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4화 > 504. 인턴 첫날
인사를 하는 것도 까먹은 채 잠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뒷모습에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예쁠 줄이야.
감탄이 튀어나오는 걸 겨우 막고 일단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인턴을 하게 된 박우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가워요. 일단 이거부터 받으세요."
그녀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사원증을 건넸다. 내 사진이 찍혀있는 것이었다.
목에다 거는 걸 확인한 이예나가 빙글 몸을 돌렸다.
-삐빅!
시범을 보여주듯 느리게 출퇴근 기계에 사원증을 찍는 그녀. 똑같이 따라한 뒤 옆에 갔다.
"이거는 나가고 들어올 땐 무조건 찍어야하는 거예요. 점심시간도 예외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자, 그럼 가볼까요?"
이예나가 또각또각 존재감을 과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더니 나를 슬쩍 돌아봤다.
"당연하겠지만 그건 항상 달고 다녀야해요."
"알겠습니다."
"저희 사무실은 10층이고 도착하자마자 바로 팀장님께 인사하시고, 밝은 미소로. 아시죠?"
"명심하겠습니다.
"첫 날이니 따로 일할 건 없고 분위기에 적응만 하도록 해요. 한 달이지만 같이 지내야 하니까."
약간 딱딱한 말투로 주의할 점을 알려주는 그녀. 기계적이기까지한 모습에 살짝 뻘쭘했다.
선을 긋는 건지, 원래 성격이 이런 건지.
나는 다시 조용해진 이예나를 곁눈질하며 눈동자를 스윽 돌렸다. 착 달라붙은 스커트 덕분에 몸매가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골반 합격, 엉덩이 합격, 다리 라인 합격, 냄새도 합격.'
당장이라도 손에 쥐고 주물주물거리고 싶은 비쥬얼이다. 소리나지 않게 몰래 침을 삼킨 뒤 시선을 위로 올렸다.
상체도 만만치 않았다.
치마 속에 들어간 와이셔츠는 허리가 얼마나 가느다란지 대충 가늠할 수 있었고, 그와 반대로 터질 듯한 단추는 가슴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뽕을 넣지 않았다면... 대충 95. 허리는 64, 엉덩이는 97?'
뇌가 자동으로 계산을 하더니 결과를 내놓았다. 데이터가 워낙 방대하니 아마 99% 정확도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상관은 없다. 딱 보기에도 엄청난 몸매니까.
나는 속으로 박수를 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런 사람이 내 사수라니.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출근하기 짜증날 정도로 싫었는데, 지금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한 걸음에 달려올 수준이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곧 문이 열렸다.
"10층. 까먹지 마요."
"알겠습니다."
살짝 들뜬 내 목소리에 그녀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버튼을 누르고는 앞을 바라봤다.
또 다시 감상 타임이 왔다.
누가 보면 음흉하기 짝이 없다고 하겠지만 이건 아주 당연한 절차다. 한 달동안 맞선임이 될 사람인데 철저히 분석하는 게 맞으니까.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고, 이런 걸 말이다.
'그건 그렇고 몇 살일까? 대리라 했으니 나보다 많을 것 같은데.'
내가 조사해본 결과로 이 회사는 사원에서 대충 2년, 주임에서 대충 2년은 해야 대리를 달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20대 후반일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저 핑크빛 머리카락과 피부의 탱탱함을 보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별 상관 없잖아?'
중요한 건 이렇게 예쁜 사람이랑 붙어있는다는 거다. 생각을 끝냄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어느새 목표 층에 도착해 있었다.
-10층입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이예나가 앞서 나갔다. 실룩거리는 엉덩이와 흔들리는 포니테일을 구경하며 뒤따라갔다.
또각또각또각...
긴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넓은 사무실. 가장 깊숙한 곳으로 직행하더니 나를 손짓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있었다.
"저희 팀장님이세요. 가서 인사 드려요."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 있게 나아갔다. 여기 구역의 대장이니 첫인상은 좋고 강렬하게.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인턴을 하게 된 박우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 반가워요. 저는 데이터분석 부서의 팀장을 맡고 있는 한우진이라고 합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팀장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손을 내밀었다.
눈치껏 잡은 뒤 짧은 악수를 마쳤다.
그건 다른 팀원들에게도 반복되었고, 내 자리에 오게 된 건 그로부터 10분 뒤였다.
"자, 여기가 오늘부터 우진 씨가 사용할 자리예요."
"감사합니다."
"별로 어려운 일을 시키진 않을 거지만 모르는 건 바로 물어봐요. 괜히 혼자 하다 실수하지 마시고."
이예나가 옆자리에 앉으며 경고를 날렸다. 푸른 눈으로 스윽 흘기더니 자기 컴퓨터를 켰다.
