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010 수해??
* * *
‘…….’
눈을 뜬 환인은 불쾌한 기시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새카맣고 어두운 공간에 덩그러니 홀로 서있는 자신.
조금 전만 해도 죽인 8마리의 녹색 괴물 시체 사이에서 앉아 쉬고 있었는데 또…….
이쯤 되자 슬슬 화가 나는 환인이었지만, 화를 내기 전에 자기 몸과 주변을 살피며 객관적인 사실을 파악하려 했다.
‘머리가 찢어지는 고통 직후 시야가 까맣게 변했지.’
달군 나이프로 상처를 지진 고통 때문에 심정지가 뒤늦게 온 건가.
두 번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긴 했지만…… 아니, 두통이 엄청났던 걸 생각하면 뇌혈관이 터져서 죽었을 수도 있다.
그럼 여긴 사후 세계?
주변은 빛을 모두 흡수하고 있는 것처럼 새까만데 자기 자신의 색만 뚜렷한 것이 의심을 가중한다. 그뿐만 아니라…….
‘상처가 없다.’
8마리의 녹색 괴물과 싸우면서 입은 상처는 물론 6일간 밀림을 헤매며 긁히거나 찔리거나 해서 난 상처도, 무기를 휘두르며 얻은 물집과 굳은살도 없어졌다.
흙과 나뭇잎과 땀, 죽인 괴물의 피를 먹어 더러워진 옷도 새것처럼 깨끗하다.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않을 듯한 현상을 2번(다른 세계 전이, 녹색 괴물의 초능력) 경험한 환인은 이 장소가 사후 세계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의 원인? 너무 많아서 탈이다.
그동안 먹었던 것이 문제가 됐을 수도 있고 가시덤불에 몇 번 찔려서 난 상처로 병균이 들어와서 잠복해있다가 발동걸린 걸 수도 있으니 말이다.
‘…….’
죽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환인은 체념한 것처럼 잠깐 눈을 감았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비상식량을 풀어줄 걸 그랬군.
수박 끈보다 더 촘촘하게 묶어놓았으니 비상식량도 얼마 안 가 굶어 죽거나 괴물 같은 놈들에게 잡아먹히겠지.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사신이나 저승사자 같은 게 없는 것은 역시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라 그렇겠지. 그러면 이대로 걷다가 소멸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생물로 환생?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만약 환생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환인이었다.
깊은 생각 없이 본능대로 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살아가는 새로 말이다.
‘……?’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환인은 문득 발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발밑 뿐만이 아니다. 저 앞까지…… 희미한 빛이 일렁이듯 흐르며 강처럼 움직이고 있다.
‘아케론의 강?’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을 감고 흐른다는 강을 떠올렸던 환인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 그 빛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신비하다면 신비할 수 있는 경험이다.
‘환생하게 되면 이것도 다 잊겠지.’
이런 몽환적인 광경을 다신 떠올릴 수 없을 거로 생각한 환인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걸음 속도를 조금 늦췄다.
그렇게 희미한 빛이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빛의 강을 걷고 있던 환인은 저 앞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벌레?’
일개미 몇 마리가 강을 따라 다가오더니…… 아니, 공중에 뜬 채 다가오더니 환인의 가슴을 관통해 지나갔다.
환인은 개미가 뚫고 지나간 자기 가슴을 만지며 뒤를 돌아보았다. 개미는 어느새 멀어져 빛의 강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
무언가 다가오는 느낌에 앞을 보니 여러 종류의 벌레, 곤충이 두엇씩 짝을 이뤄 접근 중이었다.
나비, 꿀벌, 사마귀, 사슴벌레, 귀뚜라미, 매미, 말벌, 파리, 거미, 모기, 잠자리, 메뚜기…….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의아해하던 환인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걷기 시작했다고 곤충들이 다가오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생은 곤충이라는 뜻인가.’
곤충들이 모두 자기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던 환인은 다음에 등장한 동물을 보고 멈칫했다.
젖소처럼 흰 바탕에 검은 점박이 개.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에 반쯤 돌아간 듯한 사팔뜨기 눈동자.
학생일 때 뒷산에서 만나 때려죽인 들개다.
처음으로 확실한 의지를 갖추고 목숨을 빼앗은 생물이었기에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환인이었다.
들개도 환인을 통과해서 지나갔는데, 들개가 통과할 때는 약간의 고통과 함께 몸이 살짝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고통도 특이했다. 몸 어디가 찔리거나 베이거나 맞아서 느끼는 고통이 아니라…… 몸 전체에 고통이 퍼진 듯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이어 새끼 티를 겨우 벗어난 듯한 고양이 세 마리가 다가왔다.
삼색, 흰색, 검은색 고양이.
