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2화 > 492. 식후딸이라도 쳐줄까?
그로부터 며칠 뒤, 유독 바빠보였던 박서윤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서윤 : 혹시 내일 시간 돼?
-박우진 : 시간은 되지. 할 거라도 있어?
-박서윤 : 별 거는 아니고 나랑 데이트 좀 하자.
데이트? 익숙치 않은 단어에 손을 멈칫했다.
박서윤이 저걸 먼저 언급할 줄은 몰랐는데.
-박우진 : 파파라치나 주변 시선 때문에 사리는 거 아니었어?
-박서윤 : 눈치 볼 타이밍은 훨씬 더 지났잖아. 애초에 학교에서도 잘만 붙어다니는데 아무 일도 없더만.
-박우진 : 그렇긴 해. 저번에 기사 한 번 나고 나서는 그렇게 신기하게 쳐다보지도 않으니까.
-박서윤 : 그럼 어쨌든 ok인 거지?
-박우진 : 시간이랑 장소는?
-박서윤 : 일단 1시쯤. 장소는 가면서 알려줄게.
-박우진 : 알았어.
1이 사라진 걸 확인한 뒤 화면을 껐다.
그보다 데이트라...
'생각해 보면 그동안 제대로 된 걸 하지 못하긴 했지.'
그때를 너무 의식해서 그런가. 밥을 먹어도 학교 주변에서만 먹었고, 같이 돌아다니는 것도 집 부근으로 한정되긴 했다.
그래야 순수한 학교 친구라고 생각할 테니까.
하도 유명하다 보니 이런 불편함 정도는 감수하고 살았다. 근데 본인이 먼저 하자고 하니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다.
나도 마음속으론 같이 놀러가고 싶었고.
위이이잉...
다시 한 번 울리는 진동을 확인하며 스케줄을 정리했다.
다음 날.
약속 시간에 맞춰 옆집 문을 두드렸다.
-끼익.
기다렸다는 듯 박서윤이 얼굴을 내밀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애매한 모습이었지만 빛이 나는 건 여전했다.
그렇게 위아래로 눈동자를 돌리고 있자 그녀도 똑같이 나를 훑어봤다.
곧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오... 좀 괜찮게 입었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면 상당히 잘 입은 뜻이네."
"기준치에서 아슬아슬하게 위. 뭐 그래도 같이 다니기에는 합격이야."
박서윤이 신발을 톡톡 치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손에는 차키가 들려 있었다.
평소에 보던 거랑은 다른 디자인이었다.
"그거 새로 샀냐?"
"아, 이거? 이건 평소에 돌아다닐 때 쓰는 용이야. 매번 스포츠카 끌고 다니는 건 좀 그렇잖아."
"하긴, 어그로가 미친듯이 끌리니까."
고개를 끄덕이다 무언가 이상한 점이 생각났다.
"근데 여기 1가구에 1주차 아니었냐? 어떻게 했어?"
"너 차 없잖아. 네 자리 좀 슬쩍 했지."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자리비 내놔."
"대신 내가 공짜로 태워주잖아. 그럼 너도 운전비랑 기름값 내놔."
"쌤쌤으로 치자."
"그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박서윤이 활짝 웃었다. 이래서 부자들은 무섭다니까.
소심한 복수로 딱밤을 한 대 날렸다.
"아얏! 왜 때려?"
"그렇게 이마를 까고 다니면 때리고 싶어지는 게 본능이거든."
"지랄하네."
"진짜야. 거울 한 번 보든지."
그녀가 대답 대신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었다. 썩은 미소도 상큼하게 한 번 지어주더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사이좋게 주차장으로 같이 내려갔다.
터벅터벅...
익숙한 외형의 스포츠카로 직진을 하나 싶더니 갑자기 옆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 빛났다.
박서윤이 차키를 휘릭 돌리더니 타라는 손짓을 했다.
"...저거 네 거였어?"
"여태까지 몰랐던 게 더 신기한데."
"저거 타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최근에 좀 안 타긴 했지."
박서윤이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 행동과는 달리 눈앞에 있는 건 억대를 호가하는 차량이었다.
내 나이 대에는 꿈도 못 꿀 비싼 수입차.
역시 역시 연예인답게 일반용도 장난이 아니다. 문을 여는 그녀를 따라 조수석에 앉았다.
고급스런 인테리어와 푹신한 승차감이 나를 반겼다.
"근데 이것도 꽤 비싸지 않냐?"
"저거에 비하면 얼마 안 해. 반의 반도 안 됐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말하니 되게 싸보이긴 한데... 저게 저거라고 부를만한 가격은 아니지 않냐?"
나는 10억은 호가할 것 같은 옆차를 가리켰다. 그러자 박서윤이 시동을 걸며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광고 몇 개 더 찍으면 되지."
"진짜 금전 감각이 망가지다 못해 없어진 수준이네."
"그만큼 지갑이 두둑하니까 그렇지~ 너도 나처럼 벌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솔직히 아바타를 이용하면 돈이야 박서윤 그 이상으로 벌 수 있다. 애초에 투명 인간 그 자체인데 뭘 못할 수 있을까.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활용 방법은 무궁무진한데.
어디 카지노 가서 패를 다 읽기 가능. 당당하게 은행 털기도 가능.
뭘 하든 완전 범죄 성립이다.
'근데 양심상 안 하는 것뿐이지. 딱히 할 필요도 없고.'
굶어죽지만 않으면 장땡이다. 나는 생각하던 걸 멈추고 시트에 편안히 등을 기댔다.
곧 차가 출발했다.
부우우웅...
