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021. 술의 힘
바로 들어가서 씻고 잘 줄 알았는데 이건 전혀 예상 못 했다.
술 취해서 자위하는 걸 들킨 주제에 바로 와서 술친구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건 제정신인가?
혹시 아직도 술이 덜 깬 건 아니겠지?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초인종이 한번 더 울렸다.
띵동.
똑똑똑.
"안에 있는 거 아니까 없는 척 하지 마세요."
이젠 현관문까지 두들기며 항의를 한다.
아무리 봐도 절대 돌아가지 않을 분위기라 포기하고 문을 열어줬다.
"없는 척을 한 게 아니라 맛있게 먹던 치킨을 포기하고 기름 묻은 손을 비누로 빡빡 씻고 나와서 늦은 겁니다."
일부러 상황 설명을 자세히 하며 불만을 들어냈다.
사실 1회용 장갑을 껴서 기름이 전혀 묻지 않았지만 살짝 거짓말을 섞었다.
문 앞의 그녀는 반팔과 긴바지를 입고, 손에 작은 맥주캔을 하나 들고 있었다.
진짜 마실 생각인가?
"아니, 아까 술집에서 된통 마시고 여기서 그 난리를 쳤는데 지금 또 마신다고요?"
슬쩍 아랫배를 보며 아까의 일을 돌려 말하자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변명하듯 다급하게 말했다.
"아..술집에서는 벌칙으로 도수 높은 걸 많이 마셔서 빨리 취한 거고...어쨌든 안주나 술은 별로 안 먹었어요."
"그리고 마침 시험도 끝났는데 저는 제대로 못 즐겼고, 그쪽은 혼자 마시고 있으니 이웃끼리 괜찮잖아요?"
마치 대사를 준비해온 듯 입에서 술술 나왔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면 아마 평생 말은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할 사이가 될 것 같기에 허락을 했다.
뭐, 딱히 돌려보낼 생각도 없긴 했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같이 마시자고 하는데 거절은 불가능하지.
"네, 같이 마시죠. 들어오세요."
바닥 한가운데에 치킨을 두고 마주 보며 앉았다.
막상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뻘줌한지 윤혜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 서로 통성명도 안 했죠? 저는 미래대 영문학과 2학년 윤혜윤이라 해요."
그녀는 밝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고 보니 매일 나를 옆집 사람, 옆집 남자라 부르기만 했지.
서로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다.
"저도 미래대에 다니고 있고, 전기공학과 3학년 박우진입니다."
"아 거기! 그 과에 혹시 신아영이라고 있지 않아요?"
뜬금없이 신아영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살짝 양심에 찔려 되물었다.
"네. 있긴 한데...혹시 친구이신가요?"
"아니요, 친구는 아닌데 되게 유명하잖아요. 여기 주변 대학교에 전부 소문 났을걸요? 엄청 예쁘다고."
하긴 그 얼굴에 그 몸매면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지.
솔직히 존나 예쁘긴 하다.
개인의 취향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100명 중 99명이 이상형이라 말할 정도의 외모 레벨.
"하하... 예쁘긴 한데 너무 급이 달라서 이젠 아무 생각도 안 듭니다."
"에이, 그럴리가."
그렇게 대학이나 시험은 잘 봤냐는 둥 가벼운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술이 다 떨어져 있었다.
치킨도 나눠먹다 보니 몇 조각 남지 않아 편의점에 가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이 다 떨어진 것 같으니 편의점에 좀 갔다 오겠습니다. 가는 김에 먹을 것도 좀 사고요."
"아, 그럼 제가 갔다 올게요오..."
몸을 살짝 일으키며 말하는 윤혜윤.
눈이 살짝 풀리고 말이 길어지는 걸 보니 조금 취한 것 같았다.
맥주 한 캔을 마셨을 뿐이지만, 아까 완전히 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마시니 금방 취한 것 같았다.
저 상태로 편의점을 보냈다가는 소주병 하나는 깨고 올 것 같았기에 어깨를 살짝 눌러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 제가 빨리 갔다 올게요. 손님을 보낼 수는 없으니."
가만히 앉아있는 걸 보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방을 나섰다.
'근데 술 취한 사람을 내 방에 혼자 둔 게 더 위험하지 않나? 심지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빨리 갔다 오면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발걸음 속도를 올렸다.
띠링띠링.
"어서 오세요~"
아까 봤던 알바생이 인사를 했고 재빨리 맥주 2캔과 돼지 껍데기 냉동을 골라 계산을 했다.
"감사합니다~"
띠링띠링.
편의점 문을 닫고 나오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 씨발 데자뷰인가?
왜 이렇게 익숙한 상황 같지?
맥주캔이 흔들리든 말든 집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높이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불러 내려올 동안 잠시 쭈그려 앉아 쉬었다.
"하아...하아...차라리 걍 조용히 잠들어 있었으면 좋겠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쉬었고, 곧 문이 열렸다.
내가 사는 5층을 누르고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띠링 5층입니다."
기계음과 동시에 열리는 문을 나가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세게 열었다.
벌컥!
막상 열어보니 이상한 점이나 달라진 점은 없었다.
신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윤혜윤은 나가기 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 왔어요? 고생했어요."
그녀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나를 맞이해줬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닐봉지를 건네받고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와아! 저 돼지 껍데기 엄청 좋아하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냉동고 맨 위에 있는 거 집어온 건데?
그녀는 가위로 포장을 뜯고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나는 괜히 이상한 생각을 했다며, 불안감을 씻어버리고 원래 내 자리에 앉았다.
