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8화 > 558. 진실에 아주 조금 도달한 대리님
일단 인사부터 받아주자. 당장의 의문은 접어둔 채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우진 씨와 같이 일하고 있는 이예나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아, 네... 근데 우진 오빠의 상사라고 하셨나요?"
"네네, 한 달 동안 교육 및 개발을 담당하게 되어서 지금 전담 마크 중이랍니다."
"으음... 그렇군요."
한희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동자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특히 얼굴, 가슴, 골반, 다리에서 오래 머물렀다.
스캔이 끝난 뒤 눈초리가 살짝 매서워졌다.
'견제하는 건가?'
역시 저 애가 맞는 것 같다. 아무런 평범한 관계라면 저런 경계심을 보낼 리 없으니까.
그래도 티를 내지 않고 똑같이 한희진을 훑어봤다.
금발, 푸른 눈, 자신보다는 작지만 적당히 큰 가슴. 언니를 닮아서인지 얼굴과 몸매 역시 깡패였다.
강적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궁금증이 무럭무럭 커졌다.
'저번에 박우진이 그랬잖아. 집에 가니까 한채아가 메이드 코스프레를 해줬다고. 그리고 주말 내내 미친 듯이 섹스를 했다고...'
그러면 한희진은 뭐가 되는 거지? 분명 전여친일 거라 예상했는데 친동생이라면 말이 완전 달라진다.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천지가 뒤바뀌는 수준이다.
잠깐 멍을 때리며 그날 꿨던 꿈을 떠올렸다.
-그, 그만! 하앙! 왜 자꾸 때리는 건데?
-엉덩이 맞는 거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척 하기는.
-아니 진...꺄흡! 나 그런 적 없는데!
-조용히 해. 이 마조히스트야.
매우 선명한 그때의 기억. 아직도 엉덩이가 얼얼한 기분이다. 괜히 문지르고 싶은 걸 참으며 한희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차가운 도시의 미녀라는 칭호가 딱 어울리는 외모의 소유자.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마조히스트라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위에서 내려다 보는 여왕님 포지션이 맞아 보였다.
'마조히스트... 마조히스트라...'
그때 한채아가 상념을 깼다.
"혹시 예나님만 괜찮으시다면 같이 쇼핑하지 않으실래요?"
"아, 네? 그래도 될까요? 자매분들끼리 놀러오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저희 옷 골라주는 것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겸사겸사 우진이의 회사 모험담도 듣고 싶어서요."
그럼 그렇지. 그런 목적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박우진의 사생활을 알아내고 싶은 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같이 다닐까요?"
*
"어우... 우진 씨 얼마나 일을 똑 부러지게 잘 하는지 몰라요. 분명 처음일 텐데 시키는 것마다 척척 해내고 아주 대단한 친구예요."
"어머 그래요? 맨~날 자기 자랑을 그렇게 해대는데 전부 사실이었나 보네요?"
"그럼요. 제가 회사 생활 5년 하면서 본 인턴 중 가장 일을 잘해요."
"와... 대단하네요!"
화기애애한 토크. 일단 칭찬을 하면서 호감을 이끌어내는 중이다. 물론 일을 잘한다는 건 진짜지만.
어느 정도 궁금증을 풀어줬으니 이번엔 이쪽 차례다.
"근데 종종 우진 씨를 데리러 오시던데 집이 가까우신가 봐요?"
"가깝죠. 그리고 우진이가 차가 없다 보니까 퇴근 후에 힘들 것 아니예요? 그래서 가끔 맞이하러 나가는 거죠."
"채아 씨는 참 다정하시네요."
"에이,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냥 저도 심심하니까 그런 거지."
거짓말. 분명 호텔이나 집에 가서 섹스할 목적으로 데리러 온 거면서.
이예나는 화사한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한채아를 찌릿 노려봤다.
예쁘긴 엄청 예쁜데 가슴도 미친 듯이 크다. 남자들의 이상형이 있다면 저런 사람이 아닐까 싶은 정도.
'코스프레를 해주면 안 넘어갈 수가 없긴 하다.'
그 어떤 발기부전 약보다도 효능이 좋을 듯한 몸매. 특히 저 가슴을 보고 있자 알 수 없는 패배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나도 작은 건 아닌데..."
"네?"
"아, 아니에요. 그보다 저기에 좀 들려봐도 될까요? 괜찮아 보이는 게 있어서요."
"네, 가요."
자매들과 함께 매장에 들어갔다. 적당히 옷을 고르고 있자 한채아가 저 멀리 떨어졌다.
마음에 드는 걸 찾은 듯 열심히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인가?'
3발자국 떨어진 한희진을 보며 슬쩍 말을 건네봤다.
"언니랑 되게 친해보이는데 이렇게 쇼핑 같은 거 자주 오니?"
"네, 집에 있기 심심하면 백화점 같은데 자주 오긴 해요."
"그렇구나. 그럼 혹시 우진 씨랑도 잘 아는 사이니?"
"잘 알죠. 저희 매장에서 알바 자주 뛰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한채아가 사업을 한다고 하긴 했지. 단서의 끈을 천천히 잡아당기며 다음 질문을 이었다.
"한 얼마 정도?"
