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009 수해??
* * *
탁탁탁탁.
환인은 숨이 거칠어질 정도로 달음박질치며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주변을 훑었다.
자신에게 남은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환인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도망은 멀리 못 칠 거다. 그러니 체력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그 8마리를 상대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마땅한 장소가 눈에 띄지 않는다.
‘빌어먹을.’
2일 차에 조우했던 녹색 괴물들, 그놈들과 만났던 자리의 커다란 바위 같은 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하다못해 비탈진 경사나 수풀이 무성한 곳, 혹은 나무가 빽빽한 곳이라도 있으면 나았을 텐데 하필이면 나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며 공터가 곳곳에 형성되고 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키갸아아악!
크교오오오!!
“…….”
점차 가까워지는 녹색 괴물들의 고음에 환인의 눈매가 침착해졌다.
예상보다 녹색 괴물의 추격 속도가 빠르다. 거의 2배가량.
급기야 녹색 괴물들의 달음박질 소리마저 들려오기 시작한다. 녹색 괴물의 달리기는 이렇게 빠르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걸까.
평소에는 길을 막을 뿐인 깊은 도랑도 지금은 안 보인다. 두꺼워 장애물이나 장해물이 되어줄 만한 나무도 없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있다. 이 이상 달리면 싸움조차 못 할 것이다.
도주를 멈춘 환인은 적당한 나무와 수풀을 등지고 8마리의 녹색 괴물과 대치하는 것을 선택했다.
허리춤에 매놨던 마비 구슬 주머니를 열어 코트 주머니에 쏟아붓는다. 그리고 비상식량을 수풀 속에 던져놓고 코트 앞섬의 단추를 채운다.
초봄의 조금은 두꺼운 정장 코트다. 여기에 양복 상의와 조끼, 와이셔츠까지 다 하면 소형 중고차 정도의 가격대다.
일종의 갬비슨Gambeson, 누비갑옷 역할은 충분히 해줄 것이다.
“후우.”
두 손에 각각 돌도끼와 흑곤봉을 틀어쥔 환인은 산소를 천천히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뱉으며 침착하게 녹색 괴물을 기다렸다.
키히히히힉.
캬캬캭.
캬르르르!
잠시 후 도착한 8마리의 녹색 괴물들은 조금도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실실 쪼개며 부채꼴 모양으로 퍼진다.
따로따로 도착했다면 두어 마리 먼저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강적을 상대로 한 두 번 사냥해본 게 아닌 듯 움직임이 체계적이고 협동적이다.
‘……저건, 뭐지?’
아주 희미해서 색조차 알 수 없지만, 녹색 괴물들의 눈이 부자연스럽게 빛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여태까지 22마리의 녹색 괴물을 죽였지만 저런 것은 처음 본다.
그갸아. 교오오, 칵! 캭!
8마리 중 유일하게 지팡이 같은 것을 든 녹색 괴물이 앞으로 나와 삿대질하며 뭐라 뭐라 고성을 지른다.
무척이나 화난 것처럼 보이는데 환인이 무표정으로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급기야 지팡이로 땅을 탁탁 내려치며 끼에에엑! 괴성을 지르기까지 했다.
환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녹색 괴물들의 속도. 대낮임에도 빛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눈동자.
지팡이를 쥔 1마리를 두려워하는 기색의 7마리.
눈치로 파악해보자면 저 지팡이를 든 녹색 괴물이 이 상황의 원흉인 것 같다.
“…….”
키야르르르! 키갸갹!!
거품까지 물어가며 발광하는 지팡이 녹색 괴물과 포위하듯 둘러싼 7마리를 곁눈질한 환인은 슬그머니 코트 주머니에서 마비 구슬 2개를 꺼내 들었다.
“흡!”
슉 딱!
키엑!
미리 주워놓았던 자갈을 던져 길길이 날뛰는 지팡이 녹색 괴물의 이마에 맞추자 뒤로 벌렁 나자빠진다.
7마리의 시선이 한순간 지팡이 녹색 괴물에게 모인다. 그 순간 환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날붙이 창을 가진 녹색 괴물과 지팡이 녹색 괴물의 발치에 마비 구슬을 번개같이 던졌다.
파핫 퓨슈슉.
케윽……?!
키힉!
‘칫.’
마비 구슬 2개가 터지며 검붉은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확 퍼져 나왔지만, 창을 든 놈은 믿기 어려울 만큼 날랜 동작으로 연기를 피해버린다.
걸린 것은 뒤로 자빠져있던 지팡이 녹색 괴물과 창을 든 녹색 괴물의 가까이에 있던 다른 한 마리 뿐.
키야아악!
캬르르륵!!
날붙이를 든 녹색 괴물 셋이 미친개처럼 달려들고 남은 셋도 그 뒤를 따라붙는다.
