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177. 누나 집에서 쉬고 갈래?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딱히 잠이 부족한 건 아니라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여행까지 남은 시간은 4일. 일어난 김에 세부적인 계획을 짜기로 했다.
"토일에 놀러 가는데.. 미리 렌트할까?"
기차를 타면 1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펜션. 당연히 차보단 기차를 이용하는 게 편하지만,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해야 하나.
남자라면 다 공감할 여러 상황이 있지 않은가. 그걸 포기할 순 없다.
면허도 수능 끝나고 따놨으니 문제없고.
"그럼 오늘 빌리기로 하고.. 혹시 사갈 건 없나.."
거기에 웬만한 건 다 준비되어 있을 테고, 상점에도 필요한 건 대부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가가 만만치 않을 게 뻔했다. 거기에 성수기인 걸 감안하면 2배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가뜩이나 펜션 빌리는 데에 돈을 썼는데 여기서라도 아껴야 한다.
나는 살 목록들을 적으며 계획을 천천히 짜나갔다.
몇 시간 뒤. 4인용 차를 하나 예약 완료했다.
지금 가져가면 둘 곳도 없고 추가금도 붙으니 금요일 낮에 픽업하기로 했다.
제일 큰 문제를 해결했으니 자잘한 것들을 보기로 했다.
말 나온 김에 바로 백화점으로 향했다. 고기나 소시지를 사는 목적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수영복.
조금 무리해서라도 간이 수영장이 딸린 펜션을 빌린 이유다.
신아영과 윤혜윤의 수영복이라. 생각만 해도 자지가 서는 느낌이다.
내가 수영장이 있다고 그렇게 강조를 했으니 그녀들도 절대 까먹을 리 없다.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입어달라면 당연히 입어줄 테지만, 장소와 상황이 맞아야 꼴리는 맛이 증폭되는 거 아니겠는가.
하루빨리 보고 싶지만 나중을 위해 참기로 했다.
터벅터벅.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니 남성 의류매장에 도착했다. 그녀들의 수영복도 좋지만 일단 내 것부터 챙겨야 한다.
집도 아니고 자취방에는 그런 종류의 옷은 아예 없으니 말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형형색색한 옷들을 내놓은 매장에 먼저 들어갔다.
마네킹에 서핑보드가 들려져 있는 게 내 눈을 이끌었기 때문.
"안녕하세요. 원하시는 게 있으면 찾아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고를게요."
"네에~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웃으며 다가오는 점원은 물리치고 수영복 코너에 들어갔다.
"...."
하와이 패션이라 해야 하나? 화려하고 꽃밭 투성이인 디자인의 옷들이 가득했다.
이런 건 부담스럽다. 빠르게 넘기며 대충 몇 개를 골라 탈의실에 들어갔다.
거울을 보며 갈아입고 있자 생각보다 괜찮은 것들이 많았다.
헬스로 다져진 근육 덕분에 옷빨이 상당히 잘 받았기 때문. 당당하게 상체를 노출하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
"근데 이건 너무 튀어나온다."
꼬툭튀는 전부 걸렀다. 다른 사람들도 있을 텐데 이건 좀 그렇다.
남은 것들을 고르고 골라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그 다음은 선글라스. 멋을 부리는 용도도 있지만, 운전할 때 햇빛 가리개로도 사용할 수 있으니 필수템이다.
그렇게 쇼핑을 마치고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식품 매장과 음식점들이 즐비한 층.
마침 배도 출출하겠다, 먼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맛집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자 시선을 강하게 잡아끄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군청색과 보라색이 섞인 투톤 웨이브.
내 장담하는데 저런 머리를 한 사람은 대한민국에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봤다.
인파에 섞여 보이지 않았던 빵빵한 엉덩이와 가슴이 눈에 들어오자 확신이 들었다.
나는 어깨를 살짝 찌르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점장님."
"에? 누구..?"
