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1
“카넨.”
“예.”
그는 여전히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페리아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자 카넨은 가만히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한 가지 이야기할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카넨은 자신이 매달렸지만, 그녀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카넨의 눈물을 닦아 주던 페리아는 거절의 말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제가 다른 세상에서 온 건 이미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이곳은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 속이고, 그 속에서 당신은 남자 주인공이었어요.”
카넨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페리아의 말이라면 어떤 것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 당신은 여자 주인공이었습니까?”
“아니요, 저는 그냥 엑스트라요.”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듣던 카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페리아가 하는 말이면 뭐든지 믿겠다고 생각한 것이 불과 몇 초 전인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신이… 엑스트라라고요?”
엑스트라라면 보잘것없는 역할을 말했다. 그런데 자신이 남자 주인공이라면 보잘것없는 역할과 결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페리아가 고작 엑스트라라니.
“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다른 성녀가 있다고 했던.”
“기억합니다.”
“그 사람이 여자 주인공이에요. 제가 아니라.”
이제, 어느새 시간이 흘러 그 여자 주인공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는 페리아가 카넨을 놔줘야겠다고 생각한 때이기도 했다. 결국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에게, 엑스트라치고는 화려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이 정도는 고생했던 자신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력은 많이 찼죠?”
“갑자기 그건 왜…….”
불안감이 엄습한 카넨은 흔들리는 눈으로 페리아를 바라보았다.
“마력이 충분한데도, 아직도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변함이 없어요?”
“예. 전혀 없습니다.”
카넨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녀와 몸을 그토록 섞으면서 마력을 쓴 것이라고는 최음 크림 같은 페리아와 함께 즐길 도구를 만들거나, 그녀를 만나기 위해 혹은 그녀에게 선물을 갖다 바치기 위해 공간 이동을 하거나, 페리아에게 선물을 사 줄 돈을 벌기 위해 드래곤 레어를 몇 번 털어 오는 것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페리아와 몸을 섞으면서 항상 그가 썼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력을 받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자신을 직시하던 카넨의 붉은 눈동자를 페리아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자 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같이 갈 곳이 있어요.”
그렇게 말한 뒤 페리아는 카넨과 우선 헤어지고 며칠이 지나 그에게 연락했다. 자신이 말했던 날이 왔다고. 카넨은 무슨 날인지 미리 설명을 듣지 못해 의아했으나, 페리아가 부르기에 멋있게 차려입고 그녀를 만나러 갔다.
페리아는 그동안 카넨 없이 몇 번이나 왔던 곳이기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여자 주인공이 나타나는 곳이에요. 이제 나타날 때가 되었거든요.”
이곳에 대한 묘사는 있었지만 위치에 대한 설명이 빈약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 헤맸다. 지금은 에녹이 없다지만 혹시 그와 뜻을 같이하는 신전 사람이 여자 주인공을 데려갈까 봐서, 그러면 카넨을 뺏길까 봐 걱정되었다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성녀가 둘이 되니 자신의 위치가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필요 없습니다.”
“보고 나서 결정해요.”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것은, 제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당신인데 어째서!”
카넨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페리아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제가 어떻게 믿어요. 저는 이전에도 당신이 저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저를 죽이려고 했었죠.”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다시는. 만약 제가 그런다고 한다면 제게 무슨 짓을 해도 좋습니다. 맹세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믿어 줄 수는 없는 겁니까?”
카넨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페리아도 할 말이 있었다.
“…기회를 달라고 했었잖아요, 나는 최대한 배려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페리아는 자신을 ‘여자 주인공’이라고 하는 여자에게 넘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페리아 같은 여자가 두 명일 리는 없었다. ‘주인공’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에 대해서 카넨은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다지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카넨은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 어쩔 수 없이 페리아의 의견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둘의 관계에서 약자는 언제나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건너편 바위틈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이전에도 보았던 빛이었다. 페리아가 성력을 모아서 사용했을 때와 같은 황금빛.
카넨은 그곳에 도착해 확인하기도 전부터 정말로 성녀가 등장한 것인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한 명도 존재하기 힘든 성녀가 둘이라니, 믿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저기요.”
페리아는 그녀를 보고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여자 주인공이었다. 표지로 봤을 때보다 훨씬 예쁘장한 외모였다. 물론 자신도 예쁜 외모이긴 했지만, 여자 주인공은 확실히 그 분위기부터 달랐다.
“죄송한데, 여기가 어딜까요? 분명 저는 몸이 안 좋아서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깨어나 보니 여기에 있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카넨은 진짜로 이곳에서 사람이 나타날 줄 몰랐는지 많이 놀란 눈치였다. 게다가 페리아가 이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으니, 이번에도 유리나가 이세계에서 온 것을 곧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당신이… 한 말이 정말이었습니까.”
카넨이 믿을 수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힘들게 페리아에게 말했다. 하지만 페리아는 예상했다는 듯 태연했다.
“네. 저 사람이 신탁에서 말한 진짜 성녀예요. 내가 아니라.”
유리나는 그들이 혹시 사라지지는 않을까, 이 낯선 곳에서 저 혼자 남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멀찍이 떨어져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여자 주인공이라 그런지 예쁘네요. 귀엽고. 책에서는 당신과 다사다난했지만 결국에는 사랑에 빠지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고 했어요.”
“…….”
“하지만 저와는 어떨지 모르죠. 행복할지, 불행할지, 결국엔 이혼하게 될지.”
그러니 평탄한 삶을 찾아가는 게 어떻겠냐는 은근한 권유였다. 물론 페리아는 그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일부러 카넨에게 말해 시험한 것이다.
‘버릴 거면 일찍 버려라. 나의 대체자가 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설마 카넨이 나를? 이번에도 나를 속이는 거였을까? 거짓이었을까? 불안해하면서 걱정하는 마음이 컸다. 괜히 기회를 준다고 했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저 여자와 만나는 것보다 더 행복할지도 모릅니다.”
페리아는 처음부터 카넨과 이혼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났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카넨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불안정한 미래조차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할 줄이야.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어요.”
“이제는 내 마음을 믿어 주는 겁니까?”
카넨이 페리아의 눈앞으로 다가오며 근래에 봤던 것 중에 가장 밝은 얼굴로 물었다.
“아직요.”
“그러면 제가 저 여자를 원래 세계로 보내면 믿어 주는 겁니까?”
그는 페리아의 단호한 대답도 이제는 익숙해졌다는 듯,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필요 없으니 보내면 되는 거냐고, 그에게는 페리아 외에는 필요치 않다고.
그런 이야기를 듣자 페리아는 기쁜 한편, 새로운 의문이 들었다.
“…보낼 수가 있어요?!”
“마력이 많이 필요하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저한테는 보내 준단 말 없었잖아요!”
“보낼 생각이 없었으니 안 물어봤습니다.”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물론 이전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었지만.
‘카넨, 이 방심할 수 없는 녀석.’
그러고 보니 대신관도 살아 있을 적에 저를 원래 세상으로 보낼 수 있다고 했었다. 그놈도 하는데 카넨이 못 할 리가 없었다. 카넨은 설정 자체가 ‘세계관 최강자’였으니.
그러면 오히려 잘됐다. 원래 그녀의 시험은 이 정도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덕분에 더욱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여자 주인공을 원래 세계로 보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페리아는 곧바로 실천에 옮기기 위해 여자 주인공을 불렀다.
“유리나!”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는 거예요?”
“나는 이곳의 성녀거든.”
“성녀라니, 무슨…….”
“이곳은 그런 세계야.”
유리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며, 성녀라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러나 페리아와 카넨이 입고 있는 옷을 보고 사실인가 긴가민가해했다. 자신이 원래 있던 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옷이기 때문이다.
페리아는 그녀에게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돌려보낼 사람이었으니 굳이 그녀를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카넨, 잠깐 따라올 수 있어요?”
“얼마든지.”
카넨이 결연하다 싶을 정도로 경직된 모습으로 답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페리아뿐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카넨에게는 갑자기 네가 살던 세상은 소설 속이란다! 라고 말한 상태고, 여자 주인공은 수술실에 들어가서 눈 떠 보니 이세계로 날아온 거니까. 그나마 카넨이 페리아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했으니 저 정도인 것이다.
페리아 역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엄청나게 놀랐었기에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지금이야 이곳에 정착한 지 1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무던해진 것이니.
“유리나, 처음에는 어지러울 수 있어.”
유리나의 눈을 가린 채로 카넨과 함께 공간 이동을 했다.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공간 이동에 익숙해져 버린 황제가 그들을 맞았다. 유리나는 갑작스러운 마법에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을 경험하는 것은 난생처음일 테니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저 사람은 또 누구고.”
“폐하, 반지 좀 빌려주세요.”
“…반란이더냐.”
황제의 표정이 쓸데없이 진지해졌다. 반란이라니, 누가 그런 귀찮은 짓을 한다고.
“아니에요. 다시 돌려 드릴 거예요.”
“옥새를 그렇게 쉽게 빌려 달라고 하는 것은 당신밖에 없을 거야, 페리아.”
황제가 조금 비꼬아서 말했지만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그리고 그 옥새를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을 이미 그전에 보았기에 전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폐하가 저한테 지은 죄가 있으니 당당하게 말하는 거죠.”
“…….”
“아니면, 저 죽이시게요?”
반쯤은 협박할 목적으로 몸 주변에 성력을 휘감았다. 나는 이전에 네가 나를 죽이자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는 의미였다. 물론 그때는 그녀가 성력도 제대로 못 쓰는 고작해야 남작이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달라졌다.
