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091. 타이밍이 좋아
"저야 보시다시피 편의점에서 먹을 것 좀 사 오는 길이죠."
나는 봉투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윤혜윤이 내 손을 쳐다봤지만, 검은 봉투라 안이 보이지 않는지 계속 기웃거렸다.
먹을 거라 말했는데도 안쪽이 상당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별 거 없어요. 그냥 햇반이랑 음료수 좀 사 온 것뿐이에요."
"다른 건 안 샀나 보네요?"
"딱히 살만한 게 없어서요. 당장 필요한 것도 없는데."
"당장이라..많이 사놨나 보네요. 하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니까.."
내 말에 잠깐 놀라더니 이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변했다.
말 끝을 흐리고, 입을 계속 꿈틀거리는 걸 보면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알았어요. 저는 가볼게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뼈가 들어있는 듯한 쌀쌀한 말투.
결국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윤혜윤은 휙하고 나를 지나쳐갔다.
갑자기 달라진 그 모습에 무안해졌다.
일주일 만에 봤으면 더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게다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분위기도 좋았었는데 뭐가 문제일까.
지금 건드리기에는 위험해 보여 나는 이유를 물어보지 못하고 떠나는 뒷모습만 지켜봤다.
다크서클이 엄청 많이 진 걸 보면, 아마 안 좋은 일이 있거나 잠을 못 자서 그런 것 같았다.
예민한 상태면 그럴 수도 있으니 나중에 천천히 얘기해보기로 하고,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위로 올라갔다.
덜컹.
방 안으로 돌아오니 신아영이 건조대에 빨래를 말리고 있었다.
여전히 하의실종 패션으로, 고개를 숙일 때마다 두 구멍이 훤히 보였다.
그녀는 손에 든 걸 마저 올리고는 뒤를 돌아 나를 쳐다봤다.
"오셨어요? 빨리 밥 해주세요. 배고파요."
"지금 바로 할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나는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돌리고, 계란을 꺼내 프라이를 했다.
치이익 거리는 기름 소리를 듣고 있자 신아영이 옆으로 왔다.
그리고 살짝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프라이팬을 보며 말을 걸었다.
"근데 요리 잘해요? 이거 뒤집을 수는 있죠?"
"저 자취 오래 해봐서 꽤 자신 있어요. 나중에 놀라지나 마세요."
"그렇게 말하면 꼭 망치던데."
잠시 후. 나는 그릇에 햇반과 계란. 그리고 조미료를 몇 가지를 섞었다.
나름 냄새도 괜찮고 비주얼도 먹을만해 보여 신아영한테 건네주었다.
그녀는 내용물을 쳐다보더니 한 숟가락을 퍼 입안에 넣었다.
귀여운 입을 우물거리더니, 곧 목 안으로 삼키었다.
"오! 맛있네요. 간단히 만든 것 치고는 되게 간도 잘 맞고 좋아요."
"다행이에요. 남한테 만들어주는 건 처음이라 힘 좀 줘봤어요."
"제가 처음이에요? 그거 좀 기쁘네요."
립서비스가 아닌 진심으로 맛있어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렇게 침대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던 중. 신아영이 뒤쪽 벽을 보며 물었다.
"갑자기 떠올랐는데요. 여기는 방음 잘 되나요?"
"어느..정도는요. 그래도 제가 지금까지 가봤던 방 중에는 가장 좋은 편에 속해요."
"그래요? 그럼 어젯밤 내내 크게 목소리를 냈는데 그것도 들렸을까요?"
그 말을 듣자 마음 한 구석에 있던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뭔가 계속 걸린다 생각했는데 이거였나.
설마 아까 윤혜윤의 쌀쌀했던 태도도, 진한 다크서클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의미로 말했던 건가?
생각해보면 예전에 자기 방에서 자위를 할 때. 내 방에서도 그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었다.
근데 그보다 더 큰 신음소리를 아침까지 계속 냈으니.
윤혜윤이 어떻게 생각을 할지 상상이 갔다.
신아영과의 첫 현실 섹스에 정신이 팔려 차마 그걸 생각하지 못하다니.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왜 말이 없어요? 설마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는 건 아니죠?"
"그건 애매하네요..아파트면 모를까, 원룸이라서요."
"...제 신음 소리가 옆집에 다 들렸다고 말하는 거예요?"
"아마도요?"
그녀는 확신에 차지 못한 내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평상시의 장난스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뭐, 어쩔 수 없죠. 이미 일어난 일인데."
"중간에 찾아오거나 하지 않은 걸 보면..안 들린 게 아닐까요?
"들렸어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종종 소리가 날 텐데 미리 알려준 셈 치죠. 저희의 뜨거운 밤을."
역시나 강철멘탈.
신아영다운 말이었다.
그렇게 밥을 다 먹고 설거지까지 완료를 하고 쉬던 중.
창문 쪽에 있는 빨랫감들이 보였다.
"근데 저거 그대로 내버려 둘 거예요? 오래 걸릴 텐데."
"그만큼 저랑 오래 있을 수 있으니까 좋은 거 아니에요? 제가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 자연으로 말리면 최소 하루는 걸리지 않을까 해서요."
"그건 그래요. 혹시 건조기 같은 거 없나요?"
"집에는 없고, 저기 상가 쪽 코인 세탁소에 가면 있을 거에요. 갔다 올까요?"
