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이야기. 몸 서리
“무슨 일인지 왜 설명을 해 주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이령은 스스로 이 질문이 얼마나 멍청한지 깨달았다.
말을 못하는 사내에게 설명을 해 달라니, 이렇게 바보 같은 질문이 또 있을까.
하지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내가 짐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령의 옷가지를 보따리에 챙기고 이령이 가져온 물건들을 챙기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사내의 옷 그리고 이령에게 달여 먹일 약까지 전부 챙긴 사내가 집 안팎을 다니며 수레에 이것저것을 옮겨 담았다.
사내의 행동으로만 봐도 지금 사내가 이 집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집을 떠나려는 것일까?
“저는 여기가 좋아요.”
이 집이 작고 초라하긴 하지만 이령은 이 집이 좋다.
화로 하나에 의지해서 추위를 이겨야 하고 흙벽에 누추한 공간이라도 이 집은 이령에게 행복을 준 공간이다.
그런데 이곳을 왜 떠나려는 것일까.
게다가 이곳에는 토끼들도 있다.
며칠 전에 토끼우리에 지붕을 씌웠다.
토끼들에게 먹을 건초도 잔뜩 만들어 놓았다.
겨우내 먹여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건초를 만들어 놓았다고 좋아했는데, 이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면 토끼들은 어쩌고 그 건초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곧 겨울이다.
토끼들을 두고 갈 수도 없다.
“좋아요. 갈 때는 가더라도 토끼들을 데려갈래요. 건초도 실어 가야 하구요.”
사내가 이유도 없이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령은 사내를 믿는다.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령에게로 걸어온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툭툭 건드렸다.
이상하게도 사내의 이런 행동만으로도 사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는 이령이었다.
토끼를 데려갈 테니 염려 말라는 뜻이 분명했다.
이령을 마루에 앉히고 그녀의 어깨에 솜을 누빈 겉옷을 입힌 다음 앞섶을 여며 준 사내가 이령의 옆에 화로를 갖다주었다.
그런 다음에 손으로 울타리 너머를 가리키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다녀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라는 뜻이다.
옮겨 가는 집이 어딘지 몰라도 이곳에서 멀지는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수레를 가지고 먼저 짐을 옮겨 놓고 올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사내는 수레에 장작이며 쌀가마며 이런저런 것들을 가득 싣고 울타리를 나섰다.
그렇게 나섰던 사내가 다시 돌아온 것은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날, 사내는 그렇게 세 번을 왕복하며 수레에 짐을 실어 날랐다.
“가만히 있어요.”
등잔불이 어른거리는 방 안에 사내를 앉힌 이령이 기어이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실은 이 집에 와서 지금까지 내내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사내의 덥수룩한 수염을 밀어 버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내의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것이었다.
이령이 제 물건 중에서 제일 아끼는 빗을 꺼냈다.
이 빗은 어머니의 유품이다.
닳을까 아까워서 써 보지도 못한 빗을 꺼내 이령이 사내의 뒤에 앉았다.
그리고 사내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꽤나 엉켜 있어서 쉽게 빗기지 않았다.
그래도 이령은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한 가닥씩 풀어 내렸다.
빗으로 머리를 빗겨 주는 동안 사내는 그저 얌전히 있었다.
“아프지 않아요?”
가끔 이령이 물어볼 때마다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다 빗기면 수염을 깎아도 되나요?”
이령의 최종 목표는 저 수염이다.
수염을 왜 저렇게 기르는지 알 수가 없다.
수염을 깎고 싶다는 말에 사내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에 큰 흉이라도 있나요?”
고작 수염을 깎는 것이다.
그런데 왜 주저하는 것일까.
얼굴에 보여서는 안 되는 큰 흉이라도 있는 것일까.
“곤란하면 수염은 나중으로 미룰게요. 하지만 저는 당신 얼굴에 어떤 큰 흉이 있어도 상관없어요. 얼굴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걸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이령이 빗질을 했다.
이 말은 그녀의 진심이다.
수염 아래에 감춰진 이 사내의 본얼굴이 어떤 얼굴이든 이령은 크게 상관이 없다.
얼굴에 큰 흉이 있어도, 엄청나게 못난 얼굴을 한 사내여도 상관없다.
얼굴을 보고 이 사내에게 마음을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령이 이 사내에게 마음을 준 것은 얼굴 때문이 아니라 이 사내가 제게 보여 준 행동 때문이다.
저를 향한 이 사내의 진심 때문이다.
진심에 반했으니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건 마치 사내가 자신의 과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사내의 얼굴에 큰 흉이 있다면 자신은 몸에 큰 흉이 있다.
누군지도 모르는 괴한에게 겁탈당했다는 큰 흉이 있지만, 이 사내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사내에게도 어쩌면 그런 흉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얼굴의 흉이든, 아니면 자신은 알지 못하는 어떤 식의 흉이든 그런 것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다.
흉이 있는 사람끼리, 부족한 부분이 있는 사람끼리, 결함이 있는 사람끼리 이렇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 수 있으면 된 것이다.
따뜻한 품에 서로를 끌어안고 하루하루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저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 주는 이 사내가 고마워서 이령에게도 이 사내는 더없이 소중하다.
“짐이 언제 완전히 옮겨 갈까요?”
오늘 이 사내는 세 번 정도 수레를 날랐다.
