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벌전 -->
현수는 몸을 풀고 난 뒤 연습 시합 전에 체육관 안에 있는 라커룸으로 가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새로 장착한 스킬을 시험해 볼 여산으로 현수는 카멜레온 축구복을 착용했고 날쌘 돌이 축구화까지 인벤토리에서 꺼내 신었다. 그러자 체력지수가 확 상승하면서 한결 몸이 가벼워진 현수는 느긋하게 체육관을 나섰는데 그 앞에서 혜미와 맞닥트렸다.
“혜미야.”
그녀를 먼저 발견한 현수가 반갑게 그녀 이름을 불렀다.
“어. 그래. 시합 하나 봐?”
연신대 축구 유니폼 차림의 현수를 보고 혜미가 물었다.
“응. 좀 이따 한서대랑 연습 시합이 있어. 근데 넌 어쩐 일이야?”
지금 캠퍼스는 방학기간이었다. 그것도 이제 막 시작 된 방학이기에 도서관을 제외한 대학 안은 비교적 조용했다.
“학교에 뭐 하러 왔겠냐? 공부하러 왔지.”
근데 대답하는 김혜미의 어투에 왠지 뼈가 있었다. 그녀와 하루 이틀 안 사이도 아닌 현수는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불만이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슬쩍 떠보았다.
“시합 끝나고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왜 저번에 네 친구랑 같이 먹었던 학교 앞 그 스테이크 집 어때?”
고기라면 환장하는 혜미였다. 당연히 바로 ‘오케이’란 말이 그녀 입에서 나와야 정상인데 어째 반응이 시원찮았다.
“뭐 하러. 너 바쁘잖아.”
“시합 때문에 조금 바쁘긴 하지만 너하고 점심 먹을 시간을 있어.”
“흥! 말은 항상 번드르르하게 잘하지. 됐어. 고기는 너나 많이 먹어.”
갑자기 홱 삐친 혜미가 현수를 스쳐 지나서 휑하니 도서관 쪽으로 걸어갔다. 현수는 잠깐 황당한 얼굴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녀에게 뛰어가 그녀 앞을 가로 막아섰다.
“왜 그래?”
“너 어제 시장 먹자골목에서 누구랑 같이 있었어?”
“뭐?”
“아주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다더라? 어떤 여자야? 어제 그 여자랑 같이 잤지?”
혜미는 평소 현수가 알던 그 쿨(Cool)한 혜미가 아니었다.
‘얘가 왜 이래?’
현수도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오해는 풀어 줄 필요가 있었다.
“어제 시장 먹자골목에서 저녁 먹은 건 맞아. 하지만 여자가 아니라 동생이야. 왜 너도 알잖아. 버스에서 소매치기 당할 뻔한 아주머니하고 한성정밀 구 사장님. 내가 그분들을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기로 했잖아. 그 여자가 바로 그분들 여식이고 그 앤 나에게 동생일 뿐이야.”
현수가 재빠르게 얘기를 하자 그 얘기를 들었던 혜미가 굳은 얼굴이 이내 풀리는 걸 보고 현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좋아. 시합 끝나고 스테이크 같이 먹어.”
그 말 후 혜미는 후다닥 현수를 지나쳐서 도서관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런 혜미를 잠시 지켜보고 있던 현수가 중얼거렸다.
“나를 섹파(섹스 파트너)일뿐이라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왜 저런데?”
현수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린 뒤 강하게 머리를 흔들어서 잡념을 떨쳐 낸 뒤 뒤돌아서 그라운드를 향해 걸어갔다. 곧 연습 시합이 시작 될 터였다. 지금은 여자가 아닌 시합에 집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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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가 다 되어 가자 양 진영에 선수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연신대는 주전 멤버들이 하나 둘씩 그라운드에 들어갔고 현수도 중앙 미드필더 자리에 가서 섰다. 그리고 힐끗 뒤를 돌아보니 왼쪽 수비수 자리에 윤성찬이 아닌 장철우가 서 있었다.
만약 오늘도 이명신 감독이 윤성찬을 선발 기용했다면 현수는 연습 시합을 아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양측 선수들이 다 자리를 잡고 섰을 때 심판들이 나타났는데 낯이 익은 심판들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연신대가 용성대와 연습 시합을 할 때 심판을 봤었던 그 심판들이었던 것이다.
선심이 양쪽 터치라인에 배치되자 주심이 센터서클 안에서 양 팀 주장들을 불러서 동전을 던졌다.
보통 연습 시합의 경우 원정 온 팀에 전반전 선축을 양보하기 마련인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한서대가 뭔가 작정을 하고 오늘 시합에 임하려는 모양이었다.
한서대 주장이 말한 동전 앞면이 나왔기에 한서대의 선축이 결정 되었고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그대로 시합이 진행 되었다.
삐이이이익!
주심의 긴 휘슬 소리와 함께 한서대의 킥오프로 전반전 45분 경기가 시작 되었다.
연신대에 비해 전력이 떨어지는 한서대는 포(4)백으로 수비를 견고히 하면서 역습으로 골을 노리는 전술을 들고 나왔다.