"그게 좋을 거 같네요. 같이 나가요."
"괜찮으니까 쉬고 계세요. 입을 옷도 없잖아요."
밖에 신아영과 같이 다니다간 엄청난 시선 집중이 될 게 분명했다.
아직까지는 상당히 부담되었기에 돌려서 거절을 했다.
"어차피 5분 거리에 있으니까 빨리 갔다 올게요."
"고마워요. 그럼 쉬고 있을게요."
나는 적당한 봉지에 빨랫감들을 넣고 밖으로 나갔다.
혹시라도 윤혜윤을 마주칠까 조마조마했지만, 코인 세탁소에 도착할 때까지 윤혜윤은 커녕, 아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않았다.
긴장을 풀고 나는 빈 건조기 찾아 돈을 넣었다.
예상 시간은 약 40분. 여기서 기다리기에는 좀 긴 시간이었다.
어차피 옷을 바로 찾지 않아도 되니. 집에서 쉬다 오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아영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내가 와도 아무 반응이 없자 가까이 다가가 봤다.
색색..
그녀는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었다.
그새 잠든 걸 보면 아까 일찍 일어난 것에 대한 피로가 지금 몰려든 것 같았다.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연쇄 작용 때문인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같이 침대에 올라갔다간 그녀를 깨울 수도 있으니, 책상에 팔을 베고 엎드렸다.
어차피 오래 잘 것도 아니고 잠깐만 눈을 붙일 거니까.
상관없을 것이다.
창문 밖을 보니 노을이 져 있었다.
30분 정도만 자려고 했는데 몸이 거부를 했나 보다.
"으으.."
그대로 가만히 엎드려, 몸에 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침대에서 일정한 숨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신아영도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 나는 조용히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그래 봤자 눈곱을 떼는 것뿐이었지만.
코인 세탁소에 도착해 건조기를 열어보니 따뜻하게 잘 말라있었다.
간이 꽤나 지체됐기에 서둘러 옷가지들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이번엔 인기척이 났다.
안쪽을 보니 신아영이 고개만 빼꼼 내밀어 나를 보고 있었다.
"아..고생했어요. 저는 자기만 했는데.."
"괜찮아요. 아까 청소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여기 옷 가져왔어요. 만져보니까 완전히 말라서 바로 입어도 되겠더라고요."
나는 옷들을 건조대에 올려두며, 치마만 따로 신아영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이곳저곳 만져보더니 다시 나에게 주었다.
"뽀송뽀송하네요. 근데..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났네요?"
"저도 잠깐 잠이 들어서 좀 늦게 가져왔어요."
"그렇구나..그. 혹시 조금만 침대에 있어도 될까요? 방금 일어나서 그런지 힘이 없네요."
"얼마든지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지금이 5시 30분이니..느낌상 저녁까지 먹고 갈 거 같은데. 어떻게 하려나.
나는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책상에서 핸드폰을 시작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일요일.
불과 몇 시간 전에, 이 장소에서 광란의 밤을 보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있으니 마치 동거하는 커플 같았다.
...커플이라 하니 생각났는데 신아영과 나는 무슨 관계일까?
어제 유령의 모습으로 그녀의 집에 갔을 때, 분명 신아영은 이렇게 말했다.
좋아한다고.
그 당시에도 유령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 진짜 나를 좋아하는 건가?
지금까지의 행동을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한데.
저런 여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게다가 현실에서 직접 얼굴을 대고 말한 게 아니다 보니 확실하지가 않았다.
아무리 섹스를 많이 했다 해도 얼마 전까지 모솔아다였던 나한텐, 이건 너무 어려운 감정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나는 생각을 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시원한 물을 마시며 멍을 때리고 있자, 신아영이 작게 질문을 해왔다.
"저기, 조장님.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요. 여기 옆집에는 누가 살아요?"
"책상 쪽에 있는 방은 비어있는 거 같고요, 침대 쪽 벽에는 같은 학교 사람이 살아요."
"같은 학교요? 아는 사이인가요?"
"같이 헬스장도 다니고, 종종 얘기도 하고 나름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옆집분이랑 친하시구나.. 헬스장도 같이 다니고, 좋은 친구를 두셨네요."
"어...그렇죠?"
뭔가 남자로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오해를 풀어줘야 하나?
나는 입을 열려다 말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대화가 끊기고.
신아영은 창밖을 한참 쳐다보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건조대로 향해 팬티를 집어 들었다.
"이제 가게요?"
"네. 저녁시간이니 슬슬 가야죠. 밥을 또 얻어먹긴 미안해서요."
"먹고 가셔도 되는데."
"저도 눈치는 있어요. 개인 시간 가지면서 푹 쉬세요. 아까 책상에서 쪽잠 잤으면서."
중간에 내가 자는 걸 본 모양이다.
나도 혼자 쉬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기에,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곧 옷을 다 입은 신아영은 신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기 전 뒤를 돌며 말했다.
"전 이제 갈게요. 마중 안 나오셔도 돼요."
"사양하지 않을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고마워요. 나중에 또 봐요."
말로는 그렇게 해도, 막상 마중을 안 나오면 서운한 게 사람이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엘리베이터를 같이 기다려주었다.
띠링. 5층입니다.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안에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나와 신아영을 번갈아 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 에..? 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쟤는 아까 계속 왔다 갔다할 때는 안 보이더니.
왜 하필 지금 타이밍 좋게 나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