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169. 숨바꼭질
"오후쯤에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어쨌든 이럴 때가 아니에요. 빨리 숨어요."
그녀는 침대에 널브러진 속옷을 옷장 한구석에 처박아두고는 새로운 옷을 꺼냈다.
그동안 나는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 작은 원룸에 숨을 곳이 있겠는가?
침대 아래도 만화에서나 가능한 거지, 다리가 너무 낮아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남은 장소는..'
화장실. 재빨리 옷을 챙겨 안쪽으로 피신했다. 그녀는 나를 흘끗 보더니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절대 소리 내면 안돼요. 제가 어떻게든 빨리 나갈 테니까."
"알았어."
위이이잉.
그때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안에서 아무 대답이 없자 부모님이 전화를 건 것.
윤혜윤은 몇 번 목을 가다듬더니 막 일어난 목소리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어? 엄마. 무슨 일이야?"
"%^%$$&**%%$"
"벌써 왔다고? 아.. 나 방금 일어나서 못 들었어. 잠시만."
몇 번 말을 주고받던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불 끄고 문 닫을 테니까 뭐라도 붙잡고 있어요. 이제 진짜 들어올 거니까."
"걱정마."
"걱정이 아니라, 진짜 들키는 순간 죽을지도 몰라요."
진지한 표정에 괜히 식은땀이 났다.
"그럼 화장실에 부모님이 들어오는 것만 막아줘."
"최대한 해볼게요."
그녀가 나가고, 어둠이 잠식하기 전 아바타를 하나 꺼내 밖으로 보냈다.
주변에 그녀가 있는 걸 아는 상태니 문이 닫혀도 조종이 가능했으니.
이렇게라도 상황을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다.
끼익.
현관문이 열리고,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엄마 아빠 엄청 빨리 왔네요?"
"우리 딸이 다쳤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오후에 오신다면서요."
"안돼. 그럼 늦으니까."
180cm 정도 되어 보이는 잘생긴 중년의 남자.
문을 열땐 근엄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 앞에 선 딸을 보자마자 입꼬리가 올라갔다. 딸바보가 분명하다.
"원래 차를 타고 가려 했는데, 이 양반이 절대 안 된다며 기차를 예약했지 뭐니."
"그럼 미리 연락이라도 하지. 몰랐잖아요."
"아침 일찍 전화하면 미안하기도 해서 도착하기 1시간 전에 연락했는데 안 받았더구나."
"으으.. 어쩔 수 없죠."
윤혜윤이 나이를 먹으면 저런 모습일까?
주름만 빼면 언니와 동생으로 봐도 될 정도로 동안의 중년 여성.
나는 부모님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저렇게 멋지신 분들이 결혼을 했으니, 윤혜윤같이 예쁜 애가 튀어나오는 건 당연해 보였다.
"그..그럼 출발해요."
"일단 손가락부터 보자꾸나. 어쩌다 다쳤니?"
"헬스 하다가 손가락이 미끄러져서요. 인대가 살짝 늘어났데요."
"저런.. 조심하지. 운동하지 말라고는 안 할 테니, 다음부턴 조심하거라."
"네에."
바로 갈 거라는 기대는 무참히 밟혔다.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
윤혜윤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근데 이게 무슨 냄새니? 창문도 다 닫아놓고."
"아...! 그게요. 벌레가 많아서 닫아놨어요. 그리고 방금 일어나서 환기하는 걸 깜빡.."
그때 아버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지럽혀진 침대를 쓰윽 보더니 한 마디 했다.
"에어컨이라도 틀지. 침대도 다 젖은 게 밤새 땀 흘린 거 같네."
"아..아빠! 다 큰 딸의 침대에 마음대로 앉으면 어떡해!"
윤혜윤은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허허 웃으며 일어나는 아버지. 방을 쓱 둘러봤다.
"뭐 가져갈 건 다 챙겨놨니?"
"그.. 노트북 하나만 챙기면 돼요. 나머지는 집에 다 있으니까."
"근데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 하니? 뭐라도 숨겨놨나."
