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218. 누나랑 같이 놀아줘
"하아...하아..."
적당한 빠르기로 뛰고 있자 눈앞에 1호점이 보였다. 숨을 몰아쉬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무리 한채아를 빨리 보고 싶다고 해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실례니까.
띠링띠링.
문을 열자 2호점과 똑같은 종소리가 나를 반겼다. 카운터에 있는 알바생한테 양해를 구한 뒤 창고로 들어갔다.
이젠 위치를 외운 그녀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용무를 말했다.
"점장님. 저 왔어요."
"아! 들어오렴."
손잡이를 돌렸다. 이젠 익숙한 내부와 아까 봤던 겉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한채아.
평소와 별 다를 건 없었지만 안에 들어가자 확실한 차이점이 느껴졌다.
코를 찌르는 달콤하면서 성숙한 향수의 냄새.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내 변화를 알아챘는지 한채아가 미소를 지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이거 냄새 좋지? 이번엔 새로 산 건데."
"이번이라면 언제요?"
"이틀 전 월요일에 백화점 좀 다녀왔어."
"잘 샀네요. 냄새 좋아요."
"고마워."
자매는 일요일, 월요일에 쉬니까 그때밖에 시간이 없긴 하다.
여행 갔다 와서 바로 애널 섹스까지 한 터라 힘들었을 텐데, 이걸 준비하기 위해 백화점까지 갔다 오다니.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녀의 몸을 스캔했다. 겉옷을 입었다지만 너무나도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 때문에 몸의 굴곡이 얼핏 보였다.
그런 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채아는 책상 위에 뒀던 음료수를 내게 건네줬다.
"자, 오느라 고생했어."
"잘 마실게요."
한 모금 들이켰다. 고개를 뒤로 하고 제자리로 하는 동안 눈이 마주쳤다.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우진아."
"네?"
"여행날 기억해?"
"기억하죠."
"이 누나는 편히 쉬러 펜션에 간 건데 그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왜일까요. 이 방에 있는 사람이라면 답을 알고 있는 물음.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말장난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들어있었다.
"밤에 잠을 못 자서요."
"왜 잠을 못 잤을까? 낯선 여행지라 너무 들떠서? 아니면 낮잠을 오래 자서?"
조심히 답했건만 되물음이 또 들어왔다. 분명 밤새 섹스할 걸로 뭐라 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의도로 저러는지.
뛰어올 때도 나지 않았던 땀이 이마에 흐르는 것 같았다.
"너무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너무 제 생각만 했네요."
"아니야. 여자친구들이랑 여행지에 왔는데 안 하는 게 이상한 거지. 누나는 다 이해해."
대화의 방향이 맞았는지 그녀는 활짝 웃으며 양손을 들었다. 한쪽 손으로는 시계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반대쪽 손으로 고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푹. 앞뒤로 움직이며 일련의 제스처를 취했다.
"근데 정말 열심히 하더라. 정말 밤새 할 줄은 몰랐는데 우진이 정력왕이었구나? 여자애들도 아주 죽으려고 하던데."
"하하..."
"그때도 얘기했지만 뭐라 하려는 건 아니야. 단지 휴가를 쓰고도 제대로 못 쉬었다는 게 문제지. 그래서 스트레스 풀려고 월요일에 쇼핑을 좀 많이 했는데,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지 뭐야."
자꾸 못 쉬었다는 걸 강조하는 한채아. 이대로는 얘기가 끝없이 제자리를 돌 것 같다.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으니 직구를 날려보기로 했다.
"그럼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더 열심히 일하기?"
"음... 그런 건 아니고."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갑자기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목을 이리저리 회전시키며 스트레칭 하기를 잠시,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누나 어깨가 좀 땡기는데 주물러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저 정도야 쉽지. 지금까지 몇 번이나 했던 거니까. 나는 빠르게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긴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 냄새와 온몸에서 진동하는 달콤한 향수가 코를 어지럽혔다.