그러나 아직 이 집에는 짐이 많이 남아 있다.
세간도 없는데 무슨 짐이 그렇게 많은가 하면 헛간의 곡식들이며 장작이며 그런 것들이 가장 많고, 그런 다음에 사내가 사용하는 도구들도 있다.
아직 사나흘은 더 수레로 짐을 날라야 하지 않을까.
그 사이사이에 자신의 약을 챙겨 주고 끼니를 챙겨 줘야 해서 짐을 옮기는 것이 더디다는 것을 안다.
아직까지 이령은 혼자 끼니를 챙기는 법을 모른다.
배우고 싶지만 사내는 이령이 그런 것을 하지 못하게 했다.
빨래까지도 전부 사내의 몫이다.
사내는 이령의 손에 그야말로 물 한 방울 묻히지 못하게 했다.
물론, 이령은 빨래하는 법도 모르지만 말이다.
사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는 탓에 이령은 늘 혼잣말을 한다.
하지만 혼잣말을 하면서도 이령은 그저 좋았다.
자신이 뭔가 말하면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니면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것으로 대답 아닌 대답을 해 주기 때문이다.
“거의 다 됐어요.”
사내의 머리를 다 빗긴 이령이 손을 더듬거려 끈을 집어 들고는 그것으로 사내의 머리카락을 묶었다.
사내의 머리는 짧았기 때문에 굳이 묶지 않아도 되지만, 한 줌 정도 되는 머리카락을 이령은 기어이 묶었다.
이령이 사내의 머리를 묶는 데 사용한 것은 어머니가 제 열 살 생일에 직접 수놓아 만들어 줬던 댕기였다.
붉은 천에 노란색 실로 수놓은 댕기로 사내의 짧은 머리를 묶었지만, 이 사내는 붉은색이 제법 어울려서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두 개를 전부 다 사내에게 줬다.
어머니의 빗으로 머리를 빗겨 주고, 어머니가 준 댕기로 머리를 묶어 줬다.
이 사내와는 정식으로 혼례도 올리지 못했지만, 이것을 예물로 삼아 이령은 이미 혼례를 올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제게 토끼를 주었고, 저는 이 사내에게 댕기를 주었다.
이것으로 예물을 교환했으니 자신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부다.
“수염은 나중에 꼭 깎아요. 알겠지요?”
돌아앉는 사내의 얼굴에 덥수룩하게 나 있는 수염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이령이 작게 웃었다.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노라 대답하는 사내의 품 안에 이령이 와락 안겼다.
제 품 안에 안기는 이령을 끌어안은 채로 사내가 그녀를 이불 위에 눕혔다.
제 몸을 묵직하게 눌러 오는 사내의 몸 아래에서 이령이 눈을 감았다.
제 살갗에 닿는 사내의 손이 무척이나 좋다.
제 가슴을 삼키는 사내의 숨결이 좋다.
언뜻 눈을 떴다 다시 감을 때 이령의 눈 안에 조금 전 제가 묶어 준 붉은 댕기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제 위에서 흔들리는 사내의 몸을 따라 그 붉은 것이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 * *
사내가 눈을 뜬 것은 자정이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사내는 평소와는 달리 일찍 잠이 들었다.
아침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일찍 잠드는 것을 택했다.
하루 이틀이면 짐을 다 옮길 수가 있다.
새로 옮겨 갈 집은 손을 봐야 한다.
오래 방치해 두어서 조금 허물어진 곳이 있는데, 겨울을 나려면 손을 봐야 해서 짐을 옮기는 중간중간에 집수리까지 하려니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래 봤자 사흘 정도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
칠 왕야 사독이 거사를 치르기 전에 이 집을 버리고 떠나면 된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자신들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사독이 거사를 성공하고 세상이 뒤집어져도 자신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누가 자신들을 찾아내겠는가.
이것이 사독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을 사내는 안다.
하지만 은인을 배신해서라도 그녀를 가지고 싶다.
추악한 마음이다.
그럴지라도, 그 죄를 죽어서 갚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그녀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다.
몸을 일으킨 사내가 방문을 쳐다봤다.
조금 전에 분명 인기척을 느꼈다.
자인이 올 시간은 아니다.
자인은 항상 새벽이 가까워지는 무렵에 왔다.
이령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사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선 사내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피 냄새였다.
사내는 가축을 도살하는 일을 한다.
온종일 손에 칼을 쥐고 짐승을 죽인다.
피 냄새를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다.
이건 명백한 피 냄새였다.
그게 누구의 피 냄새인지 사내는 바로 알아차렸다.
울타리 아래에 검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소.”
울타리로 걸어간 사내가 쓰러진 채로 꿈틀거리고 있는 자인의 앞에 무릎을 내리고 앉았다.
자인은 전신에 칼자국이 난 채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심각한 상처였다.
아직 거사 일이 되려면 이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거사가…….”
자인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손도 피투성이였다.
“발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 연루된 이들이 전부 잡혀 들어가고…….”
더 듣지 않아도 상황이 사내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비밀을 지켜 가며 거사를 준비했지만 황제에게 발각된 것이 틀림없다.
황제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 왔다.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으며 교활하고 잔인하다.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칠 왕야 사독도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했겠지만, 하늘이 황제의 손을 들어 준 것이리라.
시도도 해 보기 전에 들켰으니 칠 왕야 사독과 그 일에 연루된 이들은 이제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이건 사내가 바라던 바였다.
