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178. 누나는 괜찮은데.. 자고 갈래?
저걸 어떻게 거부할까. 난 절대 못한다. 아무도 들인 적 없는 자매의 비밀 공간.
거기에 내가 첫 번째로 들어가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한채아가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가기 전 그녀는 검지를 입술에 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대신 희진이 자고 있을 테니까 조용히 하는 거 잊지 말고."
"알고 있어요."
뒤를 따라 들어갔다. 처음 와보지만 익숙한 내부 인테리어.
구경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먼저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후우...고마워. 쌀은 여기다 두면 될 것 같아."
"별 거 아니에요. 근데 채아 누나, 여기 화장실은 어딨어요?"
"어...? 화장실 말이지.."
더러워진 손을 내밀며 물었다. 그걸 본 한채아는 난감한 얼굴로 턱을 살살 긁었다.
눈동자를 돌려 한희진의 방을 한 번, 자신의 방을 한 번.
"잠깐만 기다려줄래? 여긴 구조가 좀 특이해서 말이야."
어쩔 수 없다는 듯 본인의 방에 들어간 한채아.
뭔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잔뜩 들리더니 1분 뒤에 나왔다.
"일로 와."
"여기 누나 방 아니에요?"
"사실 집에 화장실이 2개 있긴 해. 근데 희진이 방에 1개, 내 방에 1개씩 각각 있는 거라서... 공용은 없어."
"진짜 구조가 특이한 집이네요."
"어차피 희진이랑 둘이서 살 거니까 별로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거든. 근데 손님을 집에 데려올 줄은 몰랐네."
그녀는 멋쩍은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게 내가 여기 올줄 누가 알았겠는가.
백화점에서 마주치고, 한채아는 휴가를 낸 상태고, 때마침 태풍도 오고.
엄청난 우연들이 겹치고 겹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어찌어찌해서 들어가게 된 그녀의 방.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농밀하고 성숙한 여자의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야하다는 뜻이 아니다. 여자 살결 특유의 냄새라고 해야 하나?
남자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한 그런 게 진동을 했다.
그게 야한 건가?
나는 방을 쓰윽 둘러보며 화장실을 찾는 척했다. 사실 알고 있지만 공식적으론 처음이니까.
그 모습을 봤는지 한채아가 내 시야를 가리며 길을 안내했다.
"그래도 내 방이니까 너무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빨리 손만 씻고 나올게요."
"같이 들어가자. 어차피 나도 씻어야 하니까."
감시하려는 건지 한채아가 내 뒤에 따라붙었다.
어차피 vr은 옷장 속에 있고, 딜도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걸 다 아는데.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쏴아아아..
손에 비누칠을 하는 도중에도 그녀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번 떠보기로 했다.
"채아 누나. 왜 그렇게 경계를 해요?"
"으응? 그런 거 아니야. 경계한 적 없어."
"계속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잖아요."
"그게... 여기까지 남자가 들어온 건 처음이라 좀 어색하네."
긴장할만했다. 집에 들어온 것도 엄청난 일인데.
거기에 한채아의 꽁꽁 숨겨진 방도 모자라 화장실까지 침투해버렸으니.
나는 물에 손을 넣으며 미묘한 공기를 느꼈다. 마치, 그렇고 그런 일을 하고 같이 씻으러 온 분위기.
자위의 귀재인 그녀라면 같은 생각을 했을 게 분명하다.
"이제 누나 씻으세요."
"어..어? 씻... 알았어."
얼굴을 붉히며 더듬는 걸 보면 100퍼다.
먼저 밖으로 빠져나왔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자 한채아가 나왔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편한 옷과 함께 말이다. 눈 둘 곳이 없다.
"음.. 일단 지금 알바생한테 출근 안 한다고 전화 좀 할게. 그 다음 희진이 깨워서 같이 점심 먹자."
"알았어요."
그녀는 머리를 마저 묶은 뒤,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찾는 게 없는지 당황한 얼굴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핸드폰 없어요?"
"응...분명 차까지 가져온 건 기억이 나는데. 어디 갔지?"
"아까 충전기에 꽂혀 있는 것 까지는 봤는데 혹시 두고 온 거 아니에요?"
내 말에 한채아는 크게 박수를 쳤다.
"맞아! 충전시킨 걸 깜빡해버렸네. 얼른 가져올 테니 저기 소파에서 쉬고 있어."
"네에."
