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믿고 쓰는 미드필더-646화 (646/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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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

현수가 어색하게 인사를 하자 이명신이 말했다.

“어디가?”

“네? 저 잠깐 볼 일이....”

“오후 훈련 시간 다 되어 가는 데 나가겠다고?”

“그게 급하게 처리를 해야 할 일이......”

“타 봐.”

“네?”

“빨리 타. 할 얘기가 있어.”

“하지만....”

“내 얘기 듣고 가. 오래 잡고 있진 않을 테니까. 아아. 오후 훈련은 빼 줄게. 천천히 볼 일 봐. 뭐해? 안 타고?”

“아네.”

현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명신의 차로 갔다. 그리고 이명신 옆의 보조석에 앉았다. 그러자 차가 출발했고 체육관 주위 주차장에 차를 댄 이명신을 따라서 현수는 또 축구부실에 올라가야했다.

축구부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연신대 축구부원들에게 두 사람의 등장은 그다지 반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새끼들. 훈련은 제대로 하고 쉬는 건지......”

이명신이 한심하다는 듯 축구부실의 선수들을 쳐다보고는 인상을 썼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웃은 얼굴로 현수를 보고 말했다.

“밥 먹고 커피 한 잔 했니?”

“아, 아뇨.”

이명신은 현수가 다른 연신대 선수들처럼 아침 훈련을 하고 점심을 먹을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 잘 됐네. 내 방에 괜찮은 원두 커피가 있거든. 한 잔 하자.”

그리곤 축구부실에 딸린 감독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를 따라 현수도 그 안으로 들어갔고. 그때 축구부실의 선수들은 다들 일그러진 얼굴로 그 두 사람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들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 중 좋은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거기 앉아.”

감독실에 들어가 이명신은 현수에게 자리를 권하고 혼자 부산을 떨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컵 두 개에 티백 원두커피를 넣고.

“설탕은 필요 없지?”

“네.”

커피포트의 물은 금방 끓었다. 이명신은 끓은 물을 준비해 놓은 두 개의 컵에 따른 뒤 그 중 하나를 현수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현수는 커피향이 진하게 나는 컵을 받아서는 살짝 한 모금 맛을 봤다. 그랬더니 제법 그윽한 커피 맛이 났다.

“어때? 맛있지?”

“네. 좋네요.”

이명신은 홀짝거리며 커피를 마시다가 힐끗 현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현수야. 너 내일 한영대와 경기에 뛰어 줄 거지?”

“그래야죠.”

현수는 대수롭게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고 싶었던 이명신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지. 그래야지. 하하하하. 됐다 그럼.”

하지만 현수가 한영대와의 경기에 뛰겠다고 한 건 그때 딱히 할 일도 없어서였다.

“오전 10시라고 했죠?”

“응?”

“모레 한영대와의 시합 시간 말입니다.”

“아니. 저녁 7시로 바뀌었는데.”

“네? 누구 맘대로요?”

“그야 주최 측인 대학축구연맹 맘대로.”

“허어. 아주 지들 멋 대로네.”

현수는 기가 찬다는 듯 마시던 컵을 내려놓고 이명신에게 말했다.

“그럼 저 내일 못 뛰겠네요.”

“뭐, 뭐라고?”

“오전에야 할 일 없으니 뛰어도 된다 싶었는데. 저녁이면 할 일이 있어서 안 되겠어요.”

“현수야!”

기겁한 이명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런다고 눈 하나 깜빡할 강현수가 아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전 이만.....”

현수가 몸을 일으켜서 감독실을 나서려 하자 이명신이 후다닥 뛰어와서 현수의 팔을 잡아챘다.

“자, 잠깐만. 너 이러고 가면 어떡해?”

“이거 놓으세요.”

“뭐?”

“저를 한영대 경기에 뛰게 만들고 싶거든 내일 일정을 오전으로 바꾸시던가요. 왜 저한테 이러세요?”

현수는 그 말 후 이명신이 잡고 있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이명신이 버럭 소리쳤다.