애초에 사독의 계획이 그런 것이었다.
거사가 성공하면 이령은 돌아가서 태자와 혼인하게 되고,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면 사내가 이령을 맡아 그녀의 지아비가 되어 살아가는 것.
사독은 그렇게 이령을 위해 두 가지 길을 준비해 놓았다.
이제 첫 번째 길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령에게 남은 것은 두 번째 길이다.
사내가 바라던 것이었고, 이미 사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기뻐해야만 한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 이령이 돌아갈 곳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기뻐해야만 한다.
자신이 이령을 도둑질한 것이 아니라 이제 정당하게 이령이 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다.
“상처부터 치료합시다.”
사내가 자인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물어볼 생각은 없다.
이유를 안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돌이켜지지 않으니 말이다.
자인을 헛간으로 데려간 사내가 자인의 옷을 벗겼다.
그의 상체에는 칼자국이 몇 개나 나 있었다.
“잘도 여기까지 왔소.”
이런 몸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이령 때문일 것이다.
충실한 호위 무사였던 이 사내는 자신의 아가씨를 두고는 죽지도 못하기 때문에 이 몸으로 피를 흘리며 기어이 여기까지 왔을 것이 분명하다.
다행히 고약을 사다 두었다.
이령의 등쌀에 사다 둔 고약이 이렇게 사용될 줄은 몰랐다.
“아가씨를 부탁드립니다.”
창백한 낯빛으로 자인이 사내를 쳐다봤다.
“이곳도 위험할 수 있으니 아가씨를 모시고 다른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내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태자 전하는 어찌 되었소.”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군.”
생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곧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왕야께서는…….”
“지금 잡혀 들어가셨으니 아마도…….”
자인이 뒷말을 흐렸다.
차마 제 입으로 제 주인의 죽음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사가 발각되어…….”
“사람이 하는 일이니 배신도 하고 그러지 않겠소.”
배신자라는 말에 사내의 가슴이 뜨끔거렸다.
거사를 배신한 것은 아니지만 사내는 사독을 배신하고 이령을 데리고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신도 배신자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저는…… 왕야를 구할 생각입니다.”
“개죽음당할 거요.”
“주인을 버리고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죽더라도 주인과 함께 죽어야지요.”
자인의 말에 사내가 입을 닫았다.
자인의 충심을 이해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충정이 목숨보다 귀한 법이니 말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귀한 것은 은혜도, 충정도, 법도도 아닌 이령이다.
이령이 웃으면 자신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이령과 함께 살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배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고, 살인자가 되어야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는 여기에 있으시오. 누굴 구하려고 해도 이런 몸으로 뭘 하겠소.”
“아가씨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요.”
“고맙습니다.”
헛간을 나갔던 사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낡은 이불이 한 채 들려 있었다.
그것으로 자인의 몸을 덮어 준 사내가 쓰지 않은 화로를 꺼내 와 그 안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폈다.
“날이 춥소.”
그 말을 남기고 사내가 헛간을 나왔다.
아직 밤이 어두웠다.
마당에 선 사내의 손등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하얀 것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눈이었다.
날이 춥다 싶더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당 한구석에 지붕을 덮어 준 토끼우리 안에서 토끼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짚단을 두르고 조금 더 따뜻하게 해 줘야 토끼들이 얼어 죽지 않을 것이다.
원래는 굴을 파고 사는 동물들인데, 저렇게 인위적으로 우리를 만들었으니 저기에서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실은 사내도 토끼를 키우는 것은 처음이다.
짐승을 도축하기만 했지 키워 본 적은 없다.
사람과 같이 살아 본 적도 없다.
어려서부터 항상 혼자였고,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령이 곁에 있고 토끼도 키운다.
충분히 만족한 삶이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분명 만족스러울 것이 틀림없다.
이령과 자신 그리고 토끼들.
세상사 다 잊고 자신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틀이면 짐을 다 옮길 수 있을 텐데.”
하얀 눈이 떨어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사내가 중얼거렸다.
사내가 손을 들어 제 짧은 머리카락을 묶은 댕기를 만졌다.
이령이 준 것이다.
분명 소중한 것을 준 것이 틀림없다.
댕기를 하지 않는 이령이 이언궁을 나오며 굳이 가져온 것으로 봐서는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리라.
이것을 자신에게 주었다.
그런데 자신은 이령에게 준 것이 없다.
이령은 제게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주었는데, 자신은 이령에게 무엇 하나 준 것이 없다.
사람이 이렇게 염치가 없으면 안 되는 법이다.
“그래. 염치가 있어야지.”
사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염치가 있어야지, 하고.
* * *
‘이령.’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이령이 눈을 떴다.
이령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방 안이 훤했다.
곁에는 사내가 없었다.
사내는 부지런하니 벌써 일어나 약을 달이거나 아침 끼니를 짓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옮겨 갈 짐을 정돈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령은 생각했다.
제가 자고 일어난 이부자리를 정돈한 이령이 겉옷을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눈이…….”
그리고 감탄했다.
마당이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당뿐만 아니라 감나무와 울타리 너머의 나무들도 소복하게 흰 눈에 덮여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는 것을 보고 이령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단 하루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워진 것이다.
그런데 마당 어디에도 사내의 발자국이 없다.
마당은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이 전부였고, 그 위에 발자국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헛간에 있으려나?”
