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선 연결 오나홀로 따먹기-510화 (510/615)

< 510화 > 510. 주황 머리와 분홍 머리

한 주의 끝, 금요일이 도래했다. 출근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입꼬리가 마구 실룩거렸다.

'와서 A4용지도 다 채워놨고 정리하란 거 했고... 이제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면 되겠다.'

핸드폰을 꺼내 당당하게 인터넷에 들어갔다. 이제 일주일된 신입이 할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전혀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일을 너무 잘해서가 아니다, 카모플라쥬라는 사기 스킬을 썼을 뿐.

다른 사람들 눈에는 열심히 뭔가를 읽고 있는 기특한 인턴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한창 딴짓을 하던 중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우진 씨. 이것 좀 마시면서 쉬엄쉬엄해요."

책상 위에 놓여진 종이컵 하나. 믹스 커피였다. 하지만 그 친절보다 준 사람의 정체가 더 놀라웠다.

"대리님?"

"일주일 동안 열심히 했으니 주는 선물이에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꾸벅 인사를 하자 그녀가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다시 머리를 들자 평소와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와이셔츠 제일 윗단추가 풀려있었다.

'까먹은 건가?'

빈틈 하나 없는 철벽을 자랑하던 이예나가 그럴 리 없다. 설마 어제 그런 꿈을 꾸게 했다고 하루만에 바꼈을 리도 없고.

나는 은근하게 드러난 쇄골을 몰래 쓰윽 스캔했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방금 그 단추 말고는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엉덩이가 꽉 끼는 스커트와 그 안에 넣은 와이셔츠.

기다란 핑크빛 포니테일까지 똑같았다.

뭐, 답답하면 풀 수도 있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대리님이 타준 커피를 홀짝 마시며 핸드폰을 계속 했다.

잠시 후, 이예나가 의자를 빙글 돌렸다.

"우진 씨, 저 지금부터 회의 들어가야 하는데 혹시 이것 좀 처리해줄 수 있어요?"

"어떤 건데요?"

"그냥 이 자료에 나와 있는 숫자들 갱신해주기만 하면 돼요."

"물론이죠. 맡겨주세요."

"고마워요."

그녀가 빙긋 웃었다. 몇 번 보긴 했지만 저렇게 밝은 건 처음 본다.

얼떨결한 미소를 지으며 10페이지 가량 되는 자료를 받아들었다.

슥슥 넘기며 확인을 하고 있자 무언가를 잔뜩 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녀올게요~"

"넵."

또각또각 높은 구두 소리가 뒤를 지나갔다. 그대로 빙 돌아 출입구로 나갔고, 잠깐 보인 앞모습에서 또 다른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단추가 잠겨있었다.

*

그로부터 몇 시간 후. 해가 중천에 뜨자 이예나가 책상을 툭툭치며 신호를 줬다.

"슬슬 점심 먹으러 갈까요?"

"넵, 알겠습니다."

"팀장님이랑 다른 분들은 중식먹는다 해서 오늘은 저희 둘이서 먹기로 해요."

"따로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음... 전 오늘 한식이 땡기는데 우진 씨는 어떤가요?"

"한식 좋습니다."

대리님이 먹고 싶다는데 인턴 나부랭이가 뭘 어째. 그냥 따라가야지.

하던 걸 멈추고 회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길가를 따라 걷고 있자 갑자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얼른 확인해보자 슈퍼 아이돌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조금 뜬끔없는 타이밍이긴 하지만 안 받을 수는 없지.

일단 3발자국 떨어진 뒤 초록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뭐야. 진짜 받네?"

"오랜만에 전화해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

"아니, 너 학교 때려쳤냐? 이 시간대에 네가 왜 여기 있어?"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김세정. 잠깐 눈살을 찌푸리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 한 10m 앞쪽에 있는 검은 스타렉스 보이냐?"

"보여."

"그거 나야."

동시에 뒷좌석의 창문이 내려왔다. 그 틈 사이로 새하얀 팔과 주황색 머리카락이 내밀어졌다.

확인해볼 것도 없이 김세정이 확실했다.

"거기 딱 기다려."

그 말과 함께 차의 문이 덜컥 열렸다. 푹 눌러쓴 모자와 선글라스로 무장한 김세정이 한 걸음에 다가왔다.

내 옆에 서더니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야, 너 은근 슈트핏 좋구나? 잘 어울리는데?"

"고마워. 근데 넌 왜 여기 있냐?"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어쨌든 나부터 설명을 하자면 기획사가 주변이라 점심 먹으러 나왔지."

"네 엔터테인먼트가 여기라고?"

김세정의 기획사가 여기 주변에 있는 줄을 몰랐다. 솔직히 그걸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겠어.

어디 소속해 있는 것만 알지.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나 한 달 동안 인턴하게 되어서 회사 생활 좀 하고 있었어."

"정말? 처음 듣는 말인데?"

"말 안 했으니까 처음 듣겠지."

"와... 진짜 너무하네. 나만 왕따 시켰던 거야?"

"내가 말하는 걸 까먹었었네. 미안."

"뭐, 됐어. 그럼 우리 점심이나 같이 먹을래? 차 안에 몰래 들어가서 스윽 하면 아무도 모를 텐데."