머리를 찰랑이며 고개를 돌린 미녀. 고급스런 향수 냄새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그녀는 나를 보자 눈을 크게 뜨며 손을 흔들었다.
"우..우진아? 여긴 어쩐 일이야?"
"저는 뭐 좀 사러 왔는데, 점장님은 곧 출근할 시간 아니세요?"
"...채아 누나. 밖이잖아."
"아, 채아 누나."
이름을 불러주자 그녀는 밝게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우울한 얼굴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오늘 하루 휴가 냈어."
"휴가요?"
"응. 희진이가 많이 아픈 것 같아서... 돌봐줄 사람은 필요하잖니? 혼자 내버려둘 수도 없고."
"두 사람 다 빠지면 편의점은 누가 봐요?"
"급하게 구했어. 시급 1.5배로 준다고 하니까 어떻게 되긴 하더라."
역시 돈이 최고다. 솔직히 한채아의 재력이면 24시간 알바를 돌려도 될 듯 한데.
게을러지지 않으려 일부러 편의점에 나오는 것 같다.
"그럼 대타로 저 부르시지."
"음.. 우진이는 수목금 알바 있으니까, 오늘도 하면 힘들 것 같아서 일부러 연락 안 했어."
"전 튼튼해서 괜찮은데."
나는 웃으며 방금 한채아가 했던 말을 복기했다.
한희진이 아프다고 했었지? 분명 어제까진 멀쩡... 하진 않았지.
공중 화장실에서 3번은 가버리고 땀범벅으로 오랫동안 있었으니 아플 요인은 충분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몸에 힘이 빠진 상태에서 저러면 그럴 수밖에.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조심히 물었다.
"그럼 여기는 왜 오신 거예요?"
"희진이한테 줄 죽을 사러 왔어. 여기가 제일 맛있게 잘하거든."
"그래요? 그럼 저도 하나 사볼게요."
"나 믿고 사는 거야? 요 귀여운 녀석."
한채아는 내 배에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하지만 바로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맞은 부분을 문질렀다.
물렁물렁한 살이 아닌, 딱딱한 복근이 있는 터라 잘못 때린 모양이다.
"으응... 배도 단단하네. 혹시 식스팩 있는 거 아니야?"
"있어요."
"정말?"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한채아. 시선을 쓰윽 주더니 고개를 획 돌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죽을 하나 주문했다.
곧 그녀의 몫이 나왔고, 나를 기다리려는 건지 한채아는 옆에 있던 쇼핑 카트에 팔을 올렸다.
무언가 아주 많이 들어있는 안쪽. 다른 사람 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거 채아 누나가 산 거예요?"
"응? 아.. 이거? 원래 뭐 사러 오면 한 번에 사는 성격이라. 필요한 것들 왕창 샀지."
대부분 요리 재료나 식품 같은 것이었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쌀 20kg 이것도요?"
"지금 당장 먹을 게 없어서 샀어. 이거 든다고 허리 나갈 뻔했잖니."
그녀는 장난으로 허리를 툭툭 치며 웃었다. 그럴 때마다 살짝씩 흔들리는 가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잠깐이라도 봤다간 바로 내 시선을 눈치 챌 것이다.
필사적으로 한채아의 눈동자에 집중하며 말을 이었다.
"햇반으로 때우고 인터넷으로 시키는 게 편하지 않나요?"
"뭐 어때, 차도 가져왔는데 온 김에 겸사겸사 다 사는 거지."
20kg면 완전군장 무게인데 괜찮은 건가? 가뜩이나 저 무거운 가슴도 들고 다니느라 힘들 텐데.
나는 버티기 힘들어 보이는 브래지어를 응원하며 죽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럼 우진이는 이제 볼일 다 끝난 거야?"
"저는.."
아직 사야 할 게 남아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바로 돌아갈 것 같은 분위기라 포기하기로 했다.
좀 더 같이 있고 싶기도 했고, 나중에 마트에 가서 사도 늦지 않으니까.
"네에. 저도 살 건 다 샀어요."
