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111. 삼자대면#2
"그럼 전 먼저 가서 앉아있을게요. 천천히 사오세요."
"네에~ 이따 봐요."
윤혜윤이 벤치로 떠나고. 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신아영을 쳐다봤다.
의도를 읽을 수 없는 얼굴.
분명 그녀라면 윤혜윤을 보내고, 나랑 단둘이 있는 쪽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으로 이랬을까?
"오늘따라 자주 쳐다보는 것 같네요? 열심히 꾸미고 온 보람이 있나?"
"그냥 평소랑은 좀 다른 거 같아서."
"네? 저는 언제나처럼 똑같은데요."
"아니, 나는 아영이가 그냥 보낼 줄 알았거든."
"아..그래요? 그렇게 저랑 데이트를 오붓하게 즐기고 싶으셨구나..미안해요."
"내 말 뜻이 그게 아닌 거 다 알잖아."
진지하게 말을 하자 신아영의 웃는 눈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남들한테는 예쁜 여자 둘을 끼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천국이라 생각하겠지만.
찔리는 게 많은 나한테는 상당히 불안한 구도였다.
특히 오나홀에 등록된 2명과 그 존재를 알고 있고, 눈치가 빠른 신아영이라면.
뒷일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저도 나름 진지하게 말한 거라고요. 평소의 저랑 똑같.. 아니 조금 다르나?"
"무슨 말이야. 그게."
"제가 어제 말했죠? 오빠 마음속엔 저 옆집분이 있다는 거 같다고요."
"...그랬지."
"그럼 저한테 없는 매력이 있다는 건데...한번 느껴보고 싶어서요. 한마디로 말하면...질투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 씨익 웃는 신아영.
적극적인 성격이란 건 알지만, 바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나에 대한 마음이 그만큼 크다는 거겠지.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우린 음식을 받고 바로 벤치로 향했다.
윤혜윤도 계속 이쪽을 신경 쓰고 있었는지, 다가가는 도중에 눈을 마주쳤다.
손에 들고 있는 토스트를 보니, 아직 반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쯤이면 다 식었을 텐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대신 커피 좀 사왔어요."
"아,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왼쪽에는 윤혜윤, 오른쪽에는 신아영.
나는 가운데에 끼여 앉아 토스트를 들었다.
두 명 모두 가슴이 크다 보니 팔꿈치가 닿지 않게 조심히.
마치 햄스터가 밥을 먹듯, 손을 앞으로 모으며 먹기 시작했다.
우물우물.
반 정도 먹었을까. 3명 모두 말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때, 신아영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혜윤 씨라고 했나요?"
"네? 네. 맞아요."
"무슨 과에 다니세요?"
"지금 영문학과 2학년에 다니고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저는 전기공학과 3학년이에요."
"네. 워낙 유명하셔서 알고 있었어요. 근데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요."
"네?"
"우진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고 자주 말해서 관심이 생겼어요."
자주는 말 안 했는데? 오히려 언급을 피하면 피했지.
"오빠..가요?"
"네. 오빠가요."
"아...우진..씨가 그렇게 말했군요.. 고마워요."
나를 보며 살짝 웃어주는 윤혜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헬스장도 같이 다닌다고 했는데. 혹시 거기서 친해진 건가요?"
"아니요. 그 전부터 얼굴을 자주 마주치긴 했어요."
"하긴, 옆집이니까 그러겠네요."
호구조사를 하는 듯한 신아영의 질문.
그럼에도 윤혜윤은 친절하게 대부분 답을 해주었다.
그동안 나는 토스트를 다 먹어버렸다.
양이 생각보다 작은 탓도 있겠지만, 계속 입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이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언제였더라..3개월 정도 된 거 같은데...음."
"3개월이요?"
약간 미심쩍은 듯이 나를 보는 신아영.
그리고 이어지는 윤혜윤의 말에 그 눈빛은 더 깊어졌다.
"아 맞아. 그때 제가 먼저 우진 씨 집에 찾아갔었거든요. 집에 이상한 게 나타나서요."
"이상한...거요?"
"네.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귀신? 같은 게 나왔어요."
"귀신..?"
"네. 요즘은 안 나오긴 하는데. 막 몸을 더듬고 그..런 종류의 짓을 많이 했어요."
"으흠...그렇군요."
"믿기 힘드시죠? 주변 사람들한테 말해봐도 다 거짓말이라고 해서, 남들한테는 숨기는 얘기에요."
윤혜윤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멍을 때렸다.
아마 그때를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읏..!
그때 신아영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이글이글거리는 눈빛.
그 속에는 '설마 오빠가 한 건 아니겠지?' 라는 뜻이 강렬하게 전해져 왔다.
아니, 그냥 99%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윤혜윤이 이상하게 쳐다보자, 신아영은 다시 표정을 풀고 말헀다.
"아니요. 그거 되게 흥미로운데요? 좀 더 말씀해주세요."
"네? 그렇게 재밌는 얘기도 아니에요."
"저는 재밌으니까 괜찮아요."
"그래요..? 중간에 재미없다고 비웃으시면 안 돼요?"
"절대 안 그러죠."
신아영이 진지하게 쳐다보자, 자신을 얻었는지 윤혜윤이 서서히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그럼 계속 얘기할게요. 그때 우진 씨가 제 집에 와서 둘러봐 주고 돌아갔어요. 근데도 밤에 또 나타나더라고요?"
"그것 참 끈질기네요."
"그렇죠? 근데 엄청 나쁜 짓은 안 하길래 그냥 냅뒀어요. 그렇게 알게 모르게 같이 지내다, 우진 씨한테도 이 얘기를 해줬고."
