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1화 > 541. 보고서에 덮친 건 왜 안 써요?
출장 뒤 오후, 이예나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책상에 머리를 박고는 최대한 내게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가림막 건너에서는 타닥이는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만 전해졌다.
'분명 보고서 쓰는 법 가르쳐 주겠다고 한 것 같은데...'
아마 알고서도 모른 척하고 있는 거겠지. 심신미약 상태일 텐데 그냥 놔둘까? 아니면 조금 놀려 먹을까?
당연히 후자다.
나는 몸을 쭈욱 뒤로 뺀 뒤 대리님의 책상을 쳐다봤다. 쥐구멍에 숨어있는 듯한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대리님."
"흐핫! 뭐뭐뭐...뭐요?"
"왜 그렇게 놀라요? 혹시 몰래 이상한 짓이라도 하고 있었나?"
"이상한 짓은 무슨... 그보다 무슨 일이에요?"
"저 아까 보고서 쓰는 법 가르쳐 주신다고 했잖아요. 근데 아무 말씀도 없으시길래 까먹은 건 아닌가 싶어서요."
"아...! 아... 맞다, 그랬지... 근데 제가 이미 거의 다 써버려서..."
옆머리를 비비 꼬며 시선을 회피하는 그녀.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니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물러날 내가 아니다.
"지금까지 쓰신 것만 보여줘도 괜찮아요."
"그...그런가요? 그럼 제가 완성되고 이메일로 보내드릴..."
"지금 보고 싶은데요."
핸드폰을 꺼내 흔들었다. 순간 이예나가 윽 하고 작은 침음을 흘렸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걸 알아챈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얼른 다가가자 이예나가 공간을 만들어줬다.
'이거 무슨 최면 어플도 아니고 태도가 180도 달라지네.'
피식 웃으며 상체를 숙였다. 거의 얼굴이 닿도록 가까이 붙자 그녀의 몸이 흠칫 떨렸다.
자기가 먼저 스킨쉽을 할 때는 자신만만하게 하더니 당하는 거에는 내성이 없는 모양이지?
생각해보면 어젯밤에도 그랬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야한 말을 하며 공격적으로 기승위를 한 것과, 일어나서 뭐라 하니 소극적으로 변한 게 증거였다.
나는 좀 더 몸을 들이밀며 화면을 가리켰다.
"처음부터 가르쳐 주실 거죠?"
"아...네."
대리님이 의자를 옆으로 끌며 마우스 휠을 올렸다. 그렇게 도망가봤자 얼마나 가겠어.
곧바로 따라 붙었다.
"...조금 떨어져 주면 안 될까요?"
"제가 눈이 안 좋아서 이렇게 해야 잘 보이네요."
"그거랑 상관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핸드폰 카메라로 확대해서 봐야겠다."
"아니아니아니아니! 괜찮아요. 여기가 아주 명당이니까 천천히 살펴보세요."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하면 얼마나 편해. 곧 설명이 시작됐다.
"흠흠, 사실 보시는 것처럼 별 건 없어요. 이름, 직위, 지역, 출장 목적 등등 칸에 맞게 적당히 쓰기만 하면 돼요."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건 없네요?"
"그렇죠. 여기 출장 내용을 쓰는 것도 뭐, 시간대 별로 정리해서 쓱쓱 쓰기만 하면 끝."
"아... 근데 아침 10시에 주차장에서 가슴을 만지게 했다라는 내용은 없네요?"
"푸흡...!"
커피를 마시던 이예나가 갑자기 입을 틀어 막았다. 몇 번 사례를 내뱉고는 눈을 부라렸다.
"조, 조용히 해요...!"
"대리님 목소리가 더 큰 것 같은데요."
어깨를 으쓱이자 표정이 더 무서워졌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더니 평소대로 돌아왔다.
"당연히 업무에 관련된 내용만 써야죠. 그런 사적인 건 딱히 안 써도 돼요."
"아쉽네요. 야밤의 호텔에서 대리님이 1살 어린 인턴을 따먹으며 몸보신을 했다 라는 걸 쓰고 싶었는데."
"...닥쳐요."
"어라, 핸드폰 잠금이 풀렸네? 갑자기 왜 이러지?"
"아아... 진짜...!"
이예나가 주먹을 꽉 쥐더니 나를 향해 휙 머리를 돌렸다. 입술을 꾸욱 3초 동안 깨물더니 말을 꺼냈다.
"원하는 게 뭐예요? 지금 마려우면 한 발 빼드려요?"
"아니요. 딱히 그런 기분은 아니고, 그냥 대리님 반응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놀리게 되네요."
"뭐, 뭐요? 귀엽다니..."
칭찬을 해주니 바로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진지함을 유지하고는 싶은데 기분은 좋은 저 표정.
진짜 귀엽네.
더 보고 싶었지만 이런 건 여기서 끊어야 한다. 애매하게 여지를 남겨야 아쉬워할 테니까.
나는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던 얼굴을 쑤욱 뺐다.
"친절하게 설명해주신 덕분에 다 익힌 것 같네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아...아, 네. 역시 배우는 게 빠르네요."
"감사합니다."
무정하게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뒤에선 아주 작게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의자가 다시 당겨진 건 10초 뒤였다.
*
"하아... 드디어 거의 다 왔네."
나는 보이기 시작한 집을 보며 걷는 속도를 높였다. 운전을 오래 한 탓에 다리와 어깨가 뻐근했지만 힘이 났다.
