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093. 오해를 풀자
그로부터 이틀 뒤인 화요일.
나는 아직까지 윤혜윤을 찾아가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건 빨리빨리 풀어야 감정이 깊어지지 않고 서로 편한 상황이었지만.
당일에는 내가 너무 피곤하기도 했고, 바로 찾아가기에는 머릿속이 정리가 안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어제는 왜 만나지 않았냐?
주말 동안 공부를 거의 못 했기에 과제가 산더미같이 밀려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어제는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책에 파묻혀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꼭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으며, 수업을 위해 학교로 출발했다.
"하아..시간 겨우 맞췄네."
나는 제출함에 보고서를 넣으며 숨을 돌렸다.
과제 자체는 아침에 끝냈지만, 낮에 실험이 있어 어차피 학교에 와야 했기 때문에.
쓸데없이 왔다 갔다를 방지하기 위해 데드라인에 맞춰 왔다.
짐덩어리를 하나 해결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중에는 신아영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인싸답게 그녀의 주변은 꽉 차 있었다.
나는 저런 자리는 싫었기에 구석으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핸드폰을 하고 있으니, 누가 내 앞에 앉았다.
고개를 살짝 들어 확인해보니 신아영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분명 저기 중간에 앉아있었는데.
가방을 들고 있는 걸 보면 자리를 옮기러 온 것 같았다.
입을 열어 인사를 하려고 하자 그녀가 핸드폰 톡톡 건드렸다.
무슨 뜻인지 몰라 잠깐 쳐다보고 있자 까톡이 울렸다.
-신아영 : 안녕하세요. 몸은 좀 괜찮나요?
-박우진 : 그날 밤에 푹 쉬니까 나아졌어요. 신아영 씨는 괜찮나요? 그때 좀 아프다고 했잖아요.
-신아영 : 지금은 멀쩡해요. 정말 그때는 죽는 줄 알았다고요. 보지가 헐었는지 밤 내내 아팠다고요.
-박우진 : 그건 좀 미안하네요. 제가 오랫동안 하기는 했죠.
신아영 : 그래도 그만큼 기분 좋았으니까 괜찮아요. 혹시 과제는 다 했어요?
박우진 : xx 교수님 꺼 말이죠? 방금 제출하고 올라오는 길이에요. 근데 바로 앞에 있으면서 왜 까톡으로 해요?
신아영 : 그럼 남들 앞에서 보지가 헐었다고 크게 말해볼까요?
박우진 : 그냥 까톡으로 하죠.
대화로 할 내용이 아니기도 했고.
신아영이 나랑 얘기를 하면 여기 있는 모두가 귀를 세우고 집중할 게 분명했으니.
어떻게 보면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렇게 타자를 치며 시간을 때우던 중.
조교가 들어와 실험이 시작되었다.
신아영과 가끔 아이컨택도 하고, 모르는 걸 물어보기도 하며 쉬는 시간이 되었다.
화장실에 가려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는 간격을 두고 내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이따 수업 끝나고 저녁 같이 먹을래요?"
"네? 설마.."
"그 눈빛은 뭐예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진짜 순수하게 밥 먹자는 뜻이었어요."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오늘 계획한 일이 있어가지고요."
"흥..살면서 처음으로 남자한테 밥 먹자고 먼저 권한 거였는데. 제 첫 경험을 이렇게 무참히 짓밟기예요?"
"그것 참 미안하네요. 근데 오늘은 진짜 중요한 일이어서요."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그럼 다음에 먹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살짝. 아주 살짝 삐진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윤혜윤과 만나지 않으면 3일이 넘어갔기에.
그 이상으로 지체되면 관계를 되돌리기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실험이 끝나자마자 나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씻고 짐을 내려놓은 뒤,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기다려봐도 묵묵부답이었다.
딱 저녁 먹을 시간이니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엇갈린 건가?
나름 긴장하고 왔는데 순간 맥이 탁 빠져버렸다.
한번 톡을 보내볼까 하다가 예전에 윤혜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시험 기간에는 저녁에 운동을 한다고 했었지.."
밑져야 본전이니 헬스장에 가보기로 했다.
거기에 있으면 베스트고, 없어도 늦은 저녁에 오면 집에 있을 확률이 높을 테니.
게다가 요즘 바빠서 운동도 별로 못했으니 나쁠 건 없었다.
나는 서둘러 운동복을 챙겨 헬스장으로 출발했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언제나처럼 똑같이 카운터의 누나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우진 씨. 이 시간에 보는 건 처음이네요."
"안녕하세요. 기말 준비 때문에 바빠서요. 잠깐 시간 남을 때 왔어요."
"아, 생각해 보니 기말 기간이었네요.. 그래서 혜윤이도 되게 오랜만에 온 거구나."
"지금 있어요?"
"네? 아 혜윤이요? 한 20분 전인가. 그쯤 왔어요."
역시 여기였나.
그녀도 딱히 밖에 돌아다니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니.
대충 찍어봤는데 정답이었다.
"알았어요. 그럼 전 들어가 볼게요."
"네~ 열심히 하세요."
나는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상당히 많아 그녀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뭐. 바로 찾을 거라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 상관없었다.
20분 전에 왔다고 했으니 금방 떠나진 않을 테니.
일단 워밍업부터 하기로 하며, 나는 런닝머신 쪽으로 갔다.