이령이 마루로 나와 신을 신었다.
신을 신으려니 발목이 긴 덧신이 보였다.
“내 것일까?”
신고 다니던 것을 신고 눈밭을 걸으면 버선이 온통 젖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발목이 긴 이 덧신을 신으면 눈밭을 걸어도 버선이 젖을 염려가 없다.
“딱 맞네.”
덧신은 맞춘 것처럼 이령의 발에 딱 맞았다.
아마 사내가 눈이 올 때를 대비해서 사다 놓은 것이 틀림없다.
덧신을 신은 이령이 마당으로 내려섰다.
사내가 있을 곳은 헛간이나 도축장 외에는 없다.
요즘 사내는 도축을 하지 않는다.
어제도 새로 들여온 소나 돼지는 없었다.
그러니까 도축장에는 없을 것이다.
이령이 헛간으로 향했다.
“여기 있어요?”
헛간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사내는 거기에 없었다.
“이상하다.”
헛간 문을 닫으려던 이령이 헛간 구석에 웅크리고 누운 것을 발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런 것은 없었다.
이불 더미처럼 보였다.
그리고 곁에는 화로도 놓여 있었다.
“뭐지?”
이상하게 여긴 이령이 이불 더미에 가까이 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인?”
이불을 덮고 쓰러져 있는 것은 틀림없는 자인이었다.
자신 때문에 손목이 잘려서 이언궁에서 쫓겨났던 자인. 그가 지금 이 헛간에 쓰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불을 들치자 전신에 붕대를 감은 것이 보였다.
붕대에는 피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를 어째…….”
대체 왜 자인이 이렇게 심각하게 다친 채로 이 헛간에 쓰러져 있는 건지, 누가 이 상처를 치료해 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대체 도치 그 사내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이가 자인을 치료해 주었나?”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사내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 물어볼 곳도 없다.
아니면 자인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든가.
이령의 선택지는 그것 외에는 없었다.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자인이 다친 것 때문에 불안한 것도 있지만, 사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서 더 불안했다.
흰 눈을 보고 즐거워했던 마음은 간 곳이 없고, 이령의 가슴에 불안만 가득 찼다.
* * *
도축한 고기가 실린 수레를 끌고 사내가 도성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가 제일 먼저 간 곳은 이언궁이었다.
이언궁은 황궁의 병사들이 에워싸서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사독은 황궁으로 잡혀갔을 것이다.
거리는 눈이 내리는 탓에 오가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적었다.
아니, 눈 때문이 아니라 지난밤에 있었던 난리 때문에 겁을 먹은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역모가 수포로 돌아갔으니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 틀림없다.
사내가 묵묵히 수레를 끌었다.
도축한 고기를 실은 수레를 끄는 백정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멈춰라.”
사내를 멈추게 한 것은 황궁의 뒷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었다.
사내가 허리를 공손하게 굽혔다.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병사가 창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들여보내도 되나?”
이번에 새로 문지기가 된 병사가 제 동료를 쳐다봤다.
“도성 밖 백정인데, 벙어리야. 한 달에 서너 번 고기를 들여오는 자니까 괜찮아.”
“벙어리?”
“덩치가 저렇게 큰데 벙어리지. 듣기는 듣는데 말을 못한다지 아마?”
병사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사내가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주로 황궁 안에 고기나 쌀 그리고 이런저런 물건들을 들여가는 자들이 출입하는 사인문이었다.
일명 황궁의 뒷문이다.
사내는 몇 년 전부터 황궁에 도축한 고기를 대 왔다.
그 덕분에 문지기 병사들과도 얼굴을 익혔고, 황궁 안의 구조도 제법 잘 알고 있다.
평소라면 고기를 실은 수레를 가지고 수라간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도중에 수레를 구석에 숨겨 두고 수라간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사내의 발이 향하는 곳은 근화전, 태자의 궁이었다.
* * *
“그래서…… 아버님께서 잡혀가셨다는 거야?”
정신을 차린 자인에게서 부친 사독에게 일어난 변고에 대해 전해 들은 이령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자인은 대충 자초지종만 이령에게 설명했다.
많은 말을 하기에는 그의 부상이 심각한 까닭이었다.
“아버님을 구해야지.”
“아가씨, 방법이 없습니다. 모두 잡혀갔습니다. 황제의 병력은 도성을 가득 채우고 있고…….”
“어째서 이런 일이…….”
이령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한동안은 울지 않았다.
이제 행복할 일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상한 백부라고 생각했던 황제가 왜 아버지를 잡아 가뒀고, 아버지는 왜 백부를 향해 반역을 꾀한 것일까.
자신이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무서웠다.
왜 아무도 자신에게는 진실을 말해 주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그 사내, 도치는 대체 이 일에 어떻게 엮여 있는 것일까.
“어르신께서는 실패할 경우의 일도 대비했습니다. 거사가 성공하면 아가씨를 다시 모셔 가려고 했지만, 거사가 실패했으니 아가씨는 이전의 일은 다 잊으시고 희원 님과 살아가시면 됩니다. 아가씨는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희원?”
자인의 입에서 나오는 낯선 이름에 이령의 눈가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희원은 누구?
“그 사람은 누구…….”
“지금 아가씨를 보호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 사람 이름은 도치이고…….”
“진짜 이름은 희원입니다. 기뻐할 희 자를 쓰시는.”
