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236. 금수저 누나랑 즐거운 데이트
한채아는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높은 콧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모양이다.
물어봤자 절대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에, 옆에 있어봤자 궁금증만 증폭될 뿐이니 잠깐 도망가기로 했다.
"저는 청소 좀 하고 올게요."
"그래. 그러렴."
나는 카운터 밖을 나가며 이번 주 스케줄을 곱씹었다. 그래봤자 토, 일만 남았을 뿐이고 딱히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여유는 넘쳤다.
화장실 쪽으로 향하자 구석에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한희진이 보였다.
'진짜 조용히 있을 때는 예쁜데 저놈의 입이 문제야.'
이렇게 말해도 그 점이 매력이긴 하다. 잠깐 멈춰 얼굴을 구경하고 있자 그녀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머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진 것.
"쓰읍....하..."
예쁜 얼굴이 구겨지며 붉게 물든 눈이 떠졌다. 그녀는 귀찮은 듯이 입가의 흘러내린 침을 닦은 뒤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다시 잠들기 위한 준비 과정을 끝내자 고개가 숙여지며 눈이 감겼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자, 그녀의 고개가 홀린 듯이 내 쪽으로 돌아갔다.
눈이 마주쳤다.
"....뭘 보냐?"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침 뚝뚝 흘리면서 자는 모습."
"변태 새끼. 여자 자는 걸 몰래 관음하고 자빠졌네."
"누가 거기서 자고 있으래? 난 화장실에 가려는 것뿐이었는데 네가 보이는 걸 어떡해."
나는 불이 꺼진 화장실의 스위치를 누르며 결백을 주장했다. 내 행동에 한희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잠에서 깨서 그런지 깊이 생각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래서 몇 분 지났어?"
"10분 정도."
"별로 안 지났으니 좀만 더 잘게... 근데 카운터는? 혹시 문 잠갔어?"
"아니, 너 들어가자마자 점장님 오셔가지고 지금 대신 봐주시고 계셔."
"언니 왔구나..."
비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하자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너 힘들어 보인다고 휴식 좀 취한다고 했어. 뭐라 안 했으니까 더 쉬어."
"알았어."
그녀가 눈 감는 걸 확인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온 김에 이것저것 볼일을 마치고 대걸레를 빨고 있자 문이 열렸다.
"나 잠깐 세수 좀 할게."
"...넌 화장실에 남자가 들어 있는데 그렇게 막 들어와도 되냐?"
"어차피 오빠밖에 없는데 괜찮잖아. 우리가 보통 사이도 아니고."
20살 주제에 하는 짓은 세월 풍파 다 맞은 늙은이다.
저렇게 뻔뻔하게 철판을 깔고 제 할 일 하는 것도 엄청난 재능이라고밖에 생각이 안 든다.
찰팍찰팍.
"맞다, 우리 3차 내기 있잖아. 나 일요일에 약속 있으니까 월요일에 하자."
"응? 알았어."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친구도 없고 딱히 취미도 없는, 이른바 방에 처박혀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의 한희진.
역시나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동의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약속 잡혔다. 이런 점은 정말 좋다.
슬슬 나가기 위해 수도꼭지를 돌리자 그녀도 물 묻은 얼굴을 들며 거울을 쳐다봤다.
"오빠 근데 승부를 가르는 내기인데 보상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럼 또 뭘 원해."
"점점 판이 커지는데 보상은 그대로니까 해본 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긴 했다. 단순히 서로 조루와 허접 보지의 오명을 벗기 위해 시작한 내기였으니 말이다.
물론 그 깊은 내면에는 더욱 음흉한 속내가 있었지만.
"그래서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볼래?"
"이길 자신은 있어서 그런 말 꺼내는 거지? 지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내가 이길 텐데 뭐. 어쨌든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말을 일주일 동안 들어주기. 그런 쪽으로."
"그런 쪽?"
"뭔지 알잖아. 모른 척은."
싱글벙글 웃는 걸 보니 자기가 지는 건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 그런 쪽이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변태인데 감당이 되려나 모르겠다.
"좋아. 일주일."
"그럼 자세한 건 내일 까톡으로 정하자. 둘 다 공평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어."
사이좋게 문을 열고 나갔다. 자연스럽게 한희진은 카운터에, 나는 매장 바닥으로.
청소하며 슬쩍 카운터를 봤다.
재잘재잘 얘기하고 있는 한희진과 인자한 눈으로 들어주고 있는 한채아.
저들은 알까? 나랑 하루에 걸쳐 데이트하기로 한 사실을.
*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일요일 아침이 되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전날 한채아랑 나눈 까톡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봤다.
한채아 - 혹시 밤에 바쁜 일이라든가 있니? 언제까지 들어와야 한다 이런 거.
박우진 - 딱히 바쁜 일도 없고, 통금 시간 같은 것도 없어요.
한채아 - 다행이네. 그럼 일요일 12시에 보자.
박우진 - 어디서 만나는지는 안 알려주시는 거예요?
한채아 - 보면 알아~ 늦지 말고 나와.
의미 불명의 말만 남기고 끊긴 연락. 데이트 당일인데도 약속 장소가 어딘지 여전히 모른다.
"데리려 오는 건가? 시간만 가르쳐준 거면 그럴 가능성이 큰데."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뒤로 가기를 눌렀다. 핸드폰을 끄는 대신 한희진 이라고 써있는 방에 들어갔다.
-박우진 : 한희진 맞지?
-한희진 : 거 참 연락 존나 빨리 하네. 내가 연락처를 가르쳐 준 지가 언젠데 이제 해?