"후욱...후욱.."
뛰면서도 앞에 있는 거울을 통해 계속 눈동자를 굴렸다.
눈에 확 띄는 외모를 하고 있으니 대충 스캔을 해도 보일 텐데.
왜 안보일까.
처음 설정했던 10분이 지나고, 슬슬 몸이 달아오르자 바닥으로 내려왔다.
벽을 따라 다음 운동은 뭘로 할까 어슬렁 거리고 있자.
저 앞쪽에 있는 사람들의 고개 방향이 한쪽으로 쏠린 걸 볼 수 있었다.
당연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나는 호기심 해결을 위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저..이따 밥이라도 한 끼 같이 할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배불러서요."
"그럼..번호라도 주실 수 있을까요? 나중에라도 같이.."
"지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거기엔 무표정으로 앉아서 쉬고 있는 윤혜윤과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대화를 듣자 바로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저번에 카운터의 상담원 누나가 했던 말이 진실인 듯.
자연스럽게 대쉬를 거절하는 윤혜윤을 실제로 보니 그제야 믿을 수 있었다.
"그..이제 가주시겠어요? 쉬고 있는데 좀 불편하네요."
"아..네. 죄송합니다.
남자가 딴 곳으로 도망을 가자, 다시 사람들은 각자의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한테 눈을 떼지 않은 채 계속 지켜봤다.
상당히 빡세게 운동을 했는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고 있는 윤혜윤.
어김없이 오늘도 쫙 붙는 레깅스와 스포츠 브라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알몸을 봤는데도 반응이 올 정도로 야한 복장이었다.
약 3분 뒤.
그녀는 아직 나를 발견 못한 듯 계속 창문 밖을 보며 쉬고 있었다.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멍을 때리기를 잠시.
어느 순간 유리에 반사된 내 모습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눈이 점점 커지고 입이 벌어지고 있는 얼굴.
진짜 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게 단점이자 장점인 것 같았다.
나는 살짝 손을 흔들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물통과 수건을 챙기더니 빠르게 일어났다.
내 쪽을 절대 쳐다보지 않은 채. 딴 곳으로 도망을 갔다.
이게 이렇게까지 피해야 할 일인가 싶었지만, 고민이 그만큼 깊다는 뜻이기도 하니.
오늘 제대로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나마 사람이 적은 곳에서 말을 걸었다.
"저기요. 혜윤 씨. 왜 자꾸 도망가요?"
"네..네? 어!? 우진 씨. 이 시간에는 웬일이에요?"
나를 처음 보는 것처럼 놀라는 얼굴을 하는 윤혜윤.
딱 봐도 연기를 하는 게 티가 났지만, 나는 모른 척 말을 이었다.
"그냥 오늘 낮에 수업이 있어서요. 끝나고 딱 들리니 지금이네요."
"아하하..그래요? 그럼 전 운동 끝났으니까 열심히 하세요. 그럼."
"30분 전에 왔다고 카운터 누나가 그러던데요."
"...오늘 과제가 밀려있어서요."
자꾸 눈을 피하고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자, 나는 아까의 사건을 언급해봤다.
"아까 대쉬받는 거 다 봤어요. 인기 많으시네요."
"그거 봤어요..? 관심 없는 사람한테 받아봤자 그냥 귀찮을 뿐이에요."
"그만큼 예쁘다는 뜻인데 좋은 거 아니겠어요. 저는 살면서 대쉬 한번 못 받아봤는데요."
"...그런 말 막하고 다녀도 괜찮은 거예요?"
"어떤 말이요?"
"그..여자한테 예쁘다는 말..이제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왜요?"
계속 이어지는 되물음에 그녀는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마치 입 밖으로 꺼내면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은. 그런 불안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여자..친구 있으시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은 이제 그분한테만 하세요."
역시 일요일 밤에 신음 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아니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으니.
"저 여자친구 없는데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네? 없다고요?"
"전 24살째 모솔 후다인데요. 그리고 아다는..그쪽이 떼주셨고요."
"아...그, 그럼.."
뇌가 정지가 된 듯 그녀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내 마지막 말 때문인지 얼굴이 빨개진 게 보였다.
저 상태가 오래 지속될 것 같았기에.
나는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계속 기다려 주었다.
"여자 친구 없다는 거 진짜예요..?"
잠시 후. 정신을 차렸는지 조심스레 질문을 해왔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보면 기분이 풀린 듯했다.
"진짜죠.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해서 뭐하겠어요."
"그럼..저번에 엘리베이터에서 신아영 씨랑 있었던 건 뭐예요? 전날 밤에 그 소리는요?"
민감한 주제가 나오자 나는 주변을 쓰윽 둘러봤다.
역시나 예상대로. 윤혜윤이랑 내가 꽤나 오래 붙어있자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할만한 얘기는 아닌 거 같네요."
"그렇..네요."
그녀도 상황을 알아챘는지 말소리를 줄였다.
가장 큰 오해도 대충 풀렸고, 더 이상 피해 다니지 않을 것 같자 나는 출입구를 가리켰다.
"우리 저녁이나 먹으면서 얘기나 할까요?"
"좋아요. 어차피 헬스 끝나고 밥 먹을 생각이었거든요."
"아까는 배부르다면서요?"
"...배고파졌어요."
그렇게 우린 같이 헬스장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