“희원…….”
본명이라고?
그렇다면 그 사내는 왜 가짜 이름을 사용한 것일까.
“그런데 거사가 성공했다면 다시 모셔 가려고 했다니? 그건 무슨 뜻이야?”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자인의 두 손은 왜 멀쩡한 것일까.
손목이 잘린 것이 아니었던가.
“아가씨, 아가씨에게 일어난 일은 어르신께서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꾸미신 일입니다.”
“아버님께서 꾸미신 일?”
이령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대체 부친이 뭘 꾸몄다는 걸까.
“그날 밤, 그 괴한은 저였습니다. 제가 아가씨를 혼절시키고, 물론 아가씨의 몸에 손을 댄 건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보이게만…….”
“아버님께서 대체 왜? 대체 왜 내게 그런 일을…….”
“아가씨는 모르셔야 했으니까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셔야 했고, 만일의 일을 대비해서 아가씨를 안전하게 지키셔야 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자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거사 때문에?”
“아니요, 아가씨.”
자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사도 그 이유 중의 하나지만, 아가씨를 지키려 한 것은 황제에게서였습니다.”
“하지만 폐하는 나를 아껴 주셨고…….”
“노리고 있었겠지요.”
“뭐?”
자인의 말에 이령이 당황했다.
처음 듣는 말이다.
그러나 자인이 허튼 소리를 할 성격이 아니라는 건 이령이 더 잘 안다.
“태자 전하와 정혼을 시킨 것은 아가씨가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못하게 막기 위함이었고, 계속 아가씨를 눈독 들이고 있다는 것을 어르신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가씨를 빼돌린 것입니다. 황제의 눈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죽은 것으로 꾸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야만 그 의심 많은 황제도 믿을 테니까요.”
“어떻게 그런…….”
“아가씨.”
자인이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그는 지금 말을 많이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계속 말하려고 했다.
아니, 말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9년 전에 마님의 죽음도…… 그자의 짓이었습니다. 황제 말입니다.”
순간 이령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령은 아직도 그날의 일이 생생하다.
귀를 찌르던 비명, 코를 자극하던 피 냄새 그리고 집 안을 짓밟던 발걸음 소리.
“여기서 나오지 말고. 알았지?”
저를 마루 아래에 숨기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르신이 숨기고 있던 것을 찾아내려고 황제가 저지른 짓이었습니다.”
“아버님이 뭘 숨기셨는데?”
“황제의…… 약점이요.”
“황제의 약점?”
그게 뭘까.
부친은 왜 그런 것을 숨겼던 걸까.
“어르신은 마님의 복수를 하고 싶어 하셨고, 황제의 악정은 극에 달해서 이번 거사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면 황제는 거리낌 없이 아가씨를 취할 것이니 아가씨를 피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숨기신 황제의 약점이 뭔데? 그게 뭔지 알려 줘야 내가…….”
“아가씨.”
자인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아가씨는 피하시면 됩니다. 아가씨라도 살아남는 것이…….”
거기까지 말하던 자인이 피를 토했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 주며 이령은 그가 더는 말하지 못하게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상황 중에서 이해가 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도치, 아니 희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내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내가 지금 보이지 않는 것도 부친의 거사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무사할까.
무사히 돌아올까.
부친의 안위도 걱정이지만, 그 사내의 안위를 알 수 없어서 이령은 더 무서웠다.
제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엄청난 일이 무섭다.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이가 제게서 떠나 버릴 것이 무섭다.
모두를 잃는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고약이 더 있나 찾아볼게.”
자인의 상처는 그 사내가 돌봐 준 것이 틀림없다.
그 사내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그때까지는 자신이 자인을 돌봐야 한다.
고약 남은 것을 찾기 위해 문갑을 뒤지던 이령이 이상한 것을 찾아냈다.
지금까지는 문갑을 열어 볼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모든 것은 전부 그 사내가 해 줬기 때문이다.
문갑의 가장 아래쪽, 가장 깊숙한 곳에, 그것도 낡은 옷 아래에 숨겨져 있던 것을 이령이 찾아냈다.
이 낡고 초라한 초가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칼.
백정이 사용하는 도축용 칼이 아니라 훌륭한 칼집에 들어 있는 칼.
그리고 황금빛의 강보.
몇 권의 책.
백정인 그 사내가 글을 알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책이 숨겨져 있는 걸까.
예법과 병법서였다.
* * *
근화전으로 들어선 사내가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침상에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굳이 휘장을 걷어 보지 않아도 침상에 누워 있는 게 뭔지 사내는 알고 있었다.
근화전의 침전에 들어서자마자 송장 썩은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침상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것은 송장이었다.
죽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도 할 수 없는 상태의 죽은 자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사내가 침상에 앉아 그 죽은 자를 쳐다봤다.
“미안하다.”
사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만 살아남아서, 미안하다.”
죽은 자의 이름은 락원이다.
즐거운 락 자를 사용하는 이름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라고 형제의 이름을 희원과 락원으로 지어 준 것은 부친이었다.
자신들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자신들이 태어났을 때 무당이 경고하지 않았더라면 형제가 생이별을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쌍둥이의 반쪽이 폐하를 죽일 겁니다.”
부친은 무당을 맹신했고, 무당이 하는 말이라면 전부 믿었다.
