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9
대신관이 사라진 뒤 페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하녀들에게 달콤한 다과를 내오라고 시켰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단것을 먹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무실’로 배정받은 공간이지만, 페리아는 그곳에서 다과를 먹으며 카우치에 널브러져 있었다. 페리아가 해치워야 할 ‘집무’라는 것은 명확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업무는 이미 신전 내에서 신관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피곤해. 그래도 대신관이 다시 오지는 않겠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크림치즈파이를 오물오물 씹어 삼키고 예전 남작일 때라면 구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값비싼 찻잎을 우린 홍차를 마셨다.
조금 기분이 나아지려는 찰나에, 달갑지 않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이번에는 또 뭔데.
“응.”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저택에 방문하고 난 뒤 첫 손님이 대신관이었던 페리아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 뚝뚝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신관 다음에는 뭐냐. 뭐가 와도 이렇게까지 화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군데.”
“대공 전하십니다.”
“…피곤하니까 돌아가라고 해.”
대신관과의 일로 피곤했다. 게다가 카넨에게 화가 풀리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번 반지 사건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을 때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녀는 대공을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직접 움직일 거였으면 굳이 하녀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일을 하도록 했다.
“전해.”
“…예.”
페리아는 카우치에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집무실에서 나와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집무실에 있는 카우치 따위가 아니라 침실에 있는 침대에 누워서 한숨 자야 지금의 스트레스가 조금 가라앉을 것 같았다.
“페리아 님.”
아까의 그 하녀가 다시금 노크를 하며 페리아를 불렀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기에 저를 부르는가 하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응.”
“대공 전하께서 선물을 맡기셨습니다.”
선물을 주려고 온 것일까. 되돌려 보내라고 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선물은 죄가 없었다.
“들어와.”
“예.”
하녀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조그마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은 브로치였다. 그것도 이전까지 자주 봐 왔던, 카넨의 마력을 추출해 만든 마력석을 세공한 것이었다.
“…….”
평소보다 크기가 작기는 했어도, 그가 쓸 수 있는 마력의 양이 한정되어 있고 그것이 다 닳으면 죽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가 많은 양의 생명력을 갈아 넣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으려고 그러는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을 죽여서 마력을 충전하려고 그러는 건가?’
선물을 받고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잡다한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페리아는 편지지를 꺼내어 작성한 뒤 공간 이동을 통해서 카넨에게 서신을 보냈다.
마력석 보내지 말아요.
날씨를 묻는 기본적인 인사말도 생략한 채로 다짜고짜 본론만 적었다. 이후 곧바로 답장이 오는 건가 싶어서 조금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이해했나 보지.”
다른 의견을 가졌다면 답장으로 썼을 테니.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면서 편안하게 쉬었다.
“…이게 뭐야.”
그런데 다음 날, 또다시 카넨이 저택을 찾아왔고 페리아는 거절했다. 그러자 카넨을 돌려보낸 하녀가 이번에는 마력석이 담긴 보석함이 아닌 꽃과 보석을 가지고 온 것이다. 마력석을 안 보낸 것은 다행이었다. 그는 얼마 뒤에 오는 여자 주인공을 만나서 연애할 예정이었는데 마력이 고갈되어 죽으면 스토리 전개가 안 됐을 것이다.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꽃은 장식하고 보석은 보관함에 넣어 둬.”
“예.”
조금 있으면 말겠지, 조금 있으면 안 오겠지 하던 것이 한 달이 지나서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한 달째 되던 날 변화가 찾아왔다.
“그분이 오셨는데, 돌려보낼까요?”
이제는 하녀마저 ‘대공 전하’라고 하지 않고 맨날 오는 ‘그분’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어떡할지 묻지도 않고 매일 그러하듯 ‘돌려보낼까’ 물어봐 왔다. 페리아는 평소에 ‘그래.’ 또는 ‘응.’, ‘그러렴.’ 같은 식으로 답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응접실로 안내해.”
“네, 그럼 응접… 예?”
“이야기를 전하고 손님을 맞이할 채비를 할 하녀를 부르렴.”
“예, 예.”
하녀는 깜짝 놀랐지만, 언젠간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빠르게 명령에 따랐다.
페리아는 평소에 공간 이동으로 저택과 신전을 오가는 것만 반복했기 때문에 치장에 긴 시간을 들이지 않았으나 오늘은 달랐다. 오랜만에 보는데 후줄근하게 있기에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접실에 페리아가 도착하자, 이미 그 안에서는 카넨이 초조하게 배회하고 있었다.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못 봤을 뿐인데 그는 꽤나 수척해져 있었다. 그동안 스트레스는 좀 받았어도 먹고 자는 데에 큰 신경을 쓰며 관리를 잘 받아 왔던 페리아와는 정반대였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 보이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카넨도 잘 지내기를 바라요.”
“…….”
카넨이 숨을 삼킨 뒤에, 오늘 그녀에게 주기 위해 가져온 선물을 내밀었다. 오늘의 선물은 보석과 향수였다. 페리아가 좋아하는 것은 값비싼 보석이라고 한 것을 떠올리며 매일 보석과 함께 꽃이나 드레스, 향수 등을 선물했다.
“직접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한 달 내내 매일매일 올 거라고는 저도 생각 못 했어요.”
“내일 또 얼굴 볼 수 있는 겁니까.”
카넨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어 왔다.
“…제가 원래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닌데요, 선물을 주면 무조건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카넨에게는 그러고 싶지가 않네요. 이제 더 이상 안 받을 테니 오지 마세요.”
“…….”
“저택에서는 마력 사용을 막아 놨으니 아무리 가까워도 매번 저택 앞까지 공간 이동을 한 뒤에 왔겠죠. 그래서 저택 밖의 사람들이 당신이 이곳에 매일 오고, 오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놓고 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안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한 달 전에 대신관이 저택에 왔었어요.”
