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3화 > 563. 아이돌과의 밀회
그날 저녁. 퇴근하기 10분 전 옆자리를 쓰윽 봤다.
타닥타닥타닥...
여전히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대리님이 있었다. 팔을 툭툭 치자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곧 뭔가 초췌한 듯한 얼굴의 이예나가 나를 돌아봤다.
"왜요?"
"오늘은 이만 쉬시는 게 어때요? 이제 10분도 안 남았는데."
"거의 다 끝나서요. 잠깐만요."
정말로 급한 일이 있는지 그녀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5분이 지나서야 의자가 다시 뒤로 젖혀졌다.
"다 끝났다... 맞다. 우진 씨, 저한테 뭐 할 말 있어요?"
"아니요. 그냥 너무 열심히 하셔서 궁금했을 뿐이에요. 도대체 뭘 하시길래 퇴근 직전까지 이러시나..."
"사실 오늘까지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제가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요. 아슬아슬 했지만 그래도 해결했으니 다행이에요."
"그렇군요."
그녀를 지켜본 건 2주가 전부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처음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예나가 아주 작게 힌트를 흘렸다.
"사실 낮에 집중을 좀 못한 것도 있고..."
"혹시 그거 때문인가요?"
"그게 뭔데요."
슬쩍 찔러본 말에 그녀가 도끼눈을 떴다.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회피했다.
"오늘 따라 자주 돌아다니시는 것 같아서요."
"상사한테 눈치 주는 부하 직원. 요즘 세상 아주 잘 돌아가네요."
"에이, 그런 뜻이 아니란 거 잘 아시잖아요."
이예나에게 의자를 붙였다. 순간 그녀가 흠칫하고 놀랐지만 개의치 않고 귓가에 입을 가까이 했다.
그녀한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혹시 아직도 정액 보관하고 계신가요?"
"으으으으... 진짜...!"
"그냥 흘렀을까봐 걱정돼서 물어본 거예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요!"
이예나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뒤로 했다. 아주 흉악했지만 나한텐 별 타격이 없었다.
'아니라고는 말 안 하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 의미를 눈치챘는지 대리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괜히 큼큼거리더니 나를 밀어냈다.
축객령에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곁눈질로 그녀의 옆모습을 보고 있자 의문점이 떠올랐다.
'근데 진짜 아직도 보관하고 있을까?'
그래도 꽤나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으니 처음보다는 많이 없어진 상태일 것이다. 볼일을 보다가 손실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몰래 먹으면서 자위를 했을 수도 있고.
이런저런 가능성은 상당히 많으니 말이다.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지만 꾹 참았다. 어차피 가르쳐주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나름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자 핸드폰이 울렸다.
'대리님인가?'
설마 보지 사진을 찍어 보내준 건 아니겠지? 설마설마 하며 확인해봤다.
-김세정 : 오늘 잠깐 볼래?
한창 바쁘신 슈퍼 아이돌이었다. 조금 김이 빠졌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바로 답장을 보냈다.
-박우진 : 나는 괜찮은데 넌 스케줄 다 끝났어?
-김세정 : 응, 오늘은 더 이상 없어.
-박우진 : 그럼 어디서 볼까?
-김세정 : 너네 회사 앞이야. 적당히 검은색 suv 찾아 와. 전에 한 번 본 적 있지?
이미 대기 중이었구나. 이건 뭐 안 된다고 했었어도 억지로 끌고 갈 기세였네.
엄청난 행동력에 감탄하고 있자 진동이 또 울렸다.
셀카였다.
-김세정 : 빨리와~
화면 가득히 채운 그녀의 얼굴. 밝게 눈웃음을 짓고 있어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천천히 감상을 하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연습 끝나고 바로 왔나 보네.'
화장기가 가득한 얼굴도 얼굴이지만 입고 있는 옷도 장난이 아니었다. 주황색 머리카락과 아주 잘 어울리는 블랙 계열 드레스.
프릴까지 달려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나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한 뒤 핸드폰을 구석으로 가져갔다.
누가 볼 새라 화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사진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흐음... 김세정이네요?"
갑자기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가림판 너머로 대리님이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무슨 공포 영화에나 나올법한 장면.
스윽 전원 버튼을 누른 뒤 아무 일도 없는 척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핸드폰을 훔쳐보는 건 아니지 않나요?"
"훔쳐보는 게 아니라 어쩌다 한 번 본 거예요. 그것도 옆에서 수상한 웃음 소리가 나오길래 아주 잠깐."
"보긴 봤네요."
"그 점은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냥 해본 소리예요."
딱히 야한 사진도 아니니 숨길 이유는 없다. 우리의 관계는 대리님도 잘 알고 있으니 변명할 것도 없고.
나는 큰 호기심을 보이는 그녀에게 슬쩍 화면을 돌렸다.
인터넷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는 따끈따끈한 셀카. 자랑하듯 보이자 이예나가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아이돌은 아이돌이네요... 그냥 얼굴에서 빛이 나네. 피부도 엄청 하얗고..."