무당의 말에 따라 이전 황후를 죽이고 쌍둥이의 모친을 새 황후로 책봉했고, 무당의 말에 따라 충신도 죽이고 나라의 법을 바꾸었다.
그런 부친에게 있어서 무당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더군다나 아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무당의 예언은 부친을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쌍둥이는 불길합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쌍둥이의 반쪽이 페하를 죽일 것이니 쌍둥이의 반쪽을 죽여서 세상에 폐하의 쌍둥이가 태어나지 않은 것으로 하늘을 속여야 합니다. 그래야 폐하의 치세가 영원히 이어질 겁니다.”
이미 세상에 태어난 쌍둥이를 태어나지 않은 것으로 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반쪽을 죽이는 것.
무당이 쌍둥이의 반쪽을 죽이기 직전에 그 핏덩이를 걱정한 누군가가 쌍둥이 태자 한 명을 가로챘다.
그것이 칠 왕야 사독이었다.
황제가 형제들을 죽이는 그 난리 속에서 살아남은 칠 왕야 사독은 들키지 않고 쌍둥이의 한쪽을 숨기는 것에 성공했고, 그렇게 해서 빼돌린 쌍둥이 태자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키웠다.
아무도 모르게.
그것이 바로 이 사내 도치다.
희원이라는 진짜 이름은 버리고, 도치라는 이름으로 어려서부터 백정 짓을 배우며 자랐다.
가장 천한 곳에 숨겨 놓아야 황제가 찾지 못할 거라고 사독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 방법은 통하는 것 같았지만, 몇 년 전부터 황제는 사독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계속 사라진 쌍둥이의 한쪽을 찾고 있었고, 마침내 그 실마리를 사독에게서 찾은 것이다.
그래서 사독의 이언궁을 습격해서 그를 위협하고 쌍둥이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사독은 운이 좋게 그때 그 자리에 없었기에 애꿎은 그의 아내만 죽임당했다.
그때부터 사독과 황제의 거리는 멀어졌다.
이미 금이 가 있던 살얼음은 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도 사독도 서로를 향해 노골적인 적대심은 보이지 않았다.
황제도 사독도 상대를 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독이 먼저 황제를 쳤고, 황제는 역습을 했다.
결국 당한 쪽은 사독이다.
사독이 현명하게 행동한 것은 그의 딸 이령을 미리 피하게 한 것이다.
이령은 원래 태자의 아내가 될 예정이었지만, 황제는 애당초 그녀를 태자에게 줄 마음이 없었다.
사독을 처리하고 나면 태자도 처리하고, 그런 다음에 이령을 제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령은 황제의 관심을 호의로 받아들였을지 몰라도, 황제의 호의는 실은 탐심이었다.
태자 락원이 이렇게 병들었다는 것은 사독도 몰랐을 것이다.
사독은 근 몇 개월 동안 태자를 보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그 이유가 이것이었다.
어쩌면 독살일지도 모른다.
황제는 태자의 죽음조차 사독에게 떠넘기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독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죽임당하면 더는 황제를 위협할 것은 없다.
황제가 평생에 두려워하던 쌍둥이의 반쪽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적어도 태자는 죽었으니 황제는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네 이름을 훔쳐야겠다.”
사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내가 훔쳐야겠다.”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해 본 적 없는 쌍둥이 형제의 주검 앞에서 사내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네 삶을 내가 서리할 거다. 내가 너 대신, 네 이름으로, 네 얼굴로, 네 삶을 살 거다. 네 아내가 되었어야 할 그녀와 함께.”
자신은 피했고, 동생은 남았다.
동생은 죽었고, 자신은 살았다.
그리고 동생의 아내가 되었어야 할 이령을 자신이 가졌다.
이제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은 동생의 이름과 신분, 그 모든 것을 가로챌 것이다.
“이 죗값은 나중에 죽어서 치르마.”
나쁜 짓이라는 걸 알지만, 방법은 이것 외에는 없다.
모두를 살리고 이령과 함께 살아갈 길은 이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썩어 가는 송장의 가슴을 한번 꾹 눌러 준 사내가 일어섰다.
그리고 경대 앞에 가서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쳐다봤다.
머리는 이령이 묶어 준 그대로였다.
주머니 안에서 작은 칼을 꺼낸 사내가 제 수염을 자르기 시작했다.
오래 기른 탓에 덥수룩한 수염은 잘 잘리지 않았다.
사내의 발아래 수염이 한 뭉치씩 툭툭 떨어졌다.
이 수염을 깎자고 하던 것은 이령이었다.
그녀에게 수염을 깎은 제 얼굴을 보여 주지 못한 것은 제 얼굴이 제 쌍둥이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령은 태자를 본 적이 있다.
자신의 얼굴을 보면 태자와 똑같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제 목소리도, 제 얼굴도 태자와 똑같다.
모든 것이 닮았다, 자신들은.
수염을 전부 자른 사내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 얼굴이 낯설었다.
제 얼굴인데 제 얼굴이 아닌 것만 같았다.
수염을 전부 깎은 사내가 문갑을 열어 죽은 자의 옷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갈아입고 근화전의 침전을 나설 때 그는 더는 백정 도치가 아니었다.
태자 락원이었다.
* * *
“괘씸한 것들.”
술을 넘치게 담은 술잔을 들어 올리는 황제의 손이 넘친 술로 흥건하게 젖었다.
