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165.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희진이 도와줘요."
"넵. 만약 시키실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
그럼 5시간 내내 같이 있는 건가. 한채아가 여기 머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게다가 어제 그런 일을 겪은 뒤인데, 마침 오늘 이런 타이밍이라니. 참으로 절묘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준비를 하러 들어갔다.
시간을 흘러 집중 판매 도중. 나와 한희진은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계산을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잠시 손님이 끊긴 틈을 타, 포스기에서 눈을 떼지 않던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간을 좁히며 말이다.
"오늘 언니 뭔가 이상하지 않냐?"
뜬금없는 질문. 물론 나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만 모르는 척을 했다.
"뭐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니야, 내 눈은 못 속여. 분명 뭔가가 있어."
"발견하면 나도 가르쳐줘라. 그렇게 말하니 궁금해지네."
내 말에 한희진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
"오빠 말하는 건데?"
"...갑자기?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이상하게 언니가 오빠를 피하는 거 같아. 혹시 해고 시그널인가?"
"나 짤리면 굶어 죽는데.. 설마."
"흠흠...저기, 박우진 씨. 같이 있기 불편해서 그런데 내일부터 나오지 말아주세요. 잔금은 바로 드리겠습니다."
"뒤질래?"
한희진이 키득대며 한채아 성대모사를 했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추고 우린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앞을 봤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일하고 있는 한채아. 둘이서 카운터를 보라며 빠져나간 그녀였다.
옆모습을 관찰하고 있으니 손님이 카운터에 다가왔다.
다시 눈을 돌리려고 할 때, 공교롭게도 한채아와 눈을 마주쳤다.
휙.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빠르게 내 시선을 피했다.
평소라면 눈인사라도 해줬을 텐데. 확실히 다른 반응이다.
"봐봐. 언니가 저렇게 당황해 하다니. 신기하지 않아?"
한희진도 그 모습을 봤는지 팔꿈치로 나를 콕콕 찔렀다.
"저게 당황하는 거야? 그냥 카운터 상황 어떤지 잠깐 본 거 아닌가."
"내가 언니랑 20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거 하나 구분 못 할 것 같아? 저건 100%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대사야. 왜 언니가 오빠를 보면 눈을 피할까.."
그야 내가 애널 절정 할 때까지 이름 부르면서 쑤셨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현실에서는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게 행동할 줄 알았는데. 꽤나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혹시..?"
"혹시 뭐."
"언니한테 고백한 건 아니지? 그러니까 저렇게 피하고 안절부절못하지."
"넌 지금 당장 정신병원에 가봐라. 어제 아픈 것 같더니 머리가 아픈 거였구나."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냐.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 봐?"
"나도 네가 누구한테 고백했다 라는 가짜 소문 막 퍼트리고 다녀도 되지?"
"칫, 됐어. 그냥 해본 소리야."
한 마디도 지지 않는 한희진. 그래도 목소리 톤을 보면 장난으로 한 말이란 걸 알 수 있다.
물론 나도 장난으로 말한 걸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삐빅.
"감사합니다."
몇 명의 손님이 더 지나가고, 가만히 계산만 하기에는 심심했는지 한희진이 또 말을 걸었다.
"아 근데 존나 궁금하네. 언니가 왜 저럴까?"
"자기만의 사정이 있겠지. 왜 그렇게 캐물으려고 해."
"어제까진 안 저랬는데.. 갑자기 저러니까 그렇지. 혹시 꿈에 오빠가 나왔는데, 막 언니 덮치고 그런 건 아니지?"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내가 했어?"
"꿈이라도 오빠가 한 거면 한 거지."
내가 하긴 했지. 나는 속으로 대답을 하며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이러다간 퇴근 전까지 끝없이 이럴 것 같았기 때문.
"그건 나중에 따로 물어보기로 하고, 근데 하루 만에 바뀐 건 점장님 말고 또 있잖아."
"누구?"
"너."
나는 손가락으로 한희진을 가리켰다. 그러자 항복하는 자세로 작게 두 손을 든 그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난 평소랑 똑같은데?"
"어제는 얼굴도 빨갛고 죽을 상이었잖아? 물도 흘리고 말이야."
"물은..손이 미끄러져서 그런 거고. 어쨌든 푹 자서 그래. 집에 가자마자 곯아떨어졌거든."
"그래 보인다. 엄청 쌩쌩한 걸 보니."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매장이 한산해져 있었다.
마침 한채아도 하던 걸 끝냈는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고생했어요. 오늘 사람 많이 왔었는데."
"별 거 아니죠. 점장님이야말로 사람 많은데 고생했어요."
그 말에 한채아는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앉았다.
"모처럼 3명이 있는데 간식 시간이나 가질까요? 먹고 싶은 거 골라오세요."
"네에. 잘 먹겠습니다."
일어나려던 순간, 한희진이 내 어깨를 누르며 대신 일어났다.
"언니, 내가 골라올게. 둘이 쉬고 있어."
"어.. 그래."
한희진이 나가자마자 찾아온 침묵. 지금 상황을 이것보다 더 잘 표현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곁눈질로 옆을 보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점장님."