이미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이명신은 마찬가지로 포백으로 수비를 강화시키고 한 수 위 전력을 갖춘 미드필더들로 하여금 한서대를 강하게 압박하게 했다.
그 주 역할이 중앙 미드필더인 강현수에게 주어졌고 현수는 능수능란하게 연신대를 진두지휘했다.
“야! 이쪽으로 차야지.”
“뺏기면 안 돼. 공 간수 잘해.”
전반 초반 두 진영은 서로를 탐색하며 미드필더간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하지만 한 순간 그 싸움의 승패가 한쪽으로 확 기울었다.
퍼억!
“크으윽!
현수와의 어깨 싸움에서 맥없이 밀린 한서대의 중앙 미드필더 채재욱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연신대 중앙 미드필더 강현수의 피지컬이 강하다는 건 저번 시합에서도 충분히 겪어봤지만 지금은 어째 그때보다 더 했다.
‘이 새끼. 대체 그 동안 뭘 한 거야?’
마치 철벽에다 몸을 부딪친 거 같았다. 채재욱은 애초 축구 재능이 떨어진 데다 위치 선정능력도 약했다. 그래서 오로지 몸으로 부딪치며 상대에게서 볼을 따냈는데 현수 앞에선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보니 자연 미드필더 싸움에서 밀리게 되었고 승기가 확 연신대쪽으로 기울어버렸다.
‘시팔....’
이를 악 다문 채재욱은 이를 반칙으로 극복해 볼 요량으로 현수를 향해 팔꿈치를 써보았다. 하지만 현수는 그걸 귀신같이 알고는 슬쩍 몸을 빼거나 먼저 팔을 뻗어 그를 밀쳐 중심을 흩어트렸다.
“이 시팔.....”
그 때문에 제대로 열이 받친 한서대 중앙 미드필더가 작정하고 현수에게 달려들어서는 그 위험하다는 백태클을 가했다.
“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현수가 쓰러졌다. 그 앞으로 주심이 바로 뛰어왔고 잠시 채재욱을 보고 고심하더니 옐로 카드를 꺼냈다.
이게 연습 시합이 아니었다면 분명 레드 카드가 나왔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연습 시합은 말 그대로 두 팀이 서로 연습을 위해 열린 경기다. 그런데 한 선수를 퇴장 시켜 버리면 그건 연습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경기가 시작 된지 채 5분도 되지 않은 상황. 여기서 주심이 레드카드를 꺼낼 순 없었던 것이다.
“끄응!”
현수도 그걸 알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주심에게 항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괜찮나?”
주심이 걱정스런 얼굴로 현수에게 물었고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심이 채재욱을 향해 말했다.
“연습 시합인데 좀 살살 하자고.”
주심의 그 말에 채재욱도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그리고 현수에게 바로 사과를 했다. 연습 시합에서 백태클은 그가 생각해도 너무 심한 처사였던 것이다.
“됐어.”
현수는 쿨하게 채재욱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그리고 연신대의 프리킥으로 시합이 재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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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현수는 좀 더 수비에 치중한 미드필더였다. 박스 투 박스의 미드필더로서의 역할을 맡아서 왕성한 활동량으로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녔다. 그건 한서대에 있어서는 재앙이나 다를 게 없었다.
2선에서 전방으로 가는 공을 현수가 죄다 끊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공격엔 그다지 적극적으로 임하진 않았다.
좌우로 패스만 돌릴 뿐 공격의 주도하는 건 그의 양 옆 미드필더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에 한서대는 쩔쩔 맸다.
연신대의 투톱인 나진목과 고동찬이 그 만큼 열심히 한서대 진영을 휘저어댔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골이었다.
그들은 번번이 한서대 수비나 골키퍼의 선방에 막혀 골을 넣지 못했다. 당연히 그 모습에 연신대 감독인 이명신은 분통을 터트렸다.
“아이고. 그걸 못 넣다니.”
그러면서 계속 현수의 눈치를 살폈다. 현수가 공격에 가담했다면 벌써 골이 터졌을 텐데 어떻게 된 것이 오늘 현수는 하프 라인을 넘지 않았고 공격도 좌우 미드필더인 김석진와 임호령에게 맡기고 있었다.
물론 현수가 2선을 책임지면서 수비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축구란 것이 결코 지키기만 해선 이길 수가 없는 경기였다.
반드시 골이 필요했는데 그 골을 넣어 줘야 할 현수가 저렇게 팔짱만 끼고 가만있으니 이명신으로서는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현수야! 좀 더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해라.”
이명신이 소리 쳤지만 현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제 자리를 고수할 뿐 공격에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연습 시합도 전반전 시간이 절반 쯤 흘렀을 때였다.
촤라락!
한서대 포워드가 연신대 중앙을 파고들다가 센터백 이기찬의 절묘한 태클에 공을 뺏겼다.
그 공이 좌측 터치라인으로 굴러 갔는데 현수가 뛰어가 그 공을 기어코 살려 냈다.
