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 올림픽 -->
아까 배태식이 거실 통 유리를 박살냈을 때 나타났었던 검은 정장 차림의 사람들 중 유리 파편을 치웠던 여자 중 하나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찻잔이 올려 진 쟁반을 들고 2층 거실에 나타났다.
그녀는 배태식과 이주나가 마주보고 앉아 있는 소파 가운데 테이블 위에 나란히 찻잔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조용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내려가고 나자 배태식이 이주나에게 차를 권하며 말했다.
“마셔.”
“고마워.”
둘은 형식적으로 한 모금씩 차를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는데 그때 배태식이 먼저 말했다.
“전화 받고 놀랐어. 이 시간에 네가 나한테 전화를 걸어 올 거란 생각은 못했거든”
이주나는 배태식의 말을 듣고 바로 생각했다.
‘당연하지. 약 빨고 계집들과 그 짓거리를 하고 있을 게 뻔한데 전화는 무슨.....’
당연히 생각한 걸 입으로 내 뱉진 않았다. 천하의 이주나도 배태식은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그의 뒤 배경도 그렇고 워낙 미친놈이다 보니 무슨짓을 저지를지 예상이 되지 않아서 말이다.
“자. 이제 왜 날 보고자 했는지 편하게 말해 봐.”
배태식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이주나에게 말했다. 배태식도 알고 있었다. 이주나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에게 전화를 하고 여기까지 찾아오진 않았을 거란 걸 말이다. 뭔가 그에게 부탁할게 있는 게 분명했다. 배태식은 그녀의 부탁이 뭐든 다 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햇다. 그래야 그녀와 자신의 벌어진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사실은.............”
이주나가 잠시 곤욕스런 얼굴 표정을 짓다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주나의 말을 가만히 경청하던 배태식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펴졌기에 자기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이주나는 그걸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우리 아빠 좀 만나서 잘 얘기 좀 해 줬으면 해.”
“별거 아니네. 그럴게.”
“진짜?”
“그럼. 네 문제가 곧 내 문제인 걸.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 뒤 둘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만남이 있으면 작별도 있는 법. 이주나가 시간을 확인하고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됐네. 나 그만 가 봐야겠어. 너도 알다시피 외박은 금지거든.”
빌딩재벌 이민석은 딸인 이주나의 사생활에 대해선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 외박만큼은 절대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새벽이라도 무조건 이주나는 집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아침 식사만큼은 무조건 이민석과 같이 해야 했고 말이다.
“알아. 피곤할 텐데 집까지 운전할 사람 붙여 줄까?”
“아니. 괜찮아. 그 정도로 피곤하진 않아. 그럼 가 볼게.”
“그래.”
배태식은 이주나를 1층 현관 앞까지 배웅했다. 그리고 저택 밖에 그녀의 차 소리가 들리자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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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식에게는 그를 케어 해 줄 사람들이 24시간 붙어 다녔다. 그들이 어떻게 운영 되는지에 대해서 배태식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그들은 도구에 불과 했으니 말이다.
“찾으셨습니까?”
배태식의 전화에 김 실장이 나타났다. 배태식을 케어 해 주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둘 있었다. 낮에는 이 실장, 밤에는 김 실장으로 불리는 이들로 배태식이 아는 한 그 둘이 정직원이었다.
그들은 배태식의 외가인 세강 그룹 쪽 사람들로 배태식이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 주었다. 배태식에게 있어서 이 실장과 김 실장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들인 셈이었다.
“내일 이민석 회장 만나러 갈 테니 스케줄 잡아.”
“네. 알겠습니다.”
김 실장이 바로 수첩에 그 내용을 적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배태식이 추가로 말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축구 선수 중에 강현수라고 있을 거야. 그 새끼에 대해 알아 봐.”
“강현수요?”
“그래. 탈탈 틀어 봐.”
배태식이 눈빛을 빛내며 말하는 걸 보고 김 실장은 자신의 수첩에 강현수란 이름을 쓰고 그 위에 크게 별표를 그렸다. 그때 배태식이 말했다.
“아침 식사 뒤에 바로 볼 수 있지?”
그 물음에 김 실장이 수첩을 덮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세강 그룹의 정보 라인은 국정원 못지않았다. 그리고 경찰 쪽은 물론 금융 감독원과도 네트워크가 연결 되어 있었다. 배태식의 아침 식사는 대략 11시 쯤 이뤄진다. 그전에 강현수란 자에 대해 충분히 알아 낼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이 일은 그가 아닌 주간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이 실장이 맡게 되겠지만 말이다.
김 실장의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배태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근처 아무 방으로 들어갔다.
이곳 저택 내 방에는 배태식 취향대로 침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배태식은 잠이 오면 이렇게 아무 방에나 들어가서 잤다.
김 실장은 잠시 뒤 배태식이 잠든 걸 확인하고 방에 불을 껐다. 배태식은 잠 잘 때 꼭 불으리 켜 둬야 했다. 하지만 잠이 들고 나면 이렇게 꼭 불을 꺼 줘야 했다. 그래야 깊게 잠이 들었다.
“오늘 내 일과도 이걸로 끝이로군.”
김 실장의 업무는 배태식으로부터 시작해서 배태식으로 끝났다. 그가 잠이 든 지금이 그에게는 꿀 같은 휴식 시간이었다. 그 휴식 시간은 날이 밝으면서 끝난다.
