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 올림픽 -->
이혜나도 현수가 자기보다 어릴 거란 건 예상했다. 하지만 10살까지 나이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이거 어쩌지.......’
현수와 보낸 그 뜨거운 시간을 잊지 못하던 이혜나는 오늘 법원에 다녀오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축구 관련 기사를 살폈다.
“강현수!”
그리고 거기에 강현수에 관한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그가 이번 올림픽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으며 향후 한국 축구의 미래가 그에게 걸려 있다는 다소 편향적 성향의 기사였다.
“강현수란 사람이 그렇게 축구를 잘하나?”
사실 이혜나는 올해 올림픽을 보지 못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그래서 올림픽 기간 동안 강현수가 축구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당시 변호사로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던 그녀는 그 동안 미뤄 둔 휴가를 다 몰아서 그때 사용했다.
그렇게 떠난 게 유럽 20박 21일 여행이었다. 사실상 배낭여행과 같은 그 여행에서 이혜나는 많은 것을 보고 깨달았다. 하지만 만고의 진리는 변하지 않았다. 바로 돈!
돈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형제, 자매를 죽이는 세상이다. 그 돈 때문에 이혜나는 여행중 죽을 고비도 겪었고 또 개고생도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여행에서 돌아 온 이혜나는 돈은 많을수록 좋다는 진리를 깨달았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이 악물고 일하기로 했다.
그런 결심 때문인지 그녀의 승소률이 급격히 올랐고 그 만큼 그녀가 속한 로펌에서 그녀에게 거는 기대도 커졌다. 하지만 정작 성과급은 올려주지 않아 요즘 이직을 고려 중인 그녀였다.
때문에 로펌에서 그녀에게 던져 준 골치 아픈 의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그녀에게 강현수란 존재는 사막의 오하시스와 같았다.
“날 길들여 보시겠다 이건데. 그렇게는 안 되지.”
그녀가 속한 로펌에서는 그녀가 일을 잘하자 포상은 해주지 않고 엉뚱하게 어려운 의뢰를 맡겼다. 그래서 그녀가 헤매면 그걸 핑계로 그 동안 그녀가 거둔 공을 유아무아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릴 모양이었다.
물론 올 연말이면 파트너 변호사 중 하나가 그녀를 다독이며 연말 보너스를 조금 쥐어 줄 터였다. 그리고 내년 성과급도 소폭이지만 인상 시켜 줄 것이고.
보통 변호사들은 거기에 만족한다. 하지만 이혜나는 아니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공정한 포상과 성과급 지급. 그것이 이뤄지지 않은 로펌에서 그녀는 더 이상 일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로펌의 그 골치 아픈 의뢰를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책임 질 일도 없었고. 그걸 빌미로 로펌 측에서 뭐라 그러면 그녀는 깨끗하게 사표를 던져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창가 넓은 개인 사무실과 유능한 사무장, 조사원에다가 3년 뒤 파트너 변호사의 자리까지 약속한 로펌으로 옮겨 갈 생각이었다.
참고로 그 로펌은 지금 이혜나가 속해 있는 로펌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그 말은 그 동안 이혜나가 이겨 온 민사 중 절반 이상이 그쪽 로펌과 엮여 있단 소리였다. 즉 이혜나가 그쪽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녀가 속해 있던 로펌의 민사 소송의 절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단 얘기였다. 상대 로펌의 민사를 총괄 해 온 거나 마찬가지인 변호사가 상대 측 로펌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한마디로 이혜나가 속해 있는 소속사는 좆 됐다고 보면 됐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혜나가 속해 있는 로펌에서는 여전히 그녀에게 큰소리를 떵떵 쳤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출근한 그녀에게 파트너 변호사란 작자가 은근슬쩍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며 손을 잡았다. 그리곤 한다는 소리가 앞으로 열심히 하란다.
“씨발. 주는 것도 없으면서 소처럼 일만 하라 이거야?”
오랜만에 자신의 출신대학인 연신대 앞에 온 이혜나는 눈에 확 띄는 포차를 발견하고 그곳에 들어갔다. 시간은 벌써 8시가 훌쩍 넘은 상황. 아직 저녁도 먹지 않은 그녀는 일단 메뉴 판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은 다 주문했다. 그랬더니 테이블이 가득 차고 넘칠 지경이 되었다.
--------------------------------------------------------------
이혜나가 연신대에 온 건 강현수에 대한 기사를 읽고 그가 연신대 출신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이곳에 오게 되었고 이왕 여기 온 거 강현수를 만나보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혜나의 동기 중 한 명이 한 말이 생각났다.
“윤석이 그 녀석 여동생이 연신대 축구부 주장과 사귀고 있다고 했었지?”
기억력이 남다른 이혜나는 그걸 생각해 내고는 동기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동기를 통해서 동기 여동생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이혜나는 변호사 특유의 친화력을 내세워서 그 동기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애인을 통해 강현수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곧장 강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도 마침 근처에 있다고 했다.
이혜나는 잘 됐다며 강현수에게 오라고 했고 그는 정말 거짓말처럼 통화 후 5분 뒤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강현수와 마주 앉은 이혜나는 그때처럼 그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고 그 과정에서 강현수가 자신보다 많이 어리단 사실에 충격에 빠졌다.
‘이건 원조 교제란 소릴 들을 판인데......’
