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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5화 (5/813)

〈 5화 〉 005 수해??

* * *

“후우, 후욱. 후우우.”

정체불명에 모습도 알지 못하는 맹수를 뒤에 두고 도망치는 것은, 도망자의 심정에 미지의 공포가 더해져 감정이 평범하지 않은 환인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선택지는 폭넓지 않다.

가만히 있다가 잡혀서 먹히느냐, 도망치다 붙잡혀 먹히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환인은 좀 더 생존 가능성이 큰 쪽을 고를 뿐.

뒤를 돌아보려는 충동을 억누르며 쉼 없이 계속해서 달리던 환인은 무릎이 풀려 땅을 몇 바퀴 구르고 나서야 뜀박질을 멈췄다.

“허억, 허억. 허억.”

심장이 터질 것 같고 폐가 찢어지는 듯 하다.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심장 마비나 폐 손상으로 죽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인 환인이었다.

드러누운 채 한동안 헐떡거리던 환인은 힘겹게 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 후욱. ”

그동안 맹수의 추격은 없었으니 이제 안전해졌다고 봐도 되는 걸까.

네발짐승과 비교하면 인간의 달리기 속도는 보잘것없다. 하고자 한다면 순식간에 쫓아왔을 테지.

잠시 숨을 고르던 환인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라톤처럼 달린 직후다. 힘들다고 그대로 퍼져버리면 경련과 근육통이 찾아올 수 있다. 힘들더라도 조금 걸으면서 기운을 차리는 것이 좋다.

나뭇잎 포장을 풀어서 코로나 베리를 몇 개 집어먹고 수분을 보충한 환인은 스마트폰을 꺼내 스마트 러닝 앱을 켰다.

GPS를 사용하지 않고 기기 자체 센서를 이용해 방향과 이동 거리를 감지해 기록해주는 앱으로, 부시크래프트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필수로 각광받는 앱이다.

때문에 GPS가 없이도 자신이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얼만큼 이동했는지 알 수 있는데, 어젯밤 스마트폰에 이런 앱을 깔아뒀다는 게 생각나 미리 설정해둔 환인이었다.

이거라면 방향을 잃어도 금방 알 수 있으니까, 전력을 소모하더라도 이 수해를 탈출하는 데 도움이 될 거란 판단에서였다.

일단 어디로 도망쳤는지 방향과 거리를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1시간 동안 17km.”

동기화된 지도가 없어 새하얀 화면에 붉은 선으로 표시된 이동 경로와 거리, 시간을 본 환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왔던 길을 되돌아온 코스로 이동 경로인 빨간 선이 구불구불한 것은 나무를 피해 달리느라 그렇다.

그런데 소요 시간이 1시간 7분 35초에 이동한 총거리는 17.32km?

시간과 거리를 확인한 환인은 앱에 오류가 일어난 게 아닐까 싶어 앱을 몇 차례 갱신시켜보았다.

[앱은 정상입니다.]

[앱은 정상입니다.]

[앱은 정상입니다.]

오류는 없었다.

‘세계 마라톤 신기록이 2시간 1분 정도였을 텐데.’

마라톤 선수들은 마라톤 복장에 신발도 과학이 가미된 전용 마라톤 슈즈를 신고 아스팔트 위에서 42km를 달린다. 세계 신기록은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고개를 숙여 자기 복장을 본다.

흙과 풀 쪼가리가 덕지덕지 붙은 진회색 정장 코트. 코트와 잘 어울리는 회색 클래식 정장. 신발은 무난한 갈색 소가죽 구두.

여기에 왼팔에는 나무 방패를 매고 있고 두 손에는 각각 거무튀튀한 곤봉과 돌도끼를 쥐고 있으며, 낙엽과 부엽토에 나무뿌리 수풀 등이 무성한 최악의 환경에서 달렸다.

이런저런 변칙상황을 고려해본다면 세계 마라톤 선수와 버금가는 기록을 달성했다는 뜻이 아닌가.

자신의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헬스장을 다니며 대강 파악하고 있는 환인이다. 절대 이만한 기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평소보다 몸이 잘 움직인다고 느끼긴 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이유가 뭘까 잠시 생각해본 환인은 방금 먹은 코로나 베리를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신체 능력의 증가를 의심하자면 역시 도핑이다.

‘이 코로나 베리가 조혈제 역할을 하는 건가.’

마라톤의 약물 도핑에 조혈제?血?가 있다는 것은 유명하다. 조혈제로 적혈구를 늘려 혈액 내 산소 운반 능력을 향상해서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물론 마라톤 협회에서는 금지하고 있는 행위.

즉 코로나 베리에 조혈 성분이 있다고 보는 게 신빙성이 높겠지.

그렇다고 해도 능력이 이 정도로 향상될 수 있는 건지 환인은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참가했던 10km 마라톤 대회에서 48분을 기록했던 환인이다.