“너 이 새끼 이런 식이면 축구부에서 제명 시켜 버릴 거야.”

축구부 감독이 선수에게 내릴 수 있는 페널티 중 가장 센 걸 이명신이 언급했다. 선수라면 다들 이 말에 기가 꺾인다. 하지만 현수는 아니었다.

“그러시던가요.”

“야! 강현수! 너 이렇게 나오면 연맹에서 가만있을 거 같아?”

“가만 안 있으면요?”

“너 연맹에서 제명 시키면 프로도 못가.”

“진짜요?”

“그, 그래.”

“뭐 제명 되 보죠. 프로에서 받아주나 안 받아 주나.”

현수는 대학축구연맹이 그를 선수 명단에서 제외 시켜 봐야 별 소용없단 걸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점이 프로 구단에 알려지면 좋을 건 없다. 하지만 서로 못 데리고 가서 난리인 강현수라면 얘기는 달랐다.

“너, 너.......”

“그럼 전 이만.....”

현수가 곧장 감독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이명신이 버럭 소리쳤다.

“연맹 회장님이 널 가만 둘 거 같아? 축구협회에 얘기해서 널 영구 제명 시켜 버릴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그만 까불고 내가 시킨 대로 내일 저녁에 한영대 경기에 뛰어.”

현수는 이명신 감독의 입에서 축구협회까지 거론 되자 눈살을 찌푸렸다. 축구협회에서 현수를 영구제명 시켜 버리면 문제는 심각했다. 일단 현수는 국내 K리그에서 뛸 수가 없게 되니까.

이 얘기를 이명신이 어제 했다면 현수도 꼬리를 내렸을 터였다. 어째든 국내 K리그에서 2년 정도는 뛰다가 해외 진출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새벽 에이전트인 백성조의 얘기를 듣고 해외 진출에 대해 생각이 바뀌고 있던 현수였다. 거기다 강압적인 이명신의 행태가 현수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고.

“어디 영구 제명 시켜 보세요.”

“...........”

현수는 이명신 앞에 그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이명신은 할 말은 잊은 듯 멍하니 현수만 쳐다봤다. 현수는 그런 이명신을 뒤로 하고 곧장 감독실을 나왔다. 그때 축구부실 안의 연신대 선수들이 다들 황당한 눈으로 현수를 쳐다보았다. 그러던 말던 현수는 곧장 축구부실을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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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현수에게 영구제명 운운한 건 이명신도 그만큼 그의 언사에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연맹에서 바꾼 일정에 대해 선수가 뛰니 마니 하는 건 옳지 않은 처사였다.

“씨발......”

하지만 현수가 나간 뒤 이명신은 화를 삭이며 생각을 했고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좆 됐다.”

대학축구연맹의 회장에게 내일 경기에 현수가 출장 할 거라고 철썩 같이 얘기 해 놨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건 감독인 이명신의 잘못만 아니었다. 한 번 정해진 경기 일정을 갑자기 바꾼 주최 측의 잘못도 있었다.

게다가 현수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전에 경기를 하면 뛰겠다고. 이명신은 곧장 대학축구연맹 측에 전화를 걸었다.

-오오. 이 감독. 어젠 고마웠어. 술값 많이 나왔지?

어제 김조현 대학축구연맹 회장과 같이 룸살롱에 갔었던 간부 중 한 명이 이명신의 전화를 받았다. 이명신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그걸 티내진 않았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뭐라고 한다고 놈들이 술값을 토해 낼 것도 아니고 말이다.

“네. 뭐. 그보다 축구 일정 말인데요.”

-일정? 일정이 왜?

“내일 오전에 한영대와 시합이 저녁으로 미뤄졌잖습니까?”

-응. 그렇지. 그게 왜?

연맹 측에서는 일정을 이렇게 바꿔 놓고도 그게 당연하다는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아니. 정해져 있던 일정을 이렇게 막 바꾸면 곤란하죠.”

-뭐? 지금 뭐라고 그랬지? 이 감독?