"아, 아니요. 엄마 아빠 앞에서 숨길 게 뭐가 있어요."
"그렇지?"
변명을 하던 그녀는 순간 다리를 안쪽으로 모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아래를 보자 바로 이해가 갔다.
밤새 질내사정한 덕분에 가득 정액을 보관하고 있던 보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꿀렁꿀렁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왜 그러니? 어디 아파?"
"아..아니 그냥 배가 아파서요. 어쨌든 밖에 나가 있으세요. 볼일만 보고 바로 나갈 테니까."
"천천히 하렴. 여기서 기다릴 테니."
"아뇨아뇨아뇨. 여기 방음이 잘 안돼서요. 그리고 저 옷도 갈아입어야 되니까.."
윤혜윤이 강제로 등을 떠밀자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를 한대 툭 쳤다.
"우리 나가서 기다려요. 개인 공간인데 계속 있는 건 부담스럽겠죠."
"거참. 알았다. 그럼 짐은 없는 거지?"
"응. 아빠."
"10분 정도 기다릴 테니 빨리 나오렴."
"네에."
문이 닫히자 그녀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바로 화장실 불을 키더니 나를 불렀다.
"오빠 일단 밖에 보내는 데는 성공했어요."
"다행이네. 눈치는 못 채신 것 같고.. 그럼 바로 가는 거야?"
"아마 옷만 갈아입고요."
"빨리 손가락 낫고 푹 쉬다 와."
나는 그녀를 껴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줬다. 기분 좋은 한숨을 내뱉으며 얼굴을 위로 올리는 윤혜윤.
진하게 키스를 해준 뒤, 손을 풀어줬다.
"적당히 20분 후쯤에 나와요."
"알았어."
신발을 신으며 윤혜윤이 손을 흔들어줬다. 하지만 옆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오빠.. 혹시 신발도 숨겼었나요?"
"어?"
안 숨긴 거 같은데...? 너무 급해서 신발까지는 생각이 안 났다.
내 대답이 없자 윤혜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에이... 못... 봤겠죠?"
"미안, 아까 너무 경황이 없어서 미처 못 챙겼다."
"아니에요. 저도 몰랐는 걸요. 만약 봤다 해도 새로 산 신발이라도 우길게요."
그녀는 탁탁 앞꿈치를 바닥에 치더니 몸을 빙글 돌렸다.
"진짜 갈게요. 연락 자주 해줘요."
"알았어."
끼익.
방안에 혼자 남았다. 나는 잠시 신발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흔적을 하나 남긴 탓에 불안하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는 방안을 쭉 둘러보며 정리를 시작했다. 며칠 동안 비어져 있을 텐데 깨끗하게 해줘야지.
세탁기를 돌리고 환기를 시켰다.
이 방 비밀번호를 모르니 적어도 빨래가 다 될 때까지는 있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할 일을 마치고 침대에 앉아있자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씹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뒷자리가 익숙했기 때문.
"이거..혜윤이 번호 뒷자리랑 똑같은데..? 설마."
보통 가족끼리는 뒷자리가 비슷하거나 똑같은 경우가 많았다. 그럼 이건.
침을 꿀꺽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머. 목소리 좋네. 안녕하세요. 혜윤이 엄마인데 잠시 통화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혹시 혜윤이 남자친구분 맞으신가요?"
대뜸 일직선으로 꽂히는 질문. 이미 내 번호도 알고 있는데 숨기는 건 의미가 없다.
혜윤이가 알려줬을 게 분명하니.
"...네. 맞습니다.
"왠지 요즘 혜윤이가 이상하더라 싶더니 역시였네요. 아! 걱정마요. 남편한테는 비밀로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옆에서 윤혜윤이 엄마 뭐하는 거야. 하고 말하는 것 같긴 한데...
"그 양반은 딸바보라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아뇨, 사과받으려고 전화한 게 아니에요. 혜윤이도 성인이고 자취하는데 이 정도쯤이야 예상했죠. 그냥 잘 부탁한다 이 말 전하고 싶어서 했어요."
