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043. 몸이 아파
일단 방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어차피 헬스장에서 주는 기본 트레이닝 복을 입고 운동을 하기 때문에 따로 옷을 챙겨가지 않았기 때문.
나는 가방에 있는 전공 책을 빼고 갈아입을 팬티 하나만 챙겨 다시 복도로 나왔다.
거기엔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윤혜윤이 보였다.
내가 생각보다 빨리 나온 게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래요. 주말 동안 쉬었으면 다시 열심히 해야죠. 꾸준히 하다 쉬는 건 좋지만 월요일부터 그러면 안돼요."
"아.. 제 생각이 짧았네요. 갑자기 운동이 하고 싶어 졌어요."
일단 헬스장에서 조금이라도 운동을 해야 놔줄 분위기라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빠르게 운동을 마친 후 쉬고 싶었기에 그녀를 지나쳐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덜컹!
"자 얼른 가죠."
"적극적인 모습 보기 좋네요."
그렇게 우리 둘은 사이좋게 헬스장으로 출발했다.
밖에 나오자마자 뜨거운 공기에 숨이 턱 막혔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고통이었는데 바로 나와 2배로 고통을 받을 줄은 몰랐다.
힘을 아끼기 위해 조용히 걷고 있자 심심한지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늘 무슨 수업 들었어요? 전기공학과라 했으니... 전기 쪽?"
"당연히 전기죠. 뭐 대충 반도체랑 이것저것 설계해서 회로 만드는 과목이에요."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오네요. 역시 공대인가요."
"그쪽은요? 영문학과라면서요?"
"음..여긴 진짜 영어만 배워요. 발음이나 책 번역 같은 거요. 그래 봤자 아직 2학년이라 제대로 배운 건 없지만요."
"영어 발음은 끝내주겠네요."
"미국 드라마 같은 거 보면서 연습하고 있긴 해요. 문장 하나 듣고 따라 하는 식으로요."
"열심히 하시네요."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헬스장 건물에 도착을 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는 건 지금 같은 날씨에 엄청나게 감사한 일이었다.
건물 내부에 들어와 헬스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평소에 보던 여직원이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어머!? 오늘은 같이 왔네요? 뭐야...혹시?"
"에이 언니 그런 거 아니에요. 헬스장 오려고 했는데 우연히 마주쳐서 같이 온 거에요."
전에도 느낀 거지만 저 사람은 항상 엮는 걸 좋아하는 듯했다.
귀찮으니까 피해 다녀야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윤혜윤이 런닝머신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먼저 위로 올라가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걸어오는 동안 땀이 났던 터라 조심히 물어봤다.
"저..더운 날씨에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또 뛰어야 돼요?"
"이건 기본이죠. 어차피 별로 걷지도 않았잖아요? 최소 10분은 해야 몸에 열이 나니까 같이 뛰어봐요."
철저한 확인 사살.
그래도 속도를 느리게 하면 10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옆쪽 런닝머신에 올랐다.
"하아...하아..."
뛴 지 4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내 몸은 비상을 외쳐 댔다.
슬쩍 옆을 보니 힘든 구석 하나 없이 여유롭게 뛰고 있는 윤혜윤.
아무리 봐도 오늘 계속 붙어있다가는 응급실에 실려갈 것 같아 도망가기로 했다.
삐빅.
벨트가 멈추고 땀을 훔치며 바닥으로 내려가자 그녀가 말을 했다.
"벌써 끝났어요? 아직 5분 정도밖에 안 지난 거 같은데..."
"아까 더위에 걸었더니 몸이 금방 뜨거워져서요. 저 먼저 딴 거 해보러 가볼게요."
"음...그럼 제가 끌고 오기도 했으니, 오늘은 제가 봐드릴게요. 새로운 기구도 알려줄 겸."
정지 버튼을 누른 뒤 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저게 딱 좋겠네요. 초보자가 하기도 쉬운 거라 부담 없을 거예요."
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자 뒤를 돌아보며 다시 말을 했다.
"빨리 따라오세요. 이래 봬도 제가 봐주는 건 흔치 않다고요?"
도망가기는 그른 것 같다.
최대한 버텨볼 수밖에.
뒤따라 간 곳에는 줄이 달려있는 기구가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가 줄을 잡고는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푸쉬다운이라는 건데요. 그냥 로프를 잡고 아래로 당기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쉬워 보이죠?"
"확실히 조작법은 쉬워 보이네요."
"대신 자세를 제대로 잡고 해야 효과가 있으니까, 제 설명 들으면서 자세 제대로 눈에 익혀 두세요."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엉덩이를 살짝 뒤로 뺀 모습은 마치 오리를 보는 듯했다.
그녀는 로프를 내리기 시작했고, 팔에는 건강미 넘치는 근육이 튀어나왔다.
"팔꿈치는 몸통 옆에 붙이고요. 팔꿈치를 고정한 채 그대로 내리시면 돼요. 자 해보세요."
솔직히 보기엔 만만해 보여서 처음에는 '다행이다'라고 생각을 했지만 막상 줄을 잡아보니 아니었다.
분명 가볍게 내린 거 같았는데 이렇게 무거운 거였나?
"가슴은 앞으로 더...등에는 힘 빡 줘서 움직이지 않게 하고, 내릴 때 쭈욱 끝까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복을 할 때마다 옆에서 계속 훈수 따발총이 튀어나왔다.
어떻게든 10번을 끝내고 나니 팔이 저려왔다.
옆을 보니 아직 부족하다는 눈빛을 발사하고 있는 악마.
나는 거의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1세트를 더 한 뒤 그냥 바닥에 누웠다.
"처음 하는 거라 너무 힘들어요. 오늘은 여기서 봐주세요."