하지만 둘은 이미 몸을 섞은 이성 지간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소리다. 그랬기에 이혜나도 강현수도 오히려 그런 윤리적인 관점의 사고에서 벗어나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죠.”
“맞아. 그래서 말인데. 너 나하고 사귀자.”
여자인 이혜나가 더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런 그녀를 보고 강현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귀는 거야 못할 거 없죠.”
강현수에게 또 다른 여자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올림픽이 끝나고 국내로 돌아와서 정리해야 할 여자들을 정리를 끝낸 현수였다. 하지만 왕성한 성욕을 가진 그에게 그녀들의 빈자리 공백은 생각보다 컸다. 그런데 그 빈 공백을 채워 줄 여자가 생겼으니 현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좋아. 그럼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 자아!”
이혜나가 소주잔을 쳐 들자 현수가 웃으며 그 잔으로 자신의 소주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부딪친 술잔을 두 사람은 시원하게 원 샷으로 비웠다. 그걸로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우리 2차 가자.”
“2차요?”
현수는 포차에서 이혜나가 시켜 놓은 음식들을 먹느라 벌써 허리끈을 푼 상태였다. 그런데 그 음식들을 절반도 채 먹지 않아 그녀가 2차를 운운하자 핸드폰의 시간을 그녀에게 확인해 주었다.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요.”
“그래? 어. 그럼 더 마셔야지. 자. 마셔.”
이혜나는 보기엔 술이 쎄 보였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술 자리에서 보면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술이 쎄다고 하는 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술고래는 술이 들어가면 적당히 볼이 붉어지는 사람들 중에 더 많다. 이혜나는 전자로 얼굴색에 아무 변화가 없지만 이미 취해 있었다.
“자아. 술은 그만. 음료수로 바꿔요.”
현수는 그런 그녀를 배려해서 그녀 손에서 소주잔을 뺐었다. 그리고 대신 음료수 잔을 쥐어 주자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 지금 나 무시 하냐?”
“무시가 아니라 생각해 주는 거죠. 2차도 가고 3차도 가야죠.”
“3차?”
이혜나는 술에 취해 있어도 말 끼는 알아들었다. 특히 현수의 입에서 나온 3차란 말에 그녀는 다시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
“그래. 3차를 꽐라 상태로 갈 순 없지. 내가 얼마나 학수고대하던 순간인데 말이야.”
그 뒤 이혜나는 음료수를 마셨다. 하지만 현수는 아직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속 소주를 마셔야 했다.
----------------------------------------------------------
현수의 배려 덕에 이혜나는 1시간쯤 뒤 술에서 완전히 깼다. 현수는 이혜나가 급하게 마신 술 때문에 자주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리자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길로 곧장 근처 약국에 간 현수는 술 깨는 약을 챙겨 왔고 그걸 먹은 뒤 이혜나는 더 이상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더불어 술도 빠르게 깼고.
“고마워. 속이 진짜 편해졌어.”
“다행이네요. 이제 슬슬 2차를 가 볼까요?”
현수가 테이블 위에 거의 다 비워진 음식들을 보고 말했다. 현수와 이혜나는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음식을 먹었다. 그 결과 이헤나가 시킨 그 많은 음식들을 다 먹을 수 있었다. 그걸 보고 그 포차 종업원도 놀랍다는 듯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긴 10인분도 더 되는 음식을 두 사람이 먹어 치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2시간 넘게 천천히 음식을 먹었기에 두 사람 모두 그렇게 먹고도 속이 부대끼지 않았다. 거기다 현수가 약국에 갔을 때 사온 소화제도 한 몫을 했고.
“좋아. 1차는 내가 살 테니까 2차는 네가 사. 그 정도는 되지?”
이혜나의 말에 현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렇게 두 사람이 같이 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이혜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하니 그녀에게 되지도 않을 어려운 의뢰를 맡긴 파트너 변호사였다.
“이윤범이.....”
또 오늘 아침부터 그녀를 만지며 성희롱한 그 파트너 변호사이기도 했고. 이혜나는 곧장 그 전화를 받았다.
“네. 변호사님. 네. 네. 아아. 그 의뢰요? 아직 검토도 안 했는데. 아뇨. 저 안 미쳤는데요? 네. 자르세요. 그럼 그렇게 알고 전 이만.”
이혜나는 뭐라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이윤범 파트너 변호사와의 통화를 그렇게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그러자 곧바로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혜나는 그 자리에서 핸드폰 배터리를 빼내버리곤 핸드폰을 그녀 핸드백 속에 넣어 버렸다. 그리곤 핸드백 속에서 지갑을 꺼내들고 포차 카운터로 향했다.
이혜나가 포차에서 1차 계산을 끝내자 그 사이 포차 밖에 나가 있던 현수가 주위를 살피다가 갈만한 2차집을 찾아냈다.
“우리 저기로 가죠.”
현수는 포차를 나와 자기에게 다가 오는 이혜나에게 2차로 갈 곳의 간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혜나는 그 간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뮤직 타운이라.....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를 수 있는 곳이네. 좋아. 가자. 이 누나가 노래가 뭔지 알려주지. 레츠 고!”
이혜나가 앞장 서서 걸어가자 그런 그녀를 보고 웃으며 현수가 그 뒤를 바로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