“하아,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힘없는 황제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해야지.”
황제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서 페리아의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다.
“성녀와 마탑주가 한편이 되어서 나를 그렇게 노려보는데… 황제면 뭐 해, 일만 하고, 협박이나 당하고!”
그동안 황제가 맺힌 게 많았던 것 같았다. 게다가 이후에 들려오는 말이, 사냥 대회에서 카넨을 실격시킨 걸로 그가 엄청나게 항의한 모양이었다. 트라비안 공작과 마탑주 사이에 끼어 있는 불쌍한 황제라는 것이 그의 이론이었다.
“결계 강화하려고 그러는 거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성녀는 정말 못하는 게 없군.”
“공짜로 해 드리는 건 아니니까요.”
“…대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놓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미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혹시 나중에라도 카넨과 이혼하게 되더라도 페리아는 제 수중에 무언가 남기를 바랐다. 저택이나 사용인이나 신전 같은 것들.
‘내가 굳이 황제에게 무료 봉사할 필요는 없지.’
페리아는 가 본 적은 없지만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 있었기에, 또다시 카넨과 유리나를 데리고 공간 이동을 했다. 황궁의 심층부였다. 주변을 둘러본 유리나는 아직도 마법에 익숙하지 않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카넨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도착해 저절로 입이 벌어져 있었다.
“페리아, 당신이 여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봤어요.”
“어디에서……. 아.”
카넨이 어릴 적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나라를 수호하는 결계를 전승받았다. 그때 딱 한 번 오고 안 온 곳이었다. 자신도 기억을 더듬어서 가야 하는데, 그곳을 페리아가 정확하게 찾아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오기 힘든 곳을 페리아가 ‘봤다’라고 말할 만한 것은 단 하나였다. 그녀가 자신을 보았다던 ‘소설’이었다. 아직도 믿기가 어려웠지만, 페리아가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 대한 믿음은 심층부에 왔을 때 확신을 갖게 되었다.
페리아는 황제에게서 받은 반지를 입구에 댔다. 그랬더니 반지의 문양이 문 안쪽으로 쑥 들어가면서 문이 흔들리며 저절로 열렸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넓은 홀이 나타나고, 바닥에는 마력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어서 붉은 빛이 마법진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카넨으로부터 흘러 나가고 있었다.
“유리나, 중심부에 서 봐.”
“시, 싫어요! 뭘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야 너를 네가 원래 살던 곳에 보내 주지.”
유리나는 황제에게 말하던 페리아의 언행을 모두 목격한 터라 그녀에게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결계를 강화하려고 그러는 거라면서요!”
“하고 나면 보내 줄 거야. 카넨이.”
“예? 아, 가능하긴 합니다.”
“…정말요?”
미남에게 약한 것은 모든 이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는지, 유리나가 조금 혹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소설 속에서, 유리나가 카넨에게 첫눈에 반했는데 숨겼다고 했던가.’
그녀의 안목은 페리아가 소설에 들어온 이후에도 여전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끓어올랐다.
‘아니야, 괜찮아. 어차피 유리나는 곧 갈 사람이야. 그렇지?’
하지만 눈은 혹시나 카넨이 유리나를 향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사이가 일반적이진 않았다. 언제라도 마음이 바뀔까 봐 걱정이 되었다.
카넨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가 유리나가 아닌 자신을 선택하자 저도 모르게 기대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래.”
“하지만, 무서운데…….”
유리나가 겁을 먹고 주저하자, 페리아는 조금 짜증이 났다. 자신에게는 그저 이것은 지나가는 과정일 뿐, 이렇게까지 시간을 끌 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유리나는 원작의 여자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그녀가 이곳에 오래 있는 것이 자신에게 좋은 점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다른 소설처럼 내 성력을 앗아 간다거나 할 수도 있잖아.’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알았는지 카넨이 부유 마법을 써서 유리나를 페리아가 말한 중심부로 보내 버렸다.
“꺄악! 내려 주세요!”
“페리아가 거기 가 있으라고 했잖아.”
카넨이 강제로 보내 버리자 유리나가 더욱 겁을 먹고 도망치려고 했다.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까지 강제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넨이 그녀가 도망칠 수 없게 마법을 써서 그녀의 주변에 거대한 장벽을 세워 버렸다.
“카넨!”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그녀에게 공격 마법을 써 봤자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는다는 것을. 단순히 이동을 제한한 겁니다.”
“하아, 놀랐잖아요.”
한동안 카넨을 보지 않아 잊고 있었나 보다, 얘는 어마어마한 쓰레기였다는 것을. 그런데 소설 속에서는 여자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이에게 쓰레기였는데, 여자 주인공이 움직인다는 이유로 장벽을 세워 가둬 버리다니.
소설 속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페리아에게는 카넨이 여자 주인공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둘이 러브라인을 타기 전에도 이렇게까지 쓰레기 짓을 하지는 않았는데…….
‘정말로 소설과 다르게 흘러가는 건가?’
물론 처음 유리나를 발견한 것은 신전이어야 하고, 카넨도 지금쯤 미혼에, 전쟁에 참여하여 마력을 얻고 있을 시기였다.
‘뭐, 어때. 소설과 다를 수도 있지.’
제일 먼저 카넨이 결혼을 했었다는 것부터 소설과 달랐다. 원작에서는 애정에 목마른 인간미 없는 소시오패스였다. 하지만 지금의 카넨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후회할 줄도 아는 제대로 된 성인이었다.
“아프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유리나. 그러게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았잖아.”
안에서는 놀란 유리나가 장벽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미 성력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한 자신이라면 모를까 유리나가 장벽을 해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페리아는 책 속에서 나왔던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생각했다. 숨겨진 결계의 방,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성력이 가득한 성녀, 그리고 술식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인 자신.
원작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술식을 해결했지만 지금의 유리나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페리아는 책 속에서의 유리나가 정보를 얻었던 것을 바탕으로 책을 읽고 할 수 있었다.
페리아는 마법진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도서관에서 가지고 온 금서에 적혀 있는 대로 성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리나를 가두고 있던 거대한 장벽 안에서 하얀 성력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뭐야!”
유리나가 놀라 소리쳤지만, 페리아는 혹여나 잘못될까 봐 성력을 사용하는 것에 집중했다. 마법진을 가득 채웠던 붉은 마력을 대신해 점차 새하얀 성력이 그 자리를 채워 나갔다.
“어떻게…….”
카넨에게서 항상 상당량의 마력을 앗아 가던 마법진이었다. 그런데 점점 빠져나가는 마력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더 이상 그의 마력은 빠져나가지 않았고 붉은색의 마법진은 새하얀 마법진이 되어 있었다.
어지간히 대형 마법을 쓰거나 전혀 충전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살아가는 데 불편함 없을 정도로 마법을 쓰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 놀라운 광경을 연출한 페리아를 자연스럽게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힘드네.’
어쩐지 소설 속에서도 여자 주인공이 탈진하긴 했다. 아마도 계속해서 성력을 쓰다 보니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유리나에게 겁을 주지 않기 위해 아프지 않다고 했을 뿐.
페리아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다시 성력을 끌어모아 보았다. 이전처럼 금빛이 맴도는 성력이 나오고 있었다. 제 계획대로 잘되었다. 대성공이었다.
“장벽 좀 거둬 줄래요?”
“예.”
카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아직도 얼떨떨해하면서도 페리아의 지시에 따랐다.
“이제 보내 줄게.”
“끝…난 거예요?”
마법을 쓰거나 빛이 나오는 것은 몰랐지만, 애초에 유리나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출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카넨이 마력을 이용해 차원을 이동하는 문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카넨이 이런 능력을 쓸 수 있었을 줄이야. 원작에서도 여자 주인공을 보내기가 싫어서 이야기를 안 한 거였나 보네. 하여튼 속이 시커매.’
유리나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했다. 말이 좋아 ‘차원 이동 문’인 거지 생김새는 영락없이 구덩이였기 때문이다.
“아, 유리나.”
“네, 네? 들어가려고 했어요! 알아서 들어갈게요!”
“아니, 너 여기 오기 전에 수술실이었다고 했지?”
“네…….”
원작에서는 유리나가 이곳에 와서 눌러앉게 되었으니, 수술의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도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해 이곳으로 오게 되었으니, 유리나도 어쩌면 좋지 못한 결과가 나와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감사의 표시야.”
페리아가 자신의 성력을 끌어모아 그녀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 주었다. 꽤나 많은 양의 성력을 이용했다.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원작에서는 유리나가 자신의 성력을 모두 희생해서 카넨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페리아는 어차피 다른 세상으로 돌아갈 유리나의 성력을 이용했다. 그 결과 카넨을 결계로부터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줬다. 그리고 제 성력도 여전히 가지고 있었으니 완전히 남는 장사였다.
“돌아가면 수술 안 받아도 될 거야.”
“저, 정말요?”
“갑자기 사라졌다가 돌아온 것에 대해서는 네가 잘 설명해야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감사해요. 일단 가서 다시 검사받아 볼게요.”
유리나는 왠지 몸이 가뿐해진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지는 못했다.
“그럼 이제 가 봐.”
“…….”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유리나의 등을 페리아가 떠밀었다.
“신기한 꿈을 꿨다고 생각하도록 해.”
“꺄아아악!”
제대로 차원 이동이 된 것인지, 곧 유리나의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카넨이 차원 이동 문을 닫고는 금방 문을 소멸해 버렸다.
“그럼 이제 폐하께 반지를 돌려주러 가죠.”
