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104. 신아영의 고백
일요일.
금요일에 녹화를 했지만 아직 짤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당장 다음 주부터 전공과목의 첫 시험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마냥 급한 것도 아니니 기말에 집중부터 하기로 했다.
"흐음.."
신아영네 집에 가기 전.
뒤를 돌아 방을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아마 지금 가면 그녀의 집에서 자고, 다음날 학교에도 같이 갈 것 같았기에.
하루는 돌아오지 못할 듯했다.
'전공책, 노트, 필기구. 그리고 오나홀까지 다 챙겼고..'
조금 무게감이 있는 가방을 들며. 문 밖으로 나갔다.
이제 여름의 시작이라 아직 밝은 바깥.
신아영네 집으로 향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신아영과 현실에서 섹스까지 했고, 윤혜윤의 감정을 어느 정도 듣기는 했는데. 이걸 이대로 놔두는 게 맞나 싶었다.
지금 당장은 괜찮은 것 같아도 불안한 상태인 건 느끼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절벽의 끄트머리는 아니더라도, 한 3m 떨어진 정도의 위기.
솔직히 그동안 모른 척 해왔지만. 머리 한구석에선 다 알고 있었다.
예전 반투명 모드로 신아영과 첫 키스를 했을 때, 잠꼬대지만 분명 좋아한다고 말을 했었고.
조별 모임에 같이 지각한 전날. 자기 직전에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좋아한다고 했었다.
물론 첫 번째는 나라는 걸 몰랐을 테지만, 두 번째는 절대 아니다.
바로 그다음 날 카페에서 추궁을 당했으니.
게다가 오나홀까지 들키고, 현실 섹스까지 했음에도 그녀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안일도 도와주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윤혜윤도 마찬가지다.
좋아한다고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뭔가 분위기에서 묘한 그런 게 느껴지긴 했다.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이.
당연히 호감 이상의 감정이 없으면 몸을 섞지도 않았겠지만.
"복잡하네.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는데..."
무선 연결 오나홀이라는 최고의 물건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너무 그거에 안주했나 싶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대충 유지하며, 섹스를 하는 건 한계가 온 듯하다.
나도 그녀들에게 감정이 있고, 그녀들도 감정이 있을 테니.
오나홀 뒤에 숨어. 예쁜 여자를 따먹는다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던 과거와는 달리.
관계가 이젠 현실로, 눈앞으로 다가왔으니까.
띵동.
"누구세요?"
"저예요. 박우진이요."
"아, 바로 열어드릴게요!"
기다리고 있었는지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 슬리퍼를 끄는 소리와 함께 신아영이 튀어나왔다.
"오랜만이에요. 오빠. 들어오세요."
"저도 반가워요. 그럼 실례할게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옅게 화장을 한 게 보였다.
평소라면 잘하지도 않았던 화장을 할 정도면. 얼마나 준비를 하고.
얼마나 기대를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깨끗하게 정리된 방안과 좋은 냄새가 확 풍겨왔다.
괜히 미안해졌다.
그동안 했던 행동을 똑같이 하면, 지금까지의 상황을 유지할 줄 알았는데.
깊어지는 감정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신아영이 나한테 잘 보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나는 그동안 뭘 했단 말인가.
자기 성찰에 빠져있자, 신아영이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꺼냈다.
"오빠. 혹시 저녁 먹었어요?"
"아니요. 할게 많다 보니 먹는 걸 깜빡했어요."
"그럼 간단하게 뭐라도 해드릴까요? 저도 어느 정도 요리에는 자신이 있어서요."
"부탁해도 될까요?"
"당연하죠.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해줄 테니."
그녀는 내 앞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앞치마를 입고, 냉장고를 뒤지더니 계란을 꺼내왔다.
치이이익..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는 소리가 나고, 껍질 깨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뒤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새삼 신기하긴 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요리를 해준다는 게.
"자, 여기 있어요. 멍 때리지 말고 어서 먹어요."
"아,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작은 탁자를 피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따뜻한 밥과 계란, 간장과 김치가 들어간 볶음밥이었다.
신아영은 반대편에서 나를 보며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혹시 할 말은 없어요?"
"네?"
"당연히 밥을 해줬으면 그에 대한 평가를 해야죠. 혹시 맛없는 건 아니죠?"
"아뇨아뇨. 엄청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내가 밥 먹는 걸 보는 게 재밌는지,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편하게 먹으라고 배려해주는 듯한 느낌.
5분 만에 그릇을 비워버리자, 신아영은 그때야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저기, 오빠. 저 뭐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사실 처음 볼 때부터 느낀 거였는데. 얼굴이 많이 어두워서요."
"아..그냥 피로가 쌓여서 그런가 봐요. 큰 일은 아니에요."
"무리하지 마세요. 당장 내일이 발표에다 곧 시험이니까요."
"고마워요."
그렇게 얼굴에 티가 났던 걸까. 아니면 신아영의 눈치가 빨라서일까?
둘 모두일 수도 있지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밝은 척을 했다.
"잘 먹었어요. 덕분에 힘이 나네요."
"뭘요. 별로 넣은 것도 없는데."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싱크대로 가져가 물을 틀었다.
