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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8화 (8/813)

〈 8화 〉 008 수해??

* * *

은신처에서 밤을 보낸 환인은 주변이 밝아지자마자 은신처를 나와 대호수로 향했다.

물론 나뭇가지와 덤불로 은신처의 입구를 잘 숨긴 뒤였다. 약 2시간 거리에 해안 같은 호숫가를 발견했으니 또 한동안 거점으로 사용할 셈이니까.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군.’

조금만 움직여도 먹을 것이 들어오는 대호수다. 그리고 어제는 배도 너무 고프고 해서 3시간 넘게 그 자리에 머물렀었다.

불도 피우고 먹을 것도 조리했다. 만약 근처에 괴물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 냄새를 맡고 찾아왔을 텐데…….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었지.’

비상식량도 있었고 괴물이 나타났다면 틀림없이 알 수 있었을 텐데 단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게 묘하게 신경 쓰인다.

호수에도 괴물이 서식할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도 공격받지 않은 것은 호수가 바다처럼 넓어 어제는 날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독이 있어서 관심 밖일 가능성도 존재하겠군.’

하지만 몸 상태는 어제와 똑같다. 아니, 어패류로 식사를 해서일까 원기가 보충되어 컨디션은 어제보다 더 좋다.

“…….”

역시 신경 쓰인다.

별조개와 비취게는 정말 허기져서 견디지 못할 때만 먹도록 하자.

이렇고 저러한 상황을 가정하며 행동 방침을 정해나가던 환인은 대호수로 향하는 루트를 어제와는 조금 다르게 잡았고, 운 좋게도 열매가 많이 맺힌 코로나 베리 덤불을 발견했다.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는지 잘 익은 열매만 21개나 된다.

500원 짜리 동전 크기의 코로나 베리 6개면 허기를 면할 수 있으니 체력 감소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루치 식량으로 쓸 양이다.

꽥. 꽥. 꽤괙. 꽤액. 꽥꽥.

“……!”

비상식량이 먹을 덜 익은 코로나 베리도 챙기던 환인은 갑자기 시작된 비상식량 경보음 1단계를 듣고 손으로 부리를 움켜쥐어 경보음을 멈추게 한다.

뀍…….

소리 없이 허리춤에 매 두었던 흑곤봉을 쥐고 몸을 낮춘 채 숨소리를 죽였다.

소음이 사라지고 밀림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환인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귀를 열어 주변의 기척을 탐색한다.

코로나 열매 덤불은 주로 나무에 기생해 자라는 기생목이다. 덤불 바로 건너편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다행…….

부스럭. 푸서석.

……이라고 생각했을 때 측후방 30여 미터 지점의 수풀이 흔들리는 것을 들었다.

그 즉시 코로나 열매 덤불이 기생하는 나무 뒤로 숨은 환인은 화면이 꺼진 스마트폰을 꺼내 흔들린 수풀 쪽을 비추었다.

각도를 맞추자 새카만 액정화면에 수풀이 반사되어 보이기 시작했고, 잠시 기다리자 수풀이 크게 흔들리며 처음 보는 괴물이 코 막힌 신음을 흘리며 수풀을 헤치고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그흐어. 그흐으.

키는 1.7m 정도?

몸통이 사람보다 길어서 상대적으로 다리가 짧은데 팔은 사람보다 1.5배는 더 길어 보인다.

돌덩이 같은 근육으로 이루어진 팔과 흉근. 이두박근이 뚜렷한 가슴. 아귀처럼 불룩 튀어나온 배불뚝이 체형.

정체 모를 갈색 가죽을 허리에 메고 있어 무릎 아래는 잘 안 보이지만, 발목과 허벅지가 분간되지 않을 만큼 두껍다.

얼핏 보면 통나무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전체적으로 고릴라와 흡사하지만, 결정적으로 회색의 몸에는 털이 한 가닥도(머리 포함) 없다.

면상은 엉망진창으로 얻어터져 부어오른 얼굴도 저보단 잘생겼을 만큼 지독하게 생겼다.

부정교합의 송곳 같은 이빨 탓에 입술이 죄다 찢어지고 뜯겨져 나갔는지 너덜너덜하다 못해 누런 잇몸이 고스란히 드러난 주둥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후으…….