‘…….’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해 겨울, 아버지가 선물해주신 차를 타고 출근하려던 환인은 시동을 걸자마자 드드득 이상한 소리와 함께 고양이의 찢어지는 비명을 들었다.
차에서 내려 엔진룸을 연 환인은 벨트에 끼어 죽은 3마리의 고양이를 볼 수 있었다.
저 세 마리의 고양이는 그때 그 고양이였다.
들개떼와 마찬가지로 세 마리의 고양이가 몸을 뚫고 지나갔을 때 약간의 고통이 밀려왔다.
눈을 감았던 환인은 시선을 내려 여전히 흐르는 희미한 빛의 강을 보았다.
‘이 강은 내가 이때까지 죽인 생명과 마주하게 하는 건가.’
죽인 생명과 마주하고 속죄라도 하라는 건지.
후, 가볍게 콧숨을 내쉰 환인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그 뒤로도 자잘한 생명이 다가왔다.
주로 파리와 모기였고 하루살이도 섞여 있었으며 조깅하다 몇 번 밟았을 개미와 사내 낚시 동호회에서 낚시로 잡은 생선도 있었다.
‘식물은 없나.’
환인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식물도 엄연히 살아있는 생물일 텐데 곤충이나 동물, 어류만 나타나는 꼴이라니.
‘…….’
누군지도 모를 대상을 비웃었다는 것에 환인은 잠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뒤로 감정이 다양해지는 것이……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휩싸인다.
그래봤자 죽었는데 다 무슨 소용일까.
다시 걷기 시작한 환인은 저 앞에서부터 몰려오듯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들을 보고 작게 웃었다.
녹색 괴물 수십 마리. 사이사이 끼어있는 짐승 머리 괴물과 그 속에서 두드러지는 회색 괴물.
모두 자신이 때려죽이고 찍어 죽인 괴물이다.
‘음…….’
첫 번째 녹색 괴물이 지나가자 동물이나 곤충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벼운 두통을 몸 전체로 느낀다고 할까. 그게 여러 번 이어지니 만만치 않은 고통이었지만 고통은 별것 아니었다.
문제는 10마리 정도가 지나갔을 때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이었다.
‘큭.’
이제 보니 지나간 숫자가 늘어날수록 고통도 비례해서 늘어난다.
20마리가 지나갔을 때는 가벼운 두통 정도이던 고통은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되었고, 몸은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무거워졌다.
30마리가 지나가니 칼로 난자당하는 느낌이 되었다. 움직임은 온몸에 무거운 추를 달고 물속을 나아가는 느낌이다.
‘후우…….’
칼로 난자당하는 고통이 불가마 속에서 산채로 불타는 고통으로 변해갈 즈음 36번째 마지막 녹색 괴물이 지나갔다.
빛의 강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은 더 없다.
몸이 불타는 듯 뜨겁다. 열 마리 정도만 더 겪었다면 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환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온몸에 칭칭 감긴 사슬이 뒤에서 잡아끄는 감각 속에서 힘겹게 한 걸음씩 나아간다.
‘으음.’
나아갈수록 불타는듯한 느낌은 점차 가라앉고 대신 그 자리를 청량감이 채우기 시작했다.
어제 대호수에서 맑은 물을 마셨을 때 폐부 깊숙이 느꼈던 그 청량감보다 더한 상쾌함이었다.
몸을 옭아매 움직이기 힘들게 하던 감각도 사라져간다.
사슬이 한 가닥씩 풀려나가며 몸이 점점 가벼워진다. 얼핏 날아 오르는듯한 해방감에 어깨를 한차례 비튼 환인은 성큼성큼 나아가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혼의 정화 의식 같군.’
환생을 위한 정화 작업 말이다.
혼에 깃든 더러움을 태우고 지우는 과정이 있다면 이러하지 않을까.
압도적인 청량감과 해방감을 만끽하며 걷던 환인은 세상이 점차 밝아져 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중 유달리 환하게 빛나는 앞길에 본능적으로 끝이 다가옴을 느낀 환인은 조급하게 굴지 않고 느긋하게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으윽.”
머릿속이 깨어나는 감각에 눈을 뜬 환인은 갑자기 밀려온 통증에, 몸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온몸이 아픈 감각에 불쾌한 신음을 흘렸다.
고통은 둘째치고 해방감과 청량감이 사라진 후유증이 크게 다가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오르던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표현 못할 굴레에 속박된 듯한 불쾌감이 온몸을 얽매고 있다.
“큭.”
몸을 일으키려다가 오른쪽 허벅지에서 느껴진 극통에 재차 신음을 흘린 환인은 심각한 관절통과 근육통에 타박상을 느끼면서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벌벌 떨린다.
