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리그 -->
연극이 끝나자 현수는 사지희와 바로 극장을 나섰다. 배우들과의 만남의 시간도 있었지만 왠지 홍경우와 마주치는 게 껄끄러웠다. 그가 눈치 없게 혜미 얘기라도 한다면 사지희가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도 문제고 말이다. 그래서 아예 그런 일이 없게 그를 안 보고 나왔다.
“연극 어땠어요?”
사지희가 기분이 좋은 지 웃음이 떠나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재미있더군요.”
“다음엔 우리 뮤지컬 보러 가요.”
“그러죠 뭐.”
의외로 새로운 맛 집을 찾는 것만큼이나 색다른 경험을 해 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현수도 사지희의 뮤지컬을 보러 가잔 제의를 흔쾌히 수용한 것이다.
“우리 또 어디......”
사지희가 현수의 팔짱을 막 끼고 말을 할 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사지희는 누구 전화인지 확인하더니 표정이 굳었다.
“자, 잠깐만요.”
그리곤 현수에게 떨어져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이요? 하지만...... 네. 네. 알았어요.”
통화를 끝낸 사지희는 한껏 풀죽은 얼굴로 현수에게 다가왔다.
“어쩌죠? 빨리 집에 들어오라네요.”
“아버님 전화였습니까?”
“네. 아쉽지만 오늘 만남은 여기까지인 거 같네요. 가요.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사지희는 현수를 데리고 극장을 나섰는데 언제 움직였는지 양동호가 극장 앞에 차를 대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연극이 끝나갈 무렵 조용히 극장을 빠져 나갔던 모양이었다. 현수와 같이 차에 탄 사지희가 시무룩하니 양동호에게 말했다.
“오빠. 현수씨 원룸으로 가요.”
그러자 양동호가 바로 뒤돌아서 그녀를 쳐다보았고 사지희가 긴 한숨과 함께 그에게 이실직고했다.
“아빠가 빨리 집에 들어오래요.”
“보스께서?”
양동호도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양동호는 차를 몰고 현수의 원룸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20여분 뒤 현수의 원룸 앞에 도착한 차에서 현수만 내렸다. 사지희가 따라 내리려는 걸 현수가 만류한 것이다.
대신 사지희가 차창을 열고 현수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다음에는 뮤지컬도보고 근사한 라운지에서 와인도 같이 마셔요.”
현수는 사지희의 말을 듣다보니 그녀가 오늘 연극 다음 코스로 어디를 가려 했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래요.”
현수의 대답해 사지희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사라지고 현수가 원룸으로 향할 때였다.
“응?”
뭔가가 그의 뒤통수를 꾹꾹 찌르는 것 같았다. 현수가 뒤를 돌아봤는데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현수가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어둠속에서 자동차 시동 켜지는 소리와 함께 라이터가 환하게 주위를 밝혔다. 그리고 그 차 안에 있던 사도철이 운전석의 수하에게 말했다.
“집으로 가자.”
사도철을 태운 차가 조용히 현수의 원룸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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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에 돌아온 현수는 씻고 잠잘 준비를 하다가 오후에 그를 찾아 온 씨큐리티 대표 윤명철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현수가 싫어하는 인간, 윤성찬과 같은 윤씨였다.
“괜찮으려나?”
그러다 문득 유혜란이 생각났다. 그녀와 그녀의 모친을 납치하려던 자들이 바로 씨큐리티의 경호원들이 아니었던가? 현수는 그녀가 걱정도 되고 또 궁금한 것도 있고 해서 유혜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대여섯 번 쯤 가고 현수는 유혜란이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으려나 보다 싶어서 막 전화를 끊으려 할 때였다.
-여보세요.
유혜란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강현숩니다.”
-알아. 무슨 일이지?
현수가 만났을 때와 달리 전화상의 유혜란은 차갑고 사무적이었다.
“그게..... 괜찮으신가 해서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야 해?
유혜란은 현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뭔가 배배 꼬여 있는 듯 했다. 그게 아니면 현수가 그녀에게 전화한 게 불쾌해서였던지.
“괜찮으시다니 됐습니다. 전 또 그들이 저까지 찾아 왔기에 걱정이 돼서.... 그만 전화 끊겠습니다.”
현수도 자기 전화 받기 싫어하는 여자랑 길게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를 끊으려 할 때였다.
-잠깐! 뭐라고? 그들이 널 찾아 가?
“네. 어제 백화점에서 그쪽과 그쪽 어머니를 강제로 데려 가려 했던 그 자들이 제가 사는 될 찾아 왔더라고요.”
-그래서?
“뭐 절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기에 저도 맞섰죠.”
-다친 덴 없어?
“네. 저보단 그쪽이 더 다쳤죠.”
-정말 너무하는군.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유혜란의 어조가 많이 바뀌었다. 명백히 현수를 싫어하던 목소리에서 그를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이다.
