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 245. 남자는 예쁜 여자랑 손만 잡아도 발기하고 쿠퍼액 나온다며?
짧고 진한 청바지와 캐주얼한 반팔, 그 위에 걸치고 있는 얇은 겉옷과 캡 모자.
마지막으로 한쪽 어깨에 메고 있는 작은 핸드백이 아주 인상적인 패션이었다.
심지어 새로 샀는지 떼 하나 묻지 않은 신발이 반짝거리며 시선을 빼앗았다.
빠르게 스캔을 하고 있자 한희진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오빠는 집 주변 역 하나 있지 않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있긴 한데, 여기서 타야 환승 없이 쭈욱 가잖아. 타고 내리고 하는 건 귀찮아서 여기로 왔지."
"그렇긴 하겠다. 어쨌든 약속 늦을 일은 없어서 다행이야."
한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이 위아래로 나를 훑어봤다.
감탄하는 목소리와 함께 눈을 크게 떴다.
"으음... 옷 좀 괜찮게 입었네? 편의점에서 보던 거랑은 딴판이야."
"네가 잘 좀 입고 오라고 하루 종일 난리 쳤잖아."
"그러니까 난리 안 쳤으면 후줄근하게 대충 입고 나왔다 이런 뜻이지?"
"넌 애가 왜 이렇게 삐뚤어져 있냐... 어쨌든 이 정도면 합격선은 맞겠지?"
"인정. 잘 입긴 했어."
사실 어제 채아 누나랑 데이트한 복장 그대로지만 관리를 잘한 탓인지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희진은 내 앞줄에 섰다. 방금 감았는지 찰랑이는 금발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끝 쪽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렸다. 열심히 빗질했는지 갈라짐 없이 부드러웠다.
"어때? 내 머리 예쁘지 않아? 계속 만지고 싶지?"
"그냥 할 짓 없어서 만지는 건데?"
"칫, 뭐 칭찬 좀 해주면 어디 덧나나."
스크린 도어에 비친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발 앞꿈치를 탁탁거리며 팔짱을 꼈다.
물론 다른 애였다면 나도 칭찬을 했겠지만, 뭔가 한희진한테는 해주기가 싫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금방 기고만장해지니 기를 누르고 싶달까.
당근보다는 채찍을. 주더라도 아주 가끔 주는 게 효과가 컸다.
어차피 마조히스트니까 본인도 속으로는 이걸 바라고 있을 터이다.
아니면 말고.
"그래서, xx역에 가면 뭐가 있길래 거기서 만나자고 한 거야?"
"가보면 알아. 내가 기가 막힌 곳을 알고 있거든."
딱히 더 물어본다고 알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3차 대딸 내기를 하러 나온 건데, 한희진의 분위기는 전혀 그러지 않아 더 예상하기 힘들었다.
마치 어디 소풍 나가는 아이 같다고 해야 하나? 엄청 들떠 있는 게 전신에서 느껴졌다.
어디든 어떤가. 뭘 준비했을지 기대도 되고 재미있을 것 같으니 얌전히 따라가기로 했다.
곧 안내음과 함께 들어온 지하철을 타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좌석에 붙어 앉자 한희진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맞다, 언니가 어제 처음으로 외박을 했거든? 방금 집에 돌아왔다고 연락 왔어."
"외박?"
"응. 대학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는데, 차 끌고 간 걸 까먹고 술 마셨다고 해서 하룻밤 자고 온다고 했어."
대학교 친구라는 걸 빼면 전부 사실이다. 대학생인 친구라고 해석하면 맞긴 하지만.
"점장님이 처음 외박할 정도면 엄청 친한 사람이었나 보네."
"그러게. 술도 마셨다고 했으니까."
"혹시 남자는 아니겠지?"
모르는 척 툭 던져본 말에 한희진은 콧웃음을 치며 바로 일축했다.
"언니가 무슨 남자야. 내가 몇 개월 동안 하루 종일 붙어있는데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어."
"그래? 내가 점장님이었다면 남자 막 꼬시고 다녔을 텐데."
"에휴, 역시 여자친구를 한 번에 2명이나 사귀고 있는 오빠다운 말이네."
"그냥 해본 말이지. 얼굴, 몸매, 돈 하나 빠지는 거 없는데 성실하게 사시니까 대단해서."
"마음이 맞는 사람이 나오면 알아서 연애 시작하겠지."
어쨌든 잘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안심이 됐다.
그렇게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10분을 더 지낸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 여기야. 3번 출구."
다시 천진난만한 어린이 모드로 변한 한희진의 적극적인 모습에 이끌려갔다.
도대체 어디에 꿀을 발라놨기에 저럴까? 발걸음 속도를 높이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완전 예상 외인 장소였다.
"....제대로 온 거 맞지?"
"당연하지. 아주 정확하게 왔어."
놀이 공원. 매표소에는 커다랗게 oo랜드라고 써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공중을 쳐다봤다. 레일 위의 열차가 하늘에 떠다니고, 높디높은 원판이 바닥으로 처박히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꺄아아아악 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귀를 찔렀다.
어이없어하는 내 표정을 봤는지 한희진은 핸드백에서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걱정하지마 오빠. 내가 끌고 온만큼 표값은 내가 낼게."