"음... 방학 때부터 했으니까 대충 5~6개월? 정도 됐네요."
"6개월이면 많이 친하겠다."
"많이 친한 편이죠."
한희진이 엣헴하고 어깨를 폈다. 그 모습을 보니 사실인 듯했다.
'섹스까지 했는데 애초에 안 친할 수가 없는 구조긴 하지.'
그렇다면 천천히 호감을 쌓다가 언니랑 동생을 차례대로 따먹은 게 분명하다.
과연 둘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박우진이 몰래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자매덮밥이라는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
궁금한 점은 한가득이었지만 첫 만남부터 더한 걸 묻기는 좀 그랬다. 그래도 한희진이라는 애의 얼굴과 관계를 확인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나왔는데 이 정도면 상당히 큰 수확이다.
'어쩌면 약점을 잡은 것일 수도 있어. 만약 이걸 빌미로 섹스 동영상을 지워달라 딜을 한다면?'
겨우 2주 남은 인턴 생활과 현실에서의 관계 파탄. 중요도를 따져봐도 후자가 압승이었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잡으며 큼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혹시 알바뛸 때는 어땠어?"
"처음 딱 왔을 때는 엄청 음흉한 시선으로 저랑 언니를 훑어봤어요."
"어... 그리고?"
"이상한 짓을 많이 하긴 했는데... 뭐, 일을 잘해서 그냥 넘어갔다고 해야 할까요? 이제 그것도 다 추억이에요."
"이상한 짓? 추억?"
들으면 들을 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한희진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둘만의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거기까지 물을 수는 없으니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쇼핑 내내 고민에 잠겼다.
*
"월요일 좋아... 월요일 좋아..."
어디서 들어본 노래를 힘없이 흥얼거리며 회사에 출근을 했다. 고작 2주 다닌 걸로도 지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걸 몇 십년 더 반복해야 한다니.
직장인들에 대한 존경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우진 씨, 좋은 아침이에요."
"아, 네. 좋은 아침입니다."
심지어는 이 옆자리의 초변태 대리님한테도 말이다. 그보다 이 사람은 뭐가 그리 좋은지 아침부터 싱글벙글이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그녀가 쪽지 하나를 건네줬다.
[이따 아침 조회 끝나고 복도로 나와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결투 신청인가? 옆을 흘끗 봤지만 이예나는 어느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무런 질문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였다.
'좀 있으면 알게 되겠지.'
나도 금방 관심을 끄고 컴퓨터를 켰다. 그렇게 약 30분 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자 이예나가 스르륵 다가왔다.
매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는 검지를 들었다.
"혹시 제가 왜 불렀는지 알고 있어요?"
"잘 모르겠는데요."
"흐응... 제가 어제 백화점에 갔거든요. 거기서 아주 재밌는 걸 발견했어요. 그게 뭐게요?"
적어도 공적인 얘기는 아닌가 보다. 하지만 내가 신도 아니고 알 리가 있겠는가.
고개를 양옆으로 젓자 이예나가 씨익 웃었다.
"거기서 자매를 만났어요."
"자매요? 채아 누나랑 희진이 말씀이신가요?"
"딩동댕!"
"...어쨌든 그래서요? 아는 체는 하셨나요?"
"인사뿐만 아니라 같이 쇼핑도 하고 밥을 먹기도 했어요.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죠."
그녀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한 3번 왕복을 했을까,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진 씨, 저번에 채아라는 분과 메이드 코스프레 섹스했다고 했잖아요?"
"그랬죠."
"근데 동생과도 몰래 한 모양이에요? 그것도 아주 과격한 플레이를 곁들이면서 말이에요."
이예나가 엄청난 비밀을 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양쪽 뇌가 재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 지금 설마 나 협박하려는 건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이어진 그녀의 말은 역시나였다.
"만약 채아 누나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요... 엄~청 아끼는 친동생이 같은 남자한테 따먹혔다는 걸 알게 된다면... 흐흣... 전 상상하기도 무섭네요."
그녀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지만 나한테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바로 앞에 있는 이 악동을 빼고는 전부 다 아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진실을 알려주기 보다는 깜빡 속아주기로 했다.
"그래서요? 저한테 대체 뭘 원하시길래 그런 걸 말씀하시는 거죠?"
"흐응... 글쎄요."
"그럼 딱 딜을 하죠. 섹스 동영상을 지울 테니 방금 그건 비밀로 하는 건 어때요?"
"제가 왜요? 어차피 그건 2주 뒤면 절로 지워지는 걸로 약속을 했는데 뭐하러요?"
이건 조금 예상외다. 분명 지워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조금 뜸을 들이자 이예나가 내 볼을 쿡 찔렀다.
"제가 이 동영상을 채아 씨한테 보내면 일만 더 커지는 거 알죠? 양다리도 큰일인데 직장 상사까지 따먹은 3다리라니..."
"원하시는 게 뭐죠?"
"뭐 별 건 없고, 남은 2주 동안 제 말을 아주 잘 들어주셔야겠어요. 조금이라도 반항 했다간... 알죠?"
이것도 좀 재밌을 것 같네. 두근거리는 심장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대리님이 슬쩍 손을 아래로 내렸다. 내 바지춤을 가리키더니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자지 꺼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