그런데 상태가 좋지 않다. 자세히 보니 근육은 뭔가 풍선처럼 물렁물렁해 보이고 몸 곳곳의 베인 듯한 상처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중이다.

무엇보다 굉장히 지친 듯 연신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고 걸음걸이마저 비틀거렸다.

‘다른 괴물과 싸웠나.’

동족이 더 없나 싶어 기다렸지만,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없었다.

상처를 좀 더 살펴보니 대강 상황이 머릿속에 연상된다.

3줄짜리가 있나 하면 1줄짜리도 상처도 있었고 스크래치처럼 난 상처도 보이고 왼쪽 다리에는 물린 듯한 흔적도 있었다.

특히 일정 간격으로 동그란 구멍이 나 있는 상처가 눈에 익은 기분이다.

‘짐승 머리 괴물의 치열이군. 녹색 괴물이 날카로운 걸로 낸 것 같은 상처도 있고. 놈들에게 쫓기는 중인가.’

그르럭.

회색 괴물이 코로나 베리 덤불을 발견한 듯 환인이 숨어있는 나무로 다가온다.

괴물의 상태를 살피며 싸울지 포기할지 가늠하던 환인은 흑곤봉에서 돌도끼로 바꿔 쥐고 어깨에 맨 비상식량 봇짐을 왼손에 들었다.

뭐, 숲에 착한 괴물도 있을지 모르지만, 환인의 감은 말하고 있었다.

저 괴물은 식인종이라고.

‘5…… 4…… 3…….’

스마트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회색 괴물의 걸음걸이를 생각하며 10에서부터 숫자를 줄여나가던 환인은 1을 마지막으로 센 직후.

팔만 내밀어 회색 괴물의 왼쪽으로 비상식량을 집어 던졌다.

꽤괙!?

그후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비상식량의 울음에 회색 괴물이 그쪽을 돌아본다. 그러더니 조금 더 격해진 숨소리와 함께 비상식량을 향해 팔을 뻗으며 걸음을 내디딘 순간.

콱!

크아아아악!!?

등에 느껴진 극통에 회색 괴물은 허리를 활처럼 휘며 포악한 비명을 질렀다.

“허.”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을 들으며 환인이 헛숨을 내뱉는다.

회색 괴물이 등을 보인 순간 암살자처럼 다가가 회색 괴물의 척추를 돌도끼로 찍은 환인이다.

힘 조절 없이 두 손으로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손가락 세 마디 깊이로 틀어박혔는데도 뼈가 멀쩡하다는 것에 놀랐던 환인은 돌도끼를 뽑고 피하려 했지만.

“큭.”

근육에 붙잡힌 것처럼 돌도끼가 뽑히지 않는다.

짧은 시간 작전을 바꿔 흑곤봉으로 돌도끼의 머리를 내려치려 한 환인이었지만…….

쿠와아아악!!

분노의 포효와 함께 회색 괴물이 회전하려는 낌새를 포착하고 망설임 없이 뒤로 훌쩍 뛰었고, 간발의 차이로 회색 괴물의 바위 같은 주먹이 환인을 스쳐 지나갔다.

후웅­ 주먹질 소리에 환인은 짜릿한 흥분을 느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과 키는 비슷하지만, 폭은 2배가량 차이 나는 회색 괴물.

잘은 모르지만 저 손에 잡히거나 한 대라도 맞으면 생존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겁에 질렸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환인은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짓는다.

쿠워어어어­!!

눈에서 피가 흐를 만큼 충혈된 눈으로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달려드는 회색 괴물의 기백은 지옥 같은 얼굴과 합쳐져 형용하지 못할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기백은 안중에도 없는 환인이었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적을 처리하는 것뿐.

환인은 자신을 잡아 찢으려 드는 회색 괴물의 두 팔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회색 괴물의 움직임을 분석한다.

관절은 역시나 근육 탓에 부드럽다고는 못하다. 휘잉­ 바람소리와 함께 휘두른 팔에 몸이 끌려가는 것을 보면 주체할 수 없는 힘에 모든 것을 맡기는 타입.

움직임도 직선적이어서 집중하면 피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분노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콰우우우!

