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084. 마지막 조별 모임
신아영의 개인 톡을 보니 아예 나를 유령으로 확정한 듯했다.
저번엔 조별 과제 늦지 말라고 했으면서, 이젠 대놓고 밤에도 늦지 말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유령인 걸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사실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증거를 잡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렇게 된 거 한 번 끝까지 우겨보기로 했다.
나는 절대 유령이 아니고, 너만의 착각이다 라고.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약 14시간 후인 오후 4시.
헬스를 갔다 와서 쉬고 있자, 문뜩 문제점 하나를 발견했다.
내일 조별 모임은 직접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설명하는 것인데, 조용한 카페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테이블에서 혼자 일어서서 설명하는 상상을 해보니, 그것만큼 웃긴 게 또 없었다.
아무래도 장소를 옮겨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바로 핸드폰을 들고, 단톡에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박우진 : 혹시 내일 조별 모임 뭘 하는지 기억나시나요?
잠시 기다리자 한 명씩 답장이 왔다.
-서아린 : 내일 그..직접 발표해보는 것 아닌가요?
-장민혁 : 저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요.
-신아영 : 네. 문제를 직접 설명해보는 거요.
-박우진 : 다들 알고 계시네요. 저도 그거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생각해보니 카페에서는 그런 걸 할 수가 없잖아요.
-장민혁 : 아 그러네요. 다른 사람들 다 있는데 일어서서 하기는 쪽팔리니까요.
-신아영 : 그럼 딴 데서 하는 건가요?
-서아린 : 스터디 카페는 어때요? 거기라면 문제없을 것 같은데.
-박우진 : 잠깐 하고 끝낼 건데 돈을 주고 갈 필요까지는 없어 보여서요. 그리고 칸막이가 없을 수도 있으니 그건 모르죠.
내 말에 다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시 대화가 끊겼다.
나도 손을 떼고 머리를 굴리고 있자, 다시 까톡 알림이 울렸다.
-신아영 : 그럼 누구 자취방에서 하는 건 어때요? 그게 가장 좋아 보이는데.
-서아린 : 아!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근데 저는 기숙사에 살아서..ㅠㅠ
-장민혁 : 저도 기숙사라..저는 안될 것 같아요.
저렇게 되면 자취방에 사는 건 나랑 신아영밖에 없는데..
살짝 불안한 느낌을 받으며, 나는 자취를 한다는 채팅을 치기 시작했다.
글을 다 쓰고 엔터를 누르기 직전, 신아영이 질문을 해왔다.
-신아영 : 조장님은 혹시 자취하시나요? 만약 안되시면 그냥 제 방에서 해도 되고요.
-박우진 : 저도 자취를 하긴 해요.
-신아영 : 음..그동안 조장님께 신세를 많이 졌으니, 이번엔 제 방에서 할까요?
상당히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신아영.
어차피 내 방에서 한다 했으면, 오나홀이나 여러 용품들을 숨겨야 했기에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나서주니 고맙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찜찜했다.
-박우진 : 네. 그럼 고맙죠. 그러면 내일 1시에 신아영 씨의 집에서 보는 걸로 할까요?
-서아린 : 저는 찬성이요! 대신 마실 것 좀 사갈게 아영아~
-장민혁 : 저도 찬성입니다.
-신아영 : 그럼 이따가 제 집 주소 보내 놓을 테니, 내일 시간 맞춰서 와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끝났다.
신아영의 방으로 실제 방문이라.
기분이 묘하긴 했지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지금은 알바 가기 전까지 쉬기로 하고.
편의점에 도착하니 어제보다 밝아진 표정의 한희진과 그와 반대로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한채아가 있었다.
평소와는 정반대의 상황에 적응이 안됐다.
"으음..."
"왜 그러세요. 점장님?"
"그냥 몸이 좀 근질근질거려서요."
"그거 일 중독 아닌가요? 몸 망가지실 텐데 천천히 하세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진짜 몸이 간질거려서요. 최근부터 좀 이랬어요."
