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선 연결 오나홀로 따먹기-269화 (269/615)

< 269화 > 269. 개강

누구인지 안 봐도 뻔했다.

문구멍으로 확인해보니 예상대로 박서윤이 길쭉한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포장에 신경 썼는지 절묘하게 붙어있는 테이프.

그럼에도 뜯은 흔적이 명백히 남아있었다.

"누구세요?"

"저 옆집의 박서윤인데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방금 씻어서 그런데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 네!"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목소리. 자신이 실수하는 바람에 온 거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자세다.

가만히 있는 택배를 제대로 확인 안 하고 가져가서 뜯고, 심지어 중고로 만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나야 아쉬울 게 없으니 최대한 천천히 나가기로 했다.

애태울수록 불리한 건 저쪽이니까.

나는 몸에 남은 물기를 제거한 뒤 대충 옷을 걸쳐 입었다.

추가로 어깨에 수건을 둘러 상황을 연출하며, 젖은 머리를 털며 문을 열었다.

끼익.

"무슨 일이시죠?"

바디워시 냄새가 좋았는지 그녀는 잠시 멍을 때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원래 목적을 떠올렸는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그녀는 말을 흐리며 상자를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어제 택배 오셨을 텐데 없어져서 놀라셨죠? 사실 저도 어제 택배가 왕창 왔는데, 실수로 그쪽 것까지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택배요?"

"네. 알아챈 건 거의 12시쯤이라 오늘 일찍 오게 되었어요."

그것 참 구구절절한 사연이지만 이젠 나랑 상관없다.

딜도를 주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받을 생각은 1도 없었으니까.

나는 미간을 좁히며 옆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정말 모르는 척 연기톤으로 목소리를 바꾸었다.

"그렇군요... 근데 전 뭐 시킨 적이 없는데요?"

"네?"

"애초에 주문한 적도 없고, 택배 온다는 문자를 받은 적도 없는데 그쪽이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분명 여기에 이름이..."

그녀는 내게 송장을 들이밀며 증거를 제시했다. 하지만 저런 것에 넘어갈 거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 철판을 하나 더 깔았다.

"부모님께 모르는 택배는 받지 말라고 배워와서요. 요즘 세상 흉흉한데 안에 이상한 거라도 들어있으면 어쩌게요?"

"그것도 그런데..."

"요즘 세상에 이름이랑 주소 알아내는 건 껌이잖아요. 그리고 상태를 보니 뜯으신 거 같은데 혹시 내용물 보셨나요?"

"네...니요."

딜도라고는 절대 말 못하겠지. 객관적으로 보면 이 상황은 아주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옆집 남자의 택배를 가져가서 열어보니 이상한 딜도가 나왔는데, 야한 짓을 하느라 너무 늦어서 다음날 아침 일찍 되돌려주려 온 여자.

길구만.

어디 이상한 소설 제목도 한 수 접어줄 내용이다.

"일단 제 것은 아니니 그쪽이 보관하고 계세요. 혹시 알아요? 잘못 온 거면 다시 회수해갈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내 말에 일리가 있는지 박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때가 딱 타이밍이다.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딜도를 가지고 되돌아가게 할 타이밍.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살살 털며, 이만 돌아갈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숨은 뜻을 알아챘는지 박서윤은 상자를 뒤로 빼며 몸을 틀 준비를 했다.

"아침부터 미안했어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만에 하나 정말로 제 물건이라면 나중에 찾아갈게요."

"알았어요."

의문에 찬 얼굴을 한 박서윤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문을 닫았다.

곧 옆으로 이동하는 발걸음과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잘 얘기한 거 맞겠지? 조금 억지 같긴 했는데.'

내 주소와 이름이 써있는 게 가장 커다란 문제긴 했지만 어떻게든 넘긴 것 같다.

이제 저 딜도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전부 그녀에게 달렸다.

10분 뒤. 컴퓨터로 인터넷을 뒤지고 있자 머릿속에 영상이 떴다.

택배는 뜯어져 있었고, 박서윤은 안에 든 물건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녀는 어제 그대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딜도를 쿡 찔렀다.

"왜 지금은 말랑말랑한거지? 어제는 딱딱했는데..."

풀발기의 형태는 유지되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나랑 동기화가 되었지만, 현재 나는 발기하지 않은 상태니까.

시간이 지나도 납득이 되지 않는지 그녀는 책상 서랍에 넣어뒀던 다이어리를 가져왔다.

사이에 들어있던 펜을 들며 천천히 상황을 써가기 시작했다.

1. 이사를 하고 짐이 전부 왔는데, 하필 옆집 남자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택배도 껴있었다.

2. 모르고 열었는데 딜도가 나왔다.

3.??????

if) 정말 남자의 택배였다?

"말도 안 되지. 남자가 딜도를 살 일도 별로 없고, 여자친구한테 쓴다고 쳐도 누가 저렇게 흉악한 걸 쓰겠어. 자기보다 더 큰 걸 말이야."

첫 가정을 펜으로 찍찍 그으며 x표시를 남겼다.

내 걸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저렇게 단정 짓다니. 그만큼 규격 외라는 뜻이겠지?

if.2) 남자 택배가 아니다.

"그럼 누가 나한테 일부러 보냈다는 소리인데..? 이게 진짜라면 좀 무서울지도."