회색 괴물은 쥐새끼처럼 피하는 환인에게 극도의 짜증과 분노를 느끼며 주먹으로 땅을 몇 차례 쿵쿵 내려쳤다.

그리고는 상체를 숙이는 동시에 주먹 쥔 두 팔로 받치며 살기 어린 시선을 환인에게 고정했다.

“……!”

사족 보행으로 변한 회색 괴물의 팔다리가 굽혀지는 것이 환인의 눈에 슬로우 모션처럼 들어온다.

저러면 속도는 이족 보행 때보다 족히 훨씬 빨라지고 안정적으로 되겠지.

팔의 리치를 생각한다면 피하기도 어려울 거다.

환인은 나무 방패의 팔 매듭을 빠르게 풀며 회색 괴물의 팔다리 움직임을 주시한다.

상체가 조금 숙여졌다가 펴지는…… 지금!

회색 괴물의 돌진 타이밍에 나무 방패를 면상에다 집어 던지며 왼쪽으로 몸을 날리는 환인.

스프링처럼 튀어 나가는 순간 날아온 방패에 얼굴을 맞은 회색 괴물은 짜증의 포효를 지르며 돌진을 멈추고 방패에 맞은 곳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따끔거리는 게 회색 괴물의 분노를 자극한다.

쿠우와아아아악­!!!

통역하자면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정도가 아닐까. 격노한 회색 괴물은 충혈된 눈으로 환인을 찾­

쾅!

쿼걱?!!

등에 충격이 들어왔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등에서 시작된 찌릿한 감각이 엉덩이로 쭉 내려가며 힘이 빠지는 이상한 느낌뿐.

시야를 방해해놓고 뒤로 돌아와 아까 하지 못한 돌도끼의 머리를 힘껏 내려친 환인은 회색 괴물의 다리가 새끼 사슴처럼 후들거리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효과가 있군.

“훕.”

쿠웍!?

두 손으로 ­콰직!­ 돌도끼를 잡고 걷어차는 반동으로 뽑아낸 환인은 몸을 뒤틀며 팔꿈치를 휘두르는 회색 괴물의 어깨를 재차 내려찍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팔꿈치 자체를 쾅, 쾅 내려친다.

퀘에엑­!!

도끼가 찍힐 때마다 피가 대량으로 튀며 순식간에 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맥이 끊어졌는지 빨간 피가 스프링클러처럼 퓨슈슛 소리를 내면서 뿜어져 나온다.

환인은 멈추지 않고 왼쪽 오금을 돌도끼로 찍고 오른쪽 오금마저 찍어 다리를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이어 허우적거리는 오른팔도 장작 패듯 콱콱 내려친다.

콱, 쾅! 쾅!!

“더럽게 튼튼하군!”

콰작!

꾸으거어어엌­!!

여러 번 도끼질 끝에 팔뼈를 잘라내는 것을 끝으로 회색 괴물의 사지를 박살 낸 환인은 흑곤봉으로 바꿔 든 뒤 후욱, 후욱 숨을 몰아쉬며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괴물의 머리 쪽으로 돌아갔다.

콰아아아악!!!

“이 상황이 되어서도 투지를 잃지 않는 건가.”

덜렁거리는 팔을 들으며 괴성을 내지르는 회색 괴물의 모습에 환인은 망설임 없이 흑곤봉을 내려쳤다.

쾅!

녹색 괴물이나 짐승 머리 괴물이었다면 두개골이 부서졌을 거다. 그러나 회색 괴물은 얼굴을 땅에 처박기만 했을 뿐 꽤 멀쩡하다.

끄뤠뤨­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흐느적흐느적 다시 고개를 드는 회색 괴물의 머리통을 재차 내려친 환인은 멈추지 않고 쉼 없이 흑곤봉을 내려쳤다.

뻑, 뻐걱! 콱! 콱! 쾅!!

우직.

그렇게 6번을 내려치고서야 살 떨리는 소리와 함께 회색 괴물의 후두부가 무너지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후욱, 허억. 허억. 크…… 후후후. 하하하하.”

사지가 피투성이가 된 채 머리가 박살 나 죽은 회색 괴물의 모습에 환인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투의 흥분은 깨끗하게 씻겨나간 지 오래다.

