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 183. 어디 놀러 간다고?
달그락거리는 분주한 부엌 소리에 잠이 깼다. 옆에 있는 핸드폰을 보니 막 12시가 된 참이었다.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우진이 일어났니?"
계속 나를 신경 쓰고 있었는지 한채아가 바로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니 앞치마를 입은 채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아침 일찍 간다고 했는데 늦게 일어나 버렸네요."
"점심까지는 비가 덜 온다고 해서 일부러 자게 냅뒀어. 이따 누나 출근할 때 주변에서 내려줄게."
"그럼 저야 감사하죠."
"그래. 여유 있으니까 천천히 준비하렴."
적당히 씻고 시간을 보내자 점심이 완성됐다. 반찬은 고기였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렸는지 한희진이 방에서 튀어나왔다.
"어? 오빠도 일어났네. 잘 잤어?"
"소파가 되게 푹신해서 괜찮았어."
"그럼 다행이고."
저 정액 도둑은 내 하체와 상체를 쓰윽 보며 식탁으로 향했다.
사람과 대화할 땐 눈을 마주치고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렇게 내 앞에는 한채아, 대각선에는 한희진이 앉게 되었다.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한우 맞죠? 비싼 건데 괜찮아요?"
"손님인데 이 정도는 대접해야지. 그보다 혹시... 밤에 이상한 소리를 듣진 않았지? 아니면 좀 피곤하다든가."
눈치를 보며 슬쩍 질문을 하는 그녀. 찔리는 게 있는지 한희진의 몸이 움찔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얼굴로 반문했다.
"무슨 일 있었나요?"
"아니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낯선 환경이니까 제대로 잠을 잤나 싶어서 물어봤어."
"음... 그러고 보니 몸이 좀 뻐근한 것 같기도 하고요. 다리에 힘도 없고."
목을 돌리자 뚜둑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그 모습에 두 자매는 동시에 눈을 피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밤의 대담한 행동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웃음만 나왔다.
그렇게 이상하게 핀트가 벗어난 대화를 하며 그릇을 비웠다.
"전 가볼게요. 어제 재워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아니야. 덕분에 집에 활기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았는 걸. 그럼 이따 봐."
"네. 늦지 않게 갈게요."
"이따 봐. 오빠."
"그래. 희진이도 잘 가고."
차에서 내리며 인사를 했다. 그래봤자 4시간 뒤에 또 봐야 하지만 말이다.
어제 정말 긴 밤을 보낸 것 같은데 시간 감각이 이상해진 것 같다.
머리를 긁적이며 집으로 들어갔다.
대충 할 일을 끝내고 편의점에 출근을 했다. 혼자 노래 들으며 앉아있는 한희진.
카운터에 들어가며 인사했다.
"안녕."
"아, 왔어?"
"근데 너 어제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오늘 출근해도 괜찮은 거냐?"
"그냥 약한 몸살인 것 같아서 나왔지. 아침에 일어나니까 많이 괜찮아졌거든."
내 정액 먹어서 그런가? 혹시 자지가 만병통치약은 아닐까?
실없는 생각을 치우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이네. 근데 점장님은 1호점 가셨나 봐?"
"응. 어제 하루 쉬었더니 일이 밀렸다고 하더라. 간지는 좀 됐어."
"바쁘신가 보네."
저번 주에는 계속 여기 머물렀는데 막상 또 사라지니 허전했다.
크게 출렁이는 가슴을 몰래 보는 맛이 있었는데 말이다.
2시간 뒤, 집중 판매가 끝나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에 한희진 혼자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진열대가 비어있었기 때문.
"어디가? 화장실?"
"아니, 물건 좀 채우게."
허리를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자 한희진이 내 팔을 잡았다.
힘을 주어 나를 앉히더니 그녀가 대신 일어났다.
"내가 할게. 앉아서 쉬고 있어."
"뭐?"
2달 알바하면서 이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 같이 일하자도 아니고, 본인이 다 하겠다라는 충격적인 발언.
나는 핸드폰을 들며 말했다.
"구급차 불러줄까? 열이 심각한 거 같은데."
"아,아니. 내가 모처럼 일해주겠다는데 왜 그렇게 말하냐?"
"그동안 많이 놀았던 건 알고 있었나 보네."
"...그건 제쳐두고. 어쨌든! 나 제정신이고 오빠는 힘들어 보이니까 한 말이야."
"내가 힘들어? 왜?"
"어..."
밤에 몰래 정액을 빼먹은 건 그렇다 쳐도, 한희진 입장에선 딱 1발 싼 걸로 알고 있을 텐데.
왜 힘들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는 행동을 보면 내가 한채아랑 애널 섹스 한 걸 전혀 모르는 눈치인데.
"그냥.. 힘들어 보여서. 그것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남자는... 1발 싸면 다시 안 서지? 막 회복하려면 오래 걸리고."
어디서 또 이상한 걸 주워들은 모양이다.
벗방하는 게 성지식은 제로에 가까운 걸 보니 경이롭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저런 혼종이 나오는 걸까?
"사람마다 다르지."
"그럼 오빠는 어떤데?"
"나? 나는 무적이지. 10발 싸도 멀쩡하니까."
"구라치네. 지나가는 개도 안 믿겠다."
"실화인데?"
"응 안 믿어. 그렇게 멀쩡하면 가서 물건이나 깔아. 내가 카운터 볼게."
손바닥 뒤집듯 말하는 게 달라진다. 그래도 나름 배려해줬던 게 귀여웠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한창 일하고 있자 한채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이 많다고 해서 퇴근 직전에야 올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인사를 하러 나가자 고운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자 그녀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고생하셨어요."
"아, 우진아. 안녕?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다."
"...혹시 제가 어제 뭐 했나요? 희진이도 그렇고 점장님도 그렇고 다 똑같이 말하는데."