카넨은 대신관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페리아 역시 대신관에 대해서 호의라고는 한 톨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를 신성제국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더군요. 하지만 거절했어요, 강압적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그 역시 실패했구요. 카넨 당신이 만들어 준 반지 덕분이었어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이미 당신에게 드렸으니 당신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어차피 저는 신전에 안 가겠다고 의사를 밝혔고 그들은 저를 억지로 데려갈 수 없어요. 그러니 저를 이용해서 신전에서 당신을 죽일 수 없으니 마음 편하게 생각하시고, 저랑 굳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페리아가 말하는 내내 그녀가 무슨 말을 할까 걱정되어 긴장한 채로 숨 한번 쉽게 내뱉지도 못했던 카넨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 하고 숨을 토해 냈다.
“제가 제 목숨이 아까워 이러는 것 같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왜 저를 죽이려고 한 거였는데요?”
“비록 처음에 당신을 만났을 때는 그러려고 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이미 한 이야기지만 당신이 믿어 줄 때까지 몇 번이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카넨은 꽤나 절박해 보였다. 하지만 페리아는 아직도 마음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 성녀가 황족인 것을 이용하기 위해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으신 건가요?”
페리아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원래 꿈꾸던 결혼 생활은 날아갈지언정, 황족으로서 얻는 혜택은 매우 컸다. 그러니 자신을 못 알아보는 조그마한 동네에서 제 취향의 남자를 데리고 가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밤일이야 카넨만 못하고, 외모도 카넨보다 별로겠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제 형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카넨은 복잡한 미소를 지은 채 인사했다.
“내일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카넨은 페리아의 오른손을 들어 입술을 맞춘 뒤 응접실을 나갔다. 페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제 집무실로 가 생각을 정리했다.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건가?’
저택 안에서는 마력이 통하지 않는 데다 성력 또한 페리아만 쓸 수 있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없지만, 저택 밖에는 카넨이 저택에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오늘은 그가 저택에 머문 시간이 평소보다 길었지만,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것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오히려 그를 응접실에 내팽개쳐 두고 박대하다가 한참 뒤에야 성녀가 그를 만나러 갔을 수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 몰래 저택을 지켜보던 이는 제가 본 것을 간단하게 암호화하여 작성한 뒤 어딘가로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그 서신을 펼쳐 본 이는, 다름 아닌 대신관이었다.
“이 정도면 슬슬 준비해도 되겠다.”
“예!”
대신관의 뒤에는 수많은 성기사와 신관들이 도열해 있었다.
***
다음 날 동이 터오를 무렵, 페리아는 강력한 성력을 느끼고 잠에서 깨었다.
“수도 내에서 이렇게 큰 성력을 느낄 일이 없는데?”
불길한 느낌이 들어 침대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뛰어갔다. 성력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보니 다름 아닌 황성이었다.
페리아의 뇌리에 스친 기억이 있었다. 수많은 무기들과 보급품들. 게다가 황성에서 느껴지는 대량의 성력까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혹시 그 비밀 신전을 통해서 신성제국에서 침입한 건가?’
마음 같아서는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굳이 그런 혼잡한 곳에 가서 사건임이 분명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지만,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오늘 낮에만 하더라도 이 저택에 있던 제 남편이 그곳에 가 있을 것이 뻔했다.
‘가야 하…나? 가는 게 낫겠지? 혹시라도 카넨이 죽으면 굉장히 찝찝할 테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세계관 최강자인데 무슨 일이 있을까도 싶었다. 그러면서도 쪽수 앞에는 장사 없다고 수많은 성기사들과 신관들에게 둘러싸인다면 제아무리 카넨이라도 멀쩡하진 않을 것 같았다.
‘…가 보자. 그래도 카넨이 만들어 준 반지 덕에 나도 대신관에게 납치될 뻔한 위기를 모면했는데, 카넨에게 위기가 닥쳤으니 나도 한 번은 도와주는 게 맞는 것 같아.’
이건 카넨을 좋아하거나 걱정해서가 아니다, 카넨이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카넨에게 신세를 갚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렇게 되뇌면서 황성으로 향했다.
***
카넨은 쏟아져 나오는 성기사들을 해치우기 위해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이전에 봤을 때는 분명 성기사 삼사백 명 정도로 예상했는데, 신전 측에서 비밀 신전을 통로로 사용하여 예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천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성기사들은 안 그래도 약간의 성력을 이용해서 싸우기 때문에 제국 기사단 입장에서는 일반 기사들과는 달라 굉장히 까다로운 존재였다. 그런데 신관들까지 같이 넘어와 합세하니 성력이라고는 티끌만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 기사단 입장에서는 힘겹기 그지없었다.
“서쪽이 무너졌다!”
“우아아아아!”
내부에 비밀 신전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도 황성의 경비를 확충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신전에서 심어 놓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신전의 세를 불려 주는 역할을 했다. 결국 황실에 충성하는 약간의 기사들과 카넨이 수많은 신성 기사단을 막아 내야 했다.
카넨이 신전과 통하는 입구의 바로 앞에서 신성제국군이 나올 때마다 곧바로 그들을 해치웠으나, 마법을 시전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머릿수와 성력을 앞세운 신성제국군에게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마법사만 죽이면 우리의 승리다!”
그렇게 외친 성기사는 곧바로 카넨의 마법에 맞아 사망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이들도 알고 있었다. 마법사만 없앤다면 다른 기사들쯤이야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성기사들의 공격이 카넨에게 더욱 집중되자 그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전에 드래곤 레어에서 몰래 만들어 두었던 마력석에 담긴 마력을 다시 흡수하며 제 마력을 채웠다.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그리고 또다시 마력을 사용하며 제게 공격하는 이들을 해치워 댔다. 그러나 사람을 단번에 죽이지 못하고 빈사 상태로 만들면 후방에 있는 신관들이 그들을 회복시켜 대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양상이 장기화되자 신성제국군의 수가 줄어드는 속도보다 카넨의 마력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이러다 모든 마력이 고갈되어 자신이 죽기라도 한다면, 분명 나라를 감싸고 있는 마법 결계 바깥에서 대기 중인 적의 군대가 침략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점점 식은땀이 나는 것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마력이 소모되는 양이 회복되는 양보다 많아 빠른 속도로 고갈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마력 부족으로 막지 못해 물리적으로 그들에게 죽거나 마력이 고갈되어 죽게 되는 것은 거의 확실했다.