“감히 역모를 꾸미다니.”
황제는 조금 전에 무당의 사당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무당이 한 말 때문에 지금 황제는 마음이 초조했다.
“쌍둥이의 반쪽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곧 돌아올 겁니다, 폐하.”
그 무당은 영험한 무당이다.
그 무당의 말이 빗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때문에 지금 황제는 사독을 살려 두었다.
다른 때였더라면 사독은 벌써 목이 잘렸을 것이다.
감히 역모를 꾸미고 제게 저항했다.
죽여도 열 번은 죽였겠지만, 살려 둘 수밖에 없는 것은 사독이 사라진 쌍둥이를 숨겼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그 처를 죽일 때 혹은 그 후에도 사독을 몇 번이나 죽일 수 있었지만, 쌍둥이를 찾기 전에는 죽일 수가 없었다.
사독이 죽으면 쌍둥이를 찾을 길이 영영 사라진다.
그 쌍둥이의 한쪽.
언젠가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러 올 그놈.
그놈을 찾아내서 죽여야 한다.
“손가락부터 하나하나 자르면 제까짓 놈이 불지 않고 버틸까.”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고문밖에 없다.
손가락 발가락을 전부 잘라서라도 쌍둥이의 한쪽이 있는 곳을 찾아내야 한다.
그놈을 죽이기 전에는 발 뻗고 잘 수가 없다.
제 피를 받아 태어났으면서 저를 죽일 운명을 가진 놈이다.
그런 놈은 자식도 아니다.
다른 자식도 다 죽였으니 그놈만 죽이면 자신은 이 옥좌에서 영원히 황제로서 살 수 있다.
지금까지 제 자리를 욕심내거나 넘본 놈들은 전부 죽였다.
자식도 죽이고 형제도 죽이고 아비도 죽였다.
다 죽일 수 있다.
이 자리만 지킬 수 있다면 말이다.
그때 방문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누구냐?!”
황제가 버럭 소리 질렀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당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조금 전에 만나고 왔는데 그새 무슨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무당이 저를 찾아오면 황제는 겁부터 났다.
또 무슨 불길한 일이 있을까 그것이 무서웠다.
가진 것을 지키는 것은 두렵고 힘든 법이다.
사방에서 전부 제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드니, 이 손에 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누구보다 잔인해져야 한다.
“무슨 일이냐고 지금…….”
그때였다.
무당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더니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그제야 황제는 무당의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당은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그리고 무당이 바닥에 철철 흘린 피를 밟고 한 사내가 들어섰다.
태자였다.
“너, 너는…….”
그럴 리가 없다.
바로 오늘 아침에도 근화전에서 썩어 들어가는 태자의 시체를 확인했다.
그런데 썩은 시체였던 태자가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들어선단 말인가.
“너, 너는……. 너는…….”
저건 태자가 아니다.
태자는 죽었다.
그렇다면 태자의 귀신이란 말인가.
귀신이 아니면,
“설마…….”
황제의 얼굴이 겁에 질렸다.
이십 몇 년 전부터 들어온 예언이 황제의 귀를 맴돌았다.
“쌍둥이의 반쪽이 폐하를 죽이고 폐하의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쌍둥이의 반쪽.
오래전에 사라졌던 그 반쪽.
“제 이름을 기억은 하십니까?”
들어선 사내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너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손에 든 술잔을 덜덜 떨고 있는 황제에게로 다가서며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 이름은 희원입니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사라진 쪽의 이름이 그것이었다. 희원.
“직접 지어 주신 이름인데, 기억도 못 하셨나 봅니다.”
저를 죽일 놈의 이름. 희원.
“제 동생이 죽었습니다.”
다가선 사내가 손에 든 것을 천천히 황제에게 내보였다.
칼이었다.
그 칼을 황제는 기억한다.
오래전에 강보에 싸인 핏덩이를 죽이라고 궁녀의 손에 들려 보낸 칼이다.
그 칼을 지금 사내가 들고 있었다.
“락원이가 죽었습니다, 아바마마.”
“나, 나는 너, 너 같은 자식은…….”
황제가 술잔을 떨어뜨리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 없느냐! 여기 역적이 있다! 역적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소리 질러도 달려오는 이가 없었다.
“아바마마.”
바짝 다가선 사내가 칼끝을 황제의 목에 댔다.
칼날이 목을 꾹 눌러 오자 황제가 끅끅 낮은 비명을 울렸다.
“이렇게 뵙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내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사내의 마지막 말이었다.
사내가 손에 든 칼로 황제의 목을 푹, 찔렀다.
붉은 피가 솟구치며 황제의 얼굴이 흙빛으로 질려 가는 것을 보면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죽어 가는 황제의 얼굴을 보며 문득 사내는 생각했다.
저 얼굴과 자신이 닮았다고.
아니, 저 욕심과 자신의 욕심은 다를 것이 없다고.
황제는 옥좌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지만, 자신은 이령을 놓지 못해서 이령을 가지려고 지금 이렇게 제 손으로 부친을 죽였다.
다른 것이 무엇일까.
결국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위해 타인을 죽였다는 것은 똑같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생각은 없다.
이건 대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욕심을 위한 것이다.
그녀와 살아가기 위한 개인의 선택이다.
손에 피를 묻힌 까닭은 온전히 그녀를 위해서다.
그러니까 자신은 영웅도 무엇도 아니다.