-미안해. 넌 나를 계속 도와줬는데 난.......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힘내세요.”
현수가 위로랍시고 한 그 말에 갑자기 유혜란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덕분에 현수는 핸드폰을 끊지도 못하고 그대로 있어야 했다.
-고마워. 힘이 나네.
유혜란은 다 울고 났는지 다시 생생해 진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그런 자들이 다신 널 찾지 않게 해 줄게. 그리고 조만간 만나서 술이나 같이 한잔 하자.
“저야 좋죠.”
현수는 기분 좋게 유혜란과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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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란과 통화 후 현수는 이부자리를 깔았다. 이제 진짜 자야 할 시간이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축구선수 강현수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말이다.
일주일이나 훈련을 빠진 터라 내일은 일찍 학교에 가 봐야 할 거 같았다. 그래서 현수는 아침 7시에 알람을 맞춰 놓고 잠을 청했다.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수는 깊은 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
“으으으으!”
현수가 시끄러운 알람소리에 잠에서 깼다. 12시 전에 잠을 잤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뻐근했다. 현수는 주섬주섬 트레이닝복을 입고 원룸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를 크게 한 바퀴 뛰면 대략 30분 정도 걸렸다. 그 정도면 아침 운동으로는 적합했다.
“헉헉헉!”
아파트 단지를 다 뛰고 거친 호흡으로 편의점에 들른 현수는 우유와 샌드위치를 샀다. 그리고 원룸으로 돌아와서는 샤워 후 식사를 하고 학교 갈 준비를 했다. 그렇게 8시 정각에 원룸을 나선 현수가 애마를 타고 연신대에 도착한 건 8시 30분이었다.
체육관 바로 앞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체육관 라카룸에 들어가자 축구부원들이 몇 명 보였다. 보니 다들 1, 2학년들이었다.
“안녕! 애들아.”
“네.”
그런데 평소 애들이 보여주던 반응과 사뭇 달랐다. 평소엔 현수가 먼저 인사하면 환하게 웃으며 살갑게 대해 주던 후배들이었다. 근데 다들 시무룩했다. 현수가 없는 일주일 사이 연신대 축구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현수는 의아해 하며 연신대 축구복을 꺼내 입고 축구화를 챙겨 신고는 라커룸을 나섰다.
“이쪽으로!”
“야야!”
축구장은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정식 훈련 시간인 9시가 되려면 아직 15분쯤 남은 상황인데 현수가 보기에도 정식 훈련처럼 보일 정도로 아침부터 축구부원들이 빡 세게 뛰고 있었다.
“뭐지?”
현수가 의아해 하며 축구장에 들어 설 때였다.
“어이. 강현수!”
현수가 보던 붙박이 중앙미드필더 자리에서 한 선수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현수가 자세히 그 선수를 쳐다 보다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심재국 선배?”
작년까지 현수와 같이 연신대의 중앙 미드필더를 번갈아 맡아 뛰던 심재국이 그라운드에 있었다. 그는 올해 포항 스틸스에서 뛰고 있는 김창수와 같은 학번으로 현수보다 1년 선배였다. 하지만 작년에 U리그 예선에서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휴학을 한 상태였다.
현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심재국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현수는 같은 포지션인 심재국 그다지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아니 나빴다.
심재국이 선배랍시고 현수를 많이 갈궜고 현수도 바로 반발하면서 여러 차례 싸움까지 이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선배인 심재국도 감독과 그의 동기인 김창수의 비호를 받는 현수를 대 놓고 괴롭히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없을 때면 항상 현수를 괴롭혔는데 그때마다 현수가 대들었기 때문에 축구부 분위기가 살벌했었다.
그러던 차에 심재국이 다리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둘의 갈등도 끝이 났었다.
“어떻게 되긴. 부상 다 나아서 복귀 한 거지?”
“작년에 졸업한 거 아니었어요?”
“휴학했었지. 그리고 2학기 복학 할 거고.”
유들유들하게 말하는 심재국을 보고 현수는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버리고 싶었는데 그걸 꾹 참았다.
“선배! 공 좀 주세요.”
그때 왼쪽 수비수 자리의 선수가 심재국에게 소리를 쳤다. 현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 윤성찬이 있었다.
‘이것들이....’
아침부터 현수가 딱 싫어하는 두 인간을 만난 현수의 얼굴이 벌레 씹은 거처럼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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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 9시가 되자 이명신 감독이 그라운드에 나타났다. 일주일 사이 선수들만큼이나 이명신에게도 변화가 있은 듯 보였다. 전 보다 더 거만해졌달 까?
“현수 왔네?”
“네.”
현수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이명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누구 들으라는 듯 말했다.