사람을 죽이면서 마력을 회복해야 하는데, 신관의 회복으로 인해 죽지를 않으니 회복이 전혀 안 되는 것이다. 이미 자신의 몸에 난 상처에서 흐른 피의 양이 적지 않았다.
아공간에 손을 넣어 쟁여 둔 마력석을 꺼내려고 했으나,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벌써 쟁여 둔 마력석을 모두 다 쓴 것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 국경에서 몰려올 군사들만 아니었으면 그냥 다 같이 죽는 건데.’
제국군이 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최대한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미루려면 자신이 살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고 마법의 정확도가 떨어져 갔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주님.”
저를 탑주라 부르는 이는 한정되어 있었다. 카넨이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 직전에 그를 받쳐 준 것은 마법사의 탑에서 카넨의 바로 아래층에 머물고 있는 마법사들이었다.
“여기서 쓰러지시면 어떡합니까.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남의 일에는 나서지 않는 게 아니었나.”
“탑주님께 저번에 받은 마력이 너무 많아서요.”
마법사들이 머쓱해하며 웃었다. 확실히 그들은 마력이 한정되어 있으니 남의 일에는 나서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마력을 충전받을 수 있다고 하니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카넨에게는 마력이 없으니 보충받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황성에 온 것이다.
“…고맙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탑주님은 고맙다는 말보다는 ‘죽여 버린다’ 같은 말이 더 잘 어울리십니다.”
마법사의 말에 다른 마법사들이 긍정하며, 소름 돋으니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말아 달라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성기사들의 쏟아지는 공격을 막으며 그들에게 반격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기가 오른 제국 기사단이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승리하지 못한 채 지난한 소모전이 이어졌다. 신성제국군 측에서 의외의 상황에 비밀 통로를 통해서 계속해서 신관들을 보낸 것이다. 하급 신관은 물론이거니와 수습 신관까지 동원되었다. 그들은 처음 보는 전쟁의 참상에 덜덜 떨면서도 상위 신관의 명령에 따라 전쟁터에 나오게 된 것이다.
‘젠장, 신전의 존재까지 알았는데 이렇게 되다니. 좀 더 방비를 잘해 뒀어야 하는데.’
페리아가 신전의 존재를 알려 주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된 것이 화가 났다. 입구에 덫도 설치해 두었건만 숨겨진 통로가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 패착이었다. 그들은 아예 바르칸 제국을 무너뜨릴 생각인지 총력전을 펼쳤다.
페리아, 한번 생각하고 나니 자꾸만 그녀의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한 번만 보았으면. 이렇게 헤어지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낮에 그녀에게 갔을 때 조금 더 열심히 설득해 볼걸. 그때는 제게 남아 있는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
‘이렇게 헛것이라도 볼 정도로 그리워하고 있었나.’
마치 제 눈앞에 페리아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카넨은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여 그녀의 허상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해, 나를 믿지 않더라도.”
마력이 바닥이 나는지 돔형으로 생긴 나라를 보호하는 결계가 위쪽에서부터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마력을 사용하지 말고 거두라며 소리쳤지만, 카넨이 태어났을 때부터 승계된 이 마법은 거두고 싶다고 거둬지는 것이 아니었다. 카넨이 다른 마법을 쓰지 않아도 계속해서 마력은 사라졌고, 결계도 함께 사라져 갔다.
그리고 무거워진 눈꺼풀을 감으려는데, 지금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반말하기로 한 거야?”
“어?”
“그러든가.”
카넨이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페리아는 조금 머쓱해졌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황성의 상황은 심각했고, 카넨 역시 빈사 상태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여기.”
페리아는 카넨의 손에 자신이 지금껏 받아 왔던 마력석들을 쥐여 주었다. 카넨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제 마력을 다시금 흡수했다. 그리고 세 개의 마력석을 그를 도와줬던 마법사들에게 던져 주었다. 그들은 페리아를 보고 안심하며 카넨이 준 마력석의 마력을 흡수했다. 자신이 마력을 흡수하더라도 그녀가 온 이상 탑주의 죽음은 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마력도 없으신 분이.”
카넨이 쓰게 웃으며 흡수한 마력을 다시 끌어와 안정을 찾았다. 그 모습을 본 페리아는 안도했다. 이전까지는 카넨이 죽으면 찝찝할 것 같았다. 제국이 무너지면 제 사용인들에게 줄 월급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죽기 직전에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다니.’
진짜로 자신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자 주인공인 유리나가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는 건가?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카넨은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았다. 이전에도 페리아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마음이 달랐다.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갑자기 나타나 저를 구해 주는 여자라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더욱 그를 가슴 설레게 만들었다.
“페, 페리아.”
“네.”
단지 한마디, ‘네.’라고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었다. 페리아가 자신을 바라보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전쟁이 끝나면 할 말이 있습니다.”
페리아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전쟁이 끝나면 할 말이 있다니, 세계관 최강 남주가 왜 사망 플래그를 세워! 이러지 마!’
남자 주인공이 사망 플래그를 세우는 것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전쟁터에서 ‘이번 전쟁이 끝나면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거야.’라든지 ‘이런 데서 죽을 수는 없어.’라든지.
“지금 말해요.”
“그래도 됩니까?”
“네. 무슨 말이든 들을 테니까 지금 해요.”
“좋아합니다.”
카넨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오는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자 페리아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이런 말인 줄 알았으면 듣지 않았지! 왜 사망 플래그를 연달아 세우는 건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지금 말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카넨은 아직도 가슴이 막힌 기분이었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가슴이 콩닥거려서 터질 것 같았다. 페리아를 품에 안고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제 마력이 충분했더라면 신성제국군을 다 쓸어버렸을 것이요, 그렇지 않더라도 제 형님과 부모님께서 일군 나라가 아니었더라면 안전한 곳으로 페리아와 도망치고 그녀에게 제 마음을 꺼내어 보였을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해요.”
하지만 페리아는 정색하며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마법사들이 공격을 주고받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중에도 카넨이 페리아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있었는데도 듣기 싫다는 듯이.
카넨은 이 일이 정리되면 페리아에게 더욱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제 마음을 전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니면 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와 몸을 섞지 않더라도 페리아가 웃어 주고 제 품에 안겨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카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페리아는 사망 플래그 좀 그만 세우라며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좋아합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고요.”
