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8화 > 538. 넌, 오늘 나한테 따먹히는 거야
-덜컥.
조용히 닫힌 현관문. 나는 꾸물거리며 신발을 벗는 그녀를 응시했다.
헤어지기 전이랑 똑같은 옷이었다.
'나는 막 씻고 나왔는데 그동안 뭐 했던 거지?'
모습을 보니 샤워는 커녕 손발만 대충 닦은 듯했다. 시간은 나름 충분했던 것 같은데.
궁금증을 뒤로 하고 일단 그녀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방을 흘끗흘끗 보던 그녀가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방이 상당히 깨끗하네요?"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니 뭐, 옷이 막 내팽개쳐져 있거나 침대가 엉망진창이거나 그럴 줄 알았죠. 보통 남자들은 그러니까요."
"보통? 혹시 남자 방에 가본 적 있으세요?"
"...아뇨."
급소심해진 이예나가 눈동자를 빙글 돌렸다. 딴 곳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내 가슴팍에 시선을 줬다.
"방금 제 가슴 봤죠?"
"안 봤거든요?"
"아까 차에서는 몰래 훔쳐본다고 뭐라 하시더니 내로남불이 심하네요."
"그때랑 지금은 다르잖아요...! 차에서는 제 가슴을 실컷 만진 뒤에 그걸로 딸치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음흉한 눈으로 바라본 거면서!"
그런가? 나름 일리가 있는 말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나를 휙 지나쳤다. 뒤에서 본 귓불은 빨개져 있었다.
"뭐... 어쨌든 브리핑부터 할게요."
"넵."
"일단 내일 아침 수리를 맡기면 1~2시간 내로 완료가 될 거예요. 그러면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회사로 출발하는 게 목표예요."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물론 이걸로 끝은 아니죠. 출근하면 보고서 작성하고 뒷정리하고 그동안 일 터진 거 없나 확인도 해야 하고..."
이예나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앞에 딱 섰다.
그림자가 드리우자 퍼득 고개를 들었다.
"알아... 들었죠?"
"네. 그보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좀 놀지 않으실래요?"
"...뭐하고요?"
"마침 티비도 큰데 같이 영화나 봐요. 아까 안내문 읽어보니까 낫플릭스 같은 것들 다 공짜던데."
이예나가 검은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를 한 번, 침대를 한 번.
아마 연인처럼 어깨를 기대고 누워있는 걸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사람이 그걸 거절할 리 없다.
"장르는요?"
"공포?"
"저 공포영화 못 봐요."
"그럼 좀비."
"잔인한 장면이 너무 많아서 싫어요."
눈살을 찌푸리는 걸 보니 정말로 싫은가 보다. 꺄악 하면서 품에 안기는 상황을 노리려 했는데 안 되겠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른 장르를 떠올려봤다.
막상 생각하려고 하니 생각나지 않는다.
"이따 같이 고르기로 하기로 하고, 일단 보긴 볼 거죠?"
"네, 뭐 할 것도 없는데 그러죠."
이예나가 선선히 허락을 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가운데까지 들어왔다.
어찌해야 할지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대리님."
"네."
"안 씻었죠?"
"엑...!"
그녀가 뒷걸음질을 치며 기겁했다.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슬금슬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냄새나요?"
"냄새나는 건 아닌데 남의 침대에 안 씻고 올라오는 건 실례잖아요."
"누, 누가 올라간데요?"
그녀가 몸을 돌리더니 팔을 들었다. 어깨에 코를 대더니 몇 번을 연신 킁킁거렸다.
흘러가듯 툭 던졌다.
"여기서 씻어도 돼요."
"미, 미쳤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예나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상상했는지 귓불이 머리카락 색만큼 진해졌다.
이렇게나 반응이 좋으면 계속 놀리고 싶어진다.
나는 능청스럽게 손짓을 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안 쓴 수건도 있고, 여분 가운도 있고, 화장실 안쪽은 안 보이는데 뭐가 문제예요?"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죠?"
"제가 아무리 변태라도 훔쳐보지는 않으니까 걱정 마요."
"뭔..."
어이가 없는지 헛바람을 내뱉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됐네요."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나를 흘겨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20분이 흘렀을까. 슬슬 지루해질 타이밍에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수증기를 모락모락 풍기는 이예나가 있었다. 나와 똑같은 가운을 걸친 채 말이다.
'조금만 더 고개를 들면 보일 것 같은데.'
v자 틈으로 은은하게 드러난 뽀얀 속살. 모습을 보니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뜻은 저걸 벗기면 알몸이라는 거다.
자꾸 내려가는 눈동자를 잡으며 침묵을 깼다.
"생각보다 늦었네요?"
"흥... 여자는 원래 오래 걸리거든요. 우진 씨라면 잘 알 텐데요"
"저는 뭐 까먹고 잠드신 줄 알았죠."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가 옆으로 턱짓을 했다. 얼른 비키라는 뜻.
곧 좋은 향을 뿜어내는 이예나가 들어오게 되었다.
"...."
"...."
막 샤워를 마친 남녀가 한 방에 같이 있다. 그것도 야심한 밤, 호텔 안에서.
건장한 성인이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서로 그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미묘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대리님 없는 동안 재밌는 걸 골라놨어요. 자, 여기서 같이 봐요."
"침대에서?"
"올라오려고 씻은 거잖아요."
"그냥 찜찜해서 씻고 온 거거든요. 착각도 적당히 해야지."
톡 쏘아낸 대리님이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완전히 올라왔다.
역시 기대하고 있었구만. 피식 웃으며 그녀의 옆에 붙었다.