그때 현수가 왼쪽 미드필더인 김석진에게 손짓을 하며 자리를 바꾸자고 신호를 보냈다. 현수는 김석진이 자신의 자리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자 바로 움직였다.
파팟!
현수는 그 공을 앞으로 툭툭 차면서 왼쪽 터치라인을 따라 빠르게 하프 라인을 넘어서 내달렸다.
그런 그의 옆으로 한서대 미드필더가 따라왔지만 주력에서 확연히 앞서며 한서대 미드필더를 벗겨냈다.
“막아!”
한서대 센터백의 외침에 한서대 수비수가 현수를 막으러 달려 나왔는데 그때 현수는 한 박자 빨리 페널티에어리어 안으로 센터링을 올렸다.
“젠장. 사람 잡아!”
한서대 센터백의 외침 속에 공은 빠르고 강하게 페널티에어리어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낙하지점에 페널티에어리어로 쇄도해 들어왔던 연신대의 왼쪽 전방 공격수 나진목이 있었다.
현수의 센터링은 정확히 나진목의 머리로 떨어졌다. 워낙 센터링이 정확하다 보니 나진목은 어렵지 않게 이마에 공을 맞추면서 살짝 방향만 틀었다.
출렁!
헤딩 된 공은 골키퍼가 허우적거리며 팔을 뻗었지만 먼저 골대 안으로 들어가 골망을 갈랐다.
“우와아아!”
“그렇지!”
연신대 벤치에서 함성이 일었다. 골을 넣은 나진목은 고맙다며 현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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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골을 내어 준 한서대는 그래도 여전히 수비 위주로 경기를 운영 해 나갔다. 팀 컬러가 그런 모양이었다.
현수는 전반전 시작하고 딱 한 번 하프 라인을 넘었고 기막힌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 때문인지 현수가 공만 잡아도 한서대 쪽에서 난리가 났다.
“4번이 공 잡았다.”
“에이씨. 빨리 잡아!”
그가 공을 잡으면 한서대 포워드와 미드필더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때문에 현수는 공을 받자마자 바로 패스하기 바빴다.
현수가 막히자 전반 초반처럼 연신대 좌우 미드필더들이 공격에 나섰는데 역시나 결정적인 연결이나 찬스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거기다 공격수들 역시 마구 잡이 식으로 슈팅을 때려 대면서 헛힘만 잔뜩 섰다. 그러는 사이 시간을 흘렀고 전반 45분이 끝났다.
스코어 1대 0!
연신대가 이기고 있는 가운데 지친 기색이 역력한 선수들이 각자 벤치로 걸어 들어갔다. 벤치에 있던 저학년 선수들이 알아서 수건과 차가운 물을 건넸다.
현수도 수건은 받았지만 물은 사양했다.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은 현수는 물 대신 아이스박스 안에 준비 되어 있던 이온 음료를 꺼내서 마셨다.
축구에서는 중간에 쉴 수 있는 하프타임이란 것이 있다. 지친 선수들이 체력을 회복하고 부족한 전술을 보완하는 시간을 말했다.
보통 정식 경기에선 라커룸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데 지금처럼 연습 시합일 때는 벤치 주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때 선수들은 저마다 물이나 음료, 혹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 준비해 와서 그걸 먹으면서 소진한 체력을 보충시켰다.
연신대 감독인 이명신은 전반전에 많이 뛴 걸 알기에 별 말 없이 선수들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 한 선수만 제외하고 말이다.
“현수야.”
이명신이 슬그머니 현수 옆으로 다가가더니 그에게 바나나 하나를 건넸다.
“이것 좀 먹어라.”
하지만 현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오늘 현수는 전반전을 뛰고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 만큼 평소보다 덜 뛰었단 소리였다. 그러니 허기도 지지 않았고 간단히 이온 음료만 마셔도 체력을 회복하는 데 충분 했던 것이다.
괜히 바나나만 내밀었다 무안해진 이명신이 조심스럽게 현수에게 말했다.
“현수야. 후반전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뛰어 주면 안 될까?”
이명신은 현수의 물 오른 공격력을 오늘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현수가 영 소극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그걸 확인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네. 뭐 그러죠.”
“그리고 후반에 윤성찬이를 넣을까 하는데.....”
윤성찬이란 말에 현수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편 현수가 대답했다.
“알아서 하세요. 선수 교체야 감독님 고유 권한 아닙니까?”
“그, 그래. 고맙다.”
이명신이 뭔가 어깨에 이고 있던 무거운 짐 하나를 떨어낸 듯 홀가분한 얼굴로 사라지는 걸 보고 현수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현수도 눈치는 있었다. 감독이 현수가 싫다는 대도 윤성찬을 끼고 돌 땐 그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윤성찬과 같이 경기를 뛴다는 거 자체 만으로도 사실 현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 꼴 보기 싫으면 내가 나가면 되지 뭐.’
현수는 후반에 오늘 시험해 보려 한 새로 장착한 스킬만 확인한 후 바로 교체 되어 나올 생각이었다. 교체 될 방법도 이미 다 생각해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