"그러게요."
"게다가 뭔가 사진보단 실물이 훨씬 더 예쁜 것 같지 않아요? 저번에 직접 만났을 때는 엄청났던데... 어쨌든 뭐, 부럽네요. 이런 친구도 다 있고."
그녀가 입맛을 다시더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엉덩이를 토닥여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지만 참아냈다.
대신 진심이 담긴 립서비스를 건넸다.
"대리님도 만만치 않게 예뻐요."
"뭐...뭐뭐뭐요?"
"그냥 그렇다고요."
"저 잘 못 들었는데..."
잘 들었으면서 무슨. 초롱초롱한 눈빛을 억지로 무시하며 핸드폰을 봤다. 원래 이런 건 다시 말하면 안 되는 게 국룰.
결국 이예나가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본 얼굴에는 입꼬리가 하늘까지 올라가 있었다.
'이런 게 사회생활이지.'
뿌듯한 나 자신을 칭찬하며 마무리 정리를 시작했다.
*
잠시 후, 회사 밖으로 빠져나오자 익숙한 suv 한 대가 보였다.
찾긴 찾았는데 이걸 어떻게 들어가야 할까? 돌아다니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 자연스럽게 들어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일단 지나가는 척 간을 보자 갑자기 문이 드르륵 열렸다.
"빨리."
검은 손이 튀어나오더니 내 팔을 잡아끌었다. 빨려들어감과 동시에 누군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오랜만. 잘 지냈어?"
"나야 언제나 잘 지내지. 너는 회사 생활 좀 할만해?"
"나는 매일이 똑같아.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무한 반복."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눈앞의 사람을 바라봤다.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한 김세정이 있었다.
똑같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진짜 예쁘긴 하네.'
풀메이크업 상태인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다 못해 눈부실 지경이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도 넋이 나갈 정도인데 제대로 꾸미니 차원이 달랐다.
이게 진짜 준비만땅인 상태구나.
잠시 멍을 때리고 있자 김세정이 씨익 웃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역시 아이돌은 아이돌이구나 하는 생각."
"그럼, 보통 아이돌도 아니고 탑티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1대1 대화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일 걸?"
"그건 좀 아닌듯."
"뒤질래?"
그녀가 주먹을 들자손사래를 치며 옆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아무도 없는 차 안은 좋은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한껏 들이마신 뒤 물었다.
"근데 그건 무대 의상이야?"
"응. 이번주 일요일날 입을 복장이야. 어때? 예쁘지?"
"잘 어울리네."
"신경 좀 많이 썼지. 내 인생 최대의 콘서트가 될 테니까."
"인생 최대?"
온갖 무대를 다 겪어본 그녀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엄청 대단한 듯했다.
"뭐, 안무도 노래도 준비 많이 했고... 무엇보다 나중에 깜짝 발표도 할 예정이거든."
"뭔데?"
"비밀."
"치사하네."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참아. 그때 되면 다 알 수 있을 테니까."
김세정이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들었다. 양옆으로 흔들리는 손가락을 보며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과연 나한테까지 비밀인 거면 어떤 걸까?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어차피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고,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지금이다.
"근데 나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거냐? 들키면 어디 끌려가서 죽도록 맞을 것 같은데."
"걱정 마. 매니저한테는 밥먹고 오라고 해서 아마 1시간 뒤쯤에 올 거야. 블랙 박스도 다 꺼놔서 안전하고."
"매니저 그 덩치 큰 아저씨 맞지? 키 190 넘을 것 같은 사람."
"응. 매니저 겸 보디가드야."
"싸우면 3초 안에 질 것 같은 피지컬이던데."
내 말에 김세정이 크게 소리내서 웃었다.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박장대소를 이었다.
곧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슬쩍 닦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내가 물어봤는데 무술도 따로 배웠었데. 아마 너 같은 일반인은 죽어도 못 이길 걸?"
"나 이만 집에 가도 되지? 갑자기 피곤해져서 말이야..."
"에이, 가긴 어딜 가. 나랑 더 얘기해."
그녀가 엉덩이를 바짝 내게 붙였다. 옆면이 모두 닿을 정도가 되자 갑작스레 팔짱을 꼈다.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을 느끼기도 전, 이번엔 머리가 어깨에 닿았다.
정수리에서 좋은 냄새가 직접적으로 풍겨왔다.
"어쨌든 오늘은 프리한 거 맞지?"
"완전 자유. 약속 아무것도 없어."
"다행이네. 혹시 바쁘면 어쩌나 했어."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조용히 온기를 느끼고 있자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였다.
"그거 이번 콘서트 노래야?"
"으응, 맞아."
"듣기 좋네."
"너한테만 먼저 들려주는 거라고."
"가문의 영광이네."
"이제 와서? 아부는 안 통해."
말은 그렇게 해도 목소리의 톤은 더 올라갔다. 그렇게 조용한 차 안에서의 밀회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