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1 - 601 마지막 날
분주한 아침. 양복을 챙겨입고 있자 아영이가 다가왔다. 목에 걸쳐 놓기만 했던 넥타이를 잡더니 매주기 시작했다.
"오늘이 출근 마지막이죠?"
"은근 시간 빨리 지난 것 같지 않아? 나는 입사한 게 엊그제처럼 느껴지는데."
"저는 혼자 수업 듣는 거 심심했다고요. 오빠의 빈자리가 이렇게나 클 줄이야..."
"그래도 이제 다음 주면 같이 다닐 수 있잖아."
그녀가 배시시 웃더니 넥타이를 쭈욱 잡아당겼다. 기껏 다 맸던 게 다시 풀렸다.
"좋긴 좋은데 이제 이런 건 못하네요."
"양복이야 언제든지 입을 수 있잖아. 이것도 마찬가지도."
"그건 맞는데... 음, 뭐랄까. 이러고 있으면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의 기분이 나거든요."
목소리에는 시원섭섭한 감정이 실려있었다. 그래서일까, 손의 움직임도 평소보다 더 꼼꼼하고 느렸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화제를 돌렸다.
"나중에 취업하면 또 느낄 수 있으니까 참아봐. 그보다 학교에서 큰일 같은 건 없었지?"
"큰일 있죠."
"뭔데?"
"이제 다시 수석 자리를 내줘야 하는 거요."
전혀 예상 외의 대답에 잠시 벙쪘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그녀가 가슴팍을 탁 쳤다.
"이 괴물이 돌아오면 졸업 때까지 평~생 2등이니까요."
"아니, 네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면 되잖아."
"흥, 교수님이 대놓고 틀리라고 내는 문제도 죄다 맞추는데 어떻게 해요."
"구석에 있는 것까지 전부 외우면 가능해."
"참 잘났어요. 잘났어."
아영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손을 뗐다. 넥타이는 예쁘게 잘 매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낑낑거리며 했던 것 같은데 이젠 아주 잘하네.'
괜히 옛날 생각이 났다. 그래봤자 한달도 안 됐지만.
"아, 맞다. 그리고 오늘 일찍 들어와야 해요?"
"당연히 그래야지."
"거기 사람들이 뭐 같이 저녁 먹자거나 술 마시자고 해도 거절해야 돼요."
"알았어. 걱정마."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뭔가를 준비하려는 듯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들었다.
현관까지 배웅 나온 모두들 보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
*
"오늘 우진 씨 마지막 날이죠?"
"아, 맞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함께 일해서 재밌었어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듣고 내뱉는 것 같다. 그만큼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이니 기분 좋긴 했다.
귀찮으면 인사치례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한껏 축하 인사를 받고 있자 이예나가 옆구리를 찔렀다.
"부럽네. 나도 탈출하고 싶다."
"대리님은 오래오래 다니셔야죠. 팀장이 되고 부장이 되는 그 날까지."
"왠지 악담처럼 들린다?"
"기분 탓이에요."
씨익 웃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입맛을 다시더니 흘러가듯 말을 꺼냈다.
"시간 빠르네."
"그러게요."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맞아요. 출장 가서 대리님 처녀 딱지도 떼고, 회사에서 보지도 빨아보..."
"닥쳐 제발."
그녀가 으르렁거리며 말을 끊었다. 조용히 하고 있자 이예나가 앞머리를 비비 꼬기 시작했다.
"뭔가 다음 주부터는 심심해질 것 같아."
"짬 날 때마다 전화나 까톡 하세요. 수업만 아니면 바로 받을 테니까."
"그걸로는 좀... 많이 부족하지."
"이제 회사에서 섹스 못해서요?"
"야...!"
그녀의 귓불이 빨개졌다. 옆머리를 슬쩍 넘겨주었다.
"대신 칼퇴근 하고 집으로 오면 실컷 할 수 있잖아요. 대리님이 어디 붙잡힐 짬도 아니고."
"아는데... 그냥 그렇다는 거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니까..."
이예나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 뭔가 바라는 눈빛으로 흘끗흘끗 곁눈질했다.
당연히 뭔지는 뻔했다. 요 며칠간 하루도 빠짐없이 봤던 거니까.
-스윽...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이예나가 몸을 붙여왔다.
이젠 회사임에도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 물론 나도 거리낌 없이 손을 움직였다.
몸매에 맞게 딱 달라붙은 옷의 라인을 훑고, 탱탱하기 짝이 없는 엉덩이를 스쳐 지나가듯 만졌다.
"하아..."
얼마 지나지 않아 달콤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기세를 이어 더 끈적하게 주물렀다.
"흐윽...읏...아앙..."
그동안 꺠달은 게 있다. 이예나의 진짜 발정 스위치는 엉덩이라는 걸.
'애널로 자위하던 습관이 영향을 끼친 거겠지.'
나는 조용히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럴수록 이예나가 더욱 달라 붙어왔다.
거의 안기는 수준이 되자 갑자기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엄청난 힘이었다.
"가자."
"어디를요?"
"하러."
한 발 빼기 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져 왔다. 그렇게 어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갔고, 도착한 곳은 옥상이었다.
나무와 풀이 심어져 있고 그늘이 있는 쉼터가 있는 공간. 게다가 높이가 높이다 보니 시원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하게요?"