600명 중 상위 10%에 해당하는 준수한 기록으로, 계산해보면 같은 시간에 2km나 더 뛰었다는 결과가 나온다.

말이 쉬워서 2km지, 자신의 기록을 뭐 한 것도 없이 10%나 단축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되지 않는다.

“…….”

여긴 지구가 아니니 뭔가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거겠지.

어차피 의문을 품는다고 알아낼 수도 없는 노릇, 가볍게 생각한 환인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정체불명의 맹수가 곧장 쫓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의도한 대로 녹색 괴물을 덮쳐서 먹고 있는 것 같은데 언제 뒤쫓아올지 모르니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잰걸음으로 움직이던 환인은 뒤를 힐끔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애초에 방향을 잘못 잡았을지도 모르겠군. 녹색 괴물을 피해 반대로 간다는 것이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간 것이었을 수도 있어.’

녹색 괴물은 약하다.

조악하게 만든 나무 방패와 무기로 네 마리와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정도였으니 녹색 괴물은 숲에서의 먹이 사슬 하위권에 속해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처음 녹색 괴물과 만난 곳이 숲의 외곽 지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짐작일 뿐이다.

녹색 괴물들을 덮친 맹수는 딱히 영역이라고 할 것 없이 숲을 활보하는 유형일 수도 있고, 녹색 괴물도 여러 부족이 있어 숲을 나눠 먹고 있을 수도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섣부른 추측은 금물.

저쪽으로 이동하다가 두 마리의 맹수와 두 개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팩트이니 여기서는 다시 돌아가자.

‘거친 밀림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밀림??이라고 하면 열대우림의 빽빽한,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후덥지근한 숲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곳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따지자면 수해와 밀림의 중간 정도. 큰 나무가 빽빽이 자라고 있지만 무리 없이 달리기가 가능할 정도다.

자라고 있는 나무의 높이가 절반만 됐어도 숲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했겠지만, 고층 아파트 수준으로 자란 나무들이 이렇게 있으니 밀림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 환인이었다.

그 후 2시간가량 걸었던 환인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걸음을 멈췄다.

거칠었던 숨결도 차분해졌고 벌떡벌떡 뛰던 심장도 잔잔해졌다. 그러나 허벅지와 종아리, 팔다리에 미묘한 불쾌감이 사라지질 않는다.

경험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이상 활동하면 내일 심각한 근육통이 찾아올 거라고 말이다.

마침 주변은 덩굴과 수풀이 조금 무성하게 자란 곳이다. 거기다 커다란 나무뿌리가 지면으로 솟아 올라와 얽히면서 작은 구멍 같은 것을 만들어낸 장소도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두어 시간 가량 남았지만, 환인은 이곳에서 쉬기로 마음먹고 근처의 적당히 큰 나무뿌리에 걸터앉았다.

앉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좋지 않은 현상이다. 이대로 자면 밤중에 쥐가 찾아와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겠지.

환인은 묵묵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물러 굳은 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여보니 쪼롱쪼롱하는 새소리와 찌륵거리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이 정도면 정체불명의 맹수는 쫓아오지 않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쫓아오는 중이라 해도 이제 환인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맞서 싸우다가 잡아먹히는 것.

잠깐 괴성을 지르던 녹색 괴물과 맹수의 울음소리를 떠올리던 환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무 방패를 점검했다.

녹색 괴물의 안면을 강하게 찍었을 때 뭔가 비틀리는 소리를 들었다. 못 같은 걸로 고정해둔 게 아니라서 내구가 걱정이었는데 살펴보니 아직은 괜찮아 보인다.

약간 헐거워진 끈을 재차 조여 맨 환인은 방패를 내려놓고 거무튀튀한 곤봉을 집어 들었다.

리더처럼 보였던 녹색 괴물에게서 빼앗은 주머니와 거무튀튀한 곤봉.

그런데 곤봉의 재질이 묘하게 익숙하다.

“…….”

돌도끼를 들어 자루를 곤봉과 비교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같은 재질이다.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돌도끼로 곤봉의 자루 제일 끝부분을 살짝 잘라……보려 했지만 잘 안됐기에 멀티툴에서 나이프를 꺼내 조금 깎아보았다.

‘놀랍군. 나이프로도 깎는 게 어려울 정도라니.’

가공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얇게 포 뜨듯이 벗겨낼 생각이었는데 마치 쇠를 깎는 느낌이다.

그렇게 잘라낸 조각을 만지작거리던 환인은 놀라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딱히 가공을 거치지 않은 듯 한데…….’

나무로 물건을 제작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기초작업, 사람에 따라서는 작업으로도 치지 않을 정도로 당연한 것은 바로 나무의 수분을 날리는 것이다.

수분을 날리는 것만으로 뒤틀림이 방지되고 나무 자체도 더욱 견고해진다. 나무를 얼마나 잘 말리느냐에 따라 똑같은 나무라고 해도 값어치가 굉장히 차이 날 정도.