거기에 어느 각도에서 봐도 압도적인 가슴의 볼륨이 눈을 고정시키게 했다.
투톤 헤어를 옆으로 치운 뒤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힘을 주어 마사지를 시작하려는 순간 한채아가 나를 제지했다.
"아, 마사지는 직접 닿아야 효과가 좋다면서? 오늘 이런 옷을 입고 왔는데 마침 잘 됐네."
누가 봐도 연기톤인 목소리로 겉옷을 풀어 헤치는 그녀. 안에 있던 것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오...'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릴 뻔했다. 시원하게 양쪽 어깨가 노출되어 있는 검은색 오프 숄더. 밝은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빛나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슴골이 살짝 드러나 있어 도저히 아래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구조.
'이 옷 만든 사람은 노벨상을 줘야 돼.'
깊은 골짜기를 보며 상념에 빠져있자 한채아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씨익 웃는 걸 보니 가슴을 쳐다보고 있던 걸 알아챈 것 같다. 애초에 그러라고 입고 온 것 같지만.
"어때? 이것도 예쁘길래 백화점에서 산 건데."
"...엄청나네요."
"뭔가 엄청난데?"
"옷도 옷이지만.. 파괴력이 심각해요."
"그래? 돈 좀 쓴 보람이 있네."
활짝 웃으며 책상으로 손을 뻗는 한채아. 또 뭘 준비한 걸까? 눈동자를 따라 움직이자 머리끈이 있었다.
그녀는 뒷머리를 잔뜩 모아 위로 올리며 새하얀 목을 드러냈다.
'진짜 제대로 꼬시려고 마음 먹었네. 이건 알고도 넘어갈 정도인데?'
얼굴, 몸매, 패션 모든 게 합쳐지니 시너지가 3배가 아닌 30배는 된 느낌이다. 넋을 놓고 있자 어느새 머리가 한 곳으로 묶여있었다.
"이제 마사지 좀 해줄래? 힘 좋은 우진아?"
"네에."
참자. 첫날부터 넘어가면 안 된다. 근데 넘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이걸 참으면 사람 새끼가 아닌데.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대놓고 대딸 쳐준다고 했던 한희진과는 달리, 한채아는 유혹만 한 상태.
이대로 덮치면 분위기가 영 살지 않는다. 물론 앞뒤 사정을 다 아는 터라 경찰서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왠지 크게 실망할 것 같아 참았다.
현실에서 우리 둘은 누나와 동생. 그 이상도 아니니 말이다.
침을 삼키며 손에 힘을 줬다.
"흐응...응...좋아. 딱 그대로.."
야릇한 신음. 일부러 내는 건지 모르겠다. 덕분에 자꾸 집중이 흐트러졌다. 손이 미끄러지는 것 같다. 가슴골에 자꾸 눈이 간다. 하체에 피가 몰린다.
아까 한 발 빼긴 했지만 내가 그걸로 만족할 리 있겠는가? 오히려 어중간한 상태에서 이런 걸 보니 더 미칠 것 같았다.
"...아? 우진아?"
"네? 네. 부르셨어요?"
"너무 마사지에 집중하고 있던 거 아니니? 몇 번이나 불렀는데."
"제가 이런 거엔 좀 진심이라 못 들었네요."
가슴에 진심이긴 하죠. 속으로 다른 말을 삼키자 한채아가 풋하고 웃더니 의자 아래에 손을 넣었다.
뒤로 젖혀지는 등받이. 물론 찰싹 기대고 있던 그녀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프릴 달린 브래지어네.'
각도가 구경하기 좋게 변한 탓에 은근하게 보이던 것이 대놓고 보였다. 이보다 더 경치가 좋은 곳이 있을까?
"우진아 그렇게 하면 아파.. 살살."
"아,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나 보다. 잠깐 손을 떼자 한채아는 몸을 비틀며 옷을 재정비했다.