“…페리아.”
“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한 겁니까.”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사실은 여자 주인공을 보낼 마음이 없었던 건가?
“그러면 제가 유리나에게 죄책감이라도 가져야 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죽을 위기에 처한 제 목숨을 살려 주고, 신성제국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해 주는 것으로 모자라 결계에 속박되어 있던 저를 풀어 주기까지.”
“…조금 이따가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페리아는 카넨이 마음에 들었다. 외모도, 권력도, 그리고 속궁합까지. 이곳에서 그보다 더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카넨과 헤어져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을 살펴봤지만 권력은 그녀에게도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카넨에게 익숙해져서 그런지 다른 남자들의 외모가 눈에 차지를 않았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화가 나지만, 사실 그의 방어기제가 발동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긴 하다. 물론 이렇게 관대하게 생각하는 것은, 페리아 자신은 결코 그에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시간 동안 페리아는 분명 즐거웠고, 그가 호감을 갖고 있는 것 역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것은, 그가 보여 왔던 모든 ‘호의’가 마력을 충전해 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정말로 그녀를 좋아하는 건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충분할 만치 마력을 충전해 주고, 결계의 속박도 풀어 주었다. 그러니 그는 이제 페리아를 통해 마력을 회복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데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할까.’
이것이 페리아가 준비한 진짜 시험이었다. 유리나를 일부러 보여 준 것이 첫 번째 시험이었다. 여자 주인공을 앞에 두고도 자신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한.
카넨은 유리나가 아닌 페리아를 선택했다. 그녀를 원래 살던 곳에 보내기까지 했고, 장벽에 가둬 버린 것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유리나에게 철벽을 친 행동이다. 아마 유리나는 카넨의 얼굴을 떠올리면 잘생긴 쓰레기라며 욕하겠지.
페리아는 카넨에게 또다시 배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게 그녀가 그에게 하는 마지막 시험이 될 것이다.
“카넨, 이제 당신은 마력이 부족할 일 따위 없을 거예요. 물론 마력을 마구잡이로 쓴다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대형 마법을 쓸 일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
“그럴 겁니다.”
결계가 항상 엄청난 양의 마력을 가져갔는데, 이제 그렇지 않다. 마력은 계속해서 소멸했지만, 성력은 일정 수준 이상만 갖고 있다면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러니 신성으로 전부 대체한 마법진은 계속해서 성력이 생겨나면서 결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마력이 바닥난 상태도 아니죠.”
“당신에게서 마력을 충분히 받아 오히려 넘치는 상태입니다.”
카넨이 페리아의 말에 긍정했다.
“즉, 내게서 굳이 마력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예요.”
마력을 크게 쓸 일은 남지 않았고, 마력을 충전받을 일도 향후 몇 년간 있을지 말지 의문인 정도였다.
“페리아, 나는.”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 봐요.”
“…….”
카넨이 무어라 항변하려고 했으나, 페리아는 마음을 다잡았을 때 제 이야기를 다 꺼내고 싶었다.
“신성제국이 무너진 마당에 굳이 황실에 성녀가 있지 않아도 될 거예요.”
카넨이 입술을 짓씹어 입술에 피가 맺혔다. 그것을 보자 마음이 약해지는 듯해 약간의 성력을 담아 회복시켜 버렸다.
“그래서 말인데요.”
카넨이 떨리는 눈으로 페리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사형 선고만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그래도 나를 좋아해요?”
“예.”
카넨은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잘 생각하고 말해요, 나 이전보다 당신에게 그렇게 이용가치가 높지 않아요.”
“좋아합니다, 페리아. 그 말로는 부족합니다.”
이혼하자며 꺼지라는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카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페리아의 손을 잡아끌어 제 품에 그녀를 안았다.
“페리아, 페리아.”
그녀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한 손으로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페리아의 여린 몸을 안았다.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사라지지 않게.
“혹시 황실에 성녀가 필요한 거라면 이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대로 있어도…….”
페리아는 여전히 그를 밀어냈다. 아직까지도 그에게 기회를 주었고, 기회를 줄 때마다 통과했지만 이제 그를 믿고 싶다는 감정이 생겼을 뿐 완전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카넨은 그런 페리아를 사랑스럽게 보면서 그녀의 귓가에 밀어를 속삭였다.
“페리아, 사랑합니다.”
“거짓말…….”
“비록 지금 저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 때까지 매일 말하겠습니다.”
카넨은 제 품에 안겨 있던 페리아의 조그마한 얼굴을 감싸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와 눈가,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페리아, 정말, 정말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만약 또다시 나를 배신하면…….”
페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넨이 몸서리치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맹세합니다.”
“그러면 내가 죽이러 갈지도 몰라요.”
완전히 진심을 다해 말하는 페리아에게 카넨이 바짝 엎드렸다.
“그러십시오. 하지만 내가 계속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은 계속 내 곁에 있어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페리아는 예전에 둘이서 결혼할 때 했던 맹세를 떠올렸다.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자던 맹세는 지키지 못했지만, 지금의 맹세가 오히려 그때보다 진실한 마음을 담은 것 같았다.
“좋아요, 당신도 나를 계속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각오해야 할 거예요.”
“바라는 바입니다. 나중에 말 바꾸지 마십시오. 계약서라도 쓰는 건 어떻습니까?”
“환영이죠.”
카넨은 마력으로 곧바로 종이와 펜을 만들었다. 종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평생 사랑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카넨이 호기롭게 서명을 한 뒤 페리아에게 건넸다.
“서명하십시오!”
페리아 역시 자신의 이름 옆에 화려하게 서명을 했다. 아주 만족스러운 계약서였다.
“그러면 카넨.”
“예.”
“이전에 못한 걸 마저 하러 갈까요?”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형에게 반지를 돌려주러 가는 것? 사냥 대회에서 우승을 하게 만드는 것?
추측할 만한 것이 너무 많아 카넨이 당황하자, 페리아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이전에 못다 한 섹스를 마저 해야죠. 나 그때 못 한 거, 아직도 쌓여 있거든요.”
페리아의 말에 카넨이 호쾌하게 웃었다. 이렇게 밝게 웃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제가 만족할 때까지 하기로 했던 것도 기억하시겠죠?”
“아…….”
“당신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니, 저는 제 말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카넨은 그대로 공간 이동 마법으로 마탑의 최상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곧바로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진 카넨은 페리아와 허겁지겁 입을 맞추면서도 그의 손가락은 착실하게 드레스를 벗겨 냈다. 드레스가 발치에 떨어지자마자 그녀를 꺼내어 침대 위로 올렸다.
그녀의 입술을 탐하면서도 손은 페리아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을 향했다. 손가락 사이로 뭉그러지는 가슴과, 조그마한 자극에도 발딱 서 버리는 유두가 귀여워 두 손가락으로 장난쳤다.
“흐읏! 가슴만 하지 마요!”
“그러면?”
카넨의 입술은 그녀의 가슴과 배를 거쳐, 골반과 허벅지를 지나 그녀의 음부를 향했다. 두 손가락으로 여린 살을 벌리고 탐욕스러운 혀를 꺼내어 음핵에 묻어 있는 애액을 핥았다.
평소와 같이 하는 건데도 카넨의 분신은 벌써부터 당장이라도 그녀의 질 안에 넣게 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카, 카넨.”
“예.”
“넣어 줘요.”
“아직 제대로 애무를 하지도 못했는데 괜찮겠습니까?”
카넨의 말에 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기다려 왔던 말이기에 단번에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아 제 것을 쑤셔 넣었다.
“흐윽!”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나서 처음으로 하는 섹스는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이전에 페리아를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한 후에 하는 섹스도 당장이라도 쌀 것처럼 엄청났지만, 이번에는 페리아도 처음부터 꽤 흥분해서는 애액을 질질 흘리며 그의 것을 조여 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데, 무슨 이유가 있는 겁니까?”
“…….”
카넨은 충분히 짐작 갔지만 절대로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사랑합니다, 페리아.”
그의 예상대로 사랑한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페리아의 질 내부가 더욱 거세게 움직였다.
“사랑해.”
“그, 그만.”
“당신은 내게 말하지 않을 겁니까?”
“…….”
“사랑해요, 페리아.”
“…나, 나도 카넨.”
계속된 그의 고백에 어쩔 수 없이 페리아가 ‘나도’라고 대답했을 뿐인데 카넨은 이내 사정해 버렸다.
“만족한 거예요?”
“…사고입니다.”
“아, 사고.”
페리아가 피식 그를 비웃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카넨이 페리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이미 한 차례 사정으로 인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페니스가 이전보다 더 커져서는 벌써 제 음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분명 제가 만족할 때까지, 라고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적당히.”
“적당히의 기준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페리아가 앓는 소리를 내자 카넨이 여유롭게 침대 옆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고르십시오, 어떤 거부터 쓰고 싶습니까?”
섹스를 할 때 사용되는 듣도 보도 못한 기구부터 아주 유명한 기구까지 있는 것을 보고 페리아는 당황했다. 그러다가 조용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 이거…….”
카넨이 색정적인 미소를 띠며 그녀가 지목한 도구를 꺼냈다.
“이것들을 다 사용하면, 제가 만족할 것 같습니다.”
“이걸 다?!”
“예.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페리아에게는 끝나지 않는 억겁과도 같은, 기나긴 하루가 시작되었다.
Epilogue
“이상하다……. 이상해.”