현관문이 닫히자 나는 거실을 돌아다니며 집 구경을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벽지와 한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창문.
밖을 내다보니 상황은 더 심각해져 있었다. 7층이지만 끝이 보이지 않은 먹구름들.
비가 그치기는커녕 오히려 세찬 바람까지 동원해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이거 오늘 돌아갈 수는 있으려나?'
솔직히 자고 가는 걸 바라고 있다. 근데 한채아가 허락을 해줄지 모르겠다.
잠시 비를 피하라고 들여보내 준 건 그녀지만, 자고 가는 건 다른 문제니까.
등을 뒤로 돌렸다. 눈에 띄는 낮은 책상.
저번에 한희진이 바니걸 복장을 입고 딜도 자위한 장소이다.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색달랐다.
'근데 많이 아프다고 했는데 괜찮으려나. 걱정되긴 하네.'
한희진 생각을 하고 있자 마침 그녀의 방문이 열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나는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진 머리에 반쯤 감긴 눈. 그리고 하품하느라 크게 벌어진 입까지.
이게 내가 예상했던 얼굴이지만 현실은 전혀 아니었다.
"하아...따뜻한 물로 샤워하니까 좀 낫네."
젖은 머리를 모으며, 머리끈을 입에 물고 있는 그녀. 차라리 상상했던 모습이었다면 다행일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대충 입은 옷차림. 가슴 위에 얹은 수건과 비스듬히 입은 팬티가 몸을 가리고 있는 전부였다.
덕분에 매끄러운 몸의 굴곡이 전부 드러났다.
나는 할 말을 잃고 한희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도 내 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뭐야..잠이 덜 깼나? 왜 오빠가 여깄어."
한희진은 입에 물고 있던 머리끈을 풀며 덤덤하게 혼잣말을 했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머리 정리 하기를 잠시.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하던 행동을 멈췄다.
"엥..!? 잠깐..."
"안녕."
인사를 하자 표정이 급격하게 바뀌어갔다.
"어...어...?"
당황, 혼돈, 경악 온갖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고.
한계를 넘어선 정보량을 다 처리했는지, 뇌가 드디어 명령을 내렸다.
"보지마!!!!!!"
한희진은 팔로 가슴을 가리며 바로 방으로 사라졌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고 있자 곧 문이 열렸다.
아까처럼 활짝은 아니고 머리만 빼꼼 내민 채로 말이다.
"뭐..뭐야. 어떻게 들어왔어. 아니, 왜 여깄어?"
"비 피하러 왔지."
"뭐?"
"그냥 백화점에서 점장님 만났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네."
"언니는 어딨는데?"
"차에 핸드폰 두고 와서 잠깐 가지러 가셨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 천천히 대답해주고 있자 현관문이 열렸다.
나이스 타이밍이다.
"우진이가 말한 대로 차에 있더라. 아, 희진이 일어났구나?"
"....언니 오늘 출근 안 해?"
"동생이 아픈데 어떻게 혼자 두고 가니. 하루 휴가 냈고 대타는 구해놨으니까 오늘은 푹 쉬어."
말하는 걸 보니 한채아가 휴가 낸 걸 몰랐던 것 같다.
하긴, 저러니까 거실에 저런 복장으로 당당하게 나왔지.
"일단 일어났으니까 밥부터 먹자. 언니가 죽 사왔어."
"잠깐만.."
약 30분 뒤, 밥을 먹은 한채아는 방에서 업무를 한다고 들어갔다.
한희진도 자기 방으로 쌩하니 들어간 상태.
내가 있을 곳은 거실밖에 없었다. 나는 바깥 창문을 보며 멍을 때렸다.
그때 누가 내 등을 쿡쿡 찔렀다. 뒤를 보니 한희진이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오빠, 잠깐 내 방으로 와봐."
"왜?"
"빨리."
목소리를 낮춘 걸 보니 몰래 들어오라는 뜻인 것 같다.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철컥.
"무슨 일 있어?"
"아까 봤지?"
"뭘?"
"뭐겠어..."
그녀는 말을 흐리며 팔로 가슴을 가렸다. 아까의 일이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위부터 아래까지 전부 스캔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야하고 망가진 모습도 만만치 않게 봤기 때문에, 별 감흥은 없었다.
그래도 한희진의 멘탈을 보존시켜 주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아니, 못 봤어."
"솔직하게 말해봐. 구라 치지 말고."