그렇게 달려드는 여섯의 속도는 환인이 반응하기 어려울 만큼 빨랐다.
지그재그로 뛰며 제동과 방향 전환을 자유자재로 하는 것을 보면 전력을 다한 속도도 아니라는 뜻.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환인은 황급히 등 뒤의 수풀 너머로 몸을 날리는 한편 남은 세 개의 마비 구슬 중 1개를 더 꺼내 수풀을 향해 던졌다.
키약!!
캬르르르!
키이이!
퍽, 소리와 함께 검붉은 연기가 다시 터져 나왔고 날붙이를 든 세 마리가 정확히 연기를 뚫으며 나타났지만, 이동 속도가 너무 빨라서 순식간에 수풀을 벗어난다.
그 때문일까, 세 마리 전부 마비에 걸린 기색이 없다. 나머지 셋은 아예 나무와 수풀을 빙 둘러오는 중이고.
“후웃!”
상처를 입지 않고 이길 수는 없다.
그 사실을 직감한 환인은 흥분으로 콧김을 강하게 내뿜으며 부러진 장검을 든 녹색 괴물을 향해 돌도끼를 투척했다.
지난 사흘간 틈틈이 돌도끼 투척 연습을 한 환인이었다.
덕분에 15m 거리에서 던졌을 때 표적 적중률은 90%에 달했으며 30m로 거리를 늘리면 적중률은 60%로 줄어들지만, 표적 범위를 지름 50cm 정도로 넓히면 다시 90%까지 늘어난다.
표적을 녹색 괴물의 몸통으로 잡으면 10번 중 9번은 맞출 수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캬아악!!
훙훙훙 회전하며 빠르게 날아간 돌도끼는 가장 왼쪽, 부러진 장검을 든 녹색 괴물의 어깨에 박혔다.
“…….”
10%가 여기서 터지다니.
어깨에 도끼가 박힌 동족이 벌렁 드러눕는데도 숏소드의 녹색 괴물과 창의 녹색 괴물은 환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무기를 꼬나쥐고 달려든다.
키야악!
그리고 사정거리가 되자마자 창을 찔러오는 녹색 괴물.
환인은 26년 평생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정도의 집중력으로 창대를 노려 흑곤봉을 사선으로 올려 쳤다.
콰득, 나무와 나무가 부딪친 소리라 믿기 어려운 파열음과 함께 창을 든 녹색 괴물이 창대와 함께 옆으로 휙 돌아간다.
속도만큼이나 힘도 강해진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녹색 괴물보다 아주 약간 강한 정도.
직후 몸을 한껏 비틀었지만 군데군데 녹슨 숏소드가 환인의 옆구리를 부욱 긋고 지나갔고, 환인은 번개같이 흑곤봉을 왼손으로 바꿔 쥐며 옆을 스쳐 지나가는 녹색 괴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터엉!
끄헥…….
숏소드의 녹색 괴물이 앞으로 쓰러지는 것까지 확인한 환인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다시 달려드는 창의 녹색 괴물과 마주섰다.
쿵, 쾅, 쿵, 쾅.
심장이 뛰는 소리가 환인의 귀를 먹먹하게 만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열기가 머리끝까지 감싸는 기분이다.
그래서일까 이상하게 녹색 괴물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보였다.
창이 움직이는 궤적.
녹색 괴물의 움직임.
토끼처럼 핏발 선 눈과 이를 악 물고 있는 녹색 괴물의 못생긴 면상.
어느새 오른손으로 흑곤봉을 바꿔 쥔 환인은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창의 궤적을 피하는 동시에 왼손을 뻗어 창대를 움켜잡았다.
턱.
키힉?!
깜짝 놀란 창의 녹색 괴물은 무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창을 잡아당겼지만, 환인은 그 힘을 버티는 대신 흑곤봉을 버리고 두 손으로 창을 잡은 뒤 있는 힘껏 휘두른다.
키에에에엑?!!
한쪽에만 30kg의 원판이 달린 바벨 프레스를 휘두르는 느낌.
힘이 두 팔에 집중되며 근육이 한계까지 부풀어 오르는 듯한 착각.
창을 놓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버티는 녹색 괴물의 행동은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할만한 것이었다.
“흐아아압!!”
약 2m 길이의 창대는 흑곤봉과 같은 재질이었다. 당장 부러질 걱정은 없다. 녹색 괴물을 무게추 삼아 뒤통수를 문지르며 일어나는 숏소드의 녹색 괴물에게 창의 녹색 괴물을 휘둘러 충돌시킨다.
콰당탕!
키갸악!
퀴에에갹!!
두 마리가 한데 엉겨 나뒹구는 동시에 환인의 어깨와 옆구리에 둔탁한 고통이 일어났다.
날붙이를 든 세 마리와 드잡이질을 하는 사이 나무를 둘러온 2마리가 가시덩굴을 감은 몽둥이로 환인을 후려친 거였다.
