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4화 > 574.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남자
"으응..."
귀여운 뒤척거림에 잠이 깼다. 눈을 뜨자 혜윤이의 얼굴이 턱 바로 아래에 있었다.
곧 끔뻑이는 갈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방금 일어난 것 같은데 이렇게나 예쁘다니.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네에. 오빠가 꼬옥 안아줘서 편하게 잘 잤어요. 진짜 한 번 안 깨고 푹."
"나도 혜윤이 가슴 덕분에 너무 푹신하게 잘 잤어."
"으응... 이렇게요?"
그녀가 내 팔을 잡아당기더니 가슴골 사이에 끼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런 걸 맛 볼 수 있다니.
말랑하고 따뜻한 감촉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보다 지금 몇 시지?"
"음... 7시 30분이요. 오빠 출근은 9시까지니까 아직 한참 남았어요."
"역시 회사 주변에서 머무니까 편하긴 하네. 늦게 나가도 괜찮고."
"그쵸? 종종 이렇게 해요."
"그건 내가 이 회사에 쭉 다닐 때 얘기지."
"아... 맞다. 인턴이었죠?"
혜윤이가 밝게 미소를 지으며 품으로 들어왔다. 가슴팍에 얼굴 비비기 시작하자 나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아래서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짜 귀여워 죽겠네.'
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그대로 어깨선으로 이동했다. 살짝 잔근육이 있는 매끄러운 피부.
살짝살짝 힘을 주며 누르자 그녀가 부르르 떨었다.
"간지러워요..."
"이렇게 예쁜 몸을 어떻게 가만히 둬."
"아이 참... 또 그런다."
혜윤이가 더욱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서로의 온기를 나눴다.
잠시 후, 여전히 팔짱을 낀 그녀가 나를 올려다봤다.
"근데 어제 그 사람은 뭐예요? 식당에서 봤던 핑크색 머리 여자요."
"혜윤이는 처음 보지? 내 직장 맞상사인데... 음, 조금 많이 나사가 빠진 변태라고 해야 할까... 뭐라 해야 할까?"
"나사 빠진 변태요?"
예상 외의 말에 혜윤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수많은 표현들을 생각해봤지만 이게 딱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어제 봤듯이 내가 섹스하는 걸 보겠다고 따라오기도 했고... 사실 저번에 한 번 따먹혔거든."
"따먹혔...? 에? 에!?"
따먹다가 아닌 따먹혔다. 명백한 수동태에 그녀가 화들짝 몸을 뒤로 했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는 배를 한 대 내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니, 그 사람이랑 했다는 건 둘째치고 오빠가 따먹혀?"
"저번에 출장 갔을 때 있잖아. 어쩌다 같이 술을 마시게 됐는데... 어휴,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변하는지 참."
"...아하, 저 사람도 오빠의 맛을 알아버렸군요."
"요약하자면 그렇게 되지?"
혜윤이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그나마 오빠의 인턴 생활이 한 달이라 다행이네요. 쭉 다녔으면 아주 그냥 회사 여자를 전부 따먹었을 기세 같았어요."
"에이, 설마.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막 하지는 않지."
"흥, 그래도 어젯밤에 제가 기선제압을 했으니 다행이네요. 그보다..."
혜윤이가 몸을 빙글 돌리더니 내 위로 올라왔다. 잠시 머리결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가슴팍에 두 손을 올렸다.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해요."
"따먹히는 것도 나쁘진 않지."
*
결국 2번이나 싼 뒤 출근을 했다. 고생했다며 혜윤이가 옷을 직접 입혀주는데 그것만큼 행복한 게 없었다.
'2일 동안 입은 거라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뭐... 오늘만 버텨야지.'
나는 카라 쪽을 흘끗 쳐다보며 사무실로 향했다. 부지런한 대리님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흠칫!
인사하기 무섭게 이예나가 몸을 떨었다. 나를 1초 동안 스윽 쳐다보더니 어색하게 손을 올렸다.
"네에... 좋은 아침."
"아침 안 먹었어요? 목소리에 힘이 없네."
"먹었는데... 하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렇게 대놓고 한숨을 쉬면 모른 척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가방을 내려놓으며 은근슬쩍 몸을 붙였다.
"어제 자위 몇 번 했어요?"
"꺄악!"
"아니. 소리지르지 마시고..."
"그... 그, 그런 소리를 듣고 어떻게 소리를 안 질러요...!"
"애널 섹스하는 걸 직접 보기도 했으면서... 참 이상한 데서 약하시네."
"뭐요?"
발끈하려던 그녀가 주변 눈치를 보더니 얌전해졌다. 이어 그러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같은 옷."
"하룻밤 묵었으니까요."
"냄새 나."
"죄송합니다."
"너무 죄송할 필요는 없고..."
그녀가 꼼지락거리며 몸을 돌렸다.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잔뜩 있는 얼굴이었지만 좀처럼 입은 열리지 않았다.
'딱 봐도 어제랑 관련이 있는 걸 텐데.'
그래도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참고 참고 도저히 못 참을 때까지 말이다.
적당히 눈치를 보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도 딱히 잡지는 않았고, 평소보다 조용한 아침 시간이 훌쩍 지났다.
-드르륵.