그저 동생의 삶을 훔쳐서 그녀와 살아가고픈 가련한 사내일 뿐이다.
* * *
사내와 이령이 함께 살던 집에 손님이 찾아온 것은 눈이 그치고 며칠이 지나 부상당했던 자인이 일어나서 비질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마당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던 자인이 울타리를 열고 들어오는 손님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에 화로에 불을 붙이던 이령이 방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이령은 그 사내가 돌아온 줄 알았다.
그러나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그 사내가 아니라 부친 사독이었다.
“아버님!”
달려간 이령이 부친의 품에 와락 안겼다.
부친의 얼굴은 초췌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부친은 꽤 많은 이를 데리고 왔고, 그중에는 가마도 있었다.
그 가마가 자신을 데려가기 위한 가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령은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분은요?”
이령이 묻는 그분은 도치, 그 사내였다.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 그 사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처 다 옮기지 못한 짐만 남겨 두고 그 사내만 사라졌다.
아직 그 사내가 다 달이지 못한 약 첩도 남아 있었다.
집 곳곳에 그 사내의 흔적이 있는데 그 사내만 없다.
그리고 이제 부친이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왔다.
그 사내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부친은 제게 함께 돌아가자며 가마를 가지고 왔다.
“서방님은요? 그분이 돌아오기 전에 저는 여기서 못 떠나요, 아버님.”
부친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자신을 여기에 보냈는지 알지만, 부친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자신은 그 사내의 아내가 되었다.
겉으로만 보이는 가짜 부부가 아니라 진짜 몸을 섞고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그 사내를 버리고 어딜 간단 말인가.
그 사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얘야.”
“서방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저는 여기에 있을게요.”
부친이 무사한 것을 본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가씨…….”
사독의 뒤에서 몸종 은아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봤지만, 이령의 마음은 이미 견고했다.
이곳에서 그 사내를 기다린다.
그것이 이령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여전히 이령은 할 줄 모르는 것이 많다.
빨래도 할 줄 모르고, 밥을 짓는 법도 모른다.
하지만 이령이 할 줄 아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 사내를 믿고 기다리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할 생각이다.
“얘야, 새 황제께서 즉위하실 거다. 너는 태자 전하의 정혼자이니 궁으로 가서…….”
“아니요, 아버님. 아니요. 제 서방님은…….”
자인에게서 들어 알고 있다.
자신이 지아비로 삼은 사내가 누군지 이령은 자인에게서 전부 들었다.
태자의 쌍둥이 형.
부친이 오래전에 숨겼다는 태자의 쌍둥이 형이 그 사내라고 했다.
태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그를 부친이 숨겨 두고 도치라는 이름으로 살아오게 했다고 자인은 말했다.
자신은 태자와 정혼했지만, 여차하면 그 사내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게 하는 것이 부친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부친이 살아 돌아왔다.
그건 거사가 실패한 것처럼 보였으나 성공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사가 성공하면 자신은 이곳을 떠나 태자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
거사가 성공하면 부친이 살지만 자신은 그 사내와 헤어져야 하고, 거사가 실패하면 부친은 죽고 자신은 그 사내와 살 수 있다.
애초에 그렇게 계획된 일이다.
기뻐해야 하는데 눈물이 났다.
그 사내는 거사가 성공한 걸 알고 떠난 것일까.
자신을 두고 떠나 버린 것일까.
같이 가기로 했으면서 혼자 가 버린 것일까.
그래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얘야, 가마에 오르거라.”
“아니요, 아니요, 아버님.”
이령이 뒷걸음질 쳤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래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도 기다리고 싶다.
아니, 기다려야 한다.
다시 한번 그 머리를 빗겨 주고, 그리고 수염을 깎아 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아직 그 사내와 하지 못한 것이 많다.
그러니까 기다려야 한다.
그때 울타리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물러나며 한 사내가 울타리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얼굴을 이령은 알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그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태자였다.
태자 락원. 자신의 정혼자.
그 사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며 이령이 눈물을 삼켰다.
쌍둥이라면 그 사내도 꼭 저렇게 생겼을 것이다.
그 사내가 왜 수염을 자르지 않았는지, 왜 제게 벙어리 흉내를 냈는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는데 그 사내 대신 제게로 걸어오는 태자를 보며 이령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이령.”
태자가 제 이름을 부르자 이령이 몸을 흠칫 떨었다.
낮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같이 갑시다.”
태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 내민 오른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손을 다친 것일까.
이령이 천천히 눈을 들어 사내의 머리를 쳐다봤다.
사내의 짧은 머리카락을 묶은 것은 붉은 댕기였다.
노란 자수가 수놓아진 붉은 댕기.
그걸 보는 순간 이령이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꾹꾹 참고 있던 울음이 한꺼번에 터지며 이령이 기어이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며칠 내내 참고 참았던 울음이었다.
울면 안 된다고, 사내는 돌아올 거라며 믿으면서 몇 번이나 터질 뻔한 울음을 참고 있었던 이령이 기어이 목 놓아 통곡했다.
그녀가 왜 우는지 다른 이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내만은 그녀가 우는 이유를 알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우는 이령의 앞에 무릎을 접고 앉은 사내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가끔 ‘그렇게 울면 목이 상하는데.’라는 말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령의 귀에만 들리게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는 생각처럼 다정해서, 꼭 이령이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