힘겹게 주변을 둘러본 환인은 사방에 흩어진 녹색 괴물을 확인하곤 허, 한숨을 내뱉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난 죽은 게 아니었나? 죽은 게 아니라면 빛의 강에서 겪은 건 뭐였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들어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기절한 지 3시간가량 흘렀다.
“……후우우.”
허탈감과 박탈감에 긴 한숨을 내쉰 환인은 여러 복잡한 감상에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 환인은 나무에 기대 힘겹게 옷을 챙겨입은 뒤 주변을 살폈다.
“…….”
절뚝절뚝 비틀비틀 움직이며 창과 돌도끼, 숏소드와 흑곤봉을 챙긴다.
생각 같아서는 전부 다 가져가고 싶지만 지금 몸 상태로 이 이상 무게를 늘리면 은신처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중간에 쓰러질 것 같았다.
조금 움직였다고 식은땀을 흘리며 헉헉 숨을 몰아쉬던 환인은 상태 멀쩡한 녹색 괴물을 찾아 몸에 두르고 있는 가죽도 벗겼다.
벗기고 보니 생각보다 넓고 큼직한 가죽이다. 몇 개를 이어 쓴다면 이불 대용으로도 쓸 정도.
가죽 위에 무기를 올려놓고 둘둘 말아서 덩굴줄기로 대충 묶은 환인은 수풀을 헤쳐 비상식량을 찾았다.
꽥.
“살아있었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기에 밟혀 죽은 것은 아닐까 했었다. 하지만 비상식량은 무사했고 환인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꽥, 울어 멀쩡함을 증명했다.
비상식량까지 챙긴 환인은 창을 지팡이 삼아 은신처로 돌아가려다가…… 초능력을 쓰던 녹색 괴물의 지팡이에 시선을 빼앗겼다.
“…….”
잠시 고민하다가 묵묵히 지팡이까지 챙긴 환인은 창과 지팡이를 트래킹 폴Trekking poles 삼아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환인은 빛의 강을 계속 생각했다. 딴생각을 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건 단순한 환각이었을까. 하지만 환각치고는 기억도, 감각도 너무 뚜렷했다. 그게 환각에 의한 경험이었다면 지금 이 세계도 환각이라고 치부할 정도로.
이해가 안 된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정신을 잃고 그런 걸 본다니.
……아니, 전조는 있었나.
오른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를 본 환인의 눈이 가늘어진다.
분명 지팡이에 손이 닿은 뒤였다. 그리고 녹색 괴물은 이 지팡이를 휘둘러 초능력을 썼다.
혹시 녹색 괴물들의 움직임이 2배나 빨라진 것도 이 지팡이 때문일까.
“헉, 헉, 헉…….”
시간을 보면 더 힘들 것 같아 기계처럼 걸음만 옮기고 있는데 점점 몸 상태가 악화되어가는 기분이다.
비지땀이 흐르고 등에 짊어진 무기와 가죽 자루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비상식량의 무게가 걸린 오른팔은 팔이 빠질 것 같다.
오른쪽 허벅지 아래는 감각이 사라졌고 몸의 오른쪽만 삐걱거리던 게 이제는 온몸이 삐걱거린다.
머리에 열이 얼마나 올랐는지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흐려진 가운데 나무나 풀이 적토색과 호박색으로 보인다.
자황색, 담황색, 포도색, 청록색 페인트가 숲에 마구 뿌려진 것처럼 보인다.
환인은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뜬 눈으로 환각을 보고 있다니. 이러다 진짜로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하겠다는 오기에 한 발 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은신처가 있는 갈라진 땅 틈에 도착했다.
작은 계곡보다 더 좁고 낮은 틈으로 내려간 환인은 좌우 벽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은신처 입구를 가려둔 나무뿌리에 겨우 도착, 비집다시피 하며 들어가서 흙벽에 몸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허억…….”
오한에 몸이 벌벌 떨린다.
어깨를 내려 메고 있던 무기 봇짐과 비상식량을 떨어트리자 먼저 떨어진 비상식량이 나중에 떨어진 봇짐에 맞아 꽥! 비명을 지른다.
굽혀지지도 않는 손가락으로 겨우겨우 가죽을 묶어둔 덩굴을 푼 환인은 나뭇잎을 모아 푹신하게 만들어 둔 곳에 가죽을 펼치고 쓰러지듯이 누웠다.
“으, 으윽…….”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가죽을 가져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무두질을 하다 만 것처럼 뻣뻣한 가죽이지만, 깔아놓은 나뭇잎이 막지 못한 냉기를 가죽이 막아줄 테니까.
벌벌 떨면서 나머지 가죽을 끌어당겨 몸을 덮은 환인은 새우처럼 웅크렸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몸 상태가 호전되어있길 바라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