"성희롱으로 고소하고 그런 거 아니지?"
"절대 안해."
확답을 받자 바로 대답했다.
"봤어. 몸매 좋던데?"
"변태 새끼.. 그걸 그새 또 다 보고 있었어?"
"네가 보여준 거지. 왜 내 탓을 하냐?"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막상 얌전하게 앉아 있는 한희진.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더니 지나가듯 말을 툭 던졌다.
"진짜 몸매 좋냐?"
"가슴 크지, 골반 크지, 허리 가늘지 .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는 다 가지고 있네."
"그거 성희롱이야. 경찰 부를게."
그녀는 옆에 있던 핸드폰을 들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기분 좋았나 보다.
"그거 물어보려고 부른 거야?"
"아니, 나는 맨몸 보여줬는데 가만히 있으면 불공평하잖아."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뭔가 어디서 많이 본 전개 같은데? 나는 어느 망가의 익숙한 내용을 떠올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희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예상대로였다.
"오빠도 보여줘."
"내 몸 보여달라고?"
"어.."
자기가 말하고도 부끄러웠나 보다. 그녀는 베개를 끌어안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보여주는 건 별 문제없다.
오히려 환영이지만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한 계기가 궁금했다.
혹시 어제 아바타의 몸을 보고 흥미가 생긴 건가? 떠오르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복근이라도 보여줄까 했지만, 나와 아바타의 차이점이 없다는 걸 알아채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남자의 몸을 처음 본듯한 그녀가 바로 눈치채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좋아. 대신 잠깐이니까 잘 봐."
반팔 배 부분을 손으로 잡자 한희진의 눈동자가 고정됐다.
살짝 들어 올려 잘 갈라진 식스팩을 드러냈다.
"와아... 몸 좋네.."
넋을 놓은 한희진. 어제 아바타의 푸른색의 식스팩과는 비교 자체가 안될 것이다.
아무리 몸이 좋다고 해도 이질감이 느껴질 테니까.
고개를 내밀며 점점 집중하는 게 느껴질 때, 바로 옷을 내려 숨겨버렸다.
"더 보여줘."
"너도 보여준 건 5초 정도였잖아."
"으으... 대신 나는 다 보여줬잖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래서 나도 다 벗으라고?"
"그러면 좋.."
"우진아! 어딨니?"
협상을 하려던 차, 밖에서 한채아가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방문 앞까지 도달했다.
똑똑.
"희진아. 혹시 우진이 못 봤니?"
"으응! 그게 화장실 쓰고 싶다 해서 지금 내 방 안에 있어."
"그러니?"
"언니는 업무 보는 중이라 방해하기 미안하다고 해서 내가 들여보내 줬어."
"그렇구나. 그냥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아서 찾았어. 별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마."
"알았어."
발걸음이 멀어지고, 한채아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숨을 몰아 쉬었다. 그녀를 보자 뭔가 불만인 표정으로 뾰로퉁하게 앉아있었다.
"들키면 큰일 날 뻔했네. 난 적당히 나가볼게."
"나 심심한데 좀 더 있어줘. 어차피 거실 나가도 할 거 없잖아."
"아프다며. 안자?"
"아까 샤워하고 죽 먹으니까 나아졌어."
이렇게까지 나를 원하는데 나가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렇게 한희진과 저녁이 되기 전까지 노가리를 까며 시간을 보냈다.
아쉽지만 내 몸을 더 보여달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 말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본인도 아는 모양이다.
그래도 오랫동안 대화를 하니 나름 친해진 기분이다.
편의점에서 개인적인 얘기는 거의 안 하던 그녀지만 집이니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진 듯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저녁 7시.
한여름이라 한창 밝을 때지만, 창문 밖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핸드폰을 켜 날씨를 검색해봤다. 전부 부정적인 소식뿐이었다.
긴 한숨을 쉬자 뒤에서 한채아가 말을 건넸다.
"우진아. 좀 있으면 태풍의 눈이 근접해서 비바람이 약해진다고 하거든?"
"그나마 좋은 소식이네요. 슬슬 집에 갈 준비할게요."
"근데 그게 내일 오전이래."
"네?"
"그래서 말인데..."
이 말을 하는 게 처음인지 침을 꿀꺽 삼킨 그녀. 긴장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꺼냈다.
"누나는 하룻밤 정도는 괜찮은데, 혹시 자고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