“다들 알겠지만 U리그 본선 경기가 일주일 뒤에 치러진다. 다행히 작년에 다리 부상으로 팀을 이탈했던 중. 앙. 미. 드. 필. 더. 심재국이 팀에 복귀를 해서 전력이 한층 업그레이드가 되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희가 더 열심히 뛰어 올 U리그 트로피는 반드시 우리 연신대가 가져 오도록 하자.”
현수는 이명신이 중앙미드필더를 특별히 강조하는 걸 듣고 웃음이 나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사실 현수는 주전으로 뛰지 않아도 별 상관없었다. 그런다고 그의 프로행에 문제가 생길 건 없으니 말이다.
물론 현수가 주전으로 뛸 건 확실했다. 심재국은 부상 전에도 실력이 별로였다. 그런데 부상 뒤 복귀한 그가 예전보다 더 잘 뛴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지.”
현수가 혼자 중얼거릴 때 이명신이 마지막으로 선수들에게 말했다.
“저번 한 주 동안 열심히 뛰어 주었다. 한 주만 더 고생해라. 다음 주부터 U리그 본선 경기에 참가할 테니까. 재국아?”
“네!”
“애들 데리고 내가 지시한 대로 훈련 시켜.”
“네. 감독님!”
현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장인 이기찬에게로 향했다.
“야야! 빨리 줄 서!”
심재국의 호령에 축구부원들이 허겁지겁 4열 횡대로 줄을 섰다. 그걸 보고 현수는 축구부에 뭐가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후배들의 얼굴이 왜 그렇게 시무룩했는지도 알 거 같았다.
현수는 심재국에게 훈련을 일임하고는 휑하니 체육관으로 향하는 이명신을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심재국이 소리쳤다.
“강현수! 너 뭐야?”
“네. 갑니다.”
현수는 일단 숙이고 들어갔다. 여기서 심재국은 감독 대행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부딪쳐 봐야 현수만 손해였다.
“하나! 둘! 하나! 둘!”
축구부원들은 축구장을 10바퀴나 뛰었다. 심재국도 같이 뛰었냐고? 당연히 아니다. 그 뿐 아니라 윤성찬도 열외였다. 그 외에 심재국에게 잘 보이기라도 한 1, 2학년 몇 명도 구보에서 빠졌다.
‘이게 뭐하자는 거지?’
현수는 축구장을 돌면서 심재국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생각했다. 그러다 빠져 있는 선수들을 보고 대충 이해가 되었다.
‘이것들이.....’
심재국은 주전 후보 가릴 것 없이 자기와 친한 녀석들로다가 축구팀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다른 선수들은 빡세게 훈련을 시키는 거다. 그럼 지친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 할 테고 감독도 별 수 없이 심재국의 말대로 팀을 꾸릴 테고 말이다.
“멍청하긴....”
현수가 심재국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옆에서 같이 뛰고 있던 이기찬에게 화난 어조로 말했다.
“대체 일주일 사이에 팀이 왜 이 꼬락서니가 된 거야?”
“내 탓이다. 내가 못나서.....”
이기찬은 책임감 강한 주장이었다. 그런 그가 주장 역할을 심재국에게 넘겼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현수는 그 이유는 천천히 알아보기로 했다.
“헉헉헉헉!”
축구장 10바퀴를 돌고 난 선수들이 거칠게 숨을 몰아 쉴 때 심재국이 바로 말했다.
“지금부터 드리블 훈련 중 볼 없이 실시하는 동작 연습을 하겠다.”
말은 드리블이지 또 뛰어야 하는 훈련이었다. 이렇게 뛰기만 하니 선수들도 빠르게 지칠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 하는 지 보자.’
현수는 두말 않고 다른 선수들과 같이 심재국이 시키는 대로 공도 없이 동작 연습을 실시했다.
그렇게 30여분 뒤 심재국은 그 다음 정지 상태에서 볼을 가지고 실제 동작 연습을 시켰다. 물론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선수들은 여전히 열외인 체 말이다.
이 드리블 훈련 역시 계속하면 체력만 갉아 먹는 훈련이었다. 뭐든 적당히 해야 훈련 효과를 보는데 현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렇게 다른 선수들은 점점 지쳐 갔지만 현수는 오히려 이런 훈련이 할만 했다. 체력은 넘쳐 나는 현수였으니 말이다.
“자자. 다음으로 넘어가서 이제부터는 움직이는 상태에서의 볼을 이용한 동작연습을 하도록 한다.”
그때부터 심재국을 비롯한 열외 했던 선수들도 훈련에 참가했다. 그리고 몇 분 되지 않아서 이명신 감독이 축구장에 나타났다. 그는 훈련하는 걸 쭉 지켜 보다 혀를 찼다.
“쯧쯧! 주전이라는 것들이 훈련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헥헥거려?”
반면 심재국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은 활기차게 드리블 연습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연히 그들이 이명신 감독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오늘 복귀한 강현수가 가벼운 몸동작으로 드리블을 하는 걸 보고 이명신은 흡족하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