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1화 > 441. 속속히 모여드는 이웃 주민
"그럼 시험지 배부하겠습니다~ 모두 보던 거 치워주세요."
조교의 말이 있자 사방에서 작은 탄식이 이어졌다.
모두 함께 부스럭거리며 가방에 요약본을 넣었지만 그 모습은 다 상이했다.
천천히 움직이며 마지막 한 줄을 읽는 사람.
까먹을까봐 공식을 계속 중얼거리는 사람.
눈을 감고 진정을 하는 사람.
조금이라도 더 잘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지만 나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 전부 들어있으니까.
사실 더 중요한 건 시간 조절이었다.
'5문제에다 새끼문제 3개씩 들어있다고 했으니까... 대충 20분이면 되겠지?'
아니, 20분만에 나가면 좀 그러니 30분은 앉아있을까?
어차피 과탑인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니 뭐라 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나름 심각한 고민을 하며 흘끗 옆을 쳐다봤다.
휘릭...휘리릭...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펜을 돌리고 있는 아영이.
자신 있는 표정을 보니 꽤나 공부를 많이 한 듯한다.
속으로 화이팅을 외치며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윙크를 했다.
"화.이.팅."
그리고는 마음이 통한 듯 똑같은 말을 아주 작게 읊조렸다.
진짜 예뻐 죽겠네.
피식 웃으면서 앞사람이 넘긴 시험지를 받았다.
잠시의 대기 시간 후, 초고속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사각...
문제는 쉬웠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는 보너스에 가까우니 순식간에 클리어.
네 번째부터는 머리를 굴려가며 천천히 펜을 놀렸지만 막힘은 없었다.
'그럼 A에다 저걸 넣어서 그 공식을 쓰면... 답은 10이겠네.'
마지막 답을 쓰고 시계를 곁눈질했다.
정확히 20분이 지나는 참이었다.
아까 예상했던 대로다.
적당히 시간 좀 때울 겸 검토는 조금 쉬었다 하기로 하자.
그럼 아영이는 어디를 풀고 있나 볼까?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지만 시험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바타를 꺼내 주변에 세워두었다.
뒤에서 훑어본 결과 4-2번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근데 과정이 나랑 달랐다.
-그거 중간에 틀렸다.
"히익!"
갑자기 아영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자 목을 툭툭 두드려 아무 일도 없다는 걸 나타냈다.
집중하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이거 괜히 미안해지네.
나는 찌릿하고 째려보는 그녀에게 두 손을 모아 사과의 뜻을 비쳤다.
"...."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표정이 풀렸다.
그리고는 시험지 구석이 무언가를 썼다.
[갑자기 뭐예요?]
-미안, 그냥 다 풀었다고 알려주려고 한 거야.
[무슨 계산기도 아니고 벌써요?]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없던데? 쓱쓱 푸니까 나왔어.
[재수 없어]
아영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다시 펜을 움직였다.
20초 정도 지나자 답을 도출해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거 틀린 거야.
[어디가 틀렸는데요?]
-말하면 컨닝이니까 말 안 할래. 알아서 잘 찾아봐.
[와... 먼저 말 걸어놓고는 치사하게 그러기예요?]
-대신 기회를 한 번 더 줬잖아. 만점 받을 기회.
[흥.]
그녀가 입술을 더 내밀었다.
인중에 펜을 올려놓고는 처음부터 샅샅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진짜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저런 외모로 저런 짓을 하는 건 사기다.
귀여워 죽겠네.
하지만 확인했음에도 그녀의 풀이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어디인지 말해줄까?
[됐어요. 그러면 컨닝이나 다름없잖아요? 저는 제 힘으로 풀어볼래요.]
그녀가 머리를 긁는 척 내 손을 살포시 뿌리쳤다.
이거 참 기특한 대답이네. 도와달라 하면 가슴 주무르려고 했는데.
나는 조용히 아바타를 없앤 뒤 다시 내 시험지를 바라봤다.
먼저 나가기는 좀 그러니 천천히 검토나 하기로 하며 말이다.
그렇게 밖으로 빠져나온 건 15분 뒤였다.
조금 어두워진 캠퍼스에는 가로등이 군데군데 켜져 있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아영이가 기지개를 쭈욱 했다.
"후으으으읏...! 하아... 드디어 중간고사가 끝났네요."
"잘 봤어?"
"네, 딱히 못 본 과목은 없는 것 같아요."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이 보통 만점 받던데."
"그걸 오빠가 하니까 이상한 거 알아요?"
그런가? 근데 나도 아영이한테 들으니까 뭔가 기분이 묘하네.
완벽한 사람한테 질투받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괜히 얼굴이 화끈해지네.
손사래를 치며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아까 그 문제는 고쳤어?"
"덕분에요. 중간쯤에 아~주 쬐금한 계산 실수가 하나 있더라고요."
"그런 것치고는 좀처럼 못 찾던데?"
"고쳤다니까요. 답 3 맞죠?"
"맞아. 정확해."
"별 거 아니더만 그거가지고 으스대기는."
그녀가 히히덕거리며 내 옆구리를 찔렀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팔을 잡았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게 되었다.
"그럼 마지막 문제 답도 말해봐."