한참을 달리고 있자 제일 중요한 걸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시계를 흘끗 본 뒤 물었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냐?"
"아, 내가 말 안 했나? 혹시 ㅇㅇ동이라고 들어봤어?"
"들어봤지. 거기 부자들만 사는 곳이잖아."
"거기야. 그냥 드라이브 겸 사전 답사."
"사전 답사?"
혹시 집사러 간다는 건가? 문뜩 저번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7명이 같이 살 집을 구해볼까 하던 얘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행동으로 옮길 줄은 몰랐다.
"사실 혼자서 깜짝 선물? 그런 걸로 알아보려 했는데 다른 사람 의견도 들어봐야 하겠더라고. 다같이 지내는 건데 내가 마음에 든다고 띠링 사버리면 안 되니까."
"혹시 마음에 드는 거라도 있어? 가는 걸 보니 뭐라도 정해둔 거 같은데."
"글쎄... 그냥 넓은 집을 찾다보니 여기가 딱 걸려서 말이야. 나도 아직 정확한 건 몰라."
그렇구나. 뭔가 운전하는 박서윤이 엄청나게 듬직해보였다.
대단하긴 하네.
그런 내 시선을 알고 있는지 그녀가 입꼬리를 쓰윽 올렸다.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내가 마음에 들어서 하는 거니까."
"집값이 얼만데 고마워 안 할 수가 없지."
"진짜 괜찮아. 어차피 수틀리면 다시 팔아버릴 거라서 말이야."
"...무섭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가 멈췄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박서윤이 기지개를 쭉 켰다.
볼록 튀어나온 가슴을 보고 있자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진심이 담긴 눈빛을 쏘아내고는 다시 핸들을 잡았다.
그렇게 30분을 더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야?"
"응, 일단 주변에 뭐가 있는지 돌아다녀보려고."
속도를 줄인 채 돌아다니다 적당한 곳이 보이자 차를 세웠다. 안전벨트를 풀고 딱 내리려는 순간 박서윤이 나를 붙잡았다.
"잠깐만 기다려봐."
"왜?"
박서윤이 대답 대신 몸을 빙글 돌렸다.
비닐 봉투를 부스럭거리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직 밥 안 먹었지? 이거 먹고 나가자."
"뭔데? 샌드위치야?"
"응, 내가 집에서 직접 만든 거야."
"정말? 어디 편의점에서 사온 거 아니지?"
"내 정성을 뭘로 보고... 일단 한 번 까봐. 보면 알 거야."
의심을 거두지 않고 포장을 풀자 꽤나 신경을 쓴듯한 삼각형 빵이 등장했다.
그럼에도 약간 투박함이 묻어 있는 게 수제라는 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야채나 토마토 같은 정석적인 재료들이 들어 있어 생각보다 맛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것까지 만들어 올 줄은 몰랐는데?'
첫 데이트라고 이렇게나 준비를 했다니. 털털한 성격을 가진 박서윤한테서 전혀 기대하지 않은 행동이다.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바라보자 그녀가 새침한 얼굴을 했다.
"얼른 먹어봐. 맛없으면 남겨도 되니까."
그러면서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게 자신이 없나 보다. 저러면 맛없어도 무조건 다 먹을 수밖에 없다.
몰래 심호흡을 한 뒤 보란 듯이 입을 크게 벌렸다.
"으음..."
내용물을 가득 베어물자 상큼함이 입안에 가득 퍼져나갔다. 요리와는 담을 쌓은 듯한 그녀였지만 기대 이상의 맛이었다.
몇 번 더 우물거리자 박서윤이 슬쩍 물었다.
"어때?"
"맛있는데?"
"정말?"
"진짜로. 너도 한 번 먹어봐."
엄지를 치켜세워주자 박서윤의 얼굴이 밝아졌다. 내심 쫄고 있었던 모양이다.
"으음... 먹을만하네."
"이런 거 처음 만들어보냐? 자취하면서 요리 정도는 할 거 아니야."
"어... 하지?"
"안 하는구만."
"하거든!"
발끈하는 거에서 이미 들켰다. 나는 피식 웃으며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몇 번 더 씹고있자 박서윤이 다시 몸을 휘릭 돌렸다. 수상한 박스를 열더니 음료수를 꺼내왔다.
"여기. 이거도 마시면서 먹어."
"...저건 또 여기서 난 거야?"
"미니 냉장고 몰라? 물이나 커피 같은 거 시원하게 보관하기 딱 좋은데."
"진짜 별 게 다 있네. 어쨌든 고마워."
시원하게 캔을 따고 꿀꺽꿀꺽 들이키자 박서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게 그 먹는 걸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건가.
그렇게 게눈 감추듯 손에 든 걸 전부 뱃속으로 집어넣었다.
적당한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자 박서윤이 몸을 들이밀었다.
"그래서 소감은?"
"맛있었어. 너도 하면 되잖아."
"아니, 평소에도 했다니까?"
"앞으로도 뭐 좀 만들면 가져와. 내가 평가해줄 테니까."
"흥... 그래 뭐. 그러뭔야."
무표정을 고수하지만 실룩거리는 입가까지는 숨길 수 없다. 저럴 땐 귀엽다니까.
나는 속으로 웃으며 차 손잡이를 잡았다.
딱 나가려는 순간 그녀가 나를 쿡쿡 찔렀다.
"어디 가려고?"
"다 먹었으니 바람이나 쐴까 해서."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나가려고 해. 좀만 쉬었다 가."
무언가 목적이 있는 듯한 은근한 말투. 가만히 지켜보자 박서윤이 은근슬쩍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스윽스윽 문지르더니 작게 속삭였다.
"식후딸이라도 쳐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