한희진이야 어제 자위 방송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서 저렇다 치고.
한채아는...오일의 효과가 슬슬 올라온 건가?
처음 바른 날로부터 약 10일 정도 지났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간지러운 부분은 유두일 텐데.
대놓고 만지지는 못하고, 몸을 움찔거리기만 하는 걸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일단 우진 씨도 왔고 하니, 전 1호점으로 넘어가 볼게요. 내일이면 주말이니 오늘만 힘내주세요."
"맡겨주세요. 걱정 마시고."
"희진이도 열심히 하고. 그럼 이따 봐요."
"응, 언니 이따 봐."
띠링띠링.
한채아가 나가자 나는 한희진한테 말을 걸었다.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어제 방송에서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의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얼굴빛이 좋아 보이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냥 어제 스트레스를 풀어서요."
"취미 생활이라도 했나 보죠?"
"그렇..죠? 오랜만에 시간이 남아서 했어요."
"밤늦게 취미라니. 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여자의 취미 생활을 함부로 알려고 하나요. 절대 안 돼요."
"...물어봐서 미안해요."
갑자기 무서운 눈이 되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딱히 자위 방송을 한다는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 운동이라든지, 게임이라든지 적당히 꾸며낼 수는 있지 않은가.
나는 적당히 찌그러져 계산을 도와주며 할 일을 했다.
그렇게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밤 10시가 되었다.
곧 점장님이 돌아올 시간.
"하아..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희진이도 안녕."
"어서 오세요. 고생하셨습니다."
"고마워요. 아, 우진 씨. 오자마자 이런 부탁을 드리긴 미안한데..."
"뭐든지 말씀하세요."
"저 어깨 좀 주물러 주실 수 있나요? 어제 마사지의 시원한 기억이 계속 남아서요."
"물론이죠. 이쪽으로 오세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은 한채아.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로 가 머리카락을 치웠다.
열심히 일을 하다 왔는지, 좋은 향수 냄새와 미세한 땀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살짝 축축한 반팔 위로 손을 올리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동시에 반팔이 살짝 말려 올라가며, 그녀의 가슴도 흔들렸다.
그 광경에 취해 나도 모르게 힘이 더 들어가고 말았다.
"흐으응..! 하앗..조금만.. 살살 해줘요. 아파요."
"아 죄송합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대사였다.
요청대로 손에 힘을 풀고, 천천히 피로를 풀어주었다.
"으흣..네. 거기..좋아요. 그 세기로.."
한 5분 정도 지난 뒤.
한채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역시 손이 커서 그런지 시원하게 잘하네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별 거 아닌데요."
미소를 짓는 한채아를 보고, 슬쩍 옆을 돌아 한희진 쳐다봤다.
하지만 평소대로의 무표정이라 그대로 두었다.
시간은 더 흘러, 11시 30분.
나는 알바를 마치고 집에 도착했다.
쉬고 있자 또다시 까톡이 울렸다.
까톡!
-서아린 : 아 조장님! 이거 아영이만 빼고 만든 단톡방인데요. 우리 내일 아영이 집에 같이 가요.
-장민혁 : 미리 만나서 슈퍼에서 먹을 것 좀 사고 가는 건 어때요? 자취방도 빌려줬는데 그냥 가기는 좀 미안하잖아요.
나는 순간 감탄을 내뱉었다.
서로 사가는 물건이 겹치거나, 누군가 한 명이 안 사와서 뻘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는데.
그런 걸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좋은 의견이었다.
-박우진 : 그거 괜찮네요. 그럼 내일 12시 30분에 미래 슈퍼 앞에서 만날까요?
-서아린 : 네. 좋아요!
-장민혁 : 저도 그말 하려고 했는데 딱 통했네요 형. 그럼 그때 봐요.
근데 호랑이굴에 가는데 선물을 들고 가야 하나?
토요일.