기습이 통한 덕분에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회색 괴물은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뛰었지만, 몸은 통증에 솔직했었다. 움직이다가 통증에 움찔거리며 멈칫거렸고 여러 번 공격 뒤에는 지친 것처럼 헐떡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색 괴물을 죽이는 데 애를 먹었다.

급소나 다름없는 머리를 흑곤봉으로 무자비하게 내려쳤는데도 6번이나 때려야 했다. 팔뼈 또한 돌도끼로 여러 번 내려찍은 뒤에야 부러졌었다.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또한 괴력에 가깝겠지.

힘도 강하고 내구력도 뛰어나고 투지도 높다. 동족이 죽어 나자빠진다고 굳거나 겁먹는 녹색 괴물, 짐승 머리 괴물과 차원이 다르다.

방금 돌진의 순간 가속을 생각해봤을 때, 그리고 지구의 고릴라가 보여주는 달리기 속도를 생각해본다면 이 회색 괴물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할 터.

이런 괴물이 짝지어 다니는 상상과 그런 놈들과 마주치는 상상을 했더니 기분이 가라앉는 환인이었다.

“…….”

꽥.

생각을 멈춘 환인은 터벅터벅 걸어서 눈을 끔뻑거리는 비상식량을 회수했다.

집어던졌던 나무 방패는 회색 괴물의 신경질적인 손짓에 팽개쳐졌는데 뼈대가 흔들렸는지 끼긱, 삐걱 소리가 난다.

나무 방패 모서리를 잡고 설렁설렁 흔들자 방패의 축을 잡던 나뭇가지가 후두둑 떨어지더니 급기야 방패 자체가 산산이 분해되고 말았다.

5일간 십수 번의 전투를 치른 나무 방패다. 지금까지 멀쩡했던 게 기적이었겠지.

“새로 만들어야겠군.”

즉흥적으로 만든 것 치고는 큰 도움이 되었기에 새로 만들 생각을 하며 대호수로 향하려던 환인은 오싹, 오한이 등줄기를 달리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환인의 시선이 닿은 수풀, 회색 괴물이 출현했던 곳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케에­

킥? 캬갹. 캬캬캬캬.

끼이히힣.

수풀이 헤쳐지며 낄낄거리는 녹색 괴물 8마리가 걸어 나왔다.

“…….”

이때까지의 녹색 괴물과는 달랐다. 하반신만 가리던 다른 녹색 괴물과 달리 나무를 덧댄 가죽으로 옷을 갖춰 입은데다, 환인이 만든 것과 별 차이 없는 나무 방패를 들고 있다.

무엇보다.

‘날붙이라니.’

8마리 중 3마리가 녹슨 날붙이를 들고 있었다.

부러진 녹슨 장검. 돌로 마구 긁은 듯 스크래치가 심한 (녹슨)숏소드. 녹슨 단검 같은 것을 나무막대기 끝에 묶어 만든 창.

날붙이를 들지 않은 녹색 괴물도 거무죽죽한 봉이나 몽둥이를 들고 있다.

“엘리트 그린 스킨인가.”

하나같이 무장이 충실한 녹색 괴물들의 모습에 확인하듯 중얼거린다.

좋지 못한 상황이다.

조금 전까지 회색 괴물과 싸우며 체력을 소비했고 방패도 잃었다. 숨결도 아직은 거칠고 심장도 격한 움직임의 후유증으로 잘게 쿵덕쿵덕 뛰고 있다.

이 상황에 무기를 제대로 갖췄을 뿐만 아니라 성급하게 달려들지도 않고 이쪽을 향해 키키키 웃는 8마리의 녹색 괴물과 싸운다?

캐캐캐캨!

캬컄컄컄!!

비웃듯이 방정맞게 폴짝거리는 녹색 괴물들을 본 순간 환인은 깨달았다.

“회색 괴물과 싸우는 걸 지켜봤군.”

크키키키키.

정답이라는 듯, 다른 녹색 괴물보다 음산한 웃음소리가 놈들의 뒤쪽에서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앞으로 나와 있던 녹색 괴물들이 좌우로 비켜선다.

거기서 기괴하게 뒤틀린 1.5m 정도의 나무 지팡이를 쥔 녹색 괴물이 8자 걸음으로 으스대며 걸어 나왔다.