"그건 안 될 것 같아."

나는 설명 대신 앞쪽을 쳐다봤다. 살짝 불편한 기색을 비치고 있는 이예나 대리님이 우리를 째려보고 있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여기로 몰렸다.

주황색과 핑크색. 정말 자강두천이네.

"내 맞선배랑 이미 점심 약속을 해서 말이야. 다음에 같이 먹자."

"...저게 회사원이라고?"

"믿기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네. 그럼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줘야 돼. 전부."

"알았어."

김세정이 옆구리를 쿡 찌른 뒤 순순히 자기 차로 들어갔다. 나도 헐레벌떡 대리님의 곁으로 다가가 사과부터 박았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친구가 튀어나올 줄은 몰라서요."

"괜찮아요. 그보다 친구라고요?"

"네, 저도 몰랐는데 여기 주변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흐음... 그렇군요."

그녀가 검은 스타렉스를 지그시 쳐다봤다. 3초 정도 시선을 주더니 몸을 획 돌렸다.

"얼른 가요."

"넵."

그렇게 식당에 도착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이예나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우진 씨는 여사친 되게 많을 것 같은 스타일인데 사실이었네요."

"제가요?"

"방금도 여자였잖아요?"

"조금... 있는 편이긴 해요."

"하긴, 학교도 좋은 데 다니고 생긴 거 멀쩡하고 몸도 좋은데 없는 게 더 이상하긴 하죠."

"하하..."

이상하게 가시가 돋힌 느낌인데 맞나? 무안하게 웃으며 수저를 세팅했다.

평소엔 핸드폰을 하던 그녀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아까 그 여자애는 무슨 일해요? 아, 호구 조사 같은 게 아니라 머리색이 특이한 게 그냥 신기해서요."

그걸 대리님이 물으면 어떡합니다. 주황색보다 더 특이한 핑크색이면서.

"연예계 쪽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그럼 뭐 방송 스태프 같은 건가요?"

"그건 아닌데...어, 말하기가 좀 곤란해요."

"곤란하면 말 안해도 괜찮아요. 저는 그냥 김세정이랑 비슷한 느낌이길래 혹시나 하고 물어봤죠~ 근데 그럴 리는 없..."

움찔.

이름이 나오자마자 몸이 반사적으로 떨렸다. 농담처럼 말하던 이예나의 입도 멈췄다.

매우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거짓말보단 사실을 말하는 게 낫겠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김세정 맞아요. 아이돌."

"어...어...어...저, 정말요?"

"솔직하게 말했으니 비밀로 해주세요."

하지만 이예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방금 말한 게 진심인지 농담인지 판별하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대뜸 자기 친구가 슈퍼 아이돌이라 하면 그 어떤 이가 믿겠는가?

고등학교 동창 같은 것도 아닌데.

약 10초 뒤 정신을 차린 그녀가 물을 들이켰다. 입가를 쓰윽 닦더니 고개를 잔뜩 내밀었다.

"어떻게 친해졌는지 궁금한데요?"

무슨 비밀을 말하는 것마냥 작게 목소리를 죽인 그녀. 이왕 말한 거 그냥 말해버리자.

"혹시 박서윤을 아시나요?"

"알죠! 같은 그룹의 멤버잖아요. 김세정과 투탑을 달리는 애."

"걔랑 같은 수업을 듣다가 친해졌어요. 근데 어쩌다 김세정까지 끼어들어서 놀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그러고 보니 박서윤도 미래대에 다닌다고 했었죠?"

"알고 계시네요?"

"한 때 기사가 많이 났으니까요."

그럼 스캔 사건도 알려나? 이건 그냥 다물고 있어야지.

다행히 이예나도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엄청난 사실에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때마침 침묵을 깨고 음식이 테이블에 놓여졌다.

"아... 덥다."

그리고 은근슬쩍 윗단추를 풀은 대리님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네에, 우진 씨도 정말 고생 많았어요."

퇴근했다. 재빨리 1층으로 내려와 로비를 지나던 중, 사람들의 목 방향이 한 곳으로 돌려진 걸 발견했다.

뭐 이벤트라도 하는 건가?

몇 걸음 더 다가가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라빛 투톤 헤어의 미녀가 있었기 때문.

특히나 팔짱을 낀 채 있어 가슴이 엄청나게 부각되고 있었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 발견."

"미리 말하고 오지 그랬어요. 채아 누나."

"이런 건 서프라이즈로 해야 좋은 거지. 자, 빨리 가자."

그녀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팔짱을 탁 꼈다. 부러움의 시선을 한가득 받으며 회사를 빠져나왔다.

향한 곳은 주차장.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탑승을 하자 채아 누나가 입술을 내밀었다.

"사실 우진이가 직장에 다니는 바람에 요즘 잘 못 만났잖니? 그래서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어."

"기대해도 될까요?"

"당연하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야."

아주 자신만만한 걸 보니 엄청난 걸 숨겨놨나 보다. 그렇게 채아 누나의 집에 도착했다.

문앞에 서자 그녀가 비밀 번호를 가르쳐줬다.

"381634. 직접 눌러봐."

천천히 입력하자 곧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는 살색의 천국이 펼쳐져 있었다.

딸기, 복숭아, 레몬, 멜론이 다함께 알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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