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8
황실에서는 전염병의 창궐로 수도 내에 위축된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성녀의 재림을 알린다는 명목으로 무도회를 열었다. 무도회에서 착용할 보석과 드레스를 사러 온 이들이 레스토랑과 디저트숍에도 들르고, 이들을 수행하는 인원이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도 많아 소비가 진작되면서 경제적 위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금액을 쓴 것은, 다름 아닌 카넨이었다. 지금도 그들의 응접실에는 카넨이 부른 부티크의 마담이 각종 원단과 시제품을 주르륵 늘어놓은 상태였다.
“연회용 드레스 오십 벌을 맞추려고 하는데.”
“무슨 드레스가 오십 벌이나 필요해요?”
드레스의 개수를 듣고 페리아가 깜짝 놀라 반박하자, 카넨이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부티크의 마담 레일리에게 말했다.
“보다시피 저런 사람이라.”
카넨의 말에 마담은 그저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을 쓰는 카넨의 의견을 반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결국에 결정권을 지닌 페리아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십 벌까지는 필요 없어요! 연회는 5일이니 다섯 벌만 있으면 돼요!”
“그러다 드레스에 와인이라도 흘리면 하루는 나오지도 않겠습니다. 당신 때문에 열리는 연회인데 말입니다.”
“그럼 열 벌만 있어도 차고 넘칠 거예요.”
“제가 사 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오십 벌에다가 모자와 장갑 세트면 충분할 것 같네요. 고마워요, 카넨.”
‘난 또 내가 사는 줄 알았잖아. 아직 신전에서 얻는 소득도 없는데, 헤헤. 카넨이 사 준다고 하면 말이 달라지지! 오십 벌을 언제 입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 두자!’
카넨이 웃으며 어차피 허락을 했으니 제가 사고 싶었던 것을 다 사기로 했다.
“이것과 어울리는 걸로.”
카넨이 아공간에서 꺼내어 마담에게 보여 준 것은, 이전에 만들어 둔 여러 가지 모양의 마력석이었다.
“…이것과 어울리면서 대공비 전하의 품격에 맞는 드레스를 맞추려면…….”
레일리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카넨이 악동같이 씨익 웃었다.
“이것은 목걸이로 착용할 예정이라 눈에 아주 잘 보이지. 그에 맞게 입으려면 드레스가 화려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아. 공교롭게도 내 아내는 이 나라의 여성 중에서 제일 신분이 높은 데다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성녀이기까지 하지.”
마담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계산기에, 그녀가 태어난 이후 가장 많은 0이 찍혔다.
“하지만 걱정 말게. 다행히도 나는 대공이고, 왕제이며, 마탑주라서 돈이 아주 많아. 아내에게 이런 드레스 오십 벌이 아니라 오백 벌쯤은 해 줘도 아무 문제가 없거든.”
카넨이 무심하게 레일리의 손에 자신의 서명이 담긴 백지수표를 쥐여 주었다.
“자네가 타고 온 마차에 선물을 실어 놨으니, 내 아내의 옷을 잘 부탁해.”
마담은 카넨의 말을 듣고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탑을 나섰다. 주변에서는 많은 이들이 염려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 미친 자들의 성이라는 마탑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그녀가 타고 온 마차에는 공작의 말에서 힌트를 얻은 카넨이 온 대륙을 공간 이동으로 돌아다니면서 모은 각종 원단이 들어차 있었다. 앉을 자리조차 없어 마담이 앉아 원단을 끌어안고 가야 했다. 하지만 대륙의 제일 번화한 수도에서, 가장 커다란 부티크를 운영하기를 벌써 30년. 자신도 처음 보는 각종 원단에 레일리의 입꼬리는 귀에 닿을 듯했다.
“…돈을 그렇게 막 써도 돼요?”
마탑주의 방에 카넨과 단둘이 남게 된 페리아는 비싼 드레스 오십 벌을 얻게 되어서 기쁜 것보다, 백지수표를 가진 마담이 부러운 마음이 컸다.
‘카넨이 돈이 많으면 뭐 하나, 내가 번 게 아닌데! 나도 돈 벌고 싶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당연히 돈을 막 쓰는 건 안 됩니다.”
“그럼 지금은 뭔데요?”
“당신 드레스 사는 게 왜 막 쓰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면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카넨은 요 근래에 페리아와 따로 떨어져 있던 시간이 꽤나 길었다.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그녀의 옷을 만들 원단을 사러 다녔고, 트라비안 공작을 찾아가 ‘아내와 사이가 좋아지는 법’을 전수받느라 바빴다. 덕분에 트라비안 공작에게 ‘이대로만 한다면 다시 태어나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는 평을 받았다.
“정말 고마워요, 카넨.”
페리아가 웃으며 하는 말에 카넨은 마주 웃으며 물었다.