요즘 페리아는 자신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가장 큰 변화는 잠이 많이 늘었다. 저녁 5시쯤이면 잠에 들어, 외출하고 온 카넨이 페리아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를 수차례. 이제는 아침 7시쯤에 일어나는 것을 알기에 ‘그냥 자는구나’ 하고 넘어가게 되었다.
‘이건 무슨 판다도 아니고.’
과장 조금만 보태면 하루 종일 자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카넨.”
“예.”
“저번에 황궁에서 먹었던 무화과 타르트가 먹고 싶어요.”
카넨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직 깜깜한 밤이었다. 그것도 새벽녘이 되기 전의 시간. 페리아는 이렇게 하도 오래 자서 낮밤이 뒤바뀌기라도 하면 꼭 새벽에 먹고 싶은 음식을 말했다.
“알겠습니다.”
황궁에서 먹은 거라면 괜찮았다. 어차피 황실 소속이니 자는 것을 깨우면 그뿐. 상대가 왕제이자 마탑주인 대공인데 불만이 있어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것이다.
황궁의 제과장을 마탑으로 데려올까 하다가 마탑에 따로 둘 데도 없고, 그가 만든 음식만 찾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때그때 가지러 가는 편이었다.
“그럼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가는 김에 레몬 셔벗도.”
“예.”
카넨이 채비를 하자 페리아가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당신이 마법사라서 좋네요, 셔벗을 만들어서 그대로 차갑게 가져올 수도 있고.”
“…마탑주를 이렇게 부려 먹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면 내가 다녀올까요?”
“안 됩니다.”
페리아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자, 카넨은 곧바로 부정했다. 페리아는 이렇게 카넨의 마음을 확인받는 걸 좋아했다.
‘매번 당신한테 말하느니 그때그때 내가 먹고 싶은 거 가져오고 싶어요.’
‘밤에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게 싫습니다. 죽이고 싶어질 겁니다. 그러니 맘 편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번거롭더라도 그렇게 해 주십시오.’
얼마 전에 있었던 대화를 생각한 페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카넨이 페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공간 이동 마법으로 사라졌다.
“그나저나, 요즘 상태가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카넨에게 먹고 싶은 게 있어 가져다 달라고 했지만, 사실 속이 더부룩해서 그렇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페리아는 자신에게 성력을 사용했다. 치유하듯 성력의 힘을 쓰면 몸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써 봤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괜찮은 후로 줄곧 사용하고 있었다.
“얼른 먹고 싶다.”
지금 생각해 보니 무화과 타르트는 별로인 것 같았다. 하지만 레몬 셔벗은 정말 맛있을 것 같았다.
페리아는 카넨이 만들어 준 마력석을 톡톡 쳤다.
-무슨 일입니까, 페리아?
그때그때 할 말이 있을 때 말하고 싶었던 페리아가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서 카넨에게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다. 제 주변의 모든 이에게 나눠 줄 수는 없으나 트라비안 공작과 황제에게는 하나씩 줘서 급한 말은 그때그때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주로 페리아가 리첼과 수다 떨 때 사용하긴 했지만.
“무화과 타르트 말고, 아니다. 그냥 무화과 타르트도 가지고 와요.”
-예. 그리고 당신이 그전에 맛있게 먹었던 딸기우유도 가져갈 겁니다.
딸기우유를 듣자마자 입에 침이 고였다. 크게 썬 딸기와 작게 썬 딸기를 설탕에 절여 우유를 부어 만든 생 딸기우유.
“당장 와요.”
-곧 타르트가 구워지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어요. 레몬 셔벗 잊지 말아요.”
-예.
마력석 너머로 카넨이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웃는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채워져 갔다.
마력석을 다시 두 번 두드리자 마력석에서 빛이 사라졌다. 페리아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 카넨을 기다렸다.
“…아.”
“으음.”
“페리아.”
“카넨, 왔어요?”
그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에도 잠이 들어 버린 페리아가 눈을 비볐다.
“자고 일어나서 먹을 겁니까?”
“아니. 오늘은 일어날래요.”
그전에도 그를 기다리다가 잠들어서 카넨이 푹 자고 일어나라고 깨우지 않았었다. 그런데 나중에 일어난 페리아가 맛있게 먹은 뒤에 갓 구운 빵이 제일 맛있는 거라며 아쉬워해서 꼭 이렇게 한 번씩은 물어봤다.
페리아가 일어나자 베드테이블을 가지고 온 카넨이 그 위에 간식이 들어 있는 봉투를 놓았다. 그녀가 신이 나서 봉투를 열자마자 무언가 역한 냄새가 났다.
“우욱!”
“페리아?! 괜찮습니까?”
당황한 카넨이 곧바로 몸을 숙여 페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입을 막은 채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괜찮습니까?! 지금 바로 조리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모아 배후를 색출하겠습니다.”
“…입 다물고 그거나 치워요.”
하얗게 질린 페리아가 얼른 저리 치우라고 손짓했다. 카넨이 곧바로 챙겨 뭔가 잘못된 게 있나 살펴보려고 봉투를 열자 다시 페리아가 헛구역질을 했다.
“냄새가… 너무 역겨워요.”
카넨이 창문가로 가서 바람 마법을 이용해 자신 주변의 공기를 계속해서 순환시키면서 페리아의 근처에 가지도 못하게 했다. 만반의 준비를 다 한 뒤에 봉투를 열었다.
“…이상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카넨이 냄새를 다시 맡아 봐도 향긋한 과일 향이 고소한 버터 냄새와 어우러져 있었다. 평소의 페리아라면 침을 꼴깍 삼켰을 텐데, 오늘의 반응은 평소와 많이 달랐다.
카넨이 하나씩 페리아에게 가져다주었다. 처음에는 페리아가 말한 대로 레몬 셔벗을, 그다음에는 무화과 타르트와 딸기우유까지. 마지막으로 조리장이 더 챙겨 준 피칸 파이를 꺼내자마자 페리아가 사색이 되더니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속에 있던 것을 게워 내고 말았다.
카넨은 피칸 파이를 봉투에 담은 뒤 아예 아공간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페리아가 돌아오기 전에 방 안 전체를 말끔하게 환기시켜 놓았다.
“왜 이러지. 원래 나 피칸 파이 되게 좋아하는데.”
“사람 입맛이라는 게 바뀌기도 하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그런데 빵을 뭐 그렇게 많이 가져왔어요!”
“만드는 김에 당신이 좋아하는 것 몇 가지 더 만들라고 했습니다.”
잠시 울렁거렸던 속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페리아는 즐겁게 웃으며 간식을 먹었다. 카넨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라면서, 어디에 있는 것이든 못 갖고 오겠냐며 자랑스레 말했다.
“…고마워요, 카넨. 역시 사람은 배가 불러야 기분이 좋아.”
페리아는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 못 잘 것 같다더니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었다. 카넨이 흐뭇하게 웃으며 잠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잘 자요, 페리아.”
페리아가 일어났을 때, 카넨은 이미 황궁으로 떠난 뒤였다. 주에 한 번 궁정 마법사들의 훈련을 맡아서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카넨은 이것을 극구 반대했었다.
‘굳이 내가 가야 해?’
‘마법사들 중에 네가 제일 강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말한다고 쟤네가 0.01퍼센트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대강 내 밑에 있는 마법사 아무나 보낼 테니까 알아서 배우라고 해.’
‘황족이라는 새끼가 의무는 안 하고 권리만 가져가려고 하지. 너 이거 안 받으면 황실에서 나가는 품위 유지비 전액 삭감할 테니 그렇게 알아.’
‘나 돈 많은데?’
‘대공비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거다.’
‘…할게.’
페리아는 어떻게든 황제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은 받으려고 했다. 그것을 익히 잘 알기에 카넨은 귀찮지만 곧장 수락했다. 그래서 지금은 황궁에 가 있는 것이고. 페리아는 이제 카넨이 눈치껏 잘 움직인다며 만족스러워했다.
페리아가 자도 자도 졸린 눈을 비비며 더 잘까, 아니면 양심껏 일어날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리첼과 연락을 주고받는 용도의 마력석이 깜빡였다.
페리아가 두 번 두드리자 리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리아! 요즘도 몸이 안 좋은가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리첼.”
카넨과 트라비안 공작이 친분이 있고 트라비안 공작이 페리아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냈기 때문인지 리첼과 페리아는 나날이 친분이 두터워졌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본 카넨과 트라비안 공작이 내심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요즘 정말 자도 자도 졸리고,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요.”
배 속에 거지가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배가 별로 안 고파서 ‘맛만 볼까?’ 하고 시작했던 간식 시간은 식사에 버금가는 양을 먹은 뒤에야 멈췄었다.
“게다가 어제는 평소에 잘 먹던 음식을 냄새만 맡았는데도 토할 것같이 역했어요.”
-어……?
“왜 그래요?”
페리아의 말을 듣던 리첼이 무언가 알아챈 듯했다.
-페리아.
“네.”
-…그거 제가 임신했을 때 증상이랑 같아요.
“네?”
-임신 초기 증상 아닐까요? 혹시 아닐지도 모르지만, 한번 검사는 받아 봐요!
그 뒤로 리첼이 무어라 말한 것 같지만 페리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임신’이라는 단어만 둥둥 떠다녔다.
‘임신? 내가 임신?’
리첼은 얼른 황궁의에게 진료를 받아 보라는 말과 함께 연락을 종료했다. 하지만 페리아는 여전히 ‘내가 임신이라고?’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내가 임신일 리가 없잖아.”