"그럼 갈까?"
"이제 제가 끌게요. 이리 주세요."
"고마워. 역시 든든하다니까."
손잡이를 건네받자 내 옆에 딱 붙는 한채아.
나는 부러운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우진이는 어쩔래? 태워다 줄까?"
트렁크에 물건을 다 넣자 한채아가 은근하게 물었다.
같이 가길 바라는 듯한 말투. 기대감이 묻어있어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음... 그럼 누나 집에 가도 돼요?"
"어? 내 집? 왜?"
"짐도 많은데 제가 문 앞까지 들어드릴게요. 저 무거운 것들 직접 옮기다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이거이거... 시급 올려달라고 은근히 압박하는 거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해도 실실 웃는 걸 보니 마음에 들은 듯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내 볼을 꼬집으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이 닿기 직전, 한채아는 재빨리 손을 내렸다.
부끄러운 듯 헛기침은 두어 번 뱉으며 말이다.
"미안, 누나가 너무 나갔네. 친동생 같아서 나도 모르게."
"전 괜찮은데요. 만져볼래요?"
만져보라는 말에 그녀는 볼 대신 어깨와 팔을 곁눈질로 봤다.
무언가 강한 열망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괜찮아. 그럼 우리 집으로 갈게?"
"넵."
안전벨트를 매자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차. 지하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분명 백화점에 들어오기 전에는 화창했는데, 지금은 우중충한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오늘 비 온다고 했나요?"
"응? 뉴스 안 봤어? 오늘부터 태풍 온다고 했는데. 한 3~4일 정도?"
"태풍이요?"
"응. 그래서 오늘 백화점에 필요한 거 다 사러 온 건데, 우진이는 몰랐구나."
뉴스 담쌓은 지 오래라 몰랐다. 나는 재빨리 여행 날짜랑 태풍 시기를 계산해봤다.
다행히 겹치지는 않았다. 어쩌면 더 좋은 일 일수도 있다.
보통 태풍이 지나간 다음에는 날씨가 엄청나게 깨끗하지 않은가? 여행에 딱 맞는 분위기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럼 비 오기 전에 빨리 가요."
"급한 일 있으면 누나가 다시 데려다줄 테니까 걱정마."
나는 갈수록 짙어져 가는 구름을 보며 시트에 몸을 묻었다.
다 하늘의 뜻인데 내가 걱정해서 뭐하겠는가.
우르르쾅쾅!!! 콰콰광!
귀를 울리는 커다란 소음과 빛나는 섬광. 한채아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마른 날벼락이 내리쳤다.
그것도 한두 번 아닌, 끝없이.
제발 집에 갈 때까지 비가 오지 않길 바랬지만 이미 늦은 듯하다.
나는 앞유리에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보며 마음을 비웠다.
잠시 뒤, 주차가 끝나자 트렁크에서 짐을 꺼냈다. 쌀가마니를 번쩍 들자 솟아오르는 내 힘줄과 근육들.
옆에서 한채아가 흘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 앞에 도착했다.
물건들을 내려놓자 그녀는 비밀번호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우진아."
"네?"
"지금 비 엄청 많이 오는데 괜찮겠어?"
"우산만 빌려주시면 제가 알아서 갈게요."
"아니야. 아까 누나가 태워다 준다 했잖아. 데려다줄게."
"아뇨아뇨. 정말 괜찮아요."
내가 여기 온다고 먼저 말을 꺼냈는데 그것 때문에 한채아가 고생하는 건 싫었다.
지금 동생도 아픈 상태라 가뜩이나 심란할 텐데.
손을 휘저으며 거절을 하자, 그녀는 가슴 아래에 팔짱을 꼈다.
비는 오고, 동생은 아프고, 그렇다고 나를 혼자 돌려보내기는 미안하고.
"음..."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던 한채아. 내 눈치를 한 번 보며 문을 가리켰다.
"그럼... 비 그칠 때까지 쉬었다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