“말로만 고맙다고 하는 겁니까?”
“…….”
페리아는 요 근래 카넨이 너무나도 헷갈렸다. 요즘의 카넨이 하는 행동을 보면 아무리 봐도 연애 처음 하는 호구였다. 방금만 하더라도 백지수표를 턱턱 던지지 않았나. 자신이었으면 백지수표에 이 나라의 한 해 국정 운영비 정도는 적었을 거다. ‘마음대로 적으라고 백지수표인 것 아닌가요……?’ 하면서.
‘음… 진짜로 그 마담이 그렇게 적으면 어떡하지? 설마 카넨을 상대로 그런 간 큰 행동을 벌일 사람은 마력이 통하지 않는 나밖에 없겠지…….’
뭐가 됐든, 페리아는 카넨에게 마음을 열어 가면서도 차마 그를 완전히 믿지는 못했다. 그런데 요즘 카넨이 하는 행동을 보면 좋게 말하면 사랑꾼, 나쁘게 말하면 호구라고 확신했다.
카넨이 눈을 감고 손목을 잡아끌자 페리아가 작게 웃고는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에게서 떨어지자 카넨이 슬쩍 실눈을 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위치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앞으로 쭈욱 내미는 카넨을 보고 페리아는 웃음이 터졌다.
“백지수표에 볼 뽀뽀 한 번이라니, 수지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카넨이 자조하듯 한마디 하자, 페리아가 더 크게 웃었다. 그녀는 눈물까지 닦으며 정신없이 웃다가 그의 뺨을 붙잡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당신한테 키스 받으려면 돈을 아주 많이 벌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만! 이제 그만해요! 카넨, 나는 당신이 이렇게 귀여운 줄 몰랐어요.”
페리아가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고 카넨이 마주 웃고는 이제 장난은 끝이라는 듯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작게 벌린 그녀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은 카넨이 그녀의 혀를 얽어내며 만족스러운 감정에 몸을 떨었다.
“그럼 더 귀여워해 주십시오. 요즘 옷도 안 태우지 않습니까.”
카넨이 마치 주인에게 애교 부리는 개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입을 맞추고, 입 안에 여린 살을 담아 빨아 당기며 울혈을 남겼다. 마치 페리아가 자신의 것이라는 양.
“착하다, 착하다.”
페리아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니 카넨이 그녀의 손을 낚아채 자신의 단단한 페니스에 가져갔다.
“쓰다듬을 곳이 잘못되었습니다.”
“…여기는 귀엽지 않잖아요.”
“그래서? 싫습니까?”
“왜 이렇게 사람이 극단적이에요, 귀엽지 않다고 싫을 리가 없잖아요.”
이전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그녀의 손이 이제는 능숙하게 그의 바지를 풀어 내렸다. 바지와 함께 그의 속옷을 함께 내리자 벌써부터 쿠퍼액을 흘러내리고 있는 페니스가 그녀를 맞이했다.
“귀엽지는 않지만, 좋아요. 길이도, 두께도.”
페리아가 한 손으로 잡기에는 턱없이 많이 남는 그의 페니스를 양손으로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벌써부터 흥분감에 달아오른 카넨이 페리아의 입술을 덮치며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어느새 그녀의 드레스는 발치로 떨어졌고, 카넨이 그녀를 살짝 들어 올려 드레스에서 꺼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수 없을 정도로 벽에 달라붙고 나서야, 카넨은 페리아의 입술을 놔주었다.
“하아, 페리아…….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의 안에 처박고 허리를 흔들고 싶지만, 참겠습니다.”
“당장 넣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밤은 기니까.”
카넨이 벽에 기대선 페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음부를 핥아 올렸다. 더 큰 쾌락을 기대하며 저절로 벌어지는 페리아의 한쪽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얹은 카넨이 그녀의 밀부에 두 개의 손가락을 단번에 찔러 넣었다.
“하읏!”
“손가락 두 개 정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먹네. 그래도 곧바로 당신의 안에 내 것을 쑤셔 박았더라면 다쳤을 수도 있습니다.”
두 개의 손가락을 교차하며 그녀의 내부를 휘저으면서도 페리아의 붉게 달아올라 통통해진 음핵을 혀로 누르며 굴리자 그녀의 입에서 계속해서 달뜬 한숨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 두 개로는 부족하다는 듯 그의 손가락을 오물오물 삼키는 내부에, 손가락을 하나 더 찔러 넣고 빠르게 들쑤셨다.
“그리고, 바로 넣으면 새벽까지 못 버티지 않습니까.”
“아! 아! 아앗! 좋아, 좋아요!”
“거짓말은. 페리아, 손가락으로는 부족한 거 다 알고 있습니다.”
“흐읏, 아!”