페리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카넨이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싱긋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마 제가 이런 데서 죽겠습니까.”
‘사망 플래그 연달아 세우지 말라니까!!’
“그런 말 마세요.”
“잊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좋아한다고 한 것을.”
페리아는 당황스러웠다. 계속해서 사망 플래그를 세우는 것도 그렇고 대체 이 남자는 누구인가 싶었다. 그전에도 제게 잘해 준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마음을 전달하는 것은 잘 느끼지 못했었다. 마치 트라비안 공작이 제 아내를 보는 것처럼 꿀 떨어지는 눈으로 카넨이 저를 보고 있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점까지 똑같잖아!’
카넨은 마음을 전했다는 것에 만족하고 신성제국군과 공격을 주고받으며 다시금 전쟁의 선두에 나섰다. 수적으로 열세인 카넨은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또다시 수세에 몰릴 것이다. 카넨의 마력과, 신성제국군의 신관이 지닌 성력의 소모전이었다.
죽는 사람도 상당수 존재했다. 성기사들도, 제국 기사들도. 가까이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페리아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세계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참상의 한복판에 자신이 설 일은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카넨이 사망 플래그를 세울 동안에, 진짜로 죽는 사람이 존재했어.’
바닥에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기사 중에는 제가 얼굴을 알고 있는 이도 있었다. 얼마 전에 아이가 태어났다며 아이에게 축복을 해 주실 수 있느냐고 수줍게 물어봤던 이였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복부에 칼이 꽂힌 채로 쓰러져 있는 이는 홀로 자신을 키워 준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 신전에 매일 기도를 오던 자였다.
“대체 왜… 전쟁을 하는 거야?”
눈앞에서 펼쳐지는 충격적인 양상에 눈을 떼지 못하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카넨은 카넨대로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에 바빴으며, 신관과 성기사들은 그들의 신념에 따라 황성을 공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점점 많은 시체가 쌓여 갔다. 성기사들은 신전의 성력으로 회복되는 이가 있었으니, 그 피해는 제국군이 더욱 심했고 그들 중에는 페리아가 알고 있는 이들이 섞여 있었으니 더욱 충격이 컸다.
“그… 그만, 그만해…….”
페리아의 목소리는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의 함성에 묻혀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심지어 바로 옆에 있던 카넨에게조차도.
“그만하라고!”
그녀가 목소리에 성력을 담아 외치자, 그제야 모든 이들이 페리아에게 집중했다.
“성녀님?”
“성녀님이셨어?”
페리아를 처음 보는 신관과 성기사들이 술렁였다. 수도 밖에서 온 이들은 페리아에 대한 소문만 얼핏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대신관에 의해 조작된 정보였으니, 페리아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대체 왜 전쟁을 하는 거야? 왜 침입하는 거야?”
페리아는 전쟁을 그만두기를 호소했다. 그러나 그들이 신경을 쓰는 것은 성녀가 등장하고, 그녀가 전쟁을 멈추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성녀님이 마법사를 도우시는 거지? 아까 전에 마력석을 주던데.”
“왜 우리는 돕지 않고 마법사를 돕는 거지?”
“어째서입니까!”
카넨을 향하던 모든 화살이 페리아를 향했다. 자신과 같은 성력을 갖고 있으면서, 그들이 배척하는 마력을 지닌 카넨을 돕는 성녀에게.
“성녀님! 어째서 마법사를 돕는 겁니까!”
“침략당한 사람을 돕는 거예요.”
페리아가 단호하게 답했다. 물론 신성제국이 침략당한다고 해서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침략을 한 사람이 나쁜 거고, 그것이 당신들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페리아는 쓰러져 있던 제국 기사단들을 성력으로 회복시켰다.
“그만하세요.”
술렁이던 신성제국군 사이에 한 명의 신관이 앞으로 나섰다. 평신관과는 의복이 다른, 고위 신관이었다.
‘몇 없는 고위 신관까지 전쟁에 나설 줄이야.’
그가 나서자 카넨이 페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페리아는 그런 카넨이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성녀님, 안녕하십니까. 신관 슈덴입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신의 뜻에 따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보통의 침략이 아닌 성전입니다. 그러니 그만할 수 없습니다.”
“신의 뜻은 누가 들었나요? 성녀인 저는 들은 적이 없는데.”
단지 하얀빛을 내뿜는 성력을 쓰는 그들과는 달리, 페리아의 성력은 금색이 섞여 있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녀만이 낼 수 있는 색이었다. 대신관이 성력을 사용할 때 나타내는 빛도 단순한 흰색이었다.
“…대신관께서 들었습니다.”
“그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증거가 남지 않아도, 신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 수 있는 겁니다.”
<믿음>.
대신관의 말이 곧 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신성제국 전체를 좌지우지했다더니, 고위 신관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했다. 고위 신관의 말에 따라 뒤에 있던 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동조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신의 현신인 성녀의 말보다도 우선한다라.”
페리아의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모를까, 신의 현신이라 불리는 성녀였다. 그러나 그들이 페리아보다 더욱 우선하고 있는 것은, 성력이 강한 인간이었다. 그 성력마저 페리아에 비하면 보잘것없기 그지없었는데도 말이다.
“성녀인 내가, 그만하라고 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건가요?”
성기사들과 평신관들은 페리아의 말을 듣고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대신관의 산하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신>이었다. 누가 신에 더 가까운 것인가,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고위 신관 슈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우선적인 것은 바로 <권력>이었다. 신만을 따르기에 그는 권력의 단맛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신은 그에게 권력을 쥐여 주지 않았다. 그에게 권력을 준 것은 바로 대신관이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처음 고위 신관이 되었을 때 사람들의 태도가 변화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를 무시하던 신관이 내게 머리를 조아리던 모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런 슈덴의 머릿속에는 대신관이 바르칸 제국을 삼키게 되었을 때의 이점에 대해서 설명해 준 것만이 맴돌았다. 신성제국은 바르칸 제국에 비하면 큰 영토를 지니지 못했다. 하지만 신도들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그러니 이곳을 대신관이 차지하고 기존의 신성제국은 슈덴이 맡을 수도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원래 셋이 있던 고위 신관 중 남은 것은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신성제국을 통치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대신관이 지니고 있는 권력에 준하는 것을 자신이 갖게 되는 것이었으니, 슈덴에게는 달콤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신의 뜻이 아니니, 들을 수 없습니다.”