“머리를 노렸어야지.”
환인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창으로 한 마리의 배를 깊게 찔렀고, 창을 뽑아 회수하는 동시에 재차 공격해오는 다른 녹색 괴물의 공격을 창대로 막고.
퍽!
프론트 킥으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피투성이가 된 채 왼손으로 부러진 장검을 쥐고 다가오는 녹색 괴물의 팔, 목, 배를 연달아 푸푸푹 찔렀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팔과 목을 노린 공격은 피한 녹색 괴물이었지만. 마지막 공격은 피하지 못해 끄어어 신음을 지르며 찔린 배를 움켜잡는다.
그대로 목을 갈라 죽인 환인은 눈을 살벌하게 빛내며 웃었다.
“큭큭큭.”
군대에서 배웠던 총검술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키힉?! 캬악! 캬하악!
끼게겍! 끼히잇!
서로 충돌한 자리가 좋지 못했는지 창을 뺏긴 녹색 괴물과 숏소드를 놓친 녹색 괴물이 한데 뒤엉킨 채 허우적거리다가 접근하는 환인의 모습에 발작하듯 버둥거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빛나던 두 놈의 눈은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움직임도 다른 녹색 괴물과 다를 바 없는 속도다.
푹, 푹.
저항하지 못하는 생명을 무자비하게 빼앗는 이 감각.
쇠붙이가 연약한 살을 뚫고 박히는 이 느낌.
솟아오르는 흥분에 거친 숨을 흘리던 환인이 홀로 남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떠는 마지막 한 마리를 향해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쿠쾅!
형체 없는 폭발에 휘말린 환인이 짐짝처럼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찌이이잉…….
자동차에 치여 날아가면 이럴까 싶을 만큼 귀가 윙윙 울고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온몸의 뼈가, 오른쪽 반신의 관절이란 관절이 모두 욱신거리는 것은 덤.
“크윽……!”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부들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환인은 무의식적으로 수풀 쪽에 시선을 주었고, 녹색 괴물이 아니라 적색 괴물이라고 해야 할 만큼 얼굴이 붉어진 녹색 괴물 한 마리를 볼 수 있었다.
얼굴에 한가득 핏줄을 세운 녹색 괴물이 지팡이를 자신에게 겨누고 있었다.
구고갸…… 크락!
녹색 괴물의 고음과 함께 지팡이 끝이 한 차례 빛났다고 느낀 환인은 앞뒤 재지 않고 몸을 굴렀다.
콰앙!!
“크윽!”
보이지 않는……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날아와 조금 전까지 환인이 있던 장소를 터트렸다.
근거리에서 터진 폭발의 진동에 뼈마디가 이탈하는 고통을 느꼈지만, 환인은 숨돌릴 틈도 없이 재차 몸을 굴렸다.
스걱
하지만 숏소드가 환인의 허벅지를 긋고 지나가는 것이 더 빨랐다. 죽은 녹색 괴물의 숏소드를 집어 든 마지막 한 마리가 환인을 공격한 것이었다.
불에 지진 듯한 통증이 허벅지를 뒤덮는다. 그러나 그 고통은 전화위복이 되어 환인의 정신을 삽시간에 일깨웠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다행히 오른손은 창을 놓지 않은 채였다. 벌떡, 몸을 날리듯이 일으킨 환인은 재차 숏소드를 휘두르려 하는 녹색 괴물의 목에 창을 꽂아넣는다.
끄뤠렉……!
비록 조금 빗나갔지만, 목의 1/3이 잘리고도 살아남을 리 없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이 삐걱거리는 고통에 움직일 수 없었는데 어디서 이런 힘이 났는지 황당할 지경이지만, 환인은 곧장 지팡이를 든 녹색 괴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키히익?!
황당한 것은 지팡이를 든 녹색 괴물도 마찬가지였다.
영체 폭발은 정통으로 맞으면 회색 숲의 점거자들도 비틀거리게 만드는 위력이다. 그런데 저 빼빼 마른 놈은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움직이다니.
환인을 향해 재차 영체 폭발을 쏘려 한 녹색 괴물은 뒤늦게 지팡이가 텅 비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다가온 환인을 보며 건드려서는 안 될 괴물을 건드렸다고 후회했다.
자신들이 몰아넣긴 했지만 회색 숲의 점거자와 일 대 일로 싸워 이기는 것을 보았는데도 괴상하면서 빼빼 마른 겉모습에 속고 말았다.
키욱.
죽기 싫어.
그것이 녹색 괴물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지팡이를 든 녹색 괴물마저 목을 잘라 죽인 환인은 진심으로 죽겠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벌떡벌떡 뛸 때마다 몸 오른쪽의 뼈와 관절이 지끈거린다. 숏소드에 베인 허벅지는 바늘로 푹푹 찌르는 것처럼 아프고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겁다.