"아니이... 그냥 안부 인사차 말하는 거지. 의미 부여 안 해도 돼."
손사래를 치며 극구 거부하는 한채아. 이쯤에서 넘어가기로 했다.
너무 파고들면 둘 중 하나가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의자를 가리키며 쉬라는 뜻을 표했다.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무슨 일 있었나요?"
"음... 별 건 없었는데 그냥 잡다한 일이 많아서 그랬어. 빨리빨리 처리하려고 하다 보니."
"천천히 해요. 무리하지 말고."
"우리 우진이 일찍 보려고 그랬지이."
말끝을 늘리며 약한 애교를 부리는 한채아. 어제 이후로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섹스한 영향이 생각보다 큰 모양이다.
"그렇게 부르면 너무 파괴력이 강한데요?"
"왜.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여기서 이름으로 불리니까 기분이 묘해서요."
"그럼 우진이도 채아 누나라고 부르는 건 어때?"
눈을 반짝이는 게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슴 아프지만 거절할 생각이다. 아까 말한 대로 싫은 건 아니지만 갭 차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직장에서는 존댓말이랑 칭호를 꼬박꼬박 쓰다, 섹스만 시작하면 반말이랑 이름을 불러주는 그 상황.
한 번쯤은 해보고 싶기도 했고 그 편이 훨씬 꼴려 보이기도 했다.
"저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괜찮은데, 점장님을 그렇게 부르기엔 좀 그래요."
"왜애?"
"점장님은 여기가 직장이잖아요. 밖에서는 누나라 불러줄 테니 참아요."
적당한 이유를 들며 빠져나왔다. 한채아는 잠깐 입술을 삐죽였지만 납득했는지 도로 집어넣었다.
나는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3일 뒤에 여행을 가니 휴가를 주제로 말을 꺼내봤다.
"근데 점장님은 휴가 같은 거 안 가세요?"
"음...갈까 말까 생각은 하고 있어. 마침 본사에서 열심히 한다고 이런 걸 주더라고."
한채아는 핸드폰을 꺼내더니 화면을 뒤적거렸다.
수많은 까톡방들. 그중 하나를 클릭하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어디 가족용 펜션 1박 2일 티켓을 주더라? 근데 이번 주 토일이라 고민 중이야."
"이번 주 토일이요? 시간 없는 거 아니에요? 미리 휴가 내고 하려면."
"맞아. 딱 오늘까지 결정하라더라."
"한 번 봐도 될까요?"
"그래. 여기."
폰을 건네받고 써져있는 설명을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봤다.
어디서 많이 본 건물 사진, 어디서 많이 본 주변 놀거리, 어디서 많이 본 방 내부 구조.
내가 예약한 펜션이었다.
'이걸 말해야 하나?'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아영이와 혜윤이랑 같이 가는 여행에 두 자매가 참가한다?
상상을 하자 괜히 식은땀이 났다.
"어때? 시설 엄청 좋아 보이지? 여기 1층에 수영장도 있고, 주변은 산속이라 공기도 맑다고 평이 좋더라."
"네.. 그래 보이네요."
"그래서 고민이야.. 어제 쉬었는데 토요일 휴가를 내고 또 가야 하나.. 아니면 그냥 넘기냐."
아무것도 모르는 한채아는 태연히 동생에게 결정권을 넘겼다.
"희진이는 어때? 여기 갈래?"
"음... 괜찮아 보이기는 한데 좀 귀찮기도 하고.."
"그렇지? 사실 언니도 차 타고 2시간 떨어져 있는 곳이라 귀찮긴 했어."
"그냥 집에서 쉬자. 준비할 것도 많고 왔다 갔다 힘들어."
말하는 걸 보니 안 가는 쪽으로 의견이 굳은 것 같다.
아쉬움 반, 안도감 반의 감정을 추스르고 있자 한채아가 말을 걸었다.
"아니면 이거 우진이 가질래? 주말에는 알바 없으니까 갔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사실 저도 주말에 놀러 가기로 약속이 잡혀 있어서요."
"그래? 아쉽네.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버려야겠네."
미련 없이 뒤로 가기 버튼을 연타하는 한채아.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으며 질문을 이었다.
내 마지막 말에 흥미가 동했던 모양이다.
"근데 주말에 어디 가? 여자 친구랑 데이트?"
"아뇨. 데이트라면 데이트인데.. 음..."
"뭐야? 우진이 여자 친구 있었던 거야? 어디 가는데?"
"여기요."
"응?"
"엥?"
내 폭탄 발언에 두 자매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녀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내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디 간다고 오빠?"
"아까 보여준 곳. xx펜션."
"...언제 가는데?"
"토일."
"정말이야 우진아?"
"네에."
침묵. 지금 분위기를 표현하기 딱 좋은 단어다.
가만히 눈치를 보고 있자 갑자기 한희진이 허리를 두드렸다.
"아...어제 아픈 것의 여파인가? 어디 가서 쉬고 싶다."
"언니도 어깨가 결리고 좀 머리가 띵하네.. 휴식이 필요한 기분이야."
"제가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아니야. 그걸로는 나을 것 같지 않고, 어디 산속에 가서 푹 쉬어야 괜찮아질 것 같아."
그렇게 말한 한채아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었다. 이리저리 터치를 하며 뭔가를 계속 확인을 한 그녀.
곧 만족한 표정으로 화면을 껐다.
"이번 주는 좀 바쁘겠네. 일도 미리미리 처리해야 하고.. 흐응.."
"백화점에 새로 옷이나 사러 갈까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두 자매. 분명 여자친구랑 같이 간다고 했는데, 왜 저렇게 의욕을 불태우는 걸까?
나는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카운터를 벗어났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토요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