대학 축구에서 연맹은 각 대학 축구부에 절대 갑의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이명신 같이 연맹에 뭐라고 떠드는 일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 연맹 측 간부는 이명신의 이런 반응에 어이가 없을 수밖에.

이명신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연맹 측 간부를 잡고 더 이상 실랑이 해 봐야 좋은 꼴 못 보겠다 싶어서 요점만 그에게 얘기했다.

“회장님께 전하십시오. 저희 팀 강현수가 내일 오후에 바쁜 관계로 한영대 경기에 뛸 수 없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 말 후 이명신은 일방적으로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아마 난리가 날 거다.”

이명신도 눈치는 있었다. 어제 왜 김조현 회장이 그를 만나자고 했는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그리고 연맹 측에서 이렇게 갑자기 시합 일정을 바꾼 것도 다 방송과 연관이 있단 것도. 때문에 아쉬운 건 연맹 측이었다.

“잘 됐네. 잘 됐어.”

안 그래도 어제 김조현 회장이 그에게 한 약속에 대한 확답을 듣고 싶었던 이명신이었다.

“네 돈 2천 5백만 원이나 털어 먹고 그냥 입 닦을 생각은 마시죠. 김조현 회장님.”

이명신은 감독실 책상으로 가서 의자에 앉아서 느긋하게 연맹 측에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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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축구연맹의 총무 부장인 김재구는 기분 좋게 출근을 했다. 어제 간만에 젊고 싱싱한 여자와 회포를 푼 그는 회춘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병신 새끼.”

그리고 더불어 자신과 연맹 측 간부들에게 속아 넘어간 연신대 이명신 감독을 비웃었다. 뭐 어째든 접대를 받은 입장에서 더 이상 그를 비웃는 건 좀 그래서 김재구는 어제 일을 잊고 일에 매진했다.

연맹 측에서 주최한 대학축구 왕중왕전은 이제 시작 되었고 세상의 이목이 집중 되고 있었다. 때문에 연맹 측 간부들도 이번 왕중왕전을 제대로 치러 보자며 다들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상황. 총무 부장인 김재구도 추가 된 예산을 어떻게 무리 없이 집행할 지를 두고 열심히 잔머리를 굴렸다. 그런 그가 점심을 먹고 일찌감치 연맹 사무실에 들어 왔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김재구는 별 생각 없이 그 전화를 받았다. 그랬더니 어제의 그 호구 연신대 이명신 감독이 아닌가? 김재구는 어제 얻어먹은 것도 있고 해서 최대한 친절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이명신이 뭘 잘못 쳐 먹었는지 되도 않는 소릴 해 댔다. 왕중왕전의 축구 일정 변경을 두고 그에게 시비를 건 것이다.

‘이런 미친 새끼가.......’

대학축구에서 연맹이 일정 바꾸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이던가? 물론 지금처럼 일주일 안에 치러지는 대회 일정을 갑자기 바꾼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연맹에서 하는 일이었다. 일개 축구 감독이 왈가왈부할 게 아니었다. 그래서 김재구가 그 점을 이명신 감독에게 얘기하며 따끔하게 혼을 내려 했는데 이명신이 자기 말만 하고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니. 이 새끼가 진짜.......”

당연히 기분이 상한 김재구는 이명신 감독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그런데 이명신 감독의 한 말을 상기하던 김재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 가만. 지금 강현수가 내일 못 뛴다고 했지?”

강현수가 내일 한영대의 경기에 출장하지 않는다면 방송국에서 난리가 날 터였다. 이건 김재구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김재구는 곧장 연맹 회장실로 뛰어갔다.

“회장님. 안에 계신가?”

회장실 앞 비서실의 여비서가 분칠을 하고 있다가 허겁지겁 달려 온 김재구를 힐끗 쳐다보고 말했다.

“아뇨. 식사하러 가셨다가 아직 안 돌아오셨는데요.”

김재구는 자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거울에 자기 얼굴만 비춰보기 바쁜 여비서를 보고 뭐라고 하려다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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