯 등…….
밀림에 이렇게 먹을 것이 많았던가, 하고 놀란 환인은 주머니가 부족할 정도로 챙겼음에도 눈에 띄는 먹을 것들이 많아 그냥 정장 코트를 벗어 거기에 먹을 것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것이 무려 5kg 양이다.
코트를 보따리처럼 묶어서 등에 짊어진 환인은 아무 맛은 안 나지만 식감이 쫄깃하고 뽀득뽀득한 산호 버섯을 먹으며 은신처로 향했다.
마음이 가벼우니 몸과 다리의 고통도 옅어진 기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