"5-1은 6, 5-2는 21, 5-3은 10. 어때요? 다 정답이죠?"
"괜히 도와줬네. 이러다 공동 1등하게 생겼어."
"와... 심보 나쁜 것봐. 사이좋게 같이 1등하면 좋잖아요. 장학금도 받고."
"나는 압도적으로 1등을 원한다고."
"치사하다 치사해."
잡담을 나누며 걷고 있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후우우웅...
기다렸다는 듯 아영이가 더 가까이 몸을 밀착했다.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부비부비 비비더니 머리를 내 쪽으로 기댔다.
두꺼운 옷 위에서도 느껴지는 물컹함과 따스함.
온 신경을 집중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발이 닿는데로 향하다 보니 캠퍼스의 중앙까지 와버렸다.
지금처럼 평화롭게 산책을 하는 것도 좋지만 이젠 막 걸을 수야 없지.
여전히 나를 꽉 붙잡고 있는 검은 머리의 미녀에게 물었다.
"시험도 끝났는데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글쎄요? 저는 그냥 오빠랑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은데."
"뭐 어디 영화 주인공같이 말하네."
"사실인 걸요."
"전자가? 아님 후자?"
"둘 다요."
아영이가 배시시 웃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정말 영화를 찍는 것 같은 각도.
이래서 자기가 예쁜 걸 알고 무기를 쓰는 애는 무섭다니까.
그 시선에 똑같이 미소를 지어주자 그녀가 문뜩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살짝 얼굴에 홍조를 올리고는 앞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방금 가고 싶은 데가 생각났어요."
"어디?"
"음... 뭔가 오늘은 엄청 클래식하고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 같아서요..."
클래식? 초심?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퀴즈를 내는 듯한 말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10초 정도 더 생각해봤지만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게 어딘데."
"엄청 오랜만인... 오빠 집이요."
갑자기 목소리가 끈적하게 변했다.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며칠을 굶은 짐승한테나 나오는 듯한 안광이었다.
물론 무엇을 하든 마지막에는 야한 짓을 한 건 분명했지만 이렇게 시작부터 대놓고 어필이라니.
무조건 환영이다.
"시험 기간 동안 많이 참았나봐?"
"공부하는 것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참은 뒤에 딱 하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해봤어요?"
"최근에 만나도 좀 얌전하다 싶었더니 이런 목적이 있었구나."
"오빠 볼 때마다 꼴려서 죽는 줄 알았다고요. 바로 덮쳐서 따먹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나는 내 몸 보고 그런 생각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여자가 보면 많이 다르나?
나는 맛있는 것을 본듯 입술에 침을 묻히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영이답긴 하지.
하지만 나도 호락호락하진 않다.
상대의 목적을 알았으니 최대한 애를 태우고 기다리게 할 거다.
"그래도 시험 끝났는데 조금만 더 돌아다니다 들어가도록 하자. 모처럼이잖아?"
"알았어요. 대신 그동안 저 팬티 다 젖으면 책임져요."
"어떻게 책임질까?"
"음... 흘러나오지 않도록 뭔가로 막아준다든가? 아니면 닦아준다든가? 그런 걸로요."
뭔가로 막는다라.
은근하게 표현했지만 목적이 분명한 유혹을 단호하게 차단했다.
"막아주면 더 나올 것 같아서 기각."
"그럼 닦아주는 건요?"
"그건 가능하지."
"지금 바로 해주세요."
아영이가 내 손을 잡더니 자신의 하복부로 이끌었다.
바지 위지만 후끈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만약 만졌는데 안 축축하면 오늘 아무 짓도 안 할 거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진짜야.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건전하게 딱 손만 잡고 잘 거야."
"그래도 같이 자는 건 확정이네요. 그나마 다행이다."
"몰래 덮치는 것도 안돼."
검지를 내밀며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도리어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싱글벙글이었다.
"흐응... 오빠가 덮치지 않고 배길 수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이~렇게 예쁜 여자가 알몸으로 한 이불에서 자고 있는데 과연 멀쩡하려나..."
"오늘 해볼까?"
"할 수 있으면요."
자신이 넘치는 목소리.
사실 나도 참을 수 있을지는 긴가민가하긴 했다.
"어쨌든 날씨 좋으니까 좀만 더 걷다 들어가자."
"네에~"
그렇게 30분 정도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돌아다녔다.
하늘이 더 어두워지자 우린 약속이나 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이동했다.
익숙한 건물이 보였고,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띠링. 5층입니다.
조금 빨라진 아영이의 속도를 따라 코너를 돌았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자 갑자기 옆집문이 벌컥 열렸다.
"아! 오빠 드디어 왔... 아영이 언니도 함께였구나. 왠지..."
그럴 줄 알았다는 야릇한 시선을 뿜어내고 있는 갈색 눈동자.
한껏 꾸민 혜윤이가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모습에 아영이가 밝게 인사를 했다.
"미안미안, 나온 김에 좀 돌아다니느라 늦었어."
"그래도 많이 늦지는 않아서 다행이네요."
혜윤이가 작게 숨을 내쉬더니 내 반대쪽 팔을 잡았다.
"같이 놀아요. 밤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