이번 가능성은 꽤나 있어 보였는지 그녀는 펜을 툭툭 치며 자신의 생각을 써나갔다.

1. 누군가 옆집 남자인 척, 몰래 이런 물건을 보냈다.

2. 하지만 누가? 여기로 이사 온 지 하루 만에 이런 걸 보냈다는 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지켜보고 있다는 거 아니야?

오한이 들었는지 박서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바로 다이어리를 닫으며 재빨리 상자를 봉인하기 시작했다.

테이프로 이중, 삼중으로 덕지덕지 밀봉이 끝나자 구석에 처박아버렸다.

아무래도 위험한 물건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래도 버리지 않은 거에 감사해야 하나?

뭔가 아주 심한 오해가 더해진 것 같지만 내가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기회가 올 때까지 지켜볼 뿐.

나는 관음 모드가 종료된 걸 확인하며 할 일을 하러 떠났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개강의 날이 되었다.

"....오늘 9시에 첫 수업이었지? 그래봤자 오리엔테이션이라 금방 끝나겠지만."

월요일 9시부터 일정이 있다니. 정말 끔찍하다.

나는 시계를 확인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목을 뚜둑이고 있자 책상 위에 올려놓은 작은 상자가 눈에 띄었다.

주말에 사놓은 아영이의 생일 선물.

무선 연결 딜도보다는 싸지만 그래도 나름 출혈을 했던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

마음 같아서는 반지 같은 걸 주고 싶었지만, 그건 상징적인 의미가 크니 함부로 줄 수가 없었다.

싫다는 게 아니라 누구 하나한테 먼저 주는 게 애매하다는 뜻이다.

줄 거면 다 같이 줘야 하니까.

나는 학교에 갈 준비를 하며 며칠 전 그녀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오빠, 전 생일 파티보다는 따로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그건 비밀이라 당일날 말해줄게요. 그리고 혜윤이한테는 오빠 하루 대여한다고 말해놨으니까 뭐라 하진 않을 거예요.'

'대여? 내가 물건이냐?'

'그러면 몸을 2개로 늘리든가요.'

'아바타 하나 줄까?'

'됐어요.'

장난스럽게 말한 뒤 쪼옥 소리를 내며 전화를 끊은 그녀.

나는 대화 내용을 복기하며 무엇을 할지 예상해봤다.

'딱 봐도 야한 짓 같은데 뭘 하고 싶은 걸까?'

보통 플레이는 아닐 것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데이트에 끌려다닐 듯하니 옷차림에 신경 써야겠다.

그렇게 준비물을 전부 챙겨 문을 여니 윤혜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빠."

"혜윤이도 9시에 수업이라 했나?"

"오늘은 10시에 있는데, 오빠랑 아영이 언니도 볼 겸 일찍 나왔어요. 생일 축하는 해줘야 하니까요."

개강 첫 날인만큼 꽤나 화려한 모습이었다. 평소보다 진한 화장과 뭔가 더 웨이브 진듯한 머리.

옷도 날씨에 맞게 산뜻한 분위기로 입은 터라 온몸에서 빛이 났다.

스캔하는 내 눈빛이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호다닥 달려와 팔짱을 꼈다.

얼마나 세게 힘을 줬는지 물컹한 가슴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윤혜윤은 팔을 마구 비비며 볼을 갖다 대었다.

"으응... 오늘은 지금 말고는 낄 시간이 없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나중에 실컷 끼게 해줄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옆집 현관문이 소란스러워졌다.

오른쪽이 아닌 왼쪽.

끼익.

좋은 향수 냄새와 함께 나온 박서윤.

어김없이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나왔지만, 전체적인 패션에서 '나 연예인임' 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근데 저렇게 꾸밀 거면 왜 얼굴은 가린 거지? 어차피 다 알아볼 거 같은데.

금발과 은발을 섞은 신비한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 박서윤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쪽도 9시에 수업이신가 봐요?"

"네. 거기 두분도...?"

박서윤은 팔짱을 끼고 있는 우리를 매우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봤자 얼굴 대부분을 가린 탓에 표정의 일부분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보였다.

"네, 대충 비슷해요."

"그렇군요..."

그녀는 눈치껏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지이이잉...

등이 따갑다. 누가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핸드폰 화면으로 머리를 정리하는 척 뒤를 확인했다.

마스크와 모자로 무장한 여자가 우리의 팔짱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쟤네 이런 관계였어? 하는 듯한 눈빛.

그 속에는 부러움과 신기함이 섞여 있었다.

물론 전자는 '청춘이라 부럽네. 개강 첫날부터 커플이라니' 라는 뜻이 다분했다.

그나마 거울이 사방에 깔려있는 엘리베이터를 탑승하자 뜨거운 눈빛이 없어졌다.

그래도 흘끗거리는 시선은 여전했다.

-1층입니다.

문이 열렸다. 부담스러운 분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먼저 앞서나갔다.

바로 출구 쪽으로 몸을 틀자 누군가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자기야, 기다렸어요."

흑발,흑안의 엄청난 미녀. 신아영이 고양이처럼 웃으며 다가왔다.

하지만 내 뒤에서 튀어나온 박서윤을 보고는 잠시 표정을 굳혔다.

동시에 사라졌던 따가움이 다시 등 뒤에 꽂혔다.

물론 앞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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