“신의 현신은 신이 아니라는 건가요.”
슈덴은 말없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마치 ‘너 따위가 아무리 외쳐 봤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성녀님이 말씀하신 건데…….”
“대신관님은 신께서 직접 말씀하셨다고 했어.”
“성녀님이 전하는 것도 신의 뜻이잖아.”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들의 의견이 갈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전세가 주춤하고 있었다.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국을 수호하는 마법사, 카넨을 제일 먼저 없애야 했다. 그러나 그를 공격하자니 바로 옆에 수백 년 동안 존재하지 않다가 이제야 나타난 성녀가 함께 있었다. 게다가 그 성녀는 전쟁을 멈추라고 하고 있었다.
“무엇들 하는 겁니까, 얼른 마법사를 공격하지 않고!”
고위 신관이 크게 외치자 그와 뜻을 같이하는 신관들이 성기사들을 회복시켰고, 의견이 다른 성기사들은 떨떠름해하며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성기사는 신전 내에서 신관과 이원화된 구조로 존재하다 보니 신관들에 비해 대신관의 영향이 덜 미쳤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페리아의 입에서 제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신전에서 리히엔의 성력을 뽑아낼 때 들었던 목소리였다. 이것이 바로 신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페리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이 올라갔고, 그것은 슈덴을 향했다. 자신이 지목되자 놀란 슈덴에게서, 하얀 성력이 새어 나오다가 이내 쏟아져 나왔다.
“리히엔으로부터 들은 것이 없나 보지?”
제 목소리를 되찾은 페리아가 말했다. 슈덴은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대신관이 정보가 퍼지는 것을 막은 것 같다고 여겼다.
페리아의 손끝에서 나온 금빛 성력이 슈덴의 새하얀 성력을 감쌌다. 그리고 금빛이 하얀빛을 완전히 감쌌을 때, 한순간에 확 터져 나와 주변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것에 닿은 신성제국군과 제국 기사단의 기사들의 상처가 순식간에 나았다. 심지어 이미 죽은 줄 알았던 기사들까지 눈을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 몸을 쓸어 보았다.
“…기적이야!”
“신의 축복이야!”
“그렇다면 아까 그것이, 신의 음성인가?!”
신성제국군들이 페리아를 단순한 성녀가 아니라 정말 신의 현신으로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 슈덴만을 제외하고.
그는 손을 벌벌 떨면서 자신의 성력을 끌어 모으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이미 모든 성력이 쏟아 낸 뒤였기에, 그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이전처럼 성력이 모이지 않았다.
“대체,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리히엔에게 미리 말을 전해 들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네. 신은 너를 필요로 하지 않나 봐. 앞으로 신관이 아닌 일반인으로서 살아가려면 열심히 노력해야겠어.”
“그게, 무슨…….”
“리히엔에게 연락해 봐, 그래도 조금이라도 먼저 같은 경험을 하고 있으니.”
슈덴은 지금 페리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에게 권력을 쥐여 주던 제 성력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기도와 수련을 매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이게 한순간에 사라진다고?’
슈덴은 지금 제게 일어난 상황이 믿을 수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대신관을 찾았다. 대신관이 성 안에 같이 온다고 하였다. 제게 권력을 약속한 그라면, 성력을 다시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열두 살 때부터 지금껏 20년이라는 세월을 대신관으로 살아오지 않았는가.
“대신관님, 에녹 대신관님!”
모든 신성제국군이 기적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에도 슈덴은 오로지 대신관만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성력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대신관을 발견했다. 성력으로 숨었을 때 주변과 동화되지 않고 어색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대신관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관님!”
슈덴은 대신관을 찾아내고는 제 앞을 가로막는 모든 이들을 헤쳐 내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대신관이 신이라도 되는 양 그의 앞에 무릎 꿇고 매달렸다.
“성력이, 성력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슈덴은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사람들은 보통 아이가 어릴 때 성력이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신성제국으로 보내고 큰돈을 받는다. 물론 아이를 팔아넘기고 싶지 않은 이들은 아이에게 성력이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밝혀지고 나면 신성제국의 보복을 받기 때문에 철저하게 숨기거나, 밝혀진 뒤에 뺏기듯 보내야 했다.
그리고 슈덴은 전자의 경우로 신관이 된 사례였다. 가정의 사정에 따라서 신성제국에 팔려 간.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였고, <고위 신관>으로서 누리던 것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하급 신관도 평신관도 아닌 고위 신관이었다. 심지어 대신관의 자리가 눈앞에 있는 듯했다.
“놓으십시오.”
하지만 대신관은 슈덴의 기대와는 달리 그를 벌레 보듯 하며 그에게 잡혀 있는 옷자락을 거칠게 빼내었다.
“대신관님……?”
“성력이 없는 자를 어떻게 신관이라 하겠습니까, 신전에서의 일은 잊고 편히 지내십시오.”
대신관은 평소에 그를 하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공대하고 있었다. 그를 신전의 일원이 아닌 외부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신관의 가면을 쓴 것이다. 누구나 존중하며, 공대하는 그런 신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는 가면.
“대신관님,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이번 일만 잘된다면 제가 신성제국을…….”
슈덴은 계속 말을 이어 갔지만 입만 벙긋거릴 뿐 주변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앞으로 말할 내용인 <신성제국을 통치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주변에 알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대신관이 그의 목소리를 없애 버린 것이다.
슈덴이 이상한 것을 깨닫고 계속 소리쳤지만 그의 귓가에도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관은 그의 큰 몸짓마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다시 몸을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 작태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대신관, 당신의 뜻은 어떻습니까?”
“…성녀님.”
모두의 눈이 대신관을 향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긴장했을 테지만 대신관은 이렇게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일에 익숙해져 있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가 한번 왕림할 때마다 꽤나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부터 그를 보러 왔고, 그가 친히 예배를 드리는 날에는 각국의 수많은 신도들이 제국을 찾아왔다.