카넨의 캐릭터 설정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력을 얻는 동안에는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점? 그렇다고 마력을 안 쓰면 된다고 하기에는 그는 마탑주였던 데다가, 나라를 보호하는 결계 마법은 매일매일 24시간 돌아가야 했다.
‘…이거구나.’
페리아가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원작에서 카넨은 여자 주인공 사이에서 예쁜 아이를 하나 낳았었다. 여자 주인공이 카넨이 속박된 결계 마법을 해제한 이후에.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그걸 해제했고.’
임신이 안 되는 조건을 없애고 나서 일주일에 5, 6일 정도는 함께 밤을 보냈다. 어떨 때는 초저녁부터 대부분 새벽녘까지. 그리고 임신이 안 된다고 알고 있는 카넨과, 임신을 하는 조건을 잊고 있었던 페리아는 당연하게도 별다른 피임을 하지 않았었고.
‘…진짜로? 내가? 내가 임신? 에이, 설마.’
임신이라니. 너무나도 낯선 단어였다. 페리아는 혹시 모르는 거라며 공간 이동으로 황궁의를 찾았다.
“비전하!”
“진료를 받아 볼까 하는데.”
“비전하께서요?”
“그래.”
황궁의가 놀라서 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성녀였다. 어지간한 부상은 그녀 스스로가 성력을 이용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황궁의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 그를 찾아왔으니 심상치 않다고 여겼다.
“혹시 무슨 일로 오신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요즘 자도 자도 졸리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고, 자주 먹던 음식은 냄새만 맡아도 역겨워. 그리고 먹고 싶던 음식이 눈앞에 보이면 일순간 먹고 싶지 않아지기도 해.”
페리아가 말을 하면 할수록 황궁의의 얼굴에 홍조가 피며 기쁨이 물들었다.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페리아에게는 충분히 답이 되고 있었다.
“비전하, 지금 말씀하신 증상은 임신 초기 증상과 일치합니다.”
“…….”
“혹시 열감이 느껴지진 않으십니까?”
“요즘 좀 덥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하지만 페리아가 더위를 느끼면 카넨이 곧바로 바람 마법이나 얼음 마법을 이용해 주변의 온도를 낮춰 줬기 때문에 특별히 불편하진 않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임신 초기 증상 중 하나였다니.
‘임신을 해 봤어야 알지.’
황궁의가 저 안쪽에서 귀중하게 보관되고 있던 마도구를 가져와 페리아의 배에 살짝 붙이자, 파란빛이 들어왔다.
“비전하, 경하드립니다.”
“…설마.”
“예, 임신이 맞습니다.”
페리아는 당황스러웠다. 당혹스러웠다. 혼란스러웠다. 패닉에 빠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얘기는 내가 직접 할 것이니 비밀로 하게.”
“하오나 제가 진찰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보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료 내용은 내가 밝히고 싶지 않다고 해 줘.”
“…알겠습니다.”
페리아는 공간 이동으로 마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내가 임신이라니. 내가 애 엄마라니. 내가!”
그렇게 숱하게 몸을 섞었으니 임신이 안 되는 것이 이상하겠지만, 그래도 임신이 안 될 줄 알았다. 상대는 카넨이었으니까.
어차피 임신을 했으니 선택지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이를 낳기 전까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을 뿐.
페리아는 우선 리첼에게 연락을 했다,
“리첼.”
-네, 페리아. 황궁에는 다녀왔나요?
“…임신 맞대요.”
-어머! 정말 축하해요!
리첼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페리아는 여전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페리아, 대공 전하께는 말씀드렸어요?
“아니요, 아직.”
-깜짝 놀라게 해 주세요! 라비는 제 임신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펑펑 울었답니다.
카넨을 울리는 건 조금 흥미로울 것 같았다. 리첼에게서 어떤 방법을 썼는지,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지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계획을 짜기로 했다.
***
“하아, 페리아. 저 왔습니다.”
카넨이 마법사의 탑에 도착하자 그를 반기는 따뜻한 체온과 밝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 냉기가 감돌았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직감한 카넨이 페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페리아?”
침대도 텅 비어 있어 페리아가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카넨이 흔들리는 눈으로 힘겹게 방 안을 둘러보다가, 못 보던 봉투 하나가 제 책상 위에 놓인 것을 발견했다.
봉투에는 신전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카넨은 페이퍼나이프를 쓸 생각도 못 하고 바람 마법으로 봉투의 끝을 뜯어 편지를 꺼냈다.
당분간 저택에 머물래요.
달랑 편지 한 통만 두고 사라지다니,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카넨은 즉시 저택으로 향했다.
페리아에게 용서받은 이후로 그는 저택에서도 마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카넨은 페리아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선 아무런 답이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묵묵부답이었다.
“페리아,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페리아로부터 답변을 들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을 한 것인가 전전긍긍해하며, 잠시라도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페리아, 제발.”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뒤에 끼이익 문이 열리며 페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페리아……!”
“카넨? 왔어요?”
페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카넨을 끌어안으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페리아?”
“응?”
“…자고 일어난 겁니까?”
“네. 당신이 왔을 때 마침 일어났네요.”
페리아가 헤헤 웃자 별 해괴한 생각을 다 하며 노심초사했던 과거가 씻은 듯이 날아갔다. 뭐가 되었든 지금 제 품 안에 페리아가 있는데 뭐 어때서.
“몸이 찌뿌둥해서 산책을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갈래요?”
“좋습니다.”
페리아가 없는 동안에도 정원사가 열과 성을 다하여 손질해 둔 정원은 아름다웠다. 녹음으로 둘러싸이고 시원한 바람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호수까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런데 왜 저택에 머물겠다고 한 겁니까?”
아직 마음속 불안함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카넨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녀들이 시중을 들어 줬으면 좋겠어서요.”
“나나 펭귄으로는 부족한 겁니까?”
“…아무래도?”
페리아는 말해 무엇 하나 싶었다. 펭귄은 결국 카넨이 입력한 내용에 대해서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카넨이 임산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녀들을 마탑으로 데리고 가자니 그들을 최상부에 둘 수도 없는 데다가, ‘마탑’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아 제대로 된 사람을 뽑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있는 하녀들을 놀리기보다는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게 나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카넨은 뭐 그리 상처를 받았는지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카넨.”
“…예.”
“어쩌면 저택에 오래 머물러야 할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저 혼자서 아이를 온전히 감당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이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건 카넨이나 페리아나 마찬가지였다.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나았다.
물론 어머니의 사랑으로 혼자서 돌보는 것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이가 엄청나게 어지르거나 밥그릇을 쏟았을 때 이를 치워 줄 사람이 있다면 더욱 넓은 마음으로 아이를 돌볼 수 있을 테니 이게 더 좋겠지.
“…마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음,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죠.”
임신을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
“무슨 일입니까?”
카넨이 냉기가 철철 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페리아는 그것이 저를 향한 것이 아님을 알기에 웃어넘겼다.
“페리아, 웃어넘길 생각 하지 마세요.”
카넨이 진지하게 말하면 말할수록 페리아는 웃겨서 쓰러질 것 같았다. 별다른 서프라이즈를 준비하지 못해 임신 소식을 어떻게 밝히나 고심했는데, 카넨이 저 혼자 삽질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조금 불편해서요…….”
“누가, 감히 누가 당신을 불편하게 한 겁니까!”
“아니에요, 카넨. 너무 화내지 말아요. 그 사람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 거예요.”
태아가 뭘 알겠어. 내 배 속에 거지가 들어서 그렇게 먹어 대나 했는데, 아기가 있어서 먹었구나. 그리고 아마 카넨도 내가 임신할 줄 몰랐을걸?
“…그자가 어떻게 했길래 당신이 마탑을 떠난 겁니까.”
페리아는 고민이 되었다. 결국 임신을 하게 만든 건 카넨인데, 여기서 ‘섹스요!’ 했다가는 페리아가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해 그가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럼 결국 배 속의 아이가 한 것을 말해야 한다.
“요즘 내 몸이 안 좋은 원인이었어요.”
“말씀하십시오. 어떤 새끼입니까.”
“말 좀 예쁘게 해요.”
아이가 듣고 있으니까. 물론 아직 청각이 발달할 때가 되지는 않았다지만. 그리고 어떤 새끼라니, 누구 새끼겠어, 카넨의 새끼지.
“지금 제가 말이 예쁘게 나올 것 같습니까?”
“네.”
“…페리아, 금방 하고 돌아올 테니 말해 주십시오.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마탑을 통째로 없애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진짜로 마탑의 흔적을 지워 버릴 기세였다. 그런 카넨 때문에 페리아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꺄하하하하하하!”
“페, 페리아?”
페리아가 눈물까지 찍으며 웃어 대자 카넨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페리아가 웃는 것을 보면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저택까지 온 거면 확실히 심각한 일이 맞는 것 같았다.
그때 페리아가 카넨의 손을 자신의 배로 끌어왔다.
“말 예쁘게 해요. 아이가 듣고 있으니까.”
“…아, 아, 아이?”
“아이.”
멍하니 멈춰 버린 카넨이 뒤늦게 되묻자, 페리아가 확인 사살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의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제, 제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을 텐데…….”
“저도 잊고 있었는데, 당신에게 속박되어 있던 결계 마법이 풀리면 임신 가능해요.”
“책에서 본 내용입니까?”
“네.”
“그런 것까지 나와 있습니까?”
너무 개인적인 사정까지 다 들춰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페리아가 아는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소설책’이라던데 그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알게 되는 것 같아서.
“네. 당신이 갑자기 여자 주인공을 임신시킨 것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할 때 나와 있었거든요.”