의자에 주름진 것을 똑바로 피고, 어깨에 걸린 브래지어를 흔들며 말이다.
출렁...출렁...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저 정도로 큰 가슴이면 사실 들리는 게 아닐까?
요동치는 가슴을 흘끗 보고 있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다시 소파를 가리켰다.
"이제 충분해. 고마워."
"별 거 아니에요."
반발기된 자지가 이동을 방해했다. 엉거주춤하게 몸을 숙이며 아까 앉았던 자리로 향했다.
어떻게든 앞쪽을 가리며 소파에 앉자 한채아가 말을 꺼냈다.
"역시 마사지는 우진이한테 받아야 좋네."
"피로는 좀 풀리셨나요?"
"아니. 이 정도로는 택도 없지. 아직 한참 남았어."
"그럼 제가 주기적으로 마사지 해드릴게요."
"그런 뜻이 아니야."
손가락을 양옆으로 저으며 핀트를 잡지 못한다는 뜻을 내비친 그녀. 진지해진 얼굴을 보니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 것 같다.
귀를 쫑긋 세웠다.
"당분간 누나 스트레스 푸는 것에 어울려줘야겠어."
"...네?"
스트레스 푸는 것에 어울려달라니. 대충은 뭔 뜻인지 알겠는데 정확히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런 쪽의 의미로 말한 건 아닐 테고.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있자 한채아가 부가설명을 더했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야. 예를 들면, 같이 영화를 보거나 드라이브를 가거나 맛집을 찾아가거나 그런 것들. 쉽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영화, 드라이브, 맛집?
이거.. 설마 데이트 신청인가?
*
'말해버렸다아아아아...!'
한채아는 책상 아래로 주먹을 쥐며 오글거리는 걸 참았다. 침착한 표정과는 달리 속은 뒤집히기 직전.
스트레스 푸는 것에 동참하라고 포장을 했지만,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데이트하자고 꼬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태어나서 남자한테 처음으로 해보는 말. 그것도 이런 옷을 입고 3살 연하 알바생한테라니.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우진이한테 대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여유로운 얼굴을 유지해야 한다. 연상의 품격을 보여줘야 하니까.
'설마 거절하겠어?'
집에서 몇 시간 동안 코디한 옷과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많이 뿌린 비싼 향수.
어떻게 해야 섹시하게 보일지 미리 사무실에 와서 시물레이션을 돌리고 대사까지 연습했다.
보람이 있는지 아까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봤던 우진이. 주의를 더 끌기 위해 가슴골을 더욱 노출하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싸보일까 참았다.
두근두근하며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좀처럼 열리지 않는 그의 입.
'너무 급발진했나? 좀 천천히 얘기를 꺼내볼 걸 그랬나?'
사실 마사지를 할 때부터 심장박동이 빨라지긴 했다. 이름을 불러주며 온몸을 쓰다듬던 지난밤의 기억이 덮어 쓰여진 탓이다.
심지어 얼굴을 보지 않은 상태로 하니 몰입감은 2배. 긴장으로 인해 서서히 입가의 미소가 굳어갔다.
'옷이 너무 야했나? 혹시 이런 스타일을 싫어한다거나... 아니야, 저거 바지 볼록해진 것봐. 분명 관심은 있을 거야.'
우진이를 의식한 후 특정 부위를 자주 관찰했던 그녀로선 아래쪽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아까 몸을 앞으로 숙이고 간 것도 그렇고. 마사지하면서 커진 게 틀림없었다.
잡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돌이 된듯 가만히 있는 우진이.
'이건 마지막 수단인데 시급 깎아버린다고 할까...? 점장을 화나게 한 죄로? 근데 알바 그만두면 어쩌지?'
불안하다. 못 참겠다.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다. 작게 침을 삼키고 입을 열려는 찰나, 앞쪽에서 먼저 말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