가시 몽둥이에 얻어맞은 어깨와 옆구리의 통증도 심상치 않다.
그저 속도가 2배가량 빨라졌을 뿐인데 이만한 피해를 보다니. 지난 6일간 조심해왔던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된 거 같아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
문득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며 녹색 괴물의 시체를 세어보니 7개뿐이다.
마비 구슬에 당한 1마리가 남아있다는 것이 생각난 환인은 수풀을 지나쳤다. 그러자 마비 구슬의 효과가 많이 가셨는지 벌벌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한 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푸욱.
켁.
심장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창으로 찌르자 바람 빠지는 신음과 함께 풀썩 쓰러져 숨이 끊어지는 녹색 괴물.
그 옆에 풀썩 주저앉은 환인은 욱신거리는 고통에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정장 코트와 정장 상의를 벗어 옆구리와 어깨를 살폈다.
“후우…….”
그저 타박상일 뿐이었다.
정장 코트와 정장 상의까지는 구멍이 났지만, 가시는 아슬아슬하게 조끼를 관통하지 못했다.
심상치 않은 고통이라 느낀 이유는…… 공기 폭발 같은 것에 휘말리며 먼저 입은 타박상을 강제로 자극받았기 때문이겠지.
아무튼,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갔다면 그 자리가 팅팅 부어올랐을 텐데 멀쩡하니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이 고통은 타박상일 것이다.
타박상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쉬다 보면 회복될 테니.
문제는 허벅지의 자상.
그나마 다행은 손가락 반 마디 정도만 베인 걸까. 정장 바지의 옷감이 질겨 원래 입어야 할 상처의 1/3 정도만 입은 게 천운이다.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면서 녹색 괴물의 시체 사이를 돌아다니며 숏소드를 찾았다.
“……빌어먹을.”
발견한 숏소드는 녹 투성이에 거무튀튀한 피딱지로 매우 더러운데다 정체모를 기름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한숨을 푸욱 내쉰 환인은 얼굴을 굳힌 채 불을 피워 멀티툴의 나이프를 달궜다.
항생제만 있으면 이런 짓은 하지 않을 텐데.
소작술???은 항생제도 뭣도 없을 때 파상풍이나 기타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하던 최후의 수단이다.
하지만 불에 지져진 상처는 조직에 상해가 일어나 세균에 더 취약한 환경을 만든다.
“이 빌어먹을 숲은 언제나 최악과 차악 중에서 선택하게 하는군.”
옷을 벗어 그나마 깨끗한 러닝셔츠의 밑단을 잘라 기다란 붕대를 만든다. 그리고 코트를 뭉쳐 입에 문 환인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나이프를 들고 심호흡했다.
치이익
“끄으읍……!!”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
눈과 이마에 핏발을 세우고 부들거리면서도 달궈진 나이프를 상처에 더욱더 강하게 누르는 환인이다.
마치 10분 같은 10초가 지나고. 나이프를 상처에서 뗀 환인은 식은땀을 비처럼 흘리며 러닝셔츠를 잘라 만든 붕대로 상처를 동여맸다.
이제 남은 것은 합병증이 오지 않길 기도하는 것뿐.
“후욱, 후욱.”
거칠게 콧김을 뿜으며 코트 안주머니에서 코로나 베리 꾸러미를 꺼낸다.
공기 폭발에 휘말리고 땅을 몇 차례 굴렀기에 열매가 다 뭉개지진 않았을까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몇 개만 그럴 뿐 나머지는 멀쩡하다.
그래도 호숫가에서 열매를 씻어놔야겠지. 즙이 마르면서 벌레를 불러들이거나 상하게 할 수 있으니…….
뭉개진 것만 골라 먹고 수분을 보충한 환인은 눈 밑이 퀭해진 느낌에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팡이를 든 녹색 괴물의 정체는 뭐였을까.
소설에 대입하자면 마법사 같은 놈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거다.
마법.
지팡이를 든 녹색 괴물 같은 놈은 많이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 호위대처럼 끌고 다니던 것들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많을 수가 없을 거다.
그것들과 마주친 것도 생각해보면…… 녹색 괴물들은 회색 괴물을 쫓고 있었고 자신은 거기에 끼어든 불청객이었을 것이다.
한숨을 재차 내쉰 환인은 고개를 들어 저 높은 곳에 형성된 나뭇잎 지붕을 보았다.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오며 작은 바람 소리와 함께 새소리가 들려온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분위기다.
그냥 이대로 드러누워 한숨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창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쉬더라도 안전한 곳에서 쉬어야지.
그렇게 몸을 절반쯤 일으켰던 환인은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비틀, 넘어지면서 지팡이를 짚었다가.
찌이이이잉!
“크윽……!?”
뇌를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에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