“…….”
카넨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자신이 한 행동도 아닌데, 자신이 무슨 죄를 그렇게 크게 저질렀기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페리아에게 깃든 신에게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 그건 제가 한 행동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페리아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카넨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마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어느 날 밤, 카넨은 갑자기 자신의 가슴팍을 누군가 때리는 고통에 잠에서 깨었다. 습격을 당한 것치고는 정말 손으로 때린 것이라 무슨 일인가 먼저 확인하기 위해 눈을 떴다. 무작위로 공격하기에는 제 사랑스러운 아내가 자고 있을테니 혹여나 그녀를 깨울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때리고 있는 것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내였다.
“페리아……?”
“이, 이 나쁜 새끼!”
“예?”
갑자기 다짜고짜 욕을 먹으면서 맞으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페리아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두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때리면서 그를 비난했다.
“나랑 결혼했으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해 놓고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제가 뭘 했다고 그러는 겁니까.”
“유리나!”
…여기서 그 여자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유리나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잖아!”
“제가요……?”
그 여자는 분명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 뒤에 알아서 살고 있을 텐데.
“너무해! 으어어어엉!”
갑자기 페리아가 울음을 터뜨리며 서럽게 울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카넨은 무조건 자신이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싹싹 빌었다. 이 기술은 트라비안 공작에게 전수받은 것이었다.
‘아내가 잘못할 리는 없으니, 네 탓일 거다. 그러니 빌어라.
서럽게 울던 페리아가 지쳐서 훌쩍였다. 카넨은 계속해서 그녀를 안아 주고, 귓가에 잘못했다고 이야기했다.
“앞으로는 유리나랑 행복하게 살지 않을 거죠?!”
“그렇게 살았던 적도 없고, 그렇게 살 생각도 없습니다.”
“…좋아요.”
페리아가 만족해서 다시금 침대에 누웠다. 카넨은 정말 너무나도 억울했다. 스쳐 지나가듯 한 번 봤던 여자 때문에 페리아가 자다가 일어나 저를 때리다니. 페리아가 잘못할 리는 없으니 이게 다 유리나 탓이었다.
“당신이 이렇게 울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죽일 걸 그랬습니다. 그랬다면 당신이 이렇게 슬퍼하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카넨이 그렇게까지 유리나에게 관심이 없다, 제게는 페리아밖에 없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지만 페리아는 이 말을 듣고 이내 이불 속으로 들어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어?!”
“페, 페리아?”
“원작에서는 나를 죽였을 거야, 결말 이후에 나를 죽였을 거야. 너무해!”
“아닙니다,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건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트라비안에게 듣기로는 임산부는 감정의 기복이 굉장히 심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을 직접 겪는 카넨의 입장에서는 미칠 것 같았다.
“카넨.”
“예.”
“만약에 나 버리고, 유리나한테 가면…….”
“그러지 않을 겁니다.”
“만약에라도 그러면, 둘 다 죽일 거예요. 바람피우기만 해 봐.”
“그러십시오.”
페리아가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제게 바람피우지 말라고 경고하는 페리아라니, 벌써부터 하반신에 피가 몰렸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페리아가 말하기를, 임신 초기에 섹스를 하게 되면 아이에게 부담이 되니 위험해서 안 된다고 했다.
‘참아야 해.’
다시 페리아를 눕히고 그녀가 잘 수 있도록 토닥였다. 아직까지도 잠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금방 잠들었다. 하지만 카넨은 여전히 단단하게 부풀어 오는 자신의 페니스 때문에 쉬이 잠들 수 없었다.
“하아…….”
페리아의 옆을 계속 지키고 싶었지만, 페니스가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점 단단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욕실로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
임신인 걸 알게 된 페리아는 본격적으로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구역질이 올라올 때마다 성력을 사용해서 가라앉혔지만 먹고 싶은 음식은 반드시 먹어야 했다. 그것은 성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포도, 딸기, 오렌지, 딸기 파르페, 초콜릿 무스, 레몬 셔벗, 꿀자몽, 자신이 근무했던 황성 도서관의 커피 기계에서 갓 뽑은 에스프레소에 물 부어서 만든 아메리카노. 이것들은 모두 페리아가 지난 이틀 동안 요구했던 음식이었다.
“카넨, 어떡하죠…….”
“무슨 일입니까.”
뭐든지 당당하게 요구하던 페리아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카넨이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달래 주었다. 아직 배가 나온 것은 아니고 태동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카넨이 그렇게 쓰다듬어 줄 때마다 페리아가 조금씩 안심했기 때문이다.
“…떡볶이가 먹고 싶어요.”
“예?”
“그냥 떡볶이 말고 즉석떡볶이.”
들어 본 적도 없는 생소한 음식을 말하자 카넨도 드물게 당황했다.
“이전 세상에서 먹었던 음식인데, 그 특유의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먹고 싶어요.”
“그런 거라면 이곳에도 비슷한 음식이 많지 않습니까.”
“그걸로 가능한 거였으면 애초에 과일 먹고 싶다고 할 때, 한 종류를 말하지 여러 종류를 다양하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
카넨이 페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학교 앞에서 사 먹었던 그 맛은 아니더라도,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은데……. 동대륙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요?”
“…찾아보겠습니다.”
“고마워요!”
페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카넨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카넨은 순간 찾아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이후 카넨의 떡볶이 찾기가 시작되었다. 제국에서 떡볶이에 대한 소문을 찾아보면서 동대륙에 직접 가기도 하고, 길들인 마물을 보내 정보를 알아 왔다. 하지만 떡볶이에 대한 정보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페리아는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떡볶이를 떨쳐 내지 못하고 더욱 먹고 싶어 했다. 저택의 요리사가 페리아에게 설명을 들은 대로 최대한 유사하게 만들어 보려고 했으나 그녀를 만족시키는 맛은 나오지 않았다.
“역시 다녀와야겠습니다.”
“동대륙을요?”
“아뇨. 당신이 있던 세상.”
카넨이 결연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그곳에 가서 꼭 ‘떡볶이’를 구해 오겠노라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마력은 충분히 있는 거죠?”
“예.”
“그럼… 혹시 나도 같이 갈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저도 차원을 건너가 본 적은 없어서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 혼자라면 어떻게든 다녀올 수 있는데, 임신한 페리아까지 같이 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카넨은 곧장 페리아가 맛있게 먹었던 떡볶이 가게의 이름과 위치를 종이에 적고 출발했다.
카넨은 페리아의 조언에 따라 금괴를 만들고 금 거래소에 가서 화폐로 바꾼 뒤 그녀가 일러 준 가게에 갔다. 처음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일순간 당황했으나, 페리아가 해 준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떡볶이, 튀김, 순대 1인분씩 주세요.”
“내장 섞어 드려요?”
제게 질문이 돌아올 줄 몰랐던 카넨은 알아듣지 못하고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 없는 음식들이 그릇에 담겼다가, 까만색 비닐봉투 안에 차곡차곡 자리 잡았다. 계산을 하던 카넨이 5만 원권 한 장을 내밀자 점원이 거스름돈을 바리바리 챙겨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카넨은 페리아가 시킨 대로 말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습니다.”
카넨은 봉투 안의 것에서 따뜻한 온도를 느끼고 페리아에게 칭찬받을 걸 생각하며 신나게 돌아왔다.
혹시나 오는 도중에 음식에 문제가 생길까 아공간에 넣었다가, 저택에 도착한 뒤 페리아의 앞에서 꺼냈다.
“이, 이 냄새!”
“페리아, 이거 맞습니까?”
“맞아요! 꺄악! 너무 좋아!”
페리아가 행복해하며 카넨에게서 봉지를 빼앗아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놓았다. 넓은 연못이 딸려 있는 정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테라스에서, 실내용 드레스를 착용한 채로, 떡볶이를 먹기 위해 하녀에게 은식기를 받는 것은 이질적이었으나 그만큼 즐거웠다.
카넨도 페리아가 엄청나게 기대했던 음식인 만큼 얼마나 맛있게 먹을지 기대가 컸다.
“…….”
하지만 페리아는 조금 먹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카넨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페리아는 그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카넨, 차원 이동까지 하게 해 놓고 정말 미안한데요.”
“…예.”
“제가 생각한 그 맛이 아니에요.”
“…….”
“레몬 셔벗 먹고 싶어요.”
페리아는 그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고구마튀김 하나를 손에 들고 먹었고, 카넨은 하녀들에게 음식을 치우라고 명한 뒤에 어깨가 축 처진 채로 황궁 제과장에게 레몬 셔벗을 받으러 갔다.
이렇게 카넨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페리아의 입덧은, 20주가 넘어가서까지 계속되었다.
***
임신 중기에 들어서면서 배가 어느 순간 훅훅 나와 있었다. 살이 조금 트는 기미가 보이자 페리아는 얼른 성력을 이용했다. 그러자 살이 트려던 자국이 감쪽같이 사라져서 그녀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성력 최고.’
매일 튼살 크림을 발라 주듯이 틈틈이 성력을 사용했다. 누군가는 그게 무슨 사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페리아는 자신의 성력을 자기가 이용하겠다는데 뭔 상관이냐며 아낌없이 성력을 이용했다.
“페리아.”
“깼어요? 성력이 이게 문제네. 밝아.”
자다가 숨 쉬기가 불편해져서 일어난 김에 성력을 사용한 것이었는데, 문제는 금빛이 도는 하얀 성력이다 보니 밤에 사용하게 되면 너무 티가 많이 났다. 오늘도 결국엔 카넨을 깨워 버리지 않았는가.
