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 294. 범인은 이 주변에 있어
"먼저 선수치길 잘한 것 같다."
내가 두 번째 대딸을 부탁했을 때의 박서윤 표정은 악귀 그 자체였다.
물론 과장을 조금 보탠 것이지만 첫 번째와 비교하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 사이는 오나홀과 딜도를 빼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텅 비어있었다.
그나마 성적인 호기심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인데,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시켰으니 충분히 그럴만했다.
아마 내 생각이 맞다면 근 시일 내로 미안하니까 제발 오나홀을 돌려달라 말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어림도 없지. 딜도 먼저 훔쳐가서 실컷 가지고 놀다가 이제 처녀막 뚫릴 거 같으니까 그만하자고?'
괴롭힐 땐 몰랐어요 하는 가해자의 입장 아닌가?
억울한 피해자인 나는 아예 고려를 하지 않은, 아주 뻔뻔하기 그지 없는 말이다.
이건 엄격한 재판장님도 불알을 탁 치며 내 편을 들어줄만한 사항이다.
다행이게도 방금의 전화로 도주로를 막아버렸으니 그럴 걱정은 없어졌다.
본인도 나를 갖고 논 걸 알고 있고, 그걸 알고서도 말하지 않았다는 두 가지 죄.
박서윤은 이제부터 절대로 들키지 않게 표정 관리나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못 말릴 테고, 합법적으로 오나홀을 들고 다녀도 되겠지.'
갑자기 나에게 너무 유리한 게임이 되어버렸다.
이러면 재미 없으니 최대한 핸디캡을 가지기로 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난 몰라요 하는 눈치 제로라는 스킬을.
다음날.
눈을 떠보니 박서윤한테 까톡이 와 있었다.
-박서윤 : 오늘 학교 같이 갈래? 수업 몇 시야?
1시간 전에 도착한 메시지.
현재 시간이 아침 9시인 걸 감안하면 상당히 이른 시간에 보낸 것이었다.
심지어 오늘은 교양 수업이 겹치지도 않는 날이라 얼마나 급했는지 알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씹게 된 걸 애도하며 화면을 두드렸다.
-박우진 : 방금 일어나서 못 봤어. 난 오늘 첫 수업 오후 1시야.
-박서윤 : 그럼 점심 같이 먹을래? 내가 맛있는 곳 알아볼게.
-박우진 : 알았어. 그럼 12시에 중앙 광장에서 만나자.
-박서윤 : 응~
까톡을 보내자마자 쏜살같이 도착한 그녀의 답장.
1초라도 더 빨리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캐내고 싶을 것이다.
나는 약속 시간까지 한참 남은 걸 확인하며 다시 침대로 몸을 던졌다.
급한 사람은 저쪽이지 내가 아니다.
어차피 우물은 목마른 사람이 파게 되어 있다.
그로부터 약 3시간 뒤.
약속 장소로 미적미적 나가자 박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진아! 여기야. 여기!"
"오래 기다렸어?"
"아니야, 나도 방금 수업 끝나서 온 거라 괜찮아."
그렇다고 하기에는 얼굴이 붉다.
약간 거친 숨결을 보면 뛰어온 게 틀림없다.
지금 상태에선 무슨 말을 들어도 귓등으로 흘릴 것 같다.
숨을 고를 시간을 주기로 하며 주변 나무 그늘을 가리켰다.
"날씨도 더운데 조금만 쉬었다 가자. 힘들어 보이는데."
"그럼 5분만..."
대충 시간을 때우고 있자 박서윤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의심받지 않고 정보를 캐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술술 불 예정이니 막 물어봐도 되는데.
그런 내 평온한 표정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기, 어제 했던 말 진짜야?"
"오나홀이 누구랑 연결되어 있다는 말? 내가 씻고 나서 몇 번 더 손가락을 넣어봤는데 진짜더라."
"그...그래서 이제 어쩌게?"
"어쩌긴. 당연히 복수해야지."
"흡!"
순간 이상한 소리가 났지만 못 들은 척했다.
곁눈질 하니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내 가방을 보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 오나홀 만지면서 괴롭힐 거야?"
"그것도 할 거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직접 찾아내는 거지. 누가 이런 귀여운 짓을 했는지 궁금하거든."
"찾아낸다고? 어떻게?"
"우리 집으로 배달 온 의문의 상자. 저번에 서윤이 너도 이런 적이 있었지?"
"아...아! 있었는데 난 그거 잃어버려서 몰라. 분리수거 때 한 번에 버려버려서."
극구 부인하는 박서윤.
말을 하면서도 눈알을 빠르게 굴리는 걸 보니 꽤나 당황한 듯하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추리를 이어나갔다.