"네..네에!?"
"제가 뭐 잘못했나요? 갑자기 저를 멀리 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아..아니에요. 우진 씨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제가 문제니까."
빠르게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젓는 그녀. 그러면서 내 어깨와 팔뚝을 쓰윽 훑어봤다.
어젯밤이 생각난 듯 더 세게 저었다.
"다행이네요. 미움 받았나 해서 짤릴 각오하고 있었는데."
"제가 우진 씨를 왜 싫어해요. 일도 잘하고 얼마나 성실한지 알고 있는데.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그럴 일은 없어요."
단호한 얼굴을 보니 진심인 것 같다. 하지만 나한테는 어젯밤의 녹아내린 표정이 자꾸 겹쳐 보였다.
눈물과 침을 흘리며 저 입으로 가버린다고 크게 소리친...
"우진 씨?"
되묻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보는 그녀.
너무 빤히 쳐다본 것 같다.
"잠깐 멍을 때려버렸네요. 죄송해요."
"피곤하면 쉬세요. 저기 창고에 들어가셔도 되고."
"괜찮아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나는 무안함을 날리기 위해 목을 한 번 돌려봤다.
우드득.
뼈 소리가 크게 나왔다. 어깨를 주무르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자, 한채아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제가 해드릴까요? 예전에 우진 씨가 몇 번 마사지 해준 적 있으니까 보답으로.."
"그럼 부탁 드릴게요."
한채아가 내 뒤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손이 어깨에 닿자 등에 무언가 느껴졌다.
집중하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움.
보지 않아도 가슴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닿는 듯, 마사지를 할 때마다 스윽스윽 문질러졌다.
"이 정도 세기는 어때요?"
"딱 좋아요. 그대로 해주세요."
계속 받고 있자 그녀의 손길이 달라졌다. 뭔가 끈적하고 느린 움직임.
마사지라기보단 더듬는다는 표현이 더 가까웠다.
"헬스 꾸준히 하나 봐요. 근육 탄탄한 것 보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면 보기 안 좋을까봐 적당히 조절하고 있어요. 점장님이 보기엔 어때요?"
"네에? 아... 네. 좋죠. 애초에 싫어할 여자가 있겠어요?"
"점장님한테 들으니 더 좋네요."
"에이 뭘요.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한채아는 소심하게 주물거리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맞다. 우진 씨. 그 호칭에 관련해서요. 점장님 말고..."
"분위기 좋네. 자, 이거 먹어."
무언가 말하려던 참에 한희진이 과자를 한가득 안고 왔다.
뒤에서 아주 작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어깨에서 손이 떼지며 등에 있던 따뜻한 감각이 사라졌다.
"자, 마음껏 드세요.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가져와도 되고요."
"잘 먹겠습니다."
*
'하아... 왜 이러지?'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있는 한채아. 뜨거운 물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단 하루. 건강 지킴이가 우진이 흉내를 냈을 뿐인데 그 여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한 번도 남에게 만져진 적 없는 몸. 덕분에 남자에 내성이 없는 것도 있지만.
아는 사람의 목소리와 몸을 보며, 아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가버린 게 가장 컸다.
'몸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
탄탄한 몸에 안긴 채 이름을 불리는 것도 한몫했다. 혼자 했던 거랑 비교 자체가 안 될 정도로.
그것도 남에게 절대 말하지 못할 애널 절정이라니. 배덕감에 절로 닭살이 올라왔다.
우진이는 이 사실을 알까? 자기와 똑같은 사람한테 만져져서 가버린 여자라니.
들키면 절대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수준이다.
그걸 가능하게 해준 건강 지킴이. 어제 보여준 능력만 봐도 사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푸른색에 몸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으며, 심지어 머릿속에 직접 말을 전달할 수 있다니.
어디 외계인이나 귀신이 아닐까?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지만 무시할 순 없었다.
확실한 건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내가 지금까지 했던 행동들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말 내 몸에서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을 건강 지킴이라 소개했으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솔직히 확인할 방법이 있긴 하다. 몸 정확히 어디가 안 좋은지, 뭘 하면 안되는지 물어봤을 때 대답을 애매하게 한다?
바로 들통나는 거다.
"후우..."
한채아는 화장실이 울릴 정도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위에 생각을 수없이 해봤지만 막상 실행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
지인의 몸과 목소리로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로 자위를 도와준다니. 사람인 이상 이걸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근데 만약 저 질문을 했다 자칭 '건강 지킴이'가 도망을 가버린다면, 다신 어제의 경험을 할 수 없게 된다.
몸에 새겨진 쾌락이 그건 안 된다며 소리쳤다.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고민하던 한채아. 하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아예 나타나지 않은 건강 지킴이.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니 당분간은 지켜보기로 했다. 겸사겸사 자위도 즐기며 말이다.
애초에 저리 가라고 말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기도 했으니.
한채아는 한 층 밝아진 얼굴로 샤워기의 물을 껐다.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하고 있자 몇 시간 전 상황이 떠올랐다.
"근데 아까 마사지할 때 보니까, 우진이 바지가 많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정말 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