어찌 되었든, 그가 있는 것이 밝혀진 이상 더는 이곳을 뜰 수가 없었다.
‘성녀가 이곳에 올 줄이야. 마법사 카넨과 척을 진 줄 알았는데.’
드디어 카넨을 죽이고 바르칸 제국을 삼킬 수 있을 줄 알았더니만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결계가 사라지자마자 들이닥칠 연합군을 막기 위해 국경에 군사를 보내 놔 수도에 그나마 군사가 적을 때 카넨을 죽였어야 하는데.
‘아니다. 이제 막 들어온 신관들도 있어. 아직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
성녀만 없다면 마법사 카넨을 죽일 수 있다. 성녀를 잃는 것은 아쉽지만 제 편이 아니라면 차라리 없애 두는 것이 좋았다. 지금의 페리아는 자신이 갖고 있던 마력석으로 만든 장신구를 모두 카넨에게 내주었으니 제 성력이 통할 것이다.
“성녀님께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페리아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두운 밤을 틈타, 대신관의 손에서 나온 새하얀 성력도 붉은 마력도 아닌 알 수 없는 검은색 힘이 바닥을 기어 페리아를 향했다.
어차피 성녀가 있으면 제국을 이길 수 없으니 승부수를 걸어야 했다. 성녀를 없애면 카넨도 죽일 수 있고, 승리 후에 그녀와 권력을 나누지 않고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둘 수 있었다.
“제가 뭘 모른다는 거죠?”
“성녀가 이런 위험한 곳에 오면 안 되지요.”
그리고 그 검은색 힘이 페리아에게 닿았고, 그녀의 발목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갔다. 천천히, 종아리를 지나 허벅지까지. 이윽고 검은 힘이 그녀의 목을 감쌌다.
“페리아, 이게 뭡니까?”
“뭐가요?”
카넨이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떼어 내기 위해 손을 댔지만 만져지지 않았다. 페리아는 카넨이 왜 그러는 건가 의아해하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제 몸을 무언가가 꽉 조여 댄 것이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크헉!”
“페리아, 페리아!”
카넨이 검은 힘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닿는 것은 여전히 그녀의 피부뿐이었다. 페리아가 버둥거리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자 카넨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신관, 신관들 중 페리아를 살펴볼 사람이 있습니까!”
신관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누군가 한 명이 뛰어가자 너 나 할 것 없이 페리아에게 달려갔다. 신관들은 그것이 만져지기는 했으나 완전히 떼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목을 감싸고 있는 것만 겨우 잡아끌어 조금 숨통이 트이게 하는 정도였다.
“허억, 허억!”
페리아가 제 몸을 조이고 있는 것에 저항하며 팔을 움직이자 가까스로 검은 힘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그리고 성력을 끌어모아 그것에 손을 대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성력이 터져 나오며 그녀를 숨 막히게 조여 대던 알 수 없는 검은 줄기가 페리아의 손이 닿았던 곳에서부터 하얗게 변해 갔다. 그 부분부터 점차 느슨하게 되어 페리아를 놓아주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성녀의 기적과도 같은 아름다운 성력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가려고 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그들의 시선은 하얗게 변해 가는 검은 줄기를 따라 이동했다. 검은 줄기가 지나가는 곳에 있던 사람들이 양옆으로 비켜서며 그 줄기의 시작 지점을 추적해 나갔다.
그리고 그 끝에는, 대신관 에녹이 있었다.
“에녹……!”
카넨은 다짜고짜 그에게 마법을 시전했다. 페리아를 죽이려고 한 에녹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가장 소중한 존재였고, 그녀에게는 제 마음만 겨우 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아직 답을 듣지도 못했다. 페리아에게는 용서를 구해야 했고, 그녀에게 다시금 제 마음을 고백해야 하는데 그녀를 잃을 뻔했다.
하지만 에녹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검은 힘을 이용해 카넨의 마법을 막아 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들 중 한 명의 하급 신관이 외쳤다.
“타락한 신관……!”
신전의 도서관에 있는 고서에나 적혀 있는 이야기였다. 신관이 타락하게 될 경우 검은 힘을 얻게 된다고. 그리고 그는 다시금 신관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타락한 신관이라니.”
에녹이 애써 태연을 가장해 가며 말했다. 성녀를 죽이는 데 실패한 것도 모자라 제가 성력을 잃은 뒤에도 대신관으로 있기 위해 금단의 마법에 손을 댄 것까지 들킬 위기였다.
또 다른 검은 줄기가 그 신관을 향해 뻗어 나갔지만, 페리아가 그것을 막아 내기도 전에 신관들이 힘을 합쳐 그것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다른 신관들이 만들어 준 결계 안에서 조금 전 공격받은 신관이 소리쳤다.
“거, 검은 마력은 신관이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새하얀 성력은커녕 시커먼 마력이 성녀임이 분명한 분을 공격했다. 그런데 그것은 다름 아닌 대신관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대신관의 눈부실 만큼 새하얀 성력을 기억하고 있던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검은색이라니.
“그렇지 않습니다.”
대신관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답했다. 그런 그에게 성기사단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타락했든 아니든, 성녀님을 공격한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까.”
성기사단장의 지적에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날 선 적의를 갖고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몇은 아직 우물쭈물하고 있었지만 그 수는 미미했다.
“…성력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보다도 더욱 신성제국을 위해 많은 힘을 쓸 수 있습니다.”
“타락한 신관의 힘을 신관들이 필요로 할까? 진짜 성력을 가진 내가 있는데.”
나서기도 싫어하고, 놀고먹는 게 꿈인 페리아였지만 지금 기회가 아니면 대신관을 잡을 수 없을 것이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신성제국군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그들에게 타락한 신관이 아닌 신의 현신인 성녀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신성제국군과 제국 기사단이 무기를 다잡으며 대신관을 공격할 시기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페리아의 성력이 그를 향해 뿜어져 나감과 동시에 그들이 달려들었다. 대신관은 공간 이동을 하여 급조된 연합군의 공격에서 빠져나갔지만, 페리아의 성력은 그를 추적해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크어억!!”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강렬한 고통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성력이 아닌 마력을 끌어모아 자기 자신을 치유했다. 치유하면 할수록 더욱 검게 변했다. 이제는 피부마저도 까맣게 변해 갔다.