그녀는 후훗 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방안에 들어가자마자 딱 느꼈죠. 어질러진 방과 이상한 냄새. 그리고 사이즈가 맞지 않는 커다란 신발까지. 게다가 요즘 혜윤이가 더 예뻐지는 터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 거죠."
역시 신발이 핵심이었던 것 같다. 왜 그걸 생각 못 했을까.
대답을 하려던 때, 핸드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음.. 기차가 와서 이만 끊어야 할 것 같네요. 그럼 혜윤이 잘 봐주시고, 나중에 시간 되면 얼굴 한 번 봐요."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전화가 끊겼다. 얼굴을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물론 내 주변 여자가 더 있다는 걸 알고도 저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갑자기 스케일이 커진 느낌이다. 마침 세탁이 끝났다는 삐빅 소리를 들으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
나중에 혜윤이한테 걸려온 전화로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아빠가 담배피러 간 사이 엄마가 넌지시 물어봤다는 것. 끝까지 모른다 했지만, 계속된 증거로 인해 결국 털어놓고 내 번호를 알려줬다는 것.
그리고 5일 정도 머물다 온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그녀와 했던 문자를 보고 있자 전화가 걸려왔다.
[신아영]
"여보세요?"
"오빠?"
"응. 아영아. 오늘 모델 알바 마지막 날이지? 언제 출발할 거야?"
"오늘은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왜? 끝나고 데이트 안 해도 괜찮아?"
"오늘 마지막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길게 한다고 해서요. 괜히 따라왔다가 6시간 이상 기다릴 수도 있어요."
내가 아무리 아영이를 좋아한다 해도 6시간 이상 앉아있는 건 무리다.
촬영은 점심 먹은 뒤인 2시에 시작한다고 했고, 그럼 최대한 빨리 끝나도 8시라는 얘기다.
"데이트하기 많이 늦은 시간이긴 하네."
"그렇죠? 그래도 다음 주에 펜션 가서 놀 거니까, 오늘 하루쯤은 참아볼게요."
아쉬운 목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신아영. 유난히 크게 들리는 걸 보니 스피커 모드로 바꾼 것 같았다.
"대신 아바타로 따라갈게. 옆에 있어줄 테니까 열심히 해."
"오히려 고맙죠. 계속 있어주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데. 그럼 전 준비 좀 해야 돼서 이만 끊을게요."
"그래 이따 봐."
쪽 소리와 함께 통화가 종료됐다. 나는 핸드폰을 옆에 두고 대형 오나홀을 가져왔다.
아영이를 생각하자 바뀌어가는 체형. 그녀한테 이걸 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현실 섹스가 아무리 좋다 해도 이건 이것대로, 저건 저것대로 장단점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오나홀을 사용할 경우, 몰래 박아도 아무 티도 나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이것 앞에서는 무력했다.
관음 모드를 사용했다. 투명을 유지하며 말이다.
"흐흐응... 뭘 입고 갈까."
거울 앞에서 옷을 고르고 있는 신아영.
이것저것 많이 꺼내놨지만 이미 마음속에 찍어둔 게 있었는지 바로 몇 가지를 들어 올렸다.
"오늘 오빠랑 데이트도 없으니까 대충 입어도 되겠지."
상체를 완전히 덮는 박스티와 군청색의 반바지. 대충 입은 것 치고는 눈이 부셨다.
특히 저 헐렁헐렁한 상의로도 가릴 수 없는 가슴. 당장 만지고 싶다.
하지만 깜짝 파티를 위해 필사적으로 참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니까.
잠시 뒤, 그녀는 집을 나서 지하철역에 들어갔다.
주말이라 붐비는 내부. 곧 알림과 함께 지하철이 앞에 멈췄다.
사람들이 잔뜩 튀어나왔지만 그만큼 또 들어갔다.
신아영은 최대한 몸을 움츠러들며 문 앞자리에 섰다.
넘어지지 않게 자세를 잡고 핸드폰을 드는 순간.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