"좀 떨어져요... 이렇게 붙을 필요는 없잖아요."
"침대가 좁은 걸 탓하세요."
"그렇게 좁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이예나의 말을 무시하며 티비를 켰다. 미리 찾아놨던 영화를 틀고 형광등을 하나 껐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천천히 영화관처럼 만들기 시작했다.
툭...투둑....
곧 은은하게 빛나는 무드등을 빼고는 빛나는 건 없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둠.
상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게 됐지만 덕분에 다른 감각이 증폭됐다.
"새액...새액..."
예를 들면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나.
움찔...움찔...
어깨가 떨리는 걸 말이다.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흥분돼 미칠 것 같다. 단순히 같이 있는 것뿐인데 왜 이러는 걸까?
벌써부터 자지가 날뛰었지만 필사적으로 가라앉혔다.
그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있던 이예나가 몸을 일으켰다. 어딜가나 싶더니 냉장고였다.
"목 말라서요."
"여기 호텔이라 냉장고 안에 있는 건 전부 유료인데요. 모텔과는 달라요."
"모텔에 있는 음료는 공짜다... 덕분에 상식이 늘었네요. 근데 괜찮아요. 이게 비싸봤자 얼마나 비싸겠어요?"
"무시하다간 요금 폭탄 맞을 걸요?"
"저 돈 은근 괜찮게 버니까 걱정 마세요."
대기업 5년차 대리이긴 했지. 잠깐 까먹고 있었다. 잔말 않고 가만히 있자 이예나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
물이나 음료수에선 볼 수 없는 19세 문구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거 술 아닌가요?"
"마실 게 이것밖에 없는 게 뭐 어떡해요."
"아니, 내일 운전..."
뭐라 할 새도 없이 한 모금 들이키는 그녀. 한 번 더 쪼르르 따르더니 내게 내밀었다.
"설마 직장 상사가 주는 걸 거절하지는 않겠죠?"
"요즘은 이런 부조리 사라진 걸로 알고 있는데요."
"회사 밖에선 안 통해요. 빨리 마셔요. 팔 아프니까."
그러면서 잔을 흔들었다. 아무리 거절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기세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든 뒤 입안에 털어 넣었다.
쓴맛이 가득했다.
"...이거 도수 몇이에요?"
"몇이더라... 30이었던가."
"그걸 안주 없이 쌩으로 마신다고요?"
"그럼 나가서 뭐라도 사올래요? 기다릴게요."
"...."
이걸 진짜로 나가면 바보 멍청이나 다름없다. 나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 뒤 다시 잔을 채웠다.
이예나에게 내밀었다.
"설마 부하 직원이 주는 잔을 거절하지는 않겠죠?"
"참나... 미리 말하는 건데 저 술 쌔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어디 누가 이기는지 봅시다."
그렇게 영화가 틀어져 있는 건 완전히 무시한 채 술파티가 벌어졌다. 끝난 건 병의 1/3이 남았을 때였다.
"포기인가요오...?"
"예, 포기입니다."
"야호...! 이겼따아... 딸꾹!"
물론 나는 아직 버틸만 했지만 문제는 저 사람이었다.혀가 꼬여 발음이 뭉개졌는데 어떻게 더 할 수가 있을까?
먼저 항복 선언을 하자 대리님이 몸을 휘청거렸다.
"흐으응..."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빠르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가운도 약간 흐트러져서는 가슴골이 반 정도 드러나 있었다.
'위치 좋네.'
눈동자를 조금만 내려도 보인다. 아주 잘.
절경을 구경하고 있자 갑자기 이예나가 머리를 휙 들었다.
"지그음... 가슴 봤죠...? 또오... 또 봤다아..."
새빨개진 얼굴로 배시시 웃는 그녀.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갑자기 앞섬을 내렸다.
한 쪽 가슴이 완전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때애...? 우진이가 계속 봤던 가슴인데 어때애...? 예쁘지? 응?"
아무리 봐도 자기가 뭔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하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다시 원상태로 복구시켜주었다.
"으응? 이것봐라아...? 안 봐? 아까 네가 엄~청 주물거리고 만져댔던 건데 시러어...?"
"진짜 취하지만 않았어도 그냥 덮쳐버렸을 텐데. 이걸 어째야 하나?"
"덮쳐? 덮쳐어...? 자신 있으면 해봐!"
"내일 아침이면 기억도 없는 사람한테 하긴 뭘 합니까? 주사 부리지 말고 자기나 하세요."
원래 계획은 영화 끝나기 전까지 그렇고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당연히 변태인 대리님은 거절을 안 할 거고, 그 상태로 멋진 첫날 밤을 보내는 게 목적이었다.
근데 이건 뭔가? 뭐 어디 주정뱅이 하나가 꼬장을 부리고 있다.
당연히 기억도 못할 것이다.
'이건 다음에 기회를 잡아야겠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괜찮겠지. 나는 머리를 긁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일단 물이나 마시며 정신 좀 차리게...
"가긴 어딜 가아?"
주정뱅이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어찌나 힘이 쌘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반대쪽 손을 동원하려는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털썩.
"잡았다... 야, 박우진. 너 방금 한 말 다시 해봐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나는 아래에 깔려 있고, 눈이 풀린 주정뱅이는 올라탔다.
그걸로 멈추지 않고 가슴을 활짝 드러냈다.
"감히 누가 누굴 덮쳐... 넌, 오늘 나한테 따먹히는 거야."
그렇게 속삭이는 그녀의 입에서, 침이 똑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