점심이 되기 무섭게 대리님이 의자를 뒤로 끌었다. 자연스럽게 나도 나갈 채비를 하며 그녀의 옆으로 붙었다.
"오늘은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신가요?"
"글쎄요... 막 땡기는 건 없네요."
"그럼 맛집 전문가인 제가 추천해도 될까요?"
"좋아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은근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대리님이라면 입맛에 맞을 거예요."
"...그거 무슨 뜻인가요?"
"별 뜻 없어요."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가 주먹을 들었다.
"자꾸 그렇게 기어오르면 아주 큰일날 줄 알아요."
"전 어차피 다음 주가 마지막이라서 그렇게 큰 타격을 없을 걸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참 빠르죠."
"빠르죠... 처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어제 왜 따라왔냐, 집에 가서 뭐 했냐 등등. 많은 것을 물어보려던 계획이 그대로 날아갔다.
특히나 저 외로움을 뿜어내고 있는 푸른 눈을 보면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러나 저러나 해도 정이 많이 들긴 했지.'
처음 입사한 날부터 주마등이 스쳐지나갔다. 똑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지 이예나도 조용히 허공을 응시했다.
그렇게 식당까지 아무 말 없이 가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찌뿌둥한 몸을 풀고 있자 그녀가 다가왔다.
"역시 우진 씨가 추천한 곳이라 맛있네요."
"예전에 줄이 길게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기억해뒀죠."
"그런 부분에선 은근 세심하네요."
"자랑은 아니지만 머리 좋다는 소리는 좀 듣습니다."
"미래대 공대인데 머리 좋은 게 당연하죠."
이예나가 콧웃음을 내뱉더니 팔을 위로 쭈욱 올렸다. 똑같이 스트레칭을 하는가 싶더니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다음엔 제가 아는 맛집이 있는데 가볼래요?"
"저야 대환영입니다."
"예약은...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쯤 할 건데 괜찮죠? 혹시 다른 일정 있으면 다른 시간대로 하고..."
금요일 저녁. 직장인 모두가 해방되는 자유의 날. 딱 그 날을 약속하는 걸 보면 대충 무슨 뜻인지 예상이 갔다.
"아뇨, 저는 한가해요."
"주변 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하루 정도는 사회 생활로 사용해도 괜찮아요."
"사회 생활은 무슨... 어쨌든 그럼 약속한 걸로 알고 있을게요?"
"넵. 기대하겠습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본성 자체는 변태여도 이럴 때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외모긴 했다.
그래서 더 꼴리는 걸지도 모르고.
"흐으응...흐응..."
간헐적으로 대리님이 콧노래를 불렀다. 발걸음도 한 층 가벼워져서는 지금이라면 간단한 농담 따먹기도 가능할 듯했다.
'그래도 안 하는 게 좋겠지. 딱히 캐물어서 얻을 것도 없고.'
저 변태가 집에 가서 뭘 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저 큰 엉덩이를 뒤로 내민 채로 딜도를 마구 쑤셔댔겠지.
보짓물도 질질 흘리면서.
군침이 절로 나오는 상상을 하고 있자 옆구리에 타격이 들어왔다.
"지금 무슨 생각해요? 표정이 아주 음흉한데."
"아마 대리님이 지금 예상하는 것과 똑같지 않을까요?"
"...뒤질래요?"
"아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흥. 됐어요."
했네. 했어.
*
시간은 흐르고 흘러 퇴근 시간이 됐다. 하루 중 가장 힘차게 1층으로 내려가자 앞쪽에서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다.
미묘하게 움직이는 속도도 느린 것 같고 말이다.
'불안한데...'
이런 경우 몇 번 겪어봤다. 그리고 그 중심에선 어김 없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입구 쪽에 시선을 주며 발걸음을 옮겼고, 역시나였다.
"아, 발견."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오늘은 또라뇨. 저는 오랜만에 들리는 건데."
아영이가 씨익 웃으며 다가왔다.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복 차림이었다.
등 뒤에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건 또 뭐야?"
"오늘 오빠랑 좋은 곳에 가기 위한 준비물이요."
"...너네 짰지?"
"네? 뭘요?"
"뭘 모르는 척이야. 다 알면서."
"흐응...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녀가 싱글거리며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내 촉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분명 뭔가 있는데...'
이틀 전은 김세정과 함께, 어제는 혜윤이와 함께. 근데 오늘은 아영이?
우연도 3번이면 필연이라 했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왜 그렇게 뚱한 표정이에요? 오늘 일 좀 열심히 했나 봐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좋은 곳이라는 게 어디야?"
"음... 그거 있잖아요. 그거. 일단 나가서 보여줄게요."
시선이 매우 따가웠기에 밖으로 도망쳐나왔다. 어느 정도 인파가 한산해지자 그녀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짜잔! 뭔지 알겠어요?"
"돗자리잖아."
"딩동댕. 그럼 과연 어디로 갈까요...?"
"설마, 한강?"
"역시 오빠라니까요. 그럼 바로 가볼까요?"
기다렸다는 듯 바로 앞에 택시가 도착했다. 그녀가 나를 먼저 안쪽으로 밀어 넣었고, 문이 쾅 닫혔다.
'아무래도 오늘도 집에 들어가긴 그른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