-박우진 : 차단함.
-한희진 : ㄹㅇ마ㅓ리ㅏ넝럳ㅈ르;ㄷ므라ㅣㅡ마릉ㅁㄹ
-한희진 : 기다려!!!!!!!!!!!!!!
-박우진 : 목요일에 번호 받았는데 토요일에 연락할 수도 있지 뭘 그러냐.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해?
-한희진 : 하... 됐어. 어쨌든 월요일 언제 시간 돼?
-박우진 : 나는 자유의 몸. 네가 편한 대로 골라.
-한희진 : 그래? 그럼 낮 12시에 xx역에서 만나자.
-박우진 : ㅇㅋ
그 뒤에 늦지 마라, 같이 다니기 쪽팔리지 않게 적당히 입고 와라 등 여러 잔소리가 있었다.
"첫 데이트라 엄청 신나 보이네."
글에서 기대감이 잔뜩 묻은 게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평소보다 구석구석 정성을 들여 씻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입던 옷을 꺼내 들었다.
날씨에 맞게 코디하고 있자 어느새 시간이 11시 50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점검을 한 뒤 집을 나섰다.
8월에 걸맞은 쨍쨍한 햇빛이 몸을 강타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녀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한채아의 번호를 클릭했다. 통화음이 몇 번 지나지 않아 맑은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나왔다.
"누나, 저 밖에 나왔는데 어디 계세요?"
"뒤에."
"네?"
나올 땐 아무도 없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미심쩍은 눈으로 뒤를 돌자 익숙한 물체가 스르륵 빠져나왔다.
주차장 안쪽에 숨어있던 고급진 차량.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진한 선팅을 한 창문이 내려가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늦지 않게 나왔네?"
"이러려고 약속 장소 말 안 하신 거예요?"
"어차피 차 타고 돌아다닐 건데 엄한 데서 만나기는 그렇잖니. 밖에 더울 텐데 얼른 타렴."
달칵 하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조수석을 열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달콤한 냄새가 나를 덮쳤다.
하지만 더욱 신경 쓰이는 건 그녀의 복장이었다. 언제 했는지 좀 더 웨이브 진 머리카락과 목에 x자로 고정되어 있는, 쫙 달라붙는 원피스.
가슴이 조금 파여있었지만 안전벨트 덕분에 브래지어 보일 정도로 내려가 있었다.
"또또또. 보자마자 누나 눈도 안 마주치고 이상한 곳만 보네."
"누나 얼굴은 평소에도 볼 수 있지만 여긴 자주 못 보잖아요."
"흥. 옆자리에 이런 짐승을 태워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불안해 죽겠어."
싫지는 않은지 한채아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럴 때마다 출렁이는 거대한 가슴.
저걸 보지 말라는 건 말도 안 되는 폭력이다.
그렇게 들썩이며 거울을 보던 행동이 멈추자 한채아는 선글라스를 끼며 물었다.
"일단 곧 점심 시간이니까 뭐라도 먹을까?"
"그래요."
"사실 누나가 이미 예약해 둔 곳이 있거든. 아마 호불호는 안 갈릴 테니... 괜찮지?"
아주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는 한채아. 분명 오늘을 위해 고르고 고른 메뉴일 텐데 당연히 괜찮다.
"오늘 코스 다 짜오신 거예요?"
"그... 그야 오늘은 누나 스트레스 풀어주는 날이니까, 당연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짰지."
"그럼 바로 가요. 전 누나가 좋아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아요."
"그래?"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며 몰래 웃음꽃을 피웠다. 숨긴다고 숨겼겠지만 창문을 통해 이미 전부 봐버렸다.
정말 귀엽기 짝이 없다.
"흠흠.. 출발할게."
부드럽게 차가 나아갔다. 오랫동안 달려 도착한 곳은 상당히 고급져 보이는 건물의 지하.
"여긴 어디예요?"
"3층에 oo레스토랑이라고 있는데. 혹시 들어봤어?"
들어봤다. 한 끼에 이십만 원 정도는 훌쩍 넘는다는 유명한 음식점. 눈을 휘둥그레 뜨자 한채아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손을 휘휘 저었다.
"알고 있나 보구나. 누나도 아주 가끔 오는 곳인데 맛있더라."
"많이 비싸지 않아요?"
"에이, 스트레스를 풀려면 제대로 풀어야지. 들어가자. 이쪽이야."
엘리베이터 인테리어부터 번쩍번쩍한 곳을 지나 올라갔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밀폐된 작은 방이었다.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를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가운데에는 널찍한 4인용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뭘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음... A코스 2개로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약 10분 뒤부터 에피타이저가 차례대로 나올 예정이니 천천히 즐겨주세요."
"고마워요."
문이 닫혔다. 이렇게 좁은 방에서 단 둘이 있다니. 벌써부터 야릇한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일단 오늘 그녀가 무엇을 준비했을지 모르니 얌전히 있기로 했다.
"여기 좋지 않니? 참 조용하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느낌이야."
"그러네요. 벽지부터가 달라 보여요."
"음식은 더하단다. 먹어보면 아주 깜짝 놀랄 거야."
한채아는 핸드백을 옆자리에 올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화장실이라도 가는 걸까.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식탁을 뺑 돌아 내 옆에 앉았다. 의자를 붙이며 어깨가 닿도록 했다.
곁눈질로 가슴골을 보고 있자 한채아가 허벅지 위에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그럼... 음식에 집중할 수 있게 누나가 도움 좀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