“완전히 검게 변하기 전에 처리해야 합니다!”
그가 타락한 신관임을 외쳤던 신관이 다시 한번 외쳤다. 그러자 카넨과 페리아가 쉴 틈 없이 공격을 퍼부어 댔다. 대부분은 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일부는 그대로 공격을 받았고 그것만으로도 그를 빈사 상태로 만들었다.
“어디 갔지?”
에녹이 검게 변한 채로 사라졌다. 그가 회복할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기사들과 신관들이 조를 이루어 대신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대신관은 처음에 제 근처에 온 추격조를 공격했다가, 그들이 연락망을 갖추고 있어 순식간에 포위되어 다시 몸을 숨기고 도망쳤다.
“허억, 허억!”
그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신관이 제 몸을 회복했다. 대신관은 제 몸의 피부가 점점 거멓게 변해 가는 것을 보고 스스로가 경멸스러웠지만,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 상태로 끝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부스럭.
에녹이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슈덴이 있었다.
“슈덴 신관, 당신인가.”
그를 공격하려던 마력을 다시 갈무리했다.
“바깥의 동향은 어떠한가. 성녀만 해치운다면 우리가 이길 것이네. 그렇다면 약속한 대로 신성제국을 통치하게 하겠네.”
슈덴이 무어라 입을 벙긋거렸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그의 목소리를 앗아 갔던 것을 떠올리고 그에게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조금 전에는 미안했네. 그때 밝혀졌다면 조금 곤란해졌을 것이라 어쩔 수 없었네.”
슈덴이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성녀와 마법사는 떨어져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기사들과 신관은 조를 이루어 수색하고 있으나 쉽게 찾지는 못할 겁니다.”
고위 신관이 전투하는 방법을 아는 이는 슈덴, 그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에녹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만약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저는 계속 말을 못했겠지요.”
슈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쪽이다! 이쪽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슈덴이 모아 잡은 손에서 숨겨 놓은 흉기를 꺼내 대신관의 심장을 찔렀다.
“크윽!”
“아무리 대신관이라도, 심장이 멎으면 살 수 없겠지.”
“커흑!”
대신관이 제 심장을 치유하려고 했으나 검은 마력은 성력에 비해 치유 속도가 미미했다. 슈덴을 죽이는 마력조차 아까울 정도로 치유에 몰두해야 했다.
“혹시 압니까, 당신을 죽인다면 성녀님께서 제게 성력을 돌려주실지.”
그렇게 말하면서 슈덴은 몇 차례나 그의 심장을 칼로 쑤셨다.
“이… 이, 놈…….”
“여기입니다! 이곳에 에녹이 있습니다!”
슈덴이 호기롭게 외쳤다. 곧 사람들이 달려왔다.
“정말이로군. 에녹을 찾을 수 있다더니.”
“그럼요, 성녀님께서는 언제 오시는 겁니까?”
슈덴이 과거의 오만방자함을 벗어던지고 구차하게 제국의 평기사에게 굽실댔다.
“지금 왔어.”
“성녀님!”
카넨과 페리아가 등장했으나, 슈덴의 눈에는 성녀인 페리아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슈덴은 보이지도 않았다.
카넨은 에녹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마법을 시전해 그의 목숨을 끊어 놓았다.
“…이걸로 된 걸까요?”
페리아가 걱정스러운 말을 하자마자 카넨이 아공간을 열어 끝없이 불타오르는 지옥불 속으로 에녹을 집어 던졌다. 그 모습까지 보고 난 페리아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을 바닥까지 사용한 카넨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페리아는 그가 이런 모습을 한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기에, 그의 마력이 고갈된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슈덴이 눈을 빛내며 성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성녀님, 제가 찾아냈습니다!”
속이 훤히 드러나는 몸짓에 페리아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이런 사람에게는 적당한 보상이 주어지면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보다는 카넨이 걱정이었다.
“슈덴, 이라고 했나요?”
“예, 맞습니다!”
“솔직히, 신전에 두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금전적인 보상은 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슈덴은 자신이 신전에 돌아가더라도 높은 자리에 다시 오를 수 없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시하던 평신관과 같은 취급을 받느니 차라리 금전적인 보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 저택으로 찾아와요. 집사에게 말해 둘 테니.”
“예, 감사합니다.”
슈덴이 자신의 처우에 대해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페리아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성제국 기사단은 신성제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그리고 바르칸 제국에 사죄해야 할 겁니다.”
신성제국군은 패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수긍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표자인 대신관이 없었기에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렇다면, 성녀님은…….”
“…저도 지금 상황이 어이없지만, 내가 사죄해야겠죠.”
애초에 성녀임을 드러내어 대신관을 밀어내려고 했기에 자신이 한 말은 지켜야 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신성제국에서 하죠.”
페리아가 성력을 이용해 신성제국으로 가는 차원의 문을 열었다. 페리아에게는 끝을 알 수 없는 성력이 있기에 이렇게 많은 인원의 순간 이동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카넨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페리아. 이대로 가는 겁니까.”
카넨이 절박하게 그녀를 붙잡고 매달렸다.
“가지 마십시오.”
“걸어가기엔 먼 거리고, 그렇다고 이곳에 주둔시킬 수도 없으니 보내는 거예요. 저는 안 가요.”
“정말입니까.”
“네.”
이렇게 다 죽어 가는 카넨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돌아온 뒤, 그를 살리고 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카넨은 페리아의 손에 깍지를 껴서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질까 봐 품에 안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낸 것이다. 그녀에게 거부당할까 봐.
페리아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쪽 손으로 마법을 시전해 신성제국군을 신성제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제국 기사단은 기사단장의 지휘 하에 해산했다. 모두 끝이 난 것이다.
“가지 않았죠?”
페리아의 물음에 카넨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을 보호하는 결계는 시시각각 그의 마력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페리아가 이번에는 성력을 이용해 그를 마법사의 탑으로 데려갔다.
“고생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같이 이동한 마법사들은 눈치 빠르게 그들의 층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마탑의 최상층, 카넨의 방에는 페리아와 카넨,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페리아.”
