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화 > 400. 꼬시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30년 같은 3초의 정적.
나는 점점 커져가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인생일대의 심각한 고민을 했다.
마주쳤으니 일단 인사를 해야 할까? 아니면 인형인 척 가만히 있을까?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게 낫겠지?'
지금 상황에서 불리한 건 나니까.
조용히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끔뻑끔뻑...
바로 소리를 지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김세정은 매우 침착했다.
대신 떨리는 손으로 딜도를 꽉 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믿기지 않는지 눈을 감았다 떴다.
이어 심호흡을 크게 했다.
"하아..."
수많은 생각 끝에 겨우 진정이 됐는지 내 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당연히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가운데였다.
"...."
아주 당당하게 하늘 높이 솟아있는 내 물건.
풀발기 되어있는 자지에 김세정이 눈을 크게 뜨며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본 남자의 알몸이 꽤나 충격적인 모양이다.
그것도 자랑스러운 내 20cm 자지와 근육들이라면 더욱더 그러겠지.
한 번 실험해볼까?
자지를 크게 껄떡여봤다.
움찔!
순간 어깨를 떠는 김세정.
못 볼 것을 본 듯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결코 눈을 떼지는 않았다.
이건 청신호다.
'잘만 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막 난리를 치면서 당장 경찰을 부를 줄 알았는데 이 반응이면 나쁘지 않다.
뼛속까지 새겨진 저 변태녀의 DNA가 나를 살린 것 같다.
그동안 봐왔던 그녀의 행보로 봐서는 충분한 이야기.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됐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한 번 말을 걸어볼까?
쏴아아아...
입을 열려던 차, 샤워기의 물소리가 끊겼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김세정이 손에 든 걸 나한테 휙 던졌다.
"읏...!"
내 자지 좀 많이 단단하네.
아프다.
맞은 부위를 쓰다듬고 있자 그녀가 대뜸 손가락질을 했다.
"너어...너가 왜 여기에...!"
말을 더듬는 걸 보니 꽤나 충격이 큰 듯하다.
빨리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라는 뜻이 다분했다.
여기서 다른 말로 속이거나 거짓말하는 건 역효과다.
솔직하게 말하자.
어차피 박서윤도 있으니 그렇게 큰일은 안 일어날 것 같고.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지금 네가 상상하고 있는 게 맞을 거야. 아까 밖에서 들었던 소리도."
"지랄하지마. 서윤이가 너 같은 놈이랑 할 리가 없어! 수많은 연예인의 고백도 전부 차버린 애인데 어떻게...!"
김세정이 거의 절규를 하듯 작게 소리쳤다.
머리를 도리도리 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분명 네가 뭔가를 인질로 잡고 협박하고 있는 게 분명해. 아니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 리가...!"
"절대 아니야. 오늘도 박서윤이 먼저 해달라고 유혹해 왔던 거라고."
"구라 치지마. 절대 안 믿어."
"그럼 증명해볼까?"
"뭘? 뭘 어떻게?"
그녀가 인상을 팍 쓰며 물었다.
헛소리라도 하는 순간 바로 응징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너 오늘 하루 자고 간다며. 밤에 박서윤이 어떻게 변하나 지켜봐."
"그 말은..."
"이따 나 술자리에 껴줘봐. 내가 확실하게 증명해줄게."
자지를 껄떡이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김세정의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
정말 이거 좋아하네.
속으로 피식 웃자 김세정이 빠득 이를 갈았다.
악귀 같은 얼굴로 경고를 했다.
"내가 지금은 서윤이 때문에 봐주는 거야.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경찰서행이니까 각오해."
"마음대로 해."
"지금 그렇게 잔뜩 허세 부려놔. 만약 아무 일도 없으면... 그냥 경찰서로는 안 끌날 거야. 우리가 누군지 알지?"
알지.
까닥 잘못 건드렸다간 어디 바다의 물고기밥이 될 것 같은 그런 존재.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아이돌인 걸.
"알았으니까 이제 슬슬 문 좀 닫아줘. 곧 나오겠다."
당당한 내 태도에 김세정이 코웃음을 쳤다.
흘겨보더니 조용히 시키는 대로 했다.
끼익... 쾅.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발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김세정을 구경하고 있자 곧 박서윤이 등장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활짝 웃었다.
"세정아, 오래 기다렸지?"
"...아니야."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라서 내가 아직 세팅도 못해놨거든. 같이 뭐 좀 사러 갈래?"
"그래."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엄청난 괴리감에 김세정이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푹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둘이 차례대로 옷장을 지나가며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무섭게 노려 보는 검은 눈동자와 이때라는 듯 신호를 주는 갈색 눈동자.
한 번씩 아이컨택 후 현관문이 쾅하고 닫혔다.
"드디어 갔네."
밖으로 빠져나왔다.
구부정한 허리를 피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보다 내 옷은 어디다 뒀더라?
너무 급한 나머지 아무데나 처박아뒀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주위를 둘러보자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이불이 눈에 띄었다.
어떻게 저렇게 숨길 생각을 했지?
나도 참 급했나 보다.
어이없음을 삼키며 옷을 입었다.