그 후 약품에 절이던가 특수용액을 바르든가 해서 강도와 경도를 올리는 일이 있지만, 이 곤봉과 돌도끼의 자루는 아무런 처리도 하지 않은 생목??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통짜 검은 나무라니.”

지구에도 검은색 나무는 존재한다. 흑단목???이 바로 그것인데, 흑단목도 심만 검은색이지 겉은 평범한 갈색이다.

환인은 근처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나무뿌리에 올려놓고 거무튀튀한 곤봉, 흑곤봉으로 내려쳐 보았다.

파각!

말 그대로 산산이 조각나는 나뭇가지.

나무뿌리마저 움푹 팬 것을 본 환인은 아쉬움에 살짝 혀를 찼다. 제대로 습기를 말리고 제작했다면 훨씬 더 뛰어난 무기가 만들어졌을 텐데.

그렇다 한들 현재로서는 이 정도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더군다나 70cm 정도 되는 흑곤봉의 무게 균형은 돌도끼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아서 휘둘러도 팔에 부담이 없다.

앞으로 흑곤봉을 주력으로 쓸 생각을 하며 돌도끼와 흑곤봉을 잘 챙겨놓은 환인은 문득 넝마 가죽을 버리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싸움이 벌어지며 언덕 아래쪽 수풀에 던졌었는데 도주 방향과 달라서 회수하질 못했다.

아니, 회수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다.

‘가죽이 있어서 그나마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았는데.’

불현듯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는 것을 자각한 환인은 멈칫했다가 신기한 감각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꾸민 웃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난 웃음을 지었다는 것에 다시 멈칫했다.

……어머니가 지금 내 모습을 보셨다면 아들이 달라졌다며 우셨을 텐데.

생경한 감정에 입매를 어루만지며 잠깐 상념에 잠겼던 환인은 상념을 털어내고 마지막 전리품을 코트에서 꺼내 들었다.

녹색 괴물에게 빼앗은 가죽 주머니.

주머니 자체는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 평범하고 무난한 것이었다.

주머니를 열어보자 새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울퉁불퉁한 적갈색 구슬 여섯 개가 눈에 들어온다.

이쪽을 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니 적을 공격하는 소모품이 틀림없을 텐데. 사용법은 투척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구슬 하나를 꺼내 만지작거리던 환인은 푸드덕 소리와 함께 녹색 외뿔 새가 저 앞의 나무둥치에 앉는 것을 목격했다.

목적은 코로나 베리인 듯 종종걸음으로 덤불로 향하는 외뿔 새.

행동은 즉각적이었다.

팍!

환인이 던진 구슬은 정확히 외뿔 새 바로 옆의 뿌리에 부딪혔고, 작은 풍선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구슬은 검붉은 가루가 되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꾸엣­!

깜짝 놀란 외뿔 새는 즉시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지만, 얼마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비실거리다가 땅에 툭 떨어져서는 바들바들 떨어대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고 가까이 다가가서 쿡쿡 찔러보니 작게 파들거리기만 할 뿐, 저항하거나 도망가려는 움직임은 없다.

죽어가는 것 같지도 않으니…….

“마비 독. 거기에 즉효성이군.”

아무리 닭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라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마비시키다니, 효과가 굉장하다. 이 정도면 제대로 흡입했을 때 사람도 순식간에 마비되지 않을까.

환인은 그제야 자신을 포위하려 한 네 마리 녹색 괴물의 행동을 이해했다.

‘거리를 그렇게 벌렸던 것은 가루에 닿지 않기 위해서였나.’

그러고 보니 방금 다리가 풀리면서 몇 바퀴 땅을 구르지 않았던가. 주머니의 마비 구슬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환인은 마비 구슬의 제조법이 탐났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포기했다.

정체불명의 맹수가 아니었더라도 주머니를 가지고 있던 녹색 괴물은 생포하기 어려웠을 거다. 아니, 되려 마비 구슬에 당해 목숨이 위험해졌겠지.

어떻게 몸짓 손짓으로 제작법을 알아냈어도 제작은 쉽지 않을 것이다.

쉬웠다면 지금까지 조우했던 10마리의 녹색 괴물 대다수가 들고 다녔을 테니까.

환인은 생각을 이어가며 덤불에서 가느다란 줄기를 채취해서 가져와 외뿔 새의 부리를 묶고 다리와 날개도 묶어놓는다. 그리고 시계를 꺼내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지속 시간도 준수하군.”

지속 시간이 10분이다.

덩치에 따라 지속 시간에 차이가 있겠지만 생명 하나를 빼앗는 데는 1분도 긴데 무려 10분이라니.

마비가 풀리는지 눈을 끔뻑이고 꾸물거리던 외뿔 새는 곧이어 푸휵, 피힉­ 숨소리를 내며 펄떡거린다.

그러든지 말든지 환인은 외뿔 새를 구덩이 속에 던져놓고 잠자리를 만들기 위한 나뭇잎과 덤불 확보에 나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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