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094. 속마음
터벅터벅..
거리를 걷던 중. 나는 옆에 있는 윤혜윤을 슬쩍 쳐다봤다.
가방끈으로 인해 볼록 튀어나온 가슴과 새하얗고 긴 목덜미.
그리고 옆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그녀의 체취까지.
나는 땀이 나지 않아서 괜찮았지만, 윤혜윤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에.
헬스장에서 나오기 전 간단하게 샤워를 했었다.
덕분에 걸을 때마다 그녀의 냄새가 내 코를 간지럽혔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여자의 몸에서는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 건지 모르겠다.
신아영도 그렇고, 윤혜윤도 그렇고.
피부 조직이 완전 다른 구조로 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의 발걸음 속도를 맞추며 걷기를 5분.
음식점이 많은 곳에 들어서자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오늘은 제가 사드릴게요."
"저는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먹고 싶은 걸로 고르세요."
"그 말이 제일 어려운 메뉴인 거 알죠?"
"알긴 아는데..진짜 괜찮아요. 가리는 게 없는 성격이라서요."
내가 고르는 건 뭐든지 먹겠다는 얼굴.
나는 간판을 쭉 살펴보며 적당한 걸 찾기 시작했다.
방금 운동하고 왔으니 어울릴만한 게... 딱 보였다.
"냉면은 어때요? 아까 땀 많이 흘리시던데. 시원하게 한 그릇 뚝딱하죠."
"냉면이요? 네. 좋아요. 여기 주변에 있나요?"
"저기 2층에 하나 있네요. 붉은 간판 보이세요?"
"아 저기 있었구나. 시원한 게 땡기긴 했는데 바로 가요."
혹시나 거절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걸 보면. 메뉴 선정은 잘한 것 같았다.
음식점에 들어가니 사람이 가득 차있었다.
저녁 시간이라 이해는 하지만, 이렇게나 많이 있는 걸 보면 꽤나 맛집인 듯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2명이요."
"저쪽 테이블로 가시면 되겠습니다."
"넵. 감사합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기다리자 젊은 알바생이 와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나는 윤혜윤도 같이 볼 수 있게 옆으로 돌린 다음. 위에서 아래로 쭉 훑어봤다.
사실 냉면집에 왔으면 냉면을 시켜야 하는 게 당연한 거지만.
무엇을 파는지 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저는 물냉면으로 할게요. 혜윤 씨는요?"
"저도 물냉면이요."
"그럼 물냉면 2개로 주문할게요. 저기요!"
나는 아까의 알바생한테 주문을 한 뒤. 메뉴판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어색함.
시끌벅적한 음식점 속에 우리 둘만이 외딴섬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를 잡기 위해 밥을 먹자고 꼬셨지만, 여기서도 말할 만한 주제는 아니었기에.
나는 물을 따라주며 가볍게 말을 걸었다.
"오늘 낮에 뭐했어요?"
"아! 고마워요. 저야 평소랑 똑같았어요. 수업 듣고, 기말고사 대비로 복습도 하고...음."
"공부는 많이 했나요? 이제 한 2주 정도 남았는데."
"2과목만 더 하면 끝낼 수 있을 거 같아요. 근데 해도 해도 모르는 게 나와서 문제예요."
"그건 모든 사람이 그럴걸요? 교수님이 아닌 이상."
"그러게요..한 번에 외워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잡담을 하고 있자 냉면 2그릇이 테이블 위에 도착했다.
주문한 지 5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빠르게 나온 게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젓가락을 들고 휙휙 저어보니 생각보다 면이 질겼다.
윤혜윤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나랑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잘라줄까요?"
"아, 네! 2번만 해주세요."
가위를 들고 물어보자 그녀는 내 쪽으로 그릇을 내밀었다.
요청대로 가위질을 2번 해준 뒤. 우린 같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배고팠는지 그녀는 입을 끊임없이 우물거렸다.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느낌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잘 먹는 게 보기 좋았다.
"하아..맛있었어요. 사주셔서 고마워요."
"별 거 아니에요. 그보다 배고팠나 보네요. 잘 먹던데."
"그냥..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봐요."
"그래요?"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어느새 어두워져 있는 하늘.
그와 반대로 눈부신 조명들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슬슬 얘기를 할 타이밍이 온 것 같아, 나는 공원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을 했다.
"우리 좀 걸을까요?"
"네.."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는 걸으면서도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계속 고민을 했다.
별 거 아닌 거 같은데도 긴장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곧 우린 시끄럽고 화려한 곳을 지나,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우린 내부를 쭉 돌며 적당한 장소를 찾아다녔고.
곧 희미하게 가로등 빛이 내리쬐고 있는 벤치에 앉게 되었다.
다리를 두드리며 그녀의 눈치 보기를 잠시.
나는 조용하게 말을 시작했다.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죠?"
"아, 네... 그 신아영 씨랑 무슨 관계인지랑. 그날 밤에 들렸던 신음 소리요.."
"첫 번째 질문부터 답해드리자면요.. 저도 정확히 정의를 할 수 없는 관계예요."
"네? 그게 무슨.."
"몸을 섞긴 섞은 사이인데요. 여자 친구는 아니고, 그 과정도 좀 복잡해서요."
"몸을 섞었다는 건.."
"네. 그날 났던 소리는 잘못 들으신 게 아니에요."
