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062. 텅텅 빈 통장
나무와 풀들이 더 풍성해진 5월 말.
아다를 뗀 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때 분명 하룻밤의 추억으로 남겨두자고 서로 약속을 했던 것 같은데, 윤혜윤한테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은 아예 얼굴을 내비치지 않더니, 8일째 되는 날 겨우 한번 마주칠 수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1층으로 내려갔었는데, 건물 입구로 들어오는 그녀가 보였다.
방금 헬스장을 갔다 돌아오는지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못 본 척 건물 안으로 획 들어가 버렸다.
심지어 주로 오후 1~2시에 운동을 했었는데, 그 당시 오후 6시 인 걸 보면 시간까지 바꿔가며 나를 피하는 게 분명했다.
기승위로 허리를 흔든 게 그렇게까지 부끄러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의 감정이 괜찮아질 때까지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원래 시간대로 헬스장에 출근을 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이젠 꽤 친해진 여직원이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우진 회원님. 요즘 열심히 하시네요."
"네, 안녕하세요. 요즘 근육이 조금 붙는 것 같아서 좀 더 몰아붙이려고요."
"음..이제 거의 2달 차니 붙을 때가 되긴 했네요. 화이팅이에요"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물함으로 몸을 돌렸을 때 여직원으로부터 질문이 들어왔다.
"아 맞다. 저번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뭐 좀 물어봐도 돼요?"
"네. 뭔데요?"
"그 혹시 혜윤이랑 뭔 일 있었어요? 예전엔 잘만 같이 다니더니 요즘은 아예 오는 시간도 바뀌고 따로 다니네요."
"글쎄요? 따로 스케줄이 생겼나 보죠. 저는 잘 모르겠네요."
"음..그렇구나. 그냥 여자의 감각이랄까? 신경 쓰여서 물어봤어요. 이건 잊어주세요."
"넵. 그럼 전 들어 가볼게요."
역시나 시간을 바꾼 게 맞았다.
왠지 그동안 헬스장에서 안 보인다 했더니 그런 거였나.
나는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평소보다 조금 사람이 없어 보이는 안쪽.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워밍업부터 시작했다.
이젠 앵간한 기구들은 다 사용할 줄 알았기에 혼자서도 충분했다.
오늘은 상체가 할 생각이었기에 적당히 루트를 따라 한 다음, 근육에 느낌이 왔을 때 그만두었다.
나는 땀을 닦으며 옆에 있는 전신 거울을 봤다.
확실히 예전의 멸치 상태보다는 훨씬 보기 좋아진 몸.
이걸 보니 운동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마무리하기로 하고 나는 밖으로 나가 샤워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자취방 건물 앞에 도착하자 갑자기 집에 있던 벽시계가 멈춘 것이 기억났다.
나는 주변 편의점에서 건전지를 하나 사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상가 건물에 가보니 예전에 봤던 모습과는 달랐다.
그 사이에 입주한 상점들이 바뀐 듯, 편의점 간판도 다른 브랜드로 변해있었다.
띠링띠링.
"어서 오세요."
안에 들어가자 딱딱하지만 예쁜 목소리가 나를 맞이해줬다.
그냥 지쳐서 그런가 보다 하고 건전지를 찾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예전의 편의점보다 더 넓어진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생활품이라 쓰여있는 간판 쪽으로 향해 AA사이즈 하나를 들고 왔다.
계산대로 향하다 순간 눈앞의 광경에 걸음을 멈췄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엄청나게 예쁜 여자애가 카운터 안에서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 때문.
그냥 금발이면 '좀 인싸구나~' 하겠지만, 저 푸른 눈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일단 얼굴도 얼굴이지만 한국말은 할 줄 아는지 궁금했다.
"계산이요."
"2900원입니다."
어눌하지도 않고 어조도 완벽한 한국어.
아마 교환학생이 알바 중인 것 같았다.
앞으로 이 편의점 자주 이용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달력을 보니 3일 뒤에 또 조별 과제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제 두 번의 문제 풀이와 한 번의 발표 연습만 준비하면 완전히 끝이었다.
그리고 기말고사만 보면 이번 학기도 종료.
머릿속으로 공부 계획을 세우며 침대에 누웠다.
운동을 하고 왔으니 조금만 쉬기로 하며 핸드폰 화면을 켰다.
키기 무섭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를 보니 통신사에서 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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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금납부 확인 안내]
05월 통신요금 은행 자동납부 부분 출금 안내.
안녕하세요. 고객님.
~~~~~
예금 부족으로 일부 요금만 출금되었습니다.
추가 출금일에 출금될 수 있도록 확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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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통장에 돈이 없다는 거였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나는 서둘러 카드 사용 내역을 봤다.
@@@컴퍼니 : -200,000원.
@@@컴퍼니 : -300,000원.
@@@컴퍼니 : -400,000원.
제일 눈에 확 띄는 금액들.
며칠 사이에 같은 곳에서만 90만 원을 써버렸다.