카넨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페리아의 손을 굳게 잡아 왔다. 하지만 고갈되는 마력으로 인해 그의 손이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페리아는 한숨을 내쉬고 가까스로 서 있는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카넨의 목에 팔을 감고 그를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지난번, 황궁의 연회에서 그렇게 헤어진 뒤로 처음이었으니 아주 오랜만이었다.
페리아의 입술이 닿자 카넨이 전율했다. 이토록 부드러웠던가, 이토록 사랑스러웠던가, 왜 그전에는 옆에 두고도 알지 못했을까. 그전에도 그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렇게 빛이 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던 제 안목에 탄식했다.
“카넨?”
카넨이 굳은 듯 그녀의 입술을 받아들이기만 하자 숨결이 얽히는 거리에서 페리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당장 죽어 가는 카넨을 일단은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적어도 제 타액을 교환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하다니. 이 순간에도 그의 마력은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입 벌려요.”
카넨이 홀린 듯 그녀의 말을 따르자 페리아가 답답한 마음에 그의 입 안에 제 혀를 집어넣고 그의 혀를 핥았다. 파드득 놀란 카넨이 곧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혀를 얽어맸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고도 혀뿐만이 아니라 그녀 자체를 놓기 싫어 두 팔로 그녀의 몸을 그러안았다.
다디단 그녀의 체액을 삼키자 카넨은 제 마력이 차오르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해 있던 공허함 대신 충족감이 자리 잡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카넨은 언제나 그래 왔듯 페리아를 집어삼킬 듯이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 이전에는 카넨이 그녀에게서 받는 마력을 갈구했다면, 지금은 정서적인 만족감을 추구했다.
“하아, 페리아.”
하지만 페리아는 카넨의 안색이 나아진 것을 확인하자 그를 밀어냈다.
“페리아……?”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으니 돌아갈게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나, 나를… 용서한 게 아니었어?”
“제가요? 왜요?”
페리아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방법이 있어서 응급처치를 하는 기분으로 입을 맞추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일이 없던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저는 아는 사람이 그렇게 죽으면 찜찜할 것 같아서 온 거예요. 신성제국이 승리한 뒤에 에녹이 나를 가만히 놔둘 것 같지도 않았고, 황제 폐하가 계셔야 우리 사용인들 급여도 주니까요.”
“그렇다면 방금 그건…….”
“심폐소생술 같은 거예요.”
페리아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카넨의 몸이 굳었다. 페리아는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그의 팔을 떼어 냈다.
“페리아.”
페리아가 자신에게 신경을 전혀 쓰지 않았더라면 죽든 말든 내버려 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제국을 구한 뒤에 자신의 목숨마저 살려 주었다. 그러니 제게 기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그녀를 그냥 보낸다면 정말로 기회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은, 아무리 연애에 멍청한 카넨이라도 알고 있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당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겁니다.”
“어차피 신성제국의 대표로서 사죄하기도 해야 할 테니 괜찮아요.”
“그렇다 한들 당신이 나라를 구해 준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대하고 있을게요.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할지.”
솔직히 자신이 저지른 잘못도 아닌데 사죄를 해야 한다니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리고 페리아,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짧게만요.”
카넨이 평소의 개구진 얼굴을 버리고 진지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거니, 페리아가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말을 듣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단지 신전에 보여 주려는 마음에 결혼하자고 했었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러고 나서는… 당신이 나의 마력을 채워 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페리아의 고운 미간에 가늘게 주름이 잡혔다. 눈꼬리가 올라간 것이,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페리아.”
페리아는 그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말로는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물론 조금 전 신성제국군과 대치할 때 했던 고백은 진심인 것 같았다.
지금의 카넨도 페리아가 꿈꾸던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자신을 데려다주는 마차 안에서 들려주는 진심을 담은 고백>과 거리가 있긴 했어도 진정성 있게 말했다.
하지만 그를 믿기엔 페리아가 겪은 배신감이 너무 컸다.
“당신이 언제 또 마음이 바뀌어 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며 살고 싶지 않아요.”
“…….”
카넨은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으려 했다. 그녀에게서 맡을 수 있었던 달콤한 체향을, 왜 그때는 소중한 줄 몰랐을까.
“지금은, 당신이 좋습니다. 이전에도 호감은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전보다도 훨씬 좋습니다. 좋아한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당신이 좋습니다.”
자신이 죽기 직전에 나타나 저를 구해 주던 그녀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그녀의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는 보이지도 않고, 상황이 위급한데도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고, 오로지 페리아만이 제 세상에 보이던 그 순간을.
“…….”
페리아는 그의 말을 듣고 고민이 되었다. 정말로 이것까지 거짓일까.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아.’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
과연 그가 마력이 가득하고, 목숨의 위협이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 그때도 그대로일까?
“정말인가요, 카넨?”
“예.”
페리아가 그의 침대에 익숙하게 걸터앉자, 채신머리없이 그의 성기에 피가 몰렸다. 단지 그녀가 제 침대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페리아가 제 밑에 깔린 채 교성을 지르던 때를 떠올린 것이다. 중증이었다.
“그럼 이리로 와 봐요.”
페리아가 그렇게 말을 하며 제 옷을 고정하고 있는 리본을 하나둘씩 풀어 내렸다. 카넨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녀의 앞으로 갔다. 그러자 페리아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붙잡아 올리며 말했다.
“등 뒤에 있는 리본도 풀어 줘요.”
한 달이 넘는 오랜 시간만이라 그런 건지, 이제는 손에 닿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한 탓인지 리본 끈을 끌어 내리는 카넨의 손이 덜덜 떨렸다. 마침내 모든 끈이 풀리고 그녀가 입고 있던 드레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나신에 카넨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페리아의 시선이 떨어진 드레스로 향하자, 그녀를 안아 올려 드레스를 침대 밖으로 치워 버렸다.
페리아가 이전에도 그랬듯, 자연스럽게 카넨의 침대 위에 누웠다. 그리고 페리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밀부만 겨우 가리고 있던 속옷을 고정하고 있던 리본을 풀어내었다.
카넨은 바지춤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지만, 제 욕심껏 그녀를 가져도 괜찮은 걸까 고민이 되어 페리아를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