페리아의 발가락이 굽어들며 절정에 오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질 내부가 요동을 치며 그의 손가락을 조여 대었다. 그러나 그녀가 절정에 오르기 직전, 카넨이 손을 빼 버렸다.
“하앙… 왜, 왜요?”
페리아가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자, 카넨이 짙게 웃으며 말했다.
“넣어 달라고 해 보십시오.”
“넣어 주세요.”
자신의 생각과 달리 너무 쉽게 말하는 페리아 때문에 카넨이 당황했다.
“그,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카넨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페리아는 절정에 오르기 직전에 중단된 것에 마음이 매우 상해 버렸다. 그리고 페리아는 고작 이 정도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카넨… 지금 장난하고 싶은 거면 누울래요? 내가 직접 넣을 테니까.”
카넨이 당황하다가 자신의 단단한 페니스를 그의 아래에 맞춰서 천천히 삽입했다.
“…정말이지 당신은, 언제나 제 예상 밖입니다.”
그의 것에 서 있는 핏줄 하나하나를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페리아가 여린 신음을 흘리며 가는 다리를 카넨의 허리에 감았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하반신이 맞물리자 깊은 곳까지 자극받은 페리아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는 카넨에 맞춰 페리아도 허리를 흔들며 질 입구를 좁혔다 푸는 것을 반복했다. 카넨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애액과 마찰하는 소리가 그들의 흥분을 더욱 부추겼다.
카넨이 페리아의 위에 엎드리자, 그의 귓가에 곧바로 페리아의 한숨 섞인 교성이 들려왔다. 자연히 그의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고 그가 움직이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그러면 그럴수록 카넨의 귀에는 더욱 달콤해진 페리아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목소리, 더 들려주십시오.”
“하아… 으응, 카넨, 읏.”
페리아는 목소리를 줄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의 바람에 따라 교성이 흘러나오는 대로 내질렀다. 카넨의 약간 휜 페니스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지점을 사정없이 찔러 댈 때면 그가 좋아하는 달콤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왔고, 카넨이 페이스를 늦출 때면 조금 쉬어 가면서 교태롭게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카넨이 또다시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짓쳐 올렸다.
“하윽! 카넨! 아읏! 좋아요… 흐윽, 너무 좋아요!”
카넨은 지금 페리아가 말하는 좋다는 것이 쾌락에 들떠 기분이 좋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페리아는 항상 자신이 느끼는 곳을 그의 뭉툭한 귀두가 꾹꾹 누를 때면 좋다고 말해 왔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쾌락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뭐가 좋습니까?”
페리아는 정신없이 쾌락에 헐떡이는 가운데에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오늘 카넨이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기어코 내 입에서 그런 말을 듣기를 바라는 거야?’
조금 전 분명 카넨은 넣어 달라고 해 보라고 했었다. 넣어 달라고 했더니 무엇을 어떻게 넣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묻기도 했었다. 그 질문에 답을 안 해 주긴 했지만……. 그런데 또다시 뭐가 좋냐고 묻는 걸 보면 정말 내가 그런 말을 해 주기를 바라나……?
‘아니, 아무리 내가 섹스를 즐긴다고는 해도 유교 국가에서 20년을 넘게 살았는데, 어떻게 ‘페리아의 질 안에 카넨의 자지를 넣어 주세요.’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어…….’
페리아는 카넨이 들었으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코피가 터졌을지, 아니면 어이없어했을지 모를 생각을 했다. 카넨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가늠하지도 못하고, 그저 얼굴이 새빨개진 페리아를 보고는 그녀를 귀여워했다.
“그냥… 좋다고만 말하면 안 돼요?”
페리아가 침대의 시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카넨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면서 그의 목에 입을 맞추자 카넨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가 느끼는 곳을 거세게 찔러 댔다.
“왜 안 되겠습니까. 저도 좋습니다, 페리아.”
페리아의 좋다는 말을 들은 카넨의 아래는 부피를 더욱 키우며 그녀가 좋다고 말한 곳뿐만 아니라 다른 곳까지 모두 긁어내리며 그녀를 더욱 몰아갔다.
“흐윽, 카넨! 아읏!”
“페리아, 계속 좋아한다고 말해 주십시오.”
카넨이 거칠게 움직이는 하반신과는 다르게 그의 입술은 다정한 말을 속삭이며 얼굴에 자잘하게 입맞춤을 계속했다. 페리아의 얼굴에 그의 입술이 안 닿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아요, 카넨. 좋아요, 하윽! 더, 더 해 줘요.”
카넨은 평소보다도 더욱 흥분이 되었다. 페리아가 좋다고 하는 것이, 지금의 행위가 아니라 마치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면, 그녀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페니스로 피가 몰리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욕심이 많은 나의 아내를 만족시키려