"여기서는 한 번도 안 해봤잖아."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 복도, 사무실, 비품실, 비상 계단... 하긴, 가볼 데는 다 가보긴 했죠."
"그렇게 나열하지 않아도 되거든."
이예나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구석으로 향했다. 적당히 그늘 진 나무 아래였다.
딱 자리를 잡자마자 그녀가 나를 정면에서 쳐다봤다. 눈을 마주치는가 싶더니 갑자기 넥타이를 잡아 내렸고, 그와 함께 까치발도 들었다.
"쪼옥...쪽...하읍...읏..."
따뜻하고 말랑한 입술. 그 사이에선 혀가 튀어나와 내 것과 인사를 해댔다.
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푸하아... 역시 맛있네."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랬어요. 하마터면 카모플라쥬 못 쓸 뻔했네."
"그거 카모플라쥬라고 부르는구나? 흐응..."
이예나가 미묘한 소리를 내며 입술에 묻은 침을 닦았다. 하지만 상관 없다는 듯 다시 까치발을 들었다.
"응흡...으응...읏... 하읍..."
방금보다 더욱 끈적한 키스가 이어졌다. 또 달라진 점이 있다면 불알을 주무르고 있는 손이었다.
질새라 나도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이예나가 몸을 떼었다.
"하아...하아... 시간 없으니까 바로 하자..."
그녀가 치마를 위로 올려 엉덩이를 드러냈다. 빛나는 피부와 새하얀 팬티와 검은 스타킹.
세 가지 조합은 정말이지 눈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야했다.
뚫어지게 쳐다보며 자지를 꺼냈다. 그걸 확인한 이예나가 허리를 흔들며 나무에 몸을 지탱했다.
자세가 잡히자 바로 입구에 귀두를 끼웠다.
그 날 나무는 물을 잔뜩 먹었다.
*
"잘가요!"
"나중에 또 봤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요!"
부서 사람들이 준 소소한 선물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도착까지 한 10분 남았을까?
오늘 따라 조용히 걷던 이예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슬슬 정체가 뭔지 말해줘도 되지 않아?"
"많이 궁금해요?"
"당연하지. 무슨 사야 차단에 방음에 그놈의 유령까지 있는데..."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기술들이 싸악 튀어나왔다.
"애초에 너 처음 볼 때부터 이상하긴 했어.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데 출근한 당일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꿈에 네가 나타났어. 그냥 나타난 것도 아니고 조용히 자던 나를 덮치는... 응?"
회상을 하던 그녀가 멈칫했다. 방금 자기가 한 말은 되뇌더니 나를 찌릿 쳐다봤다.
"너지?"
"...뭐가요?"
"너 맞잖아. 애초에 안면 튼 지 얼마나 됐다고 네가 튀어나와...!"
이예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키스할 것 같은 거리에서, 푸른 눈동자를 한없이 크게 떴다.
"내.꿈.에.나.타.나.서.나.따.먹.은.사.람.너.맞.지?"
뚝뚝 끊어 말하니 좀 무섭네. 살짝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더욱 다가왔다.
"게다가 둘째 날엔 갑자기 내 애널에다 박았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 나..!"
이쯤되면 부정할 수도, 부정할 생각도 없다. 대신 조용히 툭 내뱉었다.
"그야 대리님이 엉덩이 구멍으로 신나게 자위하고 있으니까..."
"뭐, 뭣?"
"앞으로 내 상사가 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러 슬쩍 갔는데. 설마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대놓고 언급하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입도 크게 벌리고서는 으아아아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삿대질을 했다.
"너...너어... 그거 범죄야 범죄!"
"꿈에서 하는 건 무죄예요."
"그렇게 대충 넘어가려 하지마...!"
"엘리베이터에서 자지도 훔쳐본 사람이 누구더라... 엉덩이도 스윽스윽 비비고, 출장 가서는 스스로 처녀 개통한 사람이."
"으아아아악...!"
흑역사를 개봉하자 바로 격추되는 그녀. 내가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현실에서 먼저 나쁜 짓을 한 건 이예나다.
물론 방아쇠는 내가 당겼지만.
"...."
"...."
무거운 침묵이 우리 사이를 지배했다. 서로 찔리는 게 매우 많은 상태.
결국 이예나가 먼저 항복을 외쳤다.
"좋아, 그건 쌤쌤으로 치고 넘어가자.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되는 건데? 그 기술은 또 뭐고?"
"정확한 건 집에 가서 보여줄게요."
"...그래.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합의를 한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가로등을 지나고 방향을 몇 번 꺾자 보금자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1,2,3층은 불이 꺼져 있는데 4,5층만 빛나고 있는 매우 수상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준비하느라 바쁜 것 같네.'
솔직히 뭘 할지 예상 못 한다면 바보나 다름 없다. 딱 봐도 퇴사 기념 (섹스) 파티가 예정되어 있을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킨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유난히 느린 듯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렸다.
그리고 방문을 여는 순간.
-펑!
-파밧!
폭죽이 터졌다.
"축하해요!!"
"시간 진짜 빨리 지나네."
"백수가 된 걸 축하해...!"
거슬리는 말이 있었지만 바로 귓등으로 흘러 넘겼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게 눈앞에 있었으니까.
"와아..."
이예나도 입을 떡 벌린 채 감탄을 내뱉었다. 물론 나도 비슷한 상태였다.
아영이, 혜윤이, 희진이, 채아 누나, 서윤이, 세정이.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바니걸 복장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