이런 액수라면 그것밖에 없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놔둔 정력제와 영양제를 봤다.
그리고 서랍 안에 들어있을 오일까지.
물론 효과는 확실했으니 후회는 없지만 벌써 잔고가 비어버릴 줄은 몰랐다.
다음 용돈 받는 날까지 일주일 정도 남았기에, 당장 오늘 저녁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어쩔 수 없으니 부모님께 용돈을 미리 땡겨 달라고 전화를 했다.
다행히 학점을 잘 받는다고 약속을 하니 원래 용돈 [email protected] 로 통장에 입금을 시켜주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이 약들을 매일 먹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사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돈이 부족했다.
결국 내 즐거운 성생활을 위해 알바를 시작하기로 했다.
여긴 대학가라 음식점이나 상점들이 많았으니 금방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알바 전문 사이트에 들어가 집 주변으로 검색을 해봤다.
고깃집, 학원 알바 등등 자리는 많았지만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찾아 헤매기를 잠시.
딱 눈에 띄는 공고가 있었다.
[편의점 알바 구합니다.]
지원 기간 : 금일 00시.
SU 미래대 2호점에서 수, 목, 금 18~23시 오후 알바 구합니다.
최저시급, 4대 보험 적용.
경력자 우대.
지점 이름을 보니 상당히 가까운 곳이었다.
아래 포함된 지도를 보고 나서 상당히 놀랐다.
"아까 갔던 곳이잖아?"
마침 알바 자리가 필요했는데 엄청난 찬스였다.
심지어 기간도 오늘까지라 조금만 늦었어도 지원을 하지 못할 뻔했다.
운이 좋으면 그 여자애랑 같이 근무를 설 수도 있는 기회였고, 만약 나랑 교체되는 거라 해도 집이랑 가까운 거리라 이득인 상황이었다.
나는 사이트에 써있는 대로 바로 점주한테 전화를 했다.
통화음이 몇 번 흐르고, 포근하면서도 색기가 넘치는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알바 사이트에서 미래대 지점 2호 공고를 보고 전화드렸습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혹시 간단한 소개 가능할까요?"
"네, 저는 24살 군필인 박우진입니다. 편의점 경력 6개월 있고, ## 건물에서 자취 중이라 거리도 가깝습니다."
"아! 조건이 상당히 좋으시네요. 언제 시간 되시면 이력서 들고 찾아오시겠어요?"
"저는 아침 빼고는 다 가능합니다. 널널한 시간 알려주시면 제가 그때 찾아가겠습니다."
"그럼...내일 오후 3시쯤에 오시겠어요?"
"넵. 알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네. 그때 봐요~"
진짜 살살 녹는 목소리란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거기에 나긋하며 살짝 느린 말투가 더해져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
제발 얼굴이 예쁘기를 기도하며 그날 일과를 빠르게 마쳤다.
다음날.
오늘은 헬스를 조금 일찍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30분이 남아있었다.
나는 이력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땀 냄새가 나는 건 아닌지 냄새도 맡아봤다.
그리고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최대한 깔끔한 옷으로 골라 입었다.
준비를 마친 뒤, 10분 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출발을 했다.
띠링띠링.
"어서 오세요."
안에 들어가자 카운터에는 어제 봤던 금발의 여자애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 얘가 점주는 아닌 것 같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빵빵한 엉덩이가 청바지를 터트릴 듯, 튀어나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이블을 닦고 있어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 뒤에서 감상을 하고 있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엉덩이의 주인이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진한 군청색과 보라색 사이의 톤의 머리를 뒤로 묶고, 시원하게 이마를 깐 미녀가 있었다.
"손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총명한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며, 어제 들었던 나긋한 목소리가 작은 입에서 나왔다.
전체적으로 성숙한 분위기와 편의점 유니폼을 보니 이 사람이 점주인 것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 어제 전화드렸던 알바 지원생 박우진이라고 합니다."
"아! 빨리 오셨네요. 반가워요. 이력서 가져오셨죠?"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테이블에 종이를 올려놓더니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곁눈질로 몸매를 구경했다.
유니폼이 터질듯한 가슴과 엉덩이.
다만 펑퍼짐하게 입고 있어 허리의 두께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정도 몸매의 소유자라면 어떨지 상상이 갔다.
"음..군필에 집도 가깝고.. 편의점 경력도 있고.."
혼잣말을 중얼이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일단 보관해둘게요. 지원자가 몇 분 계셔서 결과는 내일 말씀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저희 편의점에 지원해 주셔서 고마워요~"
끝 말과 함께 싱긋 웃자 순간 넋을 잃고 쳐다보게 되었다.
무조건 이 편의점에 합격해야겠다 마음을 먹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났다.
조별 과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핸드폰에 진동이 울려 확인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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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 미래대 2호점입니다.
채용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근무 시작일이나 여건 등 자세한 사항은 직접 만나서 얘기하도록 해요.
혹시 오늘 오후 3시에 괜찮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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