물론 밤에 몸보신을 한 터라 상태 자체는 괜찮았다.
'...또 생각해버렸네.'
이예나의 모습이 너무 압도적이여서 그럴까, 이젠 핑크색만 봐도 발기가 될 지경이었다.
물론 집에 가자마자 인큐버스 모드로 따먹어도 되지만 당분간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최소 며칠 간은 푹 묵혀둬야 더 맛있어질 테니까. 발정나다 못해 참을 수 없는 수준이 된 대리님을 보기 위한 인내 과정이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머릿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웠다.
동시에 빛나는 금발이 눈앞에 보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핸드폰과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딱 눈이 마주쳤다.
날카로웠던 눈매가 스륵 녹았고, 무표정했던 얼굴에는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얼른 달려갔다.
"아, 이제야 온 거야? 기다렸잖아."
"너 오늘 편의점 출근하는 날 아니었어?"
"땡땡이는 내 전문이잖아. 그보다 가방 무겁지? 이리 줘."
한희진이 반강제적으로 가방을 뺏어갔다. 잠깐 휘청였지만 금방 어깨에 메었다.
"돌이라도 넣었나... 뭐 이리 무거워?"
"노트북이랑 이것저것 많이 들어 있어서 그런 거지. 근데 요즘 운동한다면서 그것도 무거워하면 어쩌냐?"
"예상밖이라 그런 거지. 그리고 내가 살 빼려고 뛰는 거지, 딱히 근력을 키우려고 한 건 아니거든."
"약골."
"아니거든."
잠시 뚱한 얼굴을 한 그녀가 바싹 옆에 붙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더니 얘기를 꺼냈다.
"요즘 회사는 어때?"
"평소랑 똑같지 뭐. 애초에 인턴한테는 잡다한 일만 시키지, 중요한 건 안 맡겨."
"꿀 빤다는 거네."
"솔직히 출퇴근이 가장 힘든 것 같기도."
"꿀 빠는 거 맞네."
"그럼 너는 요즘 어때? 편의점 안 간지 꽤 된 것 같은데."
내 말에 한희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누가 봐도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변화.
조용히 기다리자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번호 따는 사람이 많아져서 귀찮아 죽겠어. 그냥 물건이나 쳐사지, 짜증나게..."
"예전에도 많다고 하지 않았어?"
"그것보다 더 늘었어. 내가 예쁜 건 알겠는데 작작 좀 했으면 좋겠어."
"결국 자랑이었네."
"오빠가 직접 안 겪어봐서 그런 거야.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러니 이젠 ptsd가 올 정도라고."
말투에서 정말 짜증이 묻어나왔다.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힘을 주자 한희진이 더욱 밀착했다.
"아예 카운터 앞에다 '번호 달라 하지 마세요.' 라고 적어두지 그래?"
"그러면 좀 줄려나? 좋은 방법인데?"
"아니, 진지하게 받진 말고..."
나는 엉덩이를 토닥여주며 감정을 달래주었다. 그러자 한희진이 금방 기분 좋은 목소리를 흘리며 팔에 힘을 줬다.
"그럼 채아 누나도 마찬가지겠네?"
"언니는 더 하지. 낮에는 그나마 사람이 없어서 괜찮은데, 저녁에는 오빠가 알바 안 오고 나서부터 늘었어."
"얼마나?"
"음...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데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거, 뭔지 알지?"
"살벌하네."
"그렇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발자국 더 나아가다 문뜩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따라 얌전하네?'
고양이가 아니라 마치 강아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원래라면 틱틱대야 정상인데 신기하다.
물끄러미 옆을 쳐다보자 그녀도 똑같이 고개를 올렸다.
잠깐 눈을 마주치더니 다시 내렸다.
"그러니까 빨리 편의점으로 돌아오라고... 심심하니까."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 나도 모르게 콧바람을 내뱉자 그녀의 볼이 빨개졌다.
"그래서 오늘 땡땡이 치고 나 만나러 온 거야?"
"아니, 근 2주 동안 나오지도 않았잖아. 그나마 만난 건 저번 주말이었고."
"확실히 그러긴 했지. 자, 일단 가자."
더 빨라진 걸음으로 함께 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방으로 들어온 한희진이 침대에 털썩 앉았다.
꽁꽁 싸매고 있던 자켓을 벗기 시작했다.
'오...'
확실히 더 예뻐진 느낌이 나긴 한다.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확실히 들어간 몸매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옷을 입었는데도 이렇게나 야하다니.
열심히 감상을 하고 있자 그녀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에 드나 보네? 오늘 좀 쌕끈하게 입었는데 정답이었나 봐."
"너는 어디 가서 번호 많이 따인다고 불평하지 마라."
"흐응... 그래?"
희진이가 보란 듯 팔을 높이 들었다. 옷에 맞게 딱 달라붙어 있던 가슴이 위로 출렁였다.
퇴근하자마자 이렇게 야한 걸 보여주면 참을 수 없다.
천천히 다가가자 그녀의 얼굴이 기대에 물들기 시작했다. 기세를 이어 다리 사이에 무릎을 올렸다.
자연스럽게 한희진이 몸을 뒤로 눕혔다.
투둑...
침대의 반동으로 인해 가방이 넘어졌다. 저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공간을 만들기 위해 더 밀어내자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보드마카?'
넣기 귀찮아 대충 옆에 쑤셔넣었던 거였다. 동시에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낙서 좀 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