규갸아~! 케르륵! 캬갸갸갸갹!

지팡이로 의미 불명의 동작을 보이며 어깨를 위아래로 흔들고 발을 쿵쿵 땅에 찍는 지팡이 녹색 괴물.

“…….”

특이하게도 지팡이를 든 녹색 괴물의 몸 주변에 아주 옅은 아우라가 일렁이고 있었다.

잘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지만, 그걸 목격하자 오한이 등줄기와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섬뜩한 느낌에 닭살이 솟는다.

환인은 지팡이를 쥐고 가죽을 로브처럼 입고 머리에 조잡한 가죽 모자까지 쓴 녹색 괴물에게서 회색 괴물보다 더한 위협을 느꼈다.

비상식량을 미끼로 던진다면…… 의미가 없겠군.

그걸 쓸까.

……아니, 너무 넓게 퍼져있어. 효과를 보려면 적어도 3개는 던져야 한다.

지팡이를 든 녹색 괴물이 키엑, 키키크, 크갸이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던 환인은 결심을 굳혔다.

두손에 각각 돌도끼와 흑곤봉을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힘껏 움켜쥔다.

장비 수준이 출중하다지만 결국 녹색 괴물이다. 다리 길이의 차이도 있고 장비 무게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할 테지.

두 팔을 벌리고 우스꽝스러운 폼을 잡는 지팡이 녹색 괴물은 명백하게 방심한 모습이었다.

“흡!”

키헥?!

키힉!

비웃음이 역력한 면상으로 케케케 웃는 녹색 괴물에게 기습하는 ‘척’ 큰 동작을 내보이자 앞으로 나온 지팡이 녹색 괴물뿐만 아니라 뒤의 7마리도 명백하게 겁먹은 모습으로 움츠러들었다.

……키엑!?

키이이?

그 후 벌어진 일에 녹색 괴물들은 멍청하게 두 눈을 끔뻑였다.

만약 환인이 그대로 공격했다면 녹색 괴물들도 지난 경험에 따라 반격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환인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겠지.

하지만…….

키에?

……키르르??

케흐, 켘크?

뭐지?

공격해오는 게 아니었나??

왜, 도망가?

위협이 통했음을 포착하자마자 삽시간에 수풀 사이로 사라진 환인.

녹색 괴물의 지능이 조금만 더 떨어졌다면 본능에 따라 도망치는 환인을 사냥하기 위해 곧바로 뒤쫓아 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중간한 지능 탓에 녹색 괴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리바리한 행동을 보였고.

키야아아악­! 캬그그그극!!

그것은 지팡이를 든 녹색 괴물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팍팍!

캬오오오옹!!

지팡이로 퍽퍽 땅을 내려치며 성난 고성을 지르는 녹색 괴물의 모습에 나머지는 벌에 쫓기는 것처럼 환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까드득.

멍청하고 어리숙하기만 한 동족을 다그쳐서 보낸 녹색 괴물은 지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이빨을 갈았다.

감히, 감히 날 겁먹게 하다니! 아니 겁먹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치욕.

녹색 괴물의 지능으로 수치와 모욕이라는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녹색 괴물의 무리에서도 특별하고 특출난 존재로 우러름을 받던 녹색 괴물은 환인의 위협에 쫄았다는 것을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분노로 감추었다.

끄기기기…….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녹색 괴물은 번쩍,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고 지팡이로 느릿느릿, 허공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날 화나게 한 그 괴상한 놈은 잔인한 대가를 치르리라.

그교오오­ 갸우갸아­ 기게에에­

녹색 괴물의 입에서 기이한 소리가 일정한 템포로 흘러나올수록 지팡이 근처로 희끄무레한 빛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동족 중에서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빛. 여러 힘을 주는 특별한 빛!

8개의 희미한 빛이 지팡이에 모여들었을 때 녹색 괴물은 그중 하나를 몸에 뒤집어썼다.

마치 암컷과 번식을 할 때처럼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간다.

……키히이이­

사악한 웃음을 입가에 띤 녹색 괴물은 7개의 빛이 깃든 지팡이를 옆구리에 낀 채 환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앞서나간 동족의 2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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