카넨은 아직 잠겨 있는 목소리로 괜찮다며 그녀의 몸을 옭아매 제 품 안에 더욱 끌어안았다. 그리고 곧 다시 규칙적인 호흡이 들려왔다.
“카넨, 자요?”
“…아뇨.”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나중에 물어볼까요?”
“괜찮습니다.”
카넨은 페리아와는 달리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언제라도 답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은. 어쩌면 지금 대답하고 있는 것도 잠결에 하는 거라 내일 아침이면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제 내가 임신한 지 22주가 넘어갔잖아요.”
“예.”
“그러면 슬슬 해도 되지 않나요?”
“무엇을 말입니까?”
갑자기 카넨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그리고 페리아의 배에는 벌써부터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페리아가 카넨의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속옷에서 커다란 페니스를 꺼냈다. 기둥을 위아래로 가볍게 쓸어 주는 것만으로도 카넨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솔직히, 초기만 지나가면 괜찮다고 해서 12주 지나자마자 바로 할 줄 알았는데.”
“그때는 당신이 입덧 때문에 힘들지 않았습니까.”
“먹고 싶은 걸 먹어야 해서 그렇지, 나머지는 성력 쓰면 괜찮았어요.”
“그래도 아이나 당신에게 해가 될까 봐 두렵습니다.”
“…확실히 이걸 다 넣는 건 무리죠.”
한 손으로 다 잡지 못해 양손으로 잡아야 하는 길이, 게다가 잡을 때면 엄지와 검지의 끝이 서로 맞닿지 않는 두께. 평소 같았으면 페리아가 없어서 못 먹는 카넨이었겠지만, 지금은 혹시나 그녀가 잘못될까 봐 걱정되어 손대는 것조차 조심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페리아.”
페리아가 말하자마자 곧바로 눈을 번쩍 떴으면서, 페리아가 신호를 주자마자 제 것을 세웠으면서도 괜찮다고 말한다.
“밤늦게, 혼자서 하던 거 다 알고 있어요.”
“…….”
“요즘은 밤에 잘 깨거든요.”
카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뭘 그 정도로. 그럴 수도 있지.
“허리 좀 들어 봐요.”
카넨은 홀린 듯 페리아의 명령에 따랐다. 페리아는 이내 그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려 버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기둥을 쓸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귀두의 끝에서 나온 쿠퍼액을 귀두에 펴 바르며 마사지했다.
“하아, 페리아.”
워낙 오랜만에 하는 거라 그런지 카넨이 미간을 찡그리며 쾌락에 심취해 갔다.
“잘생긴 사람을 보기만 해도 태교가 된다던데, 지금 엄청 잘되고 있을 거예요.”
“…아이가 이런 걸 봐도 되는 겁니까.”
“얼굴만 볼게요. 몸도 봐도 괜찮겠다. 벗어 봐요.”
카넨이 우물쭈물했지만, 결국 페리아의 말에 따랐다. 페리아가 하는 말을 거부하는 방법을 잊은 지 오래되었다.
“보기 좋아요.”
카넨이 이제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손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는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면서 더 큰 쾌락을 바라고 있었다.
“넣을래요?”
“…당신이 다칠까 봐 겁이 납니다.”
“넣고 싶은데.”
페리아의 말을 듣자마자 카넨이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편하게 입은 슈미즈 안으로 손을 넣었다. 넣고 싶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이미 그녀의 속옷은 흘러나온 애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카넨은 속옷의 끈을 풀어 침대 밖으로 던져 버리고, 자신의 손가락에 페리아의 애액을 묻히고 음부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읏!”
“아프면 말하십시오.”
“알겠어요.”
안쪽은 이전보다 공간이 훨씬 비좁았다. 워낙 오랜만에 하는 애무에 안쪽이 좁아진 것도 있지만, 임신 후 몸에 변화가 생긴 것인지 제 페니스를 넣을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아마 귀두와 기둥의 극히 일부만 겨우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나게 기대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싶었다.
혹시라도 제 두꺼운 페니스 때문에 그녀의 음부가 다칠까 봐 손가락으로 풀어 주었다. 페리아는 여전히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며 질 벽을 긁어 주는 것을 좋아해서 금방 절정에 올랐다.
“아읏! 조, 좋아요, 카넨. 읏!”
제 손가락을 꽉 깨무는 그녀의 질 벽에, 이전에 그녀와 섹스했던 것이 떠올라 카넨의 몸이 더욱 달아올랐다. 그는 페리아의 다리를 더욱 넓게 벌리고, 그 끝에 자신의 것을 맞췄다.
“많이 넣지는 않겠습니다.”
“…많이 품고 싶은데.”
“그래도 안 됩니다. 그건 아이를 낳은 뒤에 하도록 합시다.”
“알겠어요.”
페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넨은 지금 참고 있는 게 누군데 그 정도로 용서해 주겠냐는 태도를 보이는 건지 우스웠지만, 페리아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싶었다.
카넨이 페리아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제 귀두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흐읏!”
“몸에 힘 빼세요, 페리아.”
오랜만의 섹스였기에 뭔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카넨이 얕게 진퇴를 반복하자, 쾌락을 기억하고 있던 몸은 서서히 힘을 뺐다.
“허리, 흔들지 말아요, 페리아. 그러다가 내가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박으면 어떡하려고 그럽니까.”
“오랜만에 그렇게 하루만 하고 싶어요.”
“…제 이성을 시험하려는 겁니까.”
카넨의 몸은 지극히 멀쩡했다. 그러니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카넨이 더욱 컸다. 매일매일 순교자의 자세로 지낸 지 벌써 22주나 된 것이다.
“아니, 그냥 예전처럼 눈도 가리고, 손발 묶기도 하고, 최음 크림도 쓰고, 딜도도 쓰고…….”
페리아가 하나하나 말할 때마다 지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하마터면 사정할 뻔했다. 지금도 서랍 한편에 고이 모셔져 있는 안대를 비롯한 각종 도구들은 언제라도 쓸 수 있게 카넨이 잘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페리아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페리아의 아래에 내 것과 딜도, 두 개가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알아요. 그냥 아침 해 뜨는 거 보면서 지쳐 쓰러져 자던 시절이 그리워서.”
“괜찮겠습니까?”
“뭐가요?”
“아침 해 뜨는 거 보면서 자는 것.”
굳이 자신의 페니스를 그녀의 음부에 넣고 허리를 흔들지 않아도, 그녀를 쾌락으로 몰아갈 방법은 차고 넘쳤다. 페리아가 그렇게 말을 한다면야 그녀가 나열한 대로 눈 가리고, 손발 묶고, 최음 크림을 쓰면서 새벽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딜도 대신에 제 것을 박아야 하지만.
“지금은 잠이 안 와서 괜찮은데, 카넨은 졸리지 않아요?”
“지금 제가 잘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페리아의 허락과도 다름없는 말을 들은 카넨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페리아의 입술 사이로 교성이 흘러나왔다.
“으읏, 좋아.”
카넨은 팔을 뻗어 협탁에서 안대를 먼저 꺼냈다. 그리고 페리아의 눈을 가렸다.
“아침 해가 떠도, 뜬 줄 모르는 거 아닙니까?”
“…너무 졸리면 놔주세요.”
“분부대로.”
마음 같아서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하고 싶었지만, 페리아를 속일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카넨은 제 페니스를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조금 더 밀어 넣었다. 그러자 페리아가 느끼는 지점에 닿았는지 달콤한 목소리가 나왔다.
“하앙!”
“페리아, 쉿. 당신 목소리만 들어도 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카넨은 제 허리를 둥글게 굴리면서 그녀가 느끼는 부위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최음 크림 때문인지 어디를 넣어도 다 느끼는 탓에 이제는 자신의 쾌락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다 더 큰 쾌락을 찾아 그의 페니스가 들어오는 양이 점점 늘어났다.
“카넨, 너무 깊어요.”
“아.”
카넨이 황급하게 제 페니스를 물리자 페리아가 그의 것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못 넣는 만큼 손을 흔들면서 그의 사정을 도왔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세게 해 줘요.”
“얼른, 시간이 지나가면 좋겠습니다.”
“나도요, 당신을 눕혀 놓고 위에 올라타고 싶어.”
“페리아, 제발.”
카넨은 사정감이 몰려와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하지만 눈을 가려 그것을 알 리 없는 페리아가 그에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나중에는 당신을 침대에 묶어 놓고 올라탈 거예요. 손으로 싸게 했다가, 입으로 하게 했다가, 그다음에는 내가 직접 먹어치워야지. 이전에 돌기 있는 것도 좋았고, 뒤로 하는 것도 좋았는데.”
결국 카넨이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안쪽에 사정했다. 따뜻한 것이 퍼져 나가는 느낌에 페리아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아이에게 문제가 되진 않겠네요.”
페리아의 사정없는 말에, 카넨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이대로 끝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페리아의 하얀 다리가 카넨의 허리를 휘감았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예.”
카넨은 다시 빳빳하게 선 자신의 페니스를 그녀의 음부에 넣고 클리토리스를 손가락으로 굴렸다. 얕게 추삽질을 하니 카넨의 입장에서는 미칠 것 같았다. 오랜만의 삽입이라 기분은 너무 좋은데 그만큼 갈증이 커져 갔다. 페리아의 붉게 달아오른 몸과 달콤한 목소리. 카넨은 제 밑에서 자지러지며 최고조에 오르는 페리아의 모습을 보며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흐읏! 응!”