사온 맥주를 들이키며 땀을 식히고 있는데 눈앞에 뭔가 보였다.
분홍색 원통형에 한쪽만 구멍이 뚫린 물건.
마치 여성의 성기를 구현해 놓은 듯한 물건.
그리고 내 책상 구석에 있어야 했던 물건.
소형 오나홀이 윤혜윤이 앉아있던 자리에 놓여져 있었다.
씨발...
저게 왜 여기 있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고개를 돌려 전자레인지 앞에서 냉동이 돌아가는 걸 보고 있는 그녀를 봤다.
자기가 한 행동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저기요."
"네?"
"이게 왜 여기 있죠?"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마치 까먹었다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오나홀과 나를 반복해서 보더니 사과를 했다.
"죄,죄송해요..그 방 구경 좀 하다가 신기해서 만져보고 있었는데...생각보다 빨리 오셔서.."
내 눈치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순간 너무 놀라서 제 자리에 두는 걸 깜빡했어요..."
내 대답이 없자 작게 한 번 더 사과를 했다.
"진짜 죄송해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사실 반응을 떠보려고 가만히 있었다.
지금 오나홀이 신아영한테 연결되어 있는지, 윤혜윤한테 연결되어 있는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혹시 후자라면...눈치 못 챘을 리가 없는데 진심으로 사과하는 걸 보니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나중에 확인을 해봐야겠어...'
삐-삐-
생각 중에 마침 전자레인지가 소리를 내며 조리가 완료됐다는 걸 알려왔다.
그녀가 문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겨왔고 포장지 양쪽 끝을 살며시 잡아 치킨 박스 위에 올려놨다.
음식을 앞에 두자 다시 분위기는 풀렸고 아까처럼 평범한 대화를 해나갔다.
반 정도 먹었을 무렵, 아까 그 일이 신경 쓰였는지 윤혜윤이 다시 얘기를 꺼냈다.
"저 아까 그거 오나홀 맞죠? 남자들이 쓰는 성인기구..."
"네... 맞죠. 그건 왜요?"
"그...그거 기분 좋아요?"
당연히 정액을 뽑으려고 만든 물건인데 기분 안 좋을 리가 없지.
점점 분위기가 야릇해져 가는 걸 느껴가며 대답을 했다.
"네, 당연히 기분 좋아지려고 만든 물건이니 좋을 수밖에 없죠."
내 답변을 듣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더 했다.
"그...그럼 진짜랑 저것 중에 뭐가 더...좋아요?"
나 아다인데? 내가 어떻게 알아.
라고 말하려는 순간 무선 연결 오나홀이 떠올랐다.
예전에 썼던 일반 오나홀들과 비교도 안되게 기분 좋은 신아영의 보지.
아직 신아영한테밖에 박아보질 않아서 다른 여자의 보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오나홀보단 진짜 보지가 압승이었다.
"제 기준으로는 그래도 진짜가 훨씬 좋았어요."
반짝이는 눈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던 그녀는 말을 듣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큰 결심을 한 듯 진지한 톤으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사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듣고 나서 비웃지 말아주세요? 저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 거니까..."
그렇게 술의 힘을 빌려 시작된 이야기.
"한 달 전쯤인가? 제가 방에 무언가가 있다고 찾아왔었잖아요? 사실 그 날 이후로 꾸준히 나왔어요."
"정확히 말하면 딴 짓은 안 하고 제 몸만 더듬고 그러는데...그 더듬는 때가....하필...제가 자위를 하면 만져댔어요.."
부끄러운지 중간부터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근데...그게 진짜 기분 좋아서...마치 진짜 사람이 만져주는 것처럼 가슴이랑...그 아래도 만져주고.."
"매일 밤마다 자기 전에 찾아와서 만지다가...제가 가버리면 같이 사라지거든요..."
"그래서...더 기분 좋은 거에 흥미가 생겨서...딜도도 사보고...아! 방금 그건 잊어주세요!"
딜도 얘기는 부끄러운지 빠르게 손을 휘저으며 바람을 일으켰다.
"어쨌든..! 근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제가..그...자위를 해도 오지 않고.."
"벌써 그게 3주나 됐어요. 이제 저 혼자서 해도 별로 기분 좋지도 않고...어떡하죠..?"
이 얘기를 할 줄을 몰랐는데 이게 술의 힘인가?
나였다면 평생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살아갔을 텐데.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얘기를 나한테 꺼냈을까.
'내가 그동안 너무 무관심 했나?'
대답을 갈구하며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그녀.
차마 모른다고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그..머냐 귀신도 귀신들만의 세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 귀신도 중간고사 때문에 바빠서 못 왔을 수도 있죠."
귀신의 세계는 개뿔.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방금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건데.
그래도 대답을 해준 거에 고마운지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참...취하니까 이런 것도 막 얘기하고...미안해요. 그리고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제 주변 사람들은 귀신의 '귀' 자만 꺼내도 헛소리 하지 말라면서 아예 듣질 않았거든요."
자기가 먹은 쓰레기를 비닐봉지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뭔가 그쪽은 제 얘기를 믿지는 않아도 들어줄 거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정답이었네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마음의 응어리도 풀리고 즐거웠어요. 전 이제 가볼게요."
오늘 온 목적이 이거였나?
그녀는 신발을 신고 문을 열다 잠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입을 열고서는.
"아, 그리고 저도 오늘 오나홀 봤으니까 제 딜도 본거랑 쌤쌤으로 퉁치는 거예요? 알겠죠?"
씨익 웃는, 장난끼 넘치는 얼굴이 문틈 사이로 잠깐 보였고.
덜컹!
곧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