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067.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안녕하세요. 점장님. 저 왔습니다."
"아! 어서 와요. 우진 씨. 혹시나 안 올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딱 오셨네요."
"도망갈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예쁜 분이랑 같이 근무를 하는데요."
"에이 참, 보자마자 입 발린 소리를 하기는요."
손사래를 쳤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사실 엄청 오글거리는 소리였지만, 요즘 나도 철판을 깔은 건지 아부가 절로 나왔다.
내 말에 잠시 미소를 짓던 한채아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곧 1호점으로 넘어가려는 건지 빠르게 주의점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경력자라고 했으니 길게 얘기는 안 할게요. 다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은 청소, 진열, 계산 이 정도만 맡아주세요."
"그 정도야 쉽죠. 걱정하지 마세요."
"세세한 것은 희진이가 옆에서 알려줄 거예요. 만약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요."
실내를 돌며 전체적으로 점검을 하던 그녀는 카운터에서 멀어지자 작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 희진이는 일 배운 지 아직 3주밖에 안 되어서 헤맬 수도 있으니 옆에서 잘 봐주세요."
"알겠습니다."
동생을 아끼는 건 좋지만 이게 첫 출근한 알바생한테 할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분명 7살 차이가 난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지만 말이다.
혹시 시스콤인가?
잠시 생각을 하고 있자 한채아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따 퇴근할 때 잠시 들릴 건데요, 오늘치 일급은 그때 넣어 드릴게요. 그리고 매장 상태가 좋다면 보너스가 있을 지도 몰라요?"
"최대한 열심히 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럼 믿을게요. 이따 봐요~"
점장님이 나가고, 이 넓은 편의점에 나와 한희진만이 남게 되었다.
나는 일단 그녀한테 다가가 일정을 물어봤다.
"안녕하세요. 혹시 일 순서라든가 물건 들어오는 시간 좀 알 수 있을까요?"
"아..예..이제 6시라 사람들 한참 몰릴 시간이니까..그냥 제 옆에서 계산하는 거 도와주세요 .그리고 물건은 새벽에 들어오니까 그 시간대의 알바생이 할 거에요."
"알겠습니다."
띠링띠링.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님이 들어왔다.
카운터로 곧장 오더니 내 뒤쪽을 가리켰다.
"아쎄 1미리 한 갑 주세요."
그녀는 바로 바코드를 찍은 뒤 가격을 말했다.
"4500원입니다."
계산이 끝나고 손님이 나가자, 한희진을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포스기를 누르며 설명을 시작했다.
"방금 계산하는 거 봤어요? 이거 카드면 이 버튼 누르고 이거 누르면..딱 계산이 되고요, 현금은.."
나는 마스터한 지 오래였기에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쭈뼛거리며 설명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그냥 지켜봤다.
혹시 자신의 설명이 틀릴까 봐 여러 번 반복해서 눌러보는 것도 볼만했다.
보통 2주 정도는 일을 배우느라 바쁘다고 하지만,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예전에 알바했던 곳과 같은 브랜드라 포스기도, 일 순서도 다 똑같았기 때문이다.
한 귀로 흘리며 듣고 있자 드디어 설명이 끝났다.
"대충은 알겠죠? 제가 계속 계산할 테니까 뭘 누르는지 확실히 익혀주세요."
"알겠습니다."
그 뒤로 2시간 정도는 손님들이 꽤나 들어왔었다.
도시락을 사는 사람, 생필품을 사는 사람, 담배 사는 사람 등.
주변이 대학교 원룸 지역이다 보니 대학생이 주 고객이었다.
이제 밤이 되고 손님의 발걸음이 줄어들자, 그녀가 처음으로 나한테 계산을 맡겼다.
서로 위치를 바꾸고 기다리기를 잠시.
종이 울렸다.
띠링띠링.
"어서 오세요."
손님이 들어오자 나와 한희진은 동시에 인사를 했다.
사실 전혀 반갑지는 않지만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멍을 때리고 있자 방금 들어온 손님이 물건을 가져왔다.
내 손은 저절로 바코드를 찾아 찍었고, 입에서는 화면에 뜬 숫자를 그대로 읽고 있었다.
"1900원 입니다."
계산이 끝나자 또 다시 내 입은 스스로 움직였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이 나가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희진이 신기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저기, 저보다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예전에 6개월 동안 알바를 한 적이 있어서 그렇죠. 이미 몸에 완전히 베었어요."
"언니한테 들었긴 한데.. 오히려 제가 더 배워야 할 것 같네요.."
약 2년 전, 군대 가기 전에 했던 6개월 동안의 경력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아까 열심히 설명했던 자신이 부끄러운 듯, 다시 소심해진 태도로 창고를 가리켰다.
"이제 물건이 좀 빠졌으니 진열 좀 부탁해요. 저는 계산대 맡으면서 틈틈이 도와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나는 진열대 앞쪽부터 둘러보며 빠진 물건을 체크한 다음 창고로 들어갔다.
약 10평 정도의 넓이로, 매장이 큰 만큼 창고도 생각 외로 넓었다.
반 정도는 술과 음료수로 가득 차 있었고, 깔끔하게 코너 별로 정리되어 있어 물건을 찾기 쉬웠다.
구석에 있는 바구니에 기억나는 대로 담은 뒤 매장으로 나갔다.
하나씩 진열을 시작하자 카운터에 있던 한희진이 슬쩍 말했다.
"그...선입선출 아시죠?"
"당연하죠. 걱정하지 마세요."
"아..아, 네."