"내 기억이 맞다면 대충 일주일 전이거든? 근데 3~4일 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까 범인은 여기 주변에 있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거야?"
"일요일이 분리수거 날인데 바로 다음날 누가 내 자지를 만졌어. 그 뜻은 뭐겠어? 딜도가 분리수거장에 가지 않았고, 누군가 중간에 훔쳐갔다는 얘기지."
90%의 진실과 10% 거짓을 섞은 이야기.
어설픈 부분도 있었지만 상당히 있을법하게 스토리를 짰기 때문에 설득력은 매우 강했다.
물론 내가 뭐라 말하든 박서윤은 그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말이다.
"그, 그렇구나아~ 엄청난 추리인 걸?"
그녀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찔리는 게 많은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 어쨌든 확실한 건 이 주변에 살고 있다는 거니까 천천히 찾아나가야지."
"어떤 방식으로?"
"너도 어제 만져봤으니까 알잖아? 이것저것 넣은 채로 길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한둘쯤은 나올걸?"
매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어쩌면 지금 나를 보고 있을 수도 있고."
"히끅."
"어쨌든 그렇단 얘기야.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으...응."
나는 망했다라고 혼잣말을 하는 박서윤을 뒤로한 채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
"엄청 쫄은 것 같던데 너무 겁 줬나?"
평소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어디 가고 내 비위를 맞추기 바빴던 박서윤.
그동안의 업보를 조금이라도 청산하려는 건지 점심도 아주 성대하게 대접받았다.
낮 시간에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평화를 되찾은 건 매우 기쁜 일이지만 그걸로 봐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번 주까지는 쉬게 두기로 하자.'
당장 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일정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았다.
나는 어제 한희진이 말했던 말을 되새겼다.
'오늘 알바 끝나고 자기 집에 오라고 했지? 채아 누나 몰래.'
시간대를 보면 하룻밤 자고 오는 건 확정이다.
그리고 밤새 야한 짓을 하는 것도 물론이고.
채아 누나 몰래 집에 들어가서, 신음 소리와 말소리를 숨겨가며 밤을 지낸다라.
생각보다 어려운 미션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달리 방도도 없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선 재밌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있는데.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현관문을 나섰다.
-띠링띠링.
"어서 와 오빠."
"어서 오렴."
둘이 같이 있는 건 참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다.
나는 차례대로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늘은 사이좋게 같이 있네요."
"딱히 1호점에 할 일도 없고, 우진이 보고 싶어서 기다렸지."
한채아가 밝게 웃으며 답했다.
동시에 한희진의 표정이 샐쭉해지며 자신의 언니를 째려봤다.
참으로 어이없으면서도 위태로운 장면이다.
나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채아 누나와 그걸 질투하는 동생.
둘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오늘은 1호점에 아예 안 가시는 거예요?"
"응. 오늘이 지나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우진이 못 보는데 많이 봐둬야지."
"제가 주말이나 평일에 찾아가면 되잖아요."
"그럴래?"
그녀는 입모양으로 작게 데이트? 라고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같이 데이트를 했던 게 첫 경험 날 이후로는 없으니, 채아 누나 입장에선 상당히 나랑 같이 있고 싶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많이 신경 써주지 못했구나.'
매번 만나는 거랑 관계를 맺는 것도 편의점 주변이라 쓸쓸했을 것이다.
이번엔 제대로 해주기로 마음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 밝아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채아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한희진이 핸드폰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와도 될까요?"
"응. 천천히 갔다 와."
창고에 들어오자 등에 꽂히는 시선이 사라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을 한 번 확인한 뒤에 핸드폰을 꺼냈다.
-한희진 : 오늘 잊지 않았지?
-박우진 : 안 까먹었어.
-한희진 : 그리고 언니랑 시시덕거리는 건 좋은데, 손님들 눈도 있으니까 너무 그렇지 하지마.
-박우진 : 알았어.
손님들 눈이라니. 핑계대는 것도 참 귀엽다.
빠르게 볼일을 보고 나오자 한희진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흘끗 보더니 다가왔다.
"일하는 동안 의심받을 행동은 하지마."
"난 안 하는데 네가 문제지."
"내가 뭐?"
"책상 아래서 자지를 빤다거나 박아달라는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것 말이야."
"내...내가 언제 그랬어!"
"안 그랬으면 말고."
으르렁거리는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여줬다.
탱탱한 살덩어리를 주물러주자 금방 진정이 됐다.
손을 떼려고 하자 한희진의 허리가 뒤로 내밀어지며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조금만 더 해줘. 오늘 일하는 동안은 아예 못하니까."
부끄럼을 숨기려는지 한없이 작아진 목소리.
나는 엉덩이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힘을 주며, 기분 좋은 신음이 나올 때까지 계속 만져 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알바가 끝나는 밤 11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