약속한 시간에 슈퍼 앞으로 나가자 서아린과 장민혁이 나와있었다.
둘은 나를 보더니 손을 크게 흔들며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조장님!"
"드디어 마지막이네요 형."
"반가워요. 일단 더우니까 슈퍼 안으로 빨리 들어갈까요?"
"네에~"
대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 주변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슈퍼였다.
우린 음료수나 커피를 고르며 천천히 구경을 시작했다.
"근데 다들 아영이 집 처음 가보죠? 전 너무 기대되는데."
"우리 학교 사람들 중에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을 걸? 신아영의 집인데."
"막 아영이 집에 들어가서 꽃 냄새나고, 엄청 깨끗하고 그럴 거 같아."
좋은 냄새가 나는 건 맞지만..애액이나 보짓물 냄새도 나던데?
물론 주말 밤 한정이지만.
"조장님은요? 어떨 거 같아요?"
"어..어? 나도 되게 기대되네."
"그쵸? 저도요!"
나야 꽤나 자주 방문했기에 방의 구조나 딜도가 어느 서랍에 있고 등등을 다 알고 있지만, 얘네 머릿속에는 그냥 꽃밭을 상상하는 것 같았다.
신아영의 외모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긴 했다.
우리는 대충 먹을 것을 고른 다음 신아영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적어준 건물로 들어가, 맞는 호수를 찾아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어, 아영아 우리 왔어!"
"지금 나갈게요."
맑은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자 진짜 향기로운 꽃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어서 와요. 다들. 오늘 온다고 해서 방 좀 꾸며봤어요."
안쪽을 보니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좀 더 깔끔하고, 깨끗한 느낌.
"그럼 들어갈게~"
서아린과 장민혁이 차례대로 들어갔다.
나는 손에 든 봉투를 신아영한테 보여주며 발을 내딛었다.
"이거 자취방 빌려준다고 해서 저희가 다 같이 사 왔어요."
"뭘 이런 걸 다..고마워요. 유령 씨."
마지막 한 마디는 나한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얘들이 있는데 갑자기 말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순간 흠칫했다.
그런 나를 보며 씨익 웃는 신아영.
"아영아. 뭐라고 했어?"
"아니, 아니야. 자 들어가자."
유령이 아닌 척을 하려고 했는데.
벌써 한 방 먹어버렸다.
나는 책상 위에 봉투를 올려두고 바로 내용물을 꺼냈다.
커피나 과자 같은 소소한 먹을거리였다.
각자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둘러앉자, 신아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다들 제 방에 온 느낌이 어때요? 부모님을 빼면 제 방에 들어온 사람은 한 손가락 안에 꼽을 텐데."
"아까 꽃 냄새가 날 것 같다고 했는데 진짜 나서 놀랐어! 방도 예쁘고."
"생각보단 평범해서 놀랐어요. 저는 막 화려하고 그럴 줄 알았거든요."
서아린과 장민혁이 각자 소감을 말했다.
신아영은 기분 좋은 듯 방긋 웃더니 나를 쳐다봤다.
"조장님은 어때요?"
"되게 깨끗하고 냄새가 좋네요."
"흐흥..고마워요. 아, 잠깐 저 화장실 좀 갔다 와서 시작하도록 해요."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가고, 곧 내 핸드폰이 울렸다.
아주 의심스러운 타이밍.
양 옆에 앉아있는 둘이 볼 수 없도록, 최대한 숨기며 까톡에 들어갔다.
역시나 신아영한테 톡이 와있었다.
나는 클릭을 하자마자 헛숨을 들이켰다.
"흡..!"
"왜 그래요? 형?"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은 진정시키며 다시 화면을 봤다.
거기엔 사진 한 장과 하나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그녀의 행동.
신아영 - 저 지금 팬티 안 입었어요. 아, 잘못 보냈나? :)
그 아래에는 검은 팬티를 들고, 거울에다 셀카를 찍은 신아영의 사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