"아..오빠한테 전부 말했어요? 귀신이 나온다는 걸?"
"네. 그 둘이서 술 마실 때. 분위기 타서 그냥 말해버렸어요."
"술이요..?"
"네. 우진 씨 방에서 치킨 먹으면서 같이 마셨어요. 정확히 말하면 캔맥주였지만요."
다시 한번 옆구리에 느껴지는 충격. 아까보다 파워가 세졌다.
"그 뒤는 어떻게 됐나요?"
"별 거 없어요. 그 이후로 어쩌다 같은 헬스장을 다니면서 운동도 가르쳐 주고.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고. 이게 끝이에요."
"상당히 재밌는 얘기네요.."
나를 흘겨보는 신아영.
잔뜩 휘어진 눈썹으로,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분노 70%에 어이없음 30%가 섞인 표정이 분명했다.
이래서 둘이 만나는 게 불안했었는데. 결국 일이 터져버린 것 같다.
윤혜윤은 아직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럼 신아영 씨는 우진..씨랑 어떻게 친해졌나요?"
"저요? 음.. 저희 과에서 조별 과제가 나갔는데요. 어쩌다 같은 조가 되어서요. 그때부터 안면이 생겼죠."
"아.."
유령과 오나홀에 대한 이야기는 쏙 뺐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윤혜윤은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엄청 급속도로 가까워지셨네요."
"애초부터 서로 호감이 있었으니까요."
"호감..그렇네요."
눈 맞은 남녀가 단기간에 성관계를 맺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으니, 그녀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 같았다.
나랑 윤혜윤도 비슷한 상황으로 이루어졌으니.
"근데..두분 사귀는 건 아니죠?"
"네? 네. 연인 관계는 아니에요. 아직은."
"아직인가요.."
파직.
순간 스파크가 튀긴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신아영은 윤혜윤과 시선을 교환하며, 커피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었다.
하지만 얼음밖에 남지 않은 빈 통이라 내용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녀는 컵을 쓰윽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희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장소 좀 옮길까요?"
"네. 그래요."
그녀들을 따라 일어나자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알게 모르게 몰려있는 사람들.
대부분 남자에다 이쪽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이해는 갔지만 썩 좋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중 익숙한 얼굴도 섞여있었다.
아까 사라졌었던 장민혁과 서아린. 매우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서아린은 입을 막고 무슨 드라마를 보는 듯한 얼굴이었고. 장민혁은 존경이 가득한, 그런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보내고 있었다.
이거 소문이 더 괴랄하게 퍼질 것 같은 느낌인데..
"오빠. 빨리 와요. 어디 도망갈 생각 말고."
"어..지금 가."
선두에는 윤혜윤과 신아영이. 나는 그 뒤를 얌전히 따라갔다.
가는 방향을 보니 카페나 공원이 아닌, 내 집으로 가는 것 같았다.
둘의 연결점이 나니까. 암묵적으로 합의를 한 것 같았다.
평소보다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도착하자 윤혜윤이 말을 꺼냈다.
"제 집으로 가실래요?"
"그래요. 한번 구경해보고 싶긴 하네요."
그렇게 들어가게 된 윤혜윤의 집.
오래간만에 들어와 보는 방이었지만,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우린 짐을 내려놓고, 방 한가운데에 삼각형으로 둘러앉았다.
서로 눈치를 보고 있자, 이번에도 신아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혜윤 씨가 말했던 귀신? 그거에 관심 있는데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어...오래돼서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일단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볼게요."
"네네. 최대한 자세하게 말해주세요. "
"평소랑 같은 날이었어요. 학교에 갔다 와서 씻고,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몸을 만지는 느낌이 나는 거예요."
"그냥 툭 치듯이?"
"아니요. 마치 사람이 직접 만지는 것 같이..좀 생생한 감각이었어요."
"신기하네요..."
"그래서 바로 옆집에 있는 우진 씨한테 찾아가 봤죠. 아, 맞다! 우진 씨. 그때 제 학생증 찾아주셨죠? 왜 찾아갔지 하고 생각해보니까 기억났어요."
"...맞아요. 복도에 떨어져 있던 걸 주웠었죠."
윤혜윤은 이제 기억이 다 난다는 듯. 손뼉을 치며 이야기를 술술 풀어갔다.
동시에 내 표정은 썩어갔고. 신아영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 날 이후.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4~5번? 정도 귀신이 느껴졌어요."
"혹시 그 귀신이 가슴이나 아래쪽을 주로 만지지 않았나요?"
"아, 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아주 정확한데."
"그냥..느낌상 그럴 것 같았어요."
신아영은 나를 찌릿하고 째려보고는 다시 윤혜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혜윤 씨. 정말 고생이 많았겠어요. 시도 때도 없이 막 더듬고 밖에서도 힘들었을 텐데."
"아니요..그게 그렇진 않았어요. 거의 집에 있을 때만 그랬고..특히 밤에.. 아아.. 아니에요!"
뭔가를 말하려던 윤혜윤이 급하게 입을 막았다. 나는 뒷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땐 윤혜윤이 최대한 거부감이 없도록, 밤에 자기 전 그녀가 자위할 때만 찾아간 사실을.
하지만 이미 늦었는지. 신아영이 의미심장하게 질문을 했다.
"혹시나..정말 호기심으로 묻는 건데요. 불쾌하면 대답 안 하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네.. 일단 들어볼게요."
"귀신이..손 말고 딴 걸로 문지르지는 않았나요?"
"손이 아니면..어떤 걸 말하는 건지..?"
"알잖아요.. 이거."
신아영은 내 자지를 정확하게 가리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