'이제 딜도를 제자리에 갖다 두기만 하면 끝.'
아까 김세정이 열었던 서랍으로 갔다.
유난히 커 보이는 빈자리에 조심히 보관을 완료하자 긴장이 탁 풀렸다.
이제 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일단 박서윤에게 까톡을 하나 남기자.
박우진 : 탈출 완료.
1이 금방 없어졌다.
약간의 뒷거래가 있긴 했지만 이걸로 그녀도 안심하겠지.
"챙길 건 다 챙겼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 확인해보자.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대충 알아야하니까.
털썩.
바로 집으로 돌아와 관음 모드를 사용했다.
아직 마트에 가는 길인지 나란히 걷고 있는 김세정과 박서윤.
뚱한 표정의 주황 머리를 보더니 조심히 물었다.
"세정아,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표정이 좀 어두운데."
"아, 그냥 촬영 때가 생각나서."
"왜? 상대가 이상한 짓이라도 했어?"
"그건 아닌데..."
정말 궁금하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묻는 박서윤.
그 모습에 김세정이 또 다시 한숨을 푹 쉬더니 주제를 바꾸었다.
"됐어, 해봤자 기분 나쁜 이야기니까 안 할래. 그보다 오늘 기절할 때까지 계속 마시는 거 어때?"
"당연하지. 오늘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어."
"밤새 그러면 주변에서 시끄럽다고 뭐라하지 않을까?"
"괜찮아! 보니까 여기는 다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사람들만 있더라."
맞는 말이지.
하루 동일 신음 소리 내도 항의 한 번 안 들어오는 분들인데.
거의 천사나 다름 없는 이웃들이다.
"그럼 옆집 걔는?"
"우진이?"
"응."
김세정이 먼저 언급할줄은 몰랐는지 박서윤이 놀란 얼굴을 했다.
"웬일이야? 저번에는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음... 내가 보기엔 괜찮을 것 같아. 걔 나름 이해심이 커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걸?"
"그러기엔 좀 미안한데... 그럼 공범도 만들 겸 아예 다같이 마시는 건 어때? "
"...어!?"
김세정의 폭탄 발언에 나도 깜짝 놀랐다.
부르라고는 했지만, 적어도 둘이 재밌게 논 뒤에 할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라니.
'혹시 아예 처음부터 나랑 박서윤을 관찰할 생각인가?'
그럴 가능성이 매우 컸다.
맨 정신으로 우리 둘의 미묘한 기류를 보고 싶은 거겠지.
오히려 나야 땡큐다.
슈퍼 아이돌을 양옆에 끼고 술을 마신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절대 없다.
하지만 양심이 찔리던 박서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크게 뜨며 추가 설명을 요구하자 김세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별 건 없고... 저번에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아서 사과도 하고 싶었어."
"사과? 근데 걔가 올까?"
"우리 3명 다 동갑이기도 하고 뭐, 딱히 꺼릴 건 없잖아?"
"일단 말은 해볼게."
잠시 기다리자 박서윤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받았다.
"여보세요."
"지금 뭐해?"
"집에서 쉬고 있지."
"사실 지금 나 세정이랑 같이 있거든. 알지? 저번에 봤던 애."
"알지. 그 주황머리 싹바가지."
"...그렇게 부르지 말고. 오늘 내 방에서 술 마시기로 했거든. 혹시 괜찮으면 너도 올래?"
당연하지.
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김세정이 손을 뻗었다.
자신이 대신 받고 싶다는 제스처.
통화 상대가 바뀌었다.
"여보세요. 저 아시죠?"
"알죠."
"저번에 무례한 게 군 것에 대한 사과를 하고 싶은데... 제가 특.별.히 쏠 테니까 꼭 와줬으면 좋겠는데요?"
싱글싱글 웃으며 그렇게 특정 단어를 강조하니 호러 영화가 따로 없다.
안 그래도 갈 건데 무섭게시리.
괜히 아까 딜도에 맞은 부위가 간지러워졌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정말로 기뻐하는 톤으로 대답했다.
"정말요? 꼭 가야죠.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갈게요."
"당연히 그래야죠. 그럼 이따 부를 테니까 늦지 않게 와요."
뚝.
자기 할말만 하고 끊은 김세정.
지금이야 반신반의한 상태라 이렇게 까칠하게 굴지만, 과연 몇 시간 뒤에도 똑같이 할 수 있을까?
나는 머릿속에 계획을 세우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지금 내가 유일하게 살아남을 방법은 박서윤을 꼬시는 것이다.
단순히 꼬시는 것도 아니고 성행위에 버금가는, 스스로 좋아서 한다는 느낌이 들게 유도까지 해야 한다.
아니면 저 자존심 강한 김세정이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러지 않으려면 제대로 준비부터 해야지.
씻는 건 물론, 옷이나 분위기까지 전부 깔쌈하게.
오랜만에 힘 좀 써볼까.
나는 데이트할 때처럼 제대로 꾸미기 시작했다.
그리고.
쾅.
얼마 지나지 않아 옆집 주인이 돌아왔다는 신호가 왔다.
그럼 슬슬 가볼까?
나는 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