내가 먹었으면 내가 설거지를 하는 게 상식이니까.
덜그럭덜그럭..
세제를 뿌리고 수세미로 닦고 있자. 아까의 고민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오나홀에 등록된 4명의 여자.
모두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어, 누구 하나 쉽게 포기를 할 수 없는데.
과연 이걸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평생 오나홀 뒤에 숨어서 할 수도 없고.
"후우.."
흐르는 물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뒤에서 물컹한 두 살덩어리가 느껴졌다. 이어 등에 밀착한 부드러운 머릿결과 얼굴.
"역시 힘없는 거 맞네요. 뒷모습만 봐도 고민 투성이인 게 딱 보이는데."
목소리의 톤에서 걱정이 잔뜩 묻어 나왔다. 게다가 조용히 말하는 탓에.
그 감정이 더욱 짙게 전해져 왔다.
내 배에 팔을 두르고 힘을 주는 신아영.
그리고 나를 진정시키듯, 손가락으로 탁탁 치며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설거지는 멈춘 지 오래.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가만히 서있자.
신아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 그거 알아요?"
"어떤 거요."
"저는요. 오빠가 힘이 없으면 저도 힘이 나질 않아요. 왜인 줄 아세요?"
"..."
대답이 없자 그녀는 내게서 몸을 뗐다.
대신 내 팔을 잡고 180도 회전을 시켜, 눈을 마주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1분 정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자.
신아영은 흘러나오듯,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좋아하니까요."
3번째 듣는 단어.
하지만 이번엔 정확히 내 눈을 보고, 현실의 나를 향해 말한 직접적인 고백.
실제로 듣게 되자 심장이 마구 뛰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울적해하고 있으면. 보는 사람도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거 알아요?"
"알죠.."
"그리고, 요즘 저를 좀 피하는 거 같은데. 혹시 제가 싫어요? 싫으면 싫다고 딱 말해주세요."
단호하게 말을 했지만, 그 눈빛에서는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는 게 보였다.
만약 싫다고 하면. 바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그런 얼굴.
나도 싫다고 말한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바로 대답을 했다.
"그건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좋..아하죠."
"근데 왜 그렇게 피해 다녔어요. 저는 뭐 잘못했나 걱정 엄청 많이 했는데."
"미안해요. 그렇게 느끼게 해서."
"저번에 같이 밥 먹자고 했는데도 거절하고. 그 이후에 에프터도 없고, 전화도 금방 끊어버리고."
"정말 미안해요."
"일로 와봐요."
계속 사과를 하자 신아영이 나를 끌고 침대로 갔다.
뭔가 결심한, 진지한 표정으로.
"여기 누워봐요."
그녀의 말대로 하자, 신아영은 여성 상위의 자세로.
내 하복부 위에 앉았다.
"저 사실 봤어요."
"뭘요?"
"실험실에서 밥 먹자고 거절당한 날. 우진 오빠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음식점에 들어가는 거요."
"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걸 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다.
"자세히 보니 그때 옆집 여성분이더라고요?"
"아..네. 맞아요."
"진짜 나쁜 사람. 제가 그날 전화한 거 기억나요? 가슴 계속 졸이면서 전화할까 말까. 수십 번은 고민했는데."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다. 전부 내 잘못이긴 하다.
그동안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무엇하나 말하지 않고 숨기려고만 한 내 업보.
"할 말이 없네요. 미안해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분위기 좋아 보이던데."
나도 모르게 눈을 살짝 돌려버렸다. 끝까지 해버렸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려나?
머리를 최대한 빨리 굴려봤지만, 눈치 빠른 신아영을 속일 수는 없었다.
"눈 굴리지 말고요. 화 안 낼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줘요."
"...끝까지 갔어요."
"하.."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휙휙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주먹을 들어 내 가슴을 세게 쳤다.
"윽..!"
"그럴 거면 안 들키게 하든가. 제 레이더에 걸린 이상 그냥 안 넘어갈 거예요."
"네...네."
"원래 고백의 답, 종강하기 전까지 기다려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요."
그녀는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천이 스치는 소리에 이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자 커다랗고 탱탱한 가슴이 눈앞에 드러났다.
그녀는 옷을 벗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묶은 뒤.
깔끔하게 정리가 되자, 가슴을 흔들기 시작했다.
"어때요? 제가 그 옆집 여자보다 더 크고 모양도 예쁘지 않아요?"
"아..네."
"뭐예요. 그 시원찮은 대답은? 혹시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절대 아니에요. 가슴이 예뻐서 잠시 넋을 놓은 것뿐이에요."
"그래요?"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살짝 입꼬리를 올라갔다.
그녀는 내 가슴을 살살 문지르며, 바지 쪽에도 손을 댔다.
"좋아요. 그런 거. 그리고 다른 여자를 생각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갑자기 나온 이상한 소리에. 잘못 들었나 싶었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자, 바로 그 답을 해주었다.
"어떤 여자가 와도. 제가 오빠를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 해줄 수 있고, 몸매든 뭐든 자신 있으니까요."
"...."
"뭘 하든 결국 저한테 돌아올 게 뻔한, 그런 승부니까 괜찮아요♡"
엄청난 자신감을 보이며, 그녀는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