아침 8시가 되자 정확히 이 실장이 출근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배태식을 케어 하는 실무진 사람들도 이 시간에 근무 교대를 하고 있을 터였다.
“밤 새 별일 없었고?”
“뭐 별 큰일은 없었고 오후에 스케줄 하나와 알아보라고 하신 게 있어.”
“그래?”
김 실장은 이 실장에게 평소대로 업무를 인수인계 했다.
“수고 해.”
“그래. 푹 쉬어. 그리고 늦지 말고.”
인수인계를 끝낸 김 실장이 퇴근하고 9시가 되자 이 실장은 세강 그룹 정보과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축구 선수 강현수에 대해 탈탈 틀어 보고서로 작성해서 팩스로 보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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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30분 쯤 배태식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곧장 그 방 안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뒤 배태식은 가운 차림으로 1층 부엌 쪽으로 향했다.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그의 발걸음을 재촉케 했다.
“아줌마. 오늘 아침 메뉴 뭐야?”
배태식은 부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는 보지도 않고 식탁에 앉았다. 그러자 그 앞에 잘 차려진 한식 한 상이 보였다.
탁! 탁!
이내 그 앞에 잘 지어진 밥 한 공기와 연신 향긋한 쑥 향을 피어올리고 있는 국그릇이 놓여졌다.
“어제 시장 가 보니 쑥이 있더라고. 그래서 한 번 끓여 봤어.”
“맛있겠다.”
배태식은 신난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국 그릇으로 숟가락을 가져가서 국물을 떠 먹었다.
“카아. 좋네.”
그리곤 허겁지겁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잘 먹었어. 아줌마.”
식사를 끝낸 배태식은 바로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옷방으로 가서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그러자 배태식의 알몸이 드러났다. 배태식은 옷방의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살폈다. 마치 간밤에 그의 몸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살피기라도 하듯 꼼꼼하게 말이다. 그리곤 별 문제가 없자 그는 속옷부터 시작해서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옷을 다 챙겨 입은 배태식은 옷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이 실장이 손에 보고서를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태식이 거실 소파에 앉자 바로 그가 아침이면 즐겨 마시는 차가 나왔고 그 차 옆에 이 실장이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오후 스케줄 잡아 뒀고 말씀하신 강현수란 자에 대한 보고섭니다.”
“수고 했어.”
배태식은 먼저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차향을 음미한 뒤 천천히 찻물을 마셨다. 배태식은 아직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꼭 아침에 밥을 먹어야 했다. 그것도 양씨 아줌마가 만들어 준 가정식으로 말이다. 양씨 아주머니는 배태식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의 집에서 일했던 식모였다. 그 식모의 손맛에 길들여진 배태식은 양씨 아줌마가 만들어 주는 음식들이 제일 입맛에 맞았다. 뭐 그렇다고 배태식이 다른 음식을 못 먹는다는 건 아니었다. 하루에 한 끼라도 제대로 된 일반 가정식 식사를 하고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고 그걸 지금껏 고집해 오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침 식사 후 아로마 향 비슷한 것이 나는 허브티를 마시던 배태식이 찻잔을 내려놓고 그 옆에 보고서를 챙겨 들었다.
“강현수. 연신대 재학. 축구부원으로........... FA컵과 대학리그 등에서 맹활약........ 이번 북경 올림픽에서 축구 대표 팀에 금메달을 안긴 거나 다름없을 정도의 활약을 선보였다. 제법이네. 이 놈 유명해?”
배태식이 힐끗 옆의 이 실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이 실장이 바로 대답했다.
“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빅 스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태식은 축구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강현수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으음. 근데 인적 사항이........ 이 새끼 고아나 마찬가지네. 허어. 이거야 뭔 상대가 돼야지.......”
강현수에 대한 보고서를 읽던 중 배태식은 눈살을 찌푸리다 들고 있던 보고서를 홱 던져 버렸다.
“별거 없는 새끼네. 이 실장이 알아서 처리 해.”
“네?”
이 실장이 놀란 얼굴로 배태식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배태식이 짜증 섞인 얼굴로 이 실장을 보고 딱딱 끊어서 말했다.
“처. 리. 하. 라. 고. 네 말 몰라?”
배태식이 처리하란 게 무슨 말인지 모를 이 실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강현수는 배태식이 시켜 지금껏 이 실장이 처리 해온 자들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이 실장은 배태식과 달리 축구를 좀 아는 사람이었다.
“도련님. 다시 한 번 재고 해 주십시오.”
“뭐?”
“강현수는 앞으로 대한민국 축구계를 이끌어 갈 인재입니다. 그를 주목하는 사람들도 많고 말입니다. 쉽게 처리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이 실장이나 김 실장은 배태식의 요구는 뭐든 다 들어 주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거 까지 들어 주진 않았다. 그 때문에 그 둘이 24시간 배태식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고 말이다.
이 실장은 배태식의 이번 요구가 불가능 한 요구라고 보았다. 그럴 것이 축구를 아는 그는 현재 강현수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그 중에는 외국 유수 명문 축구 구단도 있었다. 그리고 그 구단주들 중에 대한민국의 세강 그룹쯤은 구멍가게 정도로 여기는 거부들도 있을 테고. 만약 그런 구단주 중 하나가 강현수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그를 건드렸다 자칫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고아에 별거도 아닌 놈인데 이런 놈 하나 못 처리 해?”
그런데 평소와 달리 오늘 따라 배태식이 너무 민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