페리아는 가장 민감한 두 곳이 동시에 자극을 받자 교성이 멈출 틈이 없었다. 그녀의 교성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카넨의 허리 짓은 점점 거세졌다. 그러다 페리아의 발이 굽어들면서 그녀가 절정에 오른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질 벽이 요동치자 카넨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제 페니스를 너무 깊게 찔러 넣었다.
“악!”
“페리아! 괜찮습니까?!”
“으… 아파요.”
그가 황급하게 허리를 빼려고 했으나, 페리아가 그의 허리에 감은 두 다리를 단단하게 감쌌다.
“페리아?”
“잠깐만요.”
페리아는 성력을 모아 제 몸에 흘려보냈다. 그러자 고통이 없어지고 한결 편안해졌다.
“다시.”
페리아가 야살스럽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자 카넨이 피식 웃고는 그녀의 위에 엎드렸다.
“그러면 더 깊게 넣어도 됩니까?”
“그럼 아팠다가 회복하는 걸 반복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군요. 당신이 아프면 안 되니.”
카넨은 머리에 되새기면서 조심스럽게 다시 추삽질했다. 카넨으로서는 답답해 미칠 것 같았으나 페리아가 과하지 않은, 적당한 쾌감을 즐기는 것을 보고 만족했다.
“더 넣고 싶은데.”
“아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요, 너무 아쉬워요. 당신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나중에 당신이 다 받아 줄 테니까.”
카넨은 페리아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사랑합니다, 페리아. 내 아내.”
그는 입을 맞추면서도 페리아가 절정에 오를 때까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다. 그녀가 절정에 오르고, 또다시 오를 때까지.
“그, 그만.”
“조금만 더.”
“안 돼요!”
카넨은 자잘한 쾌락이라도 만족하려고 했는데, 페리아의 단호한 거절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위에서 내려왔다. 아직도 제 페니스는 성이 나 있건만, 페리아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페리아의 몸이 힘들 수 있다고 나중에 출산하고 나면 그때는 잠 못 자게 괴롭힐 거라면서, 아이는 무조건 유모와 같이 자게 할 거라는 다짐을 하며 그녀의 옆에 누웠다.
페리아는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으니 이제 곧 잠들겠지, 그러면 욕실로 가서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페리아의 고운 손이 그의 것을 잡아 왔다.
“페리아?”
“아직, 이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카넨은 제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페리아가 싱긋 웃고는 그의 페니스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녀의 애액이 묻어 있던 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몸을 일으켜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그의 것을 입에 물었다.
“읏, 페리아.”
“이헤 하더 대허”
“예?”
페리아가 혀를 넓게 펴서 귀두를 핥아 낸 뒤에 말했다.
“입에 싸도 된다구요.”
그리고 다시 그의 것을 입에 물고 빨아들였다. 페리아의 혀가 귀두를 중점적으로 빨고, 두 손이 기둥을 위아래로 흔들어 대니 카넨의 허리가 저절로 들썩였다. 카넨은 제 욕심껏 허리를 움직일까 봐 침대의 시트를 그러쥐고 버텨 내려고 했다. 하지만 절정에 가까워 오면 가까워 올수록 그의 자제력이 약해졌다. 그러다가 페리아가 그의 페니스를 깊게 물자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카넨은 결국 그녀의 머리를 잡고 제 페니스를 찔러 넣었다.
“하아, 페리아. 윽, 좋습니다. 조금 더 세게 빨아 보십시오.”
페리아는 제 목구멍까지 들어차는 페니스 때문에 힘겨웠지만 언제나 자신을 몰아갔던 카넨이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니 더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조금 더 세게 빨면서 손으로는 더 빠르게 기둥을 훑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손에 있던 페니스의 핏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꿀렁이는 느낌과 함께 진한 정액이 흘러나왔다.
“윽, 페리아. 이제 그만.”
페리아는 이미 사정하고 있는 카넨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계속해서 입으로 빨아 올렸다. 평소였다면 역하다고 바로 뱉어 냈을 페리아였지만,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꿀꺽하고 삼켜 버렸다. 삼키는 과정에서 그의 페니스가 더욱 세게 빨려 카넨은 쾌감에 몸서리쳤다.
“역시 먹을 만한 맛은 아니네요.”
“…페리아.”
“네?”
“출산까지 얼마나 남은 겁니까?”
“음, 이제 한 4개월?”
“…빨리 갔으면 좋겠습니다.”
카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그의 페니스는 이전보다도 더욱 커져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페리아는 이를 외면하기로 했다. 아마도 그를 받아 주다 보면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잠을 못 자게 될 테니까.
***
페리아는 어느덧 출산이 임박해 있었다. 예정일까지 3주가 남아 있었고, 카넨은 하루하루 말라 가는 느낌이었다. 이를 두고 카넨과 페리아는 자기 전까지 웃고 떠들었다.
“아, 너무 웃어서 배 아프다.”
“아픈 건 안 됩니다.”
“진짜 아프면 성력 쓸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카넨은 익숙하게 그녀에게 팔베개를 한 뒤 배를 쓰다듬었다. 그가 쓰다듬어 줄 때면 페리아가 한결 편안해했기에 어느새 자기 전에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일과와도 같았다.
“아, 움직였습니다.”
“당신 손길이 좋은가 봐요.”
카넨이 어딘가 감동한 표정으로 페리아를 보았다. 페리아를 만나기 전에는, 그녀를 사랑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매일매일 몰아치는 감정의 홍수 속에서 딱 하나 변함이 없는 것은 그녀에 대한 마음이었다. 카넨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남은 기간 동안 계속 쓰다듬어 줄 테니, 당신을 너무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페리아가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해가 뜰 무렵. 카넨은 무언가 다른 낌새를 눈치챘다.
“으으으… 카넨, 일어나 봐요.”
“페리아, 괜찮습니까?!”
“아뇨……. 평소에 배가 아프던 것과는 느낌이 다른데…….”
페리아는 몇 번이나 자신의 몸에 성력을 썼지만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배가 더 많이 아파 오고, 그 아파 오는 시점도 짧아지는 것을 알아챘다.
카넨은 페리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보고 곧바로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 황궁의를 데리고 왔다. 아직 출산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 그들이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바로 페리아가 누워 있던 침실에 다른 사람이 못 오게 한 뒤 출산할 준비를 했다.
“대공 전하, 벌써 많이 진행되었습니다. 초산일 경우 아이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나, 이미 많이 진행되어 곧 나올 것 같습니다.”
“알겠다. 부디 잘 부탁하네.”
“예.”
의사와 그를 보조하는 인력들이 방으로 들어가고, 카넨은 초조하게 밖을 서성였다. 하지만 의사가 말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나왔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성력 때문이었다.
“비전하, 성력을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너무 아픈데…….”
“성력을 사용하실 때마다 몸이 회복되어 아이가 나오는 길이 닫혀 버립니다. 조금만 참았다가 출산 후에 사용해 주십시오.”
“…허리가 너무 아픈데 허리에만 쓰는 건?”
이런 식으로 조금씩 성력을 써 가면서 가능한 범위를 찾아갔다. 그러다가 아이가 나오기 직전이 되니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미칠 것 같았다. 의사들이 마취를 해 준다고 했는데, 티도 나지 않았다.
페리아는 빙의하기 전에 사촌 언니의 생생한 출산 후기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성력에 마비 효과를 담아 제 몸에 흐르게 했다. 그러자 고통이 사라지고 편안해졌다.
“비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다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페리아는 이제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언제 아이가 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책이 읽히진 않았다.
“아이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힘을 주십시오!”
“어, 어떻게?!”
의사의 설명을 들었지만 대체 어떻게 힘을 주라는 건지 이해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결국 보조 인력들이 급한 마음에 페리아의 배를 꾹꾹 누르자 곧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벌컥 문이 열리고 카넨이 들어왔다.
“…카넨, 울어요?”
“페리아아…….”
카넨이 곧바로 페리아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대충 너무 힘들지 않았느냐, 고생했다, 앞으로 힘든 건 자기가 다 할 테니 걱정 마라 이런 내용이었는데, 울면서 말하니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사실 처음에야 힘들었지, 성력 쓰고 마취한 뒤에는 괜찮았는데…….’
페리아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성력을 모아 제 몸에 걸려 있는 마비나, 출산으로 인해 바뀐 몸을 원래 상태로 돌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니, 임신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옆에서 여전히 오열하고 있는 카넨만 빼면.
“카넨, 울지 말아요.”
“하지만, 페리아…….”
“애도 안 우는데 당신이 울면 어떡해요.”
아기는 눈을 깜빡이면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카넨이 황급히 눈물을 닦더니 의사에게서 아이를 받아 들었다.
“페리아,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과 아이를 지키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페리아는 자신과 카넨의 사이에서 난 아이를 보니, 이제야 이 세상의 일원이 된 느낌이었다.
이전까지 페리아는 자신은 다른 곳에서 왔다고, 원래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했던 빙의 생활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어쩌다 우연히 만나게 된 카넨, 그리고 성욕과 물욕에 눈이 멀어 시작된 마탑주의 아내 생활. 진짜 아내인 여자 주인공이 아닌, 가짜 아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여곡절 끝에 그의 진짜 아내가 되어 있었고, 카넨과 자신을 이어 주는 그리고 이 세상과 자신을 이어 주는 새로운 존재인 딸이 태어났다.
앞으로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 아닌,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가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과 아이를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카넨.”
페리아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일 뿐이었으니까.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