"음..안 쓰던 근육을 쓰면 그럴 수도 있죠. 팔이 아프면 잠시 하체로 넘어갈까요?"
조삼모사 같았지만 그래도 상체를 더 하는 것보단 나을 거 같아 뒤를 따라갔다.
눈에 보인 건 철판때기가 붙어있는 의자.
사람들이 몇 번 사용하는 걸 봤었기에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이건 레그 프레스라는 건데요. 제가 먼저 시범 보여드릴 테니까 잘 보세요. 먼저 엉덩이는 의자에 쭈욱 붙이시고."
다리를 철판에 대고 무릎을 굽힌 자세.
마침 잘 보라고 본인이 허락했으니 아픈 팔을 주무르며 몸매 구경을 시작했다.
탄탄한 허벅지와 볼록 튀어나온 가슴을 집중적으로 보니 고통이 반감되는 듯했다.
"허리를 살짝 띄우시고 발을 살짝 벌려서 미세요."
허리를 살짝 띄우는 걸 보니 뭔가 가버렸을 때의 자세 같아 괜히 꼴렸다.
나의 이런 시선도 모른 채 그녀는 몇 번 더 왔다 갔다 시범을 보여주고는 기구에서 내려왔다.
"자, 이제 해보세요. 제가 봐드릴게요."
기구에 올라타니 따뜻한 온기와 함께 향긋한 냄새가 남아있었다.
나는 그녀의 자세와 비슷하게 취하고는 다리를 천천히 피기 시작했다.
"무릎 완전히 피지 마세요. 그거 관절에 무리가 많이 가니까 살짝만 굽힐 정도로.. 그렇죠! 잘하네요."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칭찬을 받았다.
역시 자세히 보길 잘했어.
"그럼 무게 좀 늘려볼게요. 무리 없이 한 10번 왕복할 수 있을 정도?"
"네? 10번이요? 게다가 무게를 늘린다고요?"
"10번이면 거의 최소 단위인데 이 정도는 해야죠."
무시무시한 소리에 반문을 했지만 바로 묵살당했다.
잠시 뒤 작업을 끝낸 그녀는 웃는 얼굴로 말을 했다.
"이 정도면 초보자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거예요. 천천히 해도 되니까 발 사이 조금 더 넓히시고 시작!"
"읏..!"
아까랑 다른 중압감에 허벅지가 벌벌 떨려왔다.
평소의 나였다면 나름 할만했겠지만, 지금은 병약한 상태였기에 고통스럽기만 했다.
"저기..제가 진짜 오늘 힘들어서 그런데 무게 조금만 줄여주세요."
"또 그 소리예요? 그럼 조금만 줄여드릴게요. 대신 불평 없이 하는 거예요."
"네에..."
잠시 뒤,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나고 그대로 의자에 뻗어 휴식을 취했다.
손으로 조금씩 마사지 하긴 했지만 근육을 진정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신음을 조금씩 내고 있자, 내 모습이 평소와 좀 다르다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내 안부를 물어왔다.
"근데 오늘 많이 힘들어하시긴 하네요. 몸 상태 많이 안 좋으세요?"
"온 몸이 쑤시고 아파요."
이제 상황을 파악했는지 그녀는 나를 기구에서 내려오게 한 뒤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다리랑 허벅지를 같이 주물러주며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아까는 꾀병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면 미안해요. 괜히 제가 고집 부려서..."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로 마사지를 받으니 떨림이 한층 가라앉았다.
운동울 배워서 그런지 정확하게 아픈 곳을 만져주는 게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하아...이제 괜찮아졌어요. 조금만 쉬면 될 거 같아요."
"정말 괜찮아요? 미안해요. 오늘은 그만하고 집에 가서 푹 쉬세요."
"그래야겠어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또 봐요."
강제로 데리고 왔다는 죄책감인지 그녀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마 내가 이걸 계기로 운동을 그만두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또 보자고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옆에서 떠나질 않고 계속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난 듯 어디론가로 뛰어갔다.
"이거 뿌릴 테니 가만히 있어보세요."
손에 들고 온 통에는 뿌리는 파스라 써있었다.
급히 뚜껑을 열고 내 다리 전체에 뿌리니 시원한 감각이 들며 한결 나아졌다.
조금 많다 싶을 정도로 파스로 도배하고는 다시 물었다.
"혼자 갈 수 있겠어요? 아니면 택시 불러드릴 테니 타고 가실래요?"
"5분 거리인데 택시까지는 괜찮을 거 같아요. 그 정도의 체력은 남아있으니."
"그럼 같이 가드릴게요. 혹시 길바닥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
좀 과잉보호 같긴 하지만 어떻게든 책임지겠다는 말에 같이 돌아가기로 했다.
얼마나 미안한 건지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에이 설마요. 그럼 조금만 도와주시겠어요?"
그렇게 헬스장을 나와 집에 가는길.
그녀는 내 등 뒤로 팔을 살짝 감아 부축을 해주었다.
"진짜 괜찮아요? 제가 너무 미안해서 그래요. 힘든 것도 모르고..."
"정말 괜찮습니다. 더 사과하시면 제가 더 미안하니까 이제 그만해도 돼요."
말 그대로의 뜻이었지만, 그녀한테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로 들린 것 같았다.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풀이 죽은 상태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유지를 했다.
"그...안녕히 가세요. 푹 쉬시고요.."
"네. 부축해줘서 고마웠어요. 나중에 봐요."
"네에.."
문이 잠기고 나는 화장실에 가 대충 손만 씻고 나왔다.
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에 들고 말았다.
띵동!
벨소리에 눈이 떠졌다.
저번에 시킨 택배겠거니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띵동!
다시 울리는 벨소리.
힘들어서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그 다음 들려오는 소리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똑똑똑!
"우진 씨 혹시 있어요? 우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