다시 조용히 있던 그녀는 심심한 건지 카운터에서 나왔다.
그리고 본인도 창고에 들어가 빠진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 진열을 시작했다.
말소리 하나 없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편의점을 가득 채웠다.
나도 아직은 첫날이니 분위기만 파악할 겸 조용히 일만 했다.
"저는 이제 청소 좀 할게요."
"아, 네. 대걸레는 창고 안쪽 화장실에 있어요."
다시 창고로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니, 아까 못 봤던 작은 화장실이 있었다.
안쪽에는 대걸레를 빠는 수채기와 세면대, 그리고 변기 칸 하나가 있었다.
리모델링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상당히 깨끗했다.
나는 대걸레를 들고 물을 묻힌 뒤 매장으로 나왔다.
바닥을 닦고 있으니, 바닥에 쭈그려 앉아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한희진이 있었다.
그녀의 주변을 지나가며 아래를 내려보았다.
청바지 사이로 보이는 엉덩이 골.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깊어 보였다.
주변이 더러운 척, 나는 멈춰 서서 대걸레를 문지르며 시선은 엉덩이에 고정시켰다.
확실히 외국의 유전자가 섞여서 그런지 색다른 질감이었다.
손을 집어넣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천천히 청소를 마쳤다.
카운터에 들어와 있으니 할 일을 다 끝냈는지 그녀도 내 옆에 왔다.
같이 의자에 앉아 있으며 시간을 때우다 보니 어느새 10시가 됐다.
1시간만 더 버티면 퇴근시간.
퇴근시간이라 하니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 한희진한테 질문을 했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혹시 퇴근은 언제 하세요?"
"저..언니가 데리러 오면 같이 집에 가요."
"데리러 온다는 거면..오후 11시에요?"
"네. 같이 낮 2시에 출근을 해서 딱 9시간씩 일하고 집에 가요."
"그럼 일주일 내내 일하는 건가요?"
"아니요. 일요일, 월요일은 쉬고요. 나머지는 똑같이 출근을 해요."
"그렇군요. 주 5일은 지켜서 일을 하네요."
나름 체계적으로 스케줄을 짜 놓은 것 같았다.
다시 말이 끊기자 매장을 보며 멍을 때렸다.
째깍째각.
퇴근 시간 1시간 전부터는 시간이 드럽게 안 간다.
누가 의도적으로 시계를 멈춰 놓은 듯한 느낌.
한희진은 핸드폰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첫날이라 눈치가 보여 할 수가 없었다.
괜히 뒤를 돌아 담배 위치를 외우고 있다 보니 문 쪽에서 종이 울렸다.
띠링띠링.
하늘하늘한 검은 추리닝 바지에 회색 반팔.
그리고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가 들어왔다.
무슨 비밀요원 같은 복장.
마침 심심했던 차라 방금 들어온 여자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특정 코너에 가더니 한참을 서 있었다.
카운터에서는 안 보이는 위치라 cctv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는 갈색 웨이브 머리와 적당히 큰 가슴이 선명하게 송출되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모습.
내가 cctv를 보자 핸드폰을 보고 있던 한희진도 무슨 일이 있냐는 듯, 같이 화면을 봤다.
그녀는 여자 손님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작게 혼잣말을 했다.
"저 언니 또 왔네. 오늘도 그건가?"
특이한 사람인지 기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물어봤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는 사람은 아닌데, 음..걍 머릿속에 팍 꽂히는 손님이랄까요? 엄청 예뻐요. 그리고 사는 물건도요."
이런 얘가 예쁘다고 할 정도의 미녀라.
궁금증이 더 커졌다.
잔뜩 기대를 하며 기다리자, 뭔가를 들고 온 손님이 카운터에 물건을 올려놨다.
그리고 고개는 더 푹 숙인 채, 조용히 카드를 주머니에서 꺼내 리더기에 꽂았다.
나는 바코드기를 들고 올려진 물건을 봤다.
보자마자 바로 이해가 갔다.
콘돔.
그것도 2박스.
솔직히 예전에 알바를 할 때도 여자가 콘돔을 사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익숙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XL사이즈의 일반 콘돔 한 박스와 돌기형 콘돔 한 박스.
나는 바코드를 찍으며 말을 했다.
"손님. 신분증 검사 좀 하겠습니다."
"네!? 아니..저번엔 안 했는데..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누군지 기억이 났다.
설마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일반 콘돔은 누구나 살 수 있지만, 이 돌기형 콘돔은 성인용이라 신분증이 필요합니다."
"아..알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돌기랑 성인을 강조하며 말을 했다.
눈앞의 손님은 빠르게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건네주었다.
사진을 보자 예상했던 얼굴이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말을 했다.
"모자도 벗어주시겠어요? 본인인지 확인을 해야 돼서요."
순간 손님은 몸을 떨더니 손을 올려 천천히 모자를 벗고 고개를 올렸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나는 사람의 눈이 실시간으로 커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아..아! 무...무슨..! 왜 여기에..!?"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왜..여기에 있는 거예요? 분명...! 저번 주에는 없었는데..?"
"오늘 처음 알바 시작해서요. 저번 주에는 없었죠."
상당히 당황한 얼굴로 나를 향해 삿대질하고 있는 윤혜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더 예뻐 보였다.
그건 그렇고 저번 주라.
이거 상습범이었네.
게다가 XL 사이즈? 새로 딜도 샀나?
"오늘부터...알바라니.."
다시 고개를 숙여 눈을 피하는 윤혜윤과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나.
옆에 한희진이 있는 것도 까먹은 채,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묘한 기류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