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괴한
이령은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귀를 건드려 잠에서 깼다.
이령은 잠귀가 밝은 편이다.
바람이 조금만 거세어 문을 덜컹거리게 하고 문밖에 있는 나무가 소리를 내며 흔들려도 잠이 깰 정도로 잠귀가 밝다.
아주 어렸을 적 무서운 일을 당한 적이 있어서 그 후유증이라고 의원은 말하곤 했다.
가위에 잘 눌리고 잠귀가 밝아 깊게 잠들지 못하게 된 것은 열 살 때 있었던 끔찍하고 무서웠던 비극 때문이다.
9년 전, 이령은 모친을 잃었다.
부친이 이언궁을 비운 사이 궁에 괴한들이 잠입해서 이언궁의 모든 이가 잔인하게 도륙당하고 죽임당했다.
“여기서 나오면 안 돼. 알겠지? 꼼짝 말고 여기에 있어야 한다. 무슨 소리가 들려도 나와서는 안 돼.”
그렇게 말하며 모친은 이령을 마루 아래에 숨겨 뒀고, 그곳에서 열 살의 이령은 밤새도록 그 무서운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두 손으로 귀를 꽉 막고 그 무서운 소리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그 소리는 계속되었다.
비명, 고함 그리고 무서운 발걸음 소리.
“이령아!”
마루 밑에 숨어 있던 이령을 발견한 것은 새벽이 되어 이언궁으로 돌아온 부친이었다.
저를 향해 손을 내미는 부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이령은 혼절해 버렸다.
그날, 이령은 모친을 잃었다.
그날, 이언궁의 모든 사람이 죽었다.
단 한 명, 이령만 제외하고 모두가 죽었다.
그 후로 이령은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깼다.
어둠이 무서워서 밤에 불을 끄지 못했고, 곁에는 항상 하녀가 있어야 했다.
그 후로 부친은 이령에게 호위 무사를 붙여 주었다.
이령은 어디를 가더라도 호위가 있어야만 안심했고, 잠이 들 때에도 호위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부터 하는 버릇이 생겼다.
“자인아?”
분명히 미세한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문을 흔드는 소리가 아니라 발걸음 소리였다.
“자인아, 밖에 있지?”
자인은 이령을 호위하는 무사의 이름이다.
항상 자인의 곁에서 떠나는 법이 없다.
“자인아.”
하지만 재차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불안감이 이령의 가슴을 스쳤다.
자인이 자리를 비웠을 리가 없다.
“자인아? 은아야?”
호위 무사인 자인은 그렇다 치고, 항상 이령의 곁에서 수발을 드는 몸종 은아도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이령의 불안을 부추겼다.
‘대체 왜……. 다들 어디 간 거지?’
가슴에서 불안감이 치솟으며 9년 전의 악몽 같았던 밤이 이령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야. 그럴 리가…….’
또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또 그런 무서운 밤이 찾아왔을 리가 없다.
“자, 자인아……. 은아야…….”
덜덜 떨며 이령이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겁을 잔뜩 먹은 채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손을 더듬어 촛불이 켜져 있는 촛대를 꽉 쥐었다.
여차하면 이것으로 제 몸을 지킬 작정이었다.
그녀가 방문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누구……?!’
방문에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다.
시커먼 그림자가 방문 앞에 나타나자 와락 겁을 먹은 이령이 촛대를 꽉 쥐고 뒤로 물러섰다.
“자인아?”
그림자는 사내의 것이었다.
이 밤에 제 처소 주위에 있을 사내는 자인 외에는 없다.
“자인이니?”
자인이라면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일까.
“누, 누구냐!”
이령이 있는 용기를 다 짜내어 소리를 쳤다.
그 순간 방문이 덜컥 열렸다.
“꺄아악!”
방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촛대의 촛불이 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방 안의 촛불들이 꺼지며 어둠이 이령의 시야를 뒤덮었다.
“아악!”
그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이령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읍!”
어둠 속에서 이령이 발버둥을 쳤다.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커먼 인영이 괴물처럼 어둠 속에서 눈을 스칠 뿐이었다.
“읍!”
억센 손이 이령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를 침상으로 쓰러뜨렸다.
‘아, 안 돼!’
침상으로 쓰러지는 순간 이령은 괴한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은 지금 자신을 겁탈하려는 것이다.
‘안 돼! 안 돼!’
겁탈을 당하다니, 그런 짓을 당할 수는 없다.
자신은 머잖아 혼인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겁탈을 당하면 어떻게 정혼자의 낯을 보겠는가.
“읍! 흐읍!”
안간힘을 써 가며 발버둥을 쳤지만 통할 리가 없다.
“읍!”
입에 재갈이 물렸다.
두 손이 위로 올려지더니 천에 칭칭 묶여 버렸다.
입에 재갈이 물리고 양손이 결박당한 이령이 두려움에 질려 온몸을 비틀었다.
그때 괴한의 손이 그녀의 옷을 찢었다.
쫘악-.
옷이 찢겨 나가며 괴한의 손이 제 다리를 벌리려 하자 이령이 그를 걷어찼다.
‘안 돼!’
할 수 있는 모든 저항을 하며 이령이 두 다리로 괴한을 계속 걷어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퍽-.
괴한의 주먹이 이령의 복부를 거칠게 가격했다.
무서운 힘이 복부를 가격하는 순간 이령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