"역시..그랬군요."
뭐라 반응이 있을 줄 알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나와 윤혜윤의 관계도. 사귀지는 않으면서 섹스를 한 사이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를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요약하자면 여자 친구는 아니고 섹스는 했다. 이거죠?"
"그렇게..볼 수 있죠."
"그럼 밤새 소리가 난 것도. 진짜 안 쉬고 계속한 거예요?"
"네. 거의요."
"하아.."
잠시 질문을 멈춘 그녀는 나를 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실망이나 한심하다는 뜻이 담긴 게 아닌, 다행이라는 의미가 강해 보였다.
"뭐, 여자 친구만 아니면 됐어요. 막상 들어보니 허무하네요."
"저는 혜윤 씨가 계속 피해 다니길래 좀 심각한 상황인 줄 알았는데요."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긴 했는데..그렇게 티가 났어요?"
"네. 엘리베이터에서 저랑 신아영 씨를 보자마자 사색이 된 걸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하하.. 그렇게 느낄 정도였나요."
윤혜윤은 무안한 듯 살짝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조용히 산책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뭔가 말할 게 있어 보였기 때문에, 나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잠시 뒤. 오랫동안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던 그녀의 입에서 서서히 말이 흘러나왔다.
"제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나오는 거. 우진 씨가 봐도 웃기죠?"
"아니요. 전혀요."
"거짓말 하지 않아도 돼요. 사실 학창 시절 때부터 친구들이 너는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많이 놀리곤 했어요."
"예전부터 그러셨나 보네요."
"네. 근데 저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장난감이 된 기분이었거든요. 그래서 무표정을 유지하는 연습을 했었는데."
그녀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빨라진 말투를 진정시키고, 다시 침착해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보니 잘 안되더라고요. 약간 트라우마라고 해야 하나, 단점이라고 해야 하나.. 고쳐야 하는데 말이에요. 괜히 진지한 척 행동하는 것에 집중하다가. 이것저것 한두 개씩 빠트리는 일도 자주 있었고요."
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속마음.
평소에 밝고 쾌활하다가도, 이상한 데서 2% 부족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저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보기 좋았는데요.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직접 안 겪어봐서 모르는 거예요.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은 꼭 놀리고 가는 게 은근 스트레스예요. 매번 웃으면서 넘기기도 힘들고요."
"그거는 혜윤 씨가 예쁘니까 다들 그렇게 하는 거죠. 반응도 좋고 귀여우니까요."
솔직히 놀리는 맛이 있다는 건 인정한다.
나름 진지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티가 나고, 그 생각이 다 보였기에 장난을 친 거지.
그 사람들도 결코 나쁜 뜻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 경험을 비추어봐도 그랬다.
당장 생각나는 것을 떠올려봐도 상당히 많았으니 말이다.
술친구가 필요하지 않냐고 초인종을 눌렀을 때.
같이 요가하자고 나를 잡았을 때.
자기 방에서 영화를 보자고 물어봤을 때.
그 수법이 어설프고 의도가 눈에 뻔히 보였지만.
그런 허당 같은 면이 귀여워, 알면서도 넘어가 주었다.
"다들 진심으로 하는 건 아닐 거예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내 마지막 말에 그녀는 나를 한참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떨어지는 나뭇잎이 신호탄이 된 듯.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진 씨."
"네."
"아까 제가 왜 피해 다녔냐고 물어보셨잖아요. 궁금해요?"
"당연히 궁금하죠."
단순히 내가 신아영과 붙어있었다고.
그렇게 대놓고 피해 다닐 이유는 없었으니 말이다.
"일단..표면적인 이유로는. 여자 친구가 생긴 줄 알았던 것 때문이었어요. 여자 친구가 생기면.. 관계는 깨끗하게 정리를 하는 게 맞으니까요. 평범했던 이웃으로 다시."
"그럼 진짜 이유는요?"
"혹시 저번 주에..저랑 했을 때, 제가 했던 말 기억나요?"
나는 머리를 최대한 굴려봤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 크고 많은 일이 일어났기도 했고, 질문의 범위가 너무 애매모호했기에.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래도 거짓말보단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으니까.
그냥 모른다고 말을 했다.
"죄송해요.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네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때 제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제가 하자고 할 때 해주기. 이렇게 말하면 기억나요?
"아! 네. 기억나네요."
"그 말을 하고 딱 일주일 뒤. 옆집 방에서 갑자기 다른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리면 어떤 생각이 들 거 같아요?"
"...."
"물론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까. 뭘 하시든 강제할 입장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일부러 저를 떼어내기 위해 그런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전혀.."
"저도 오늘 다가와 주시는 걸 보고,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 건 알았어요. 그래도 그땐..혹시 내가 질릴만한 짓을 했나, 내가 싫어졌나. 또 버려지는 건가. 고민 정말 많이 했어요."
그 말을 듣자 양심이 찔렸다.
내가 가볍게 했던 말들과 행동들이.
그녀에겐 큰 상처였던 것 같았다.
"만약에...신아영 씨랑 계속하게 된다 하더라도. 저하고도..관계를 유지해주실 수 있어요? 제가..신아영 씨보다 나은 건 없지만요. 얼굴도 몸매도.."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보는 윤혜윤.
내가 신경 쓰지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 하는 판이었는데.
오히려 반대의 상황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