일단 나도 따라서 전원 버튼을 눌렀다.
'원래 성격이 저런 것 같네.'
무뚝뚝하게 일만 하는 철벽녀. 상사로선 저런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괜히 이것저것 뒤적거리고 있자 이예나 대리가 의자를 드르륵 돌렸다.
"아까도 들었겠지만 저희는 데이터분석을 주로 하는 부서예요. 그래서 무언가를 종합하고 분류하고 정리하고, 이런 작업들이 상당히 많아요."
그녀가 밑밥을 살살 깔더니 엄청나게 두꺼운 서류철을 건네주었다.
"이거 순서대로 정리 좀 해주세요. 오른쪽 아래에 번호가 써 있을 테니 차례대로 쌓아두기만 하면 돼요."
"넵, 알겠습니다."
"지금이... 오전 9시 30분이니까 점심 먹기 전까지 끝내줬으면 좋겠어요. 참고로 점심시간은 12시부터 1시까지예요."
할말을 끝내고 다시 고개를 돌린 그녀. 딱 일거리만 주는 매정한 모습이었다.
칼 같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한테는 약간 불만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2시간 30분 이내에 끝내라는 거지?'
단순 노가다라 어려운 건 없다. 하지만 인턴 첫날 오자마자 이런 걸 주다니.
좀 커피 마시면서 얘기 좀 하고 농땡이도 피고 하면 얼마나 좋아.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분류 작업을 시작했고, 별 다른 이벤트 없이 오전 시간이 지나갔다.
"이야... 잘 먹었다. 우진 씨는 어땠어? 여기 우리가 자주 오는 식당인데."
"팀장님의 픽답게 엄청 맛있었어요."
"하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내 대답에 팀장님이 호탕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띄워주었다.
하지만 내 사수는 달랐다.
"...."
맨 앞에서 적당히 걷는 속도를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 담당인데 신경 좀 써주지.
속으로 약간의 불만을 표출할 때, 누군가 옆에서 툭툭 쳤다.
아침에 인사를 한 번 나눴던 다른 팀원이었다.
"우진 씨, 예나 대리님은 원래 저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요."
"혹시 좀 차가운 성격이신가요?"
"차갑다고 해야 하나... 철벽을 친다 해야 하나... 자기 일은 정말 똑 부러지게 잘하는데 그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타입이세요."
"확실히 첫 만남부터 그래 보이긴 했죠."
"모두한테 저러는 거니까 너무 상처받지 말고... 아, 맞다. 그리고 아침에 맡긴 거 전부 정리했다면서요? 은근 오래 걸리는 작업인데 엄청 빠르게 했네요?"
"그렇게 많은 양도 아니었는데요 뭘. 그냥 순서 맞추기일 뿐인데."
칭찬에는 겸손이다. 멋쩍게 웃자 그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아뇨, 그거 은근 헷갈리는 것도 많고 이것저것 다 섞여 있었는데 1시간만에 끝냈잖아요."
"제가 손이 좀 빠른 편이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정리를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근데 실수 하나 안 했잖아요? 아까 예나 대리님이 쓰윽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으시던데. 그리고 아무 말씀도 안 했다는 건 정확하게 했다는 거죠."
"에이, 과찬입니다."
그냥 시간 떼우기로 시킨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아무래도 나름대로 테스트를 해본 모양이다.
나는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채워놓으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근데 이예나 대리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직급은 높으신데 저랑은 별로 차이가 안 나는 것 같아서요."
"그쵸? 예나 대리님을 처음 본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가 멋쩍게 웃었다. 이어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듣고 놀라지 말아요... 무려 25살이세요."
"...네?"
"우진 씨보다 딱 1살 많아요. 엄청 대단하죠?"
25살 핑크빛 머리를 한 여자가 대리라니. 이건 또 무슨 얘기야?
*
'그래도 일머리는 좀 있는 모양이네.'
이예나는 아침에 건네준 서류철을 다시 매의 눈으로 살펴봤다. 아주 깔끔하고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건 뭐 트집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수준이다.
괜히 미래대 출신이 아니구만. 옆자리를 흘끗 곁눈질했다.
파릇파릇한 인턴이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찌릿.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턴을 뽑는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낙하산을 의심했다. 어디 높으신 분의 지인이거나 친척이거나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까.
때문에 첫 날이지만 일거리를 던져주었다. 약간 꼽을 줄 생각으로.
'근데 뭐야 이거?'
나보다 더 정리 잘하잖아? 부정적이었던 이미지가 아주 살짝 플러스가 됐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이걸로는 택도 없다.
누구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입사해서 개같이 굴러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그럼 조금 더 어려운 일을 줘보도록 할까?
"우진 씨 잠깐 여기로 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