"아니, 오늘.... 아니다. 그래 가자."
예상과는 아주 다른 상황에 좀 당황했을 뿐, 싫다는 건 아니었다.
쟤도 나름 생각이 있을 테니 여기 온 걸 테고.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터벅터벅.
월요일이지만 방학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물론 주말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 대부분 줄 대기 시간은 10분 이내였다.
뭐부터 할까 발길 가는 데로 걷고 있자 한희진이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오빠, 혹시 무서운 거 잘 타?"
"난 여기 중에 못 타는 건 없어."
"오... 그럼 맛보기로 저것부터 타자."
손끝에는 양옆으로 흔들리고 있는 바이킹이 있었다. 저 정도는 껌이다.
"그래. 근데 너는 못 타는 거 있냐?"
"아니, 당연히 없지."
"허세가 아니길 빌게."
"오빠나."
빠르게 바이킹 줄에 섰다. 다음 차례가 우리 앞에서 끊기고, 다다음 차례 땐 1등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경쟁하듯 맨 뒤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안전벨트를 메고 옆을 보자 아주 신난 표정의 한희진이 보였다.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본다.
"어디 소리 지르나 확인할 거야."
"마음대로 해라."
나도 볼 거니까. 속으로 마지막 말을 삼키며 바이킹이 가동될 때까지 기다렸다.
우우웅... 철컥.
긴 안내음이 끝나고 진동이 울렸다. 흔들거리며 공중으로 올라가는 몸체. 얼마 지나지 않아 꼭대기에 도착했다.
정점에서 멈추고, 사람들의 비명이 커질 때쯤 한희진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질 수 없다.
"꺄아아아아악!!!!"
앞머리가 까지고 그 사이를 세찬 바람이 파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바닥에 도착한 것은 반대쪽을 지나 다시 정상에 올랐다.
잠깐 움직임이 멈춘 순간 한희진이 소리쳤다.
"오빠아! 쫄은 거 같은데에...!?"
"쫄은 건 너겠지!"
잠깐 눈을 마주친 뒤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한 뒤에야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하아... 재밌었다. 그치 오빠?"
"오랜만에 타니까 재밌긴 하네."
"아까 위에서 표정 볼만 하던데? 혹시 지린 건 아니겠지?"
"그건 내가 할 소리인데."
서로 앞머리를 정리하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느 정도가 되자 한희진은 바로 자이로드롭을 가리켰다.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을 보니 차마 싫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선선히 몸 방향을 틀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걸 보니 문뜩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얘 설마 그냥 나랑 놀고 싶어서 여기 온 거 아니야?'
예전에 채아 누나한테 얼핏 들은 걸 떠올려봤다. 많이 이국적인 외모로 인해 방어기제가 심하다고 했었나.
대학교도 가지 않고 바로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도 있고,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친구도 없어 보였으니 이렇게 놀러 오는 건 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름 말 놓고 편하게 얘기하는 건 나밖에 없다는 소리다.
'갑자기 귀여워 보이네.'
뭔가 사촌 동생이랑 같이 놀이공원 온 느낌이라 해야 하나.
진짜 목적은 서로 알고 있으니 저녁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재밌게 즐기기로 했다.
나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과 함께 그녀의 옆에 섰다.
"그렇게 빨리 안 가도 다 탈 수 있으니까 천천히 가."
"...뭐야? 갑자기 그 재수 없는 표정은?"
"어린애랑 놀아주는 어른의 표정은 다 이렇단다."
"애는 무슨.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한희진은 질린 얼굴로 손짓을 훠이훠이 저었다. 그러더니 좋은 생각이 났는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딱 붙었다.
"오빠아... 우리 손잡고 다닐까?"
"왜? 길 잃어버릴 것 같냐?"
"또 개소리한다. 이것도 다 전략이야 전략."
"무슨 전략? 미아가 되지 않겠다는 전략?"
그녀는 쯧쯧 거리며 고개를 젔더니 무슨 대단한 걸 설명하듯 검지를 쭉 내뺐다.
"잘 봐. 남자는 예쁜 여자랑 손만 잡아도 막 발기하고 쿠퍼액 나오고 그런다며? 낮 동안 계속 오빠를 애 태우면 나중에 내가 이길 확률이 올라갈 거란 말씀!"
"와... 정말 대단하십니다. 교수님. 이대로 집에 가서 논문이라도 쓰지 않으실래요?"
기대했던 내가 잘못이지. 어디서 또 이상한 걸 주워 들었나 보다.
시원찮은 반응을 보이자 한희진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추가 설명을 하려 했다.
"아니, 그러니까..."
"됐어. 자."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내기를 핑계로 데이트를 하러 나오게 한 이 애정 결핍한테 말이다.
갑자기 변한 내 태도가 수상했는지 한희진은 선뜻 잡지 못했다. 대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본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왜, 놀기 싫어?"
"아니야. 가자."
따스한 온기가 엮여졌다. 나보다도 훨씬 작고 부드러운 손.
먼저 잡자고 한 주제에 미세한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렇게 손 잡으면 내가 애태워진다고 했었지?"
"그...그렇지?"
"너나 오늘 보지 안 젖게 조심해라."
짧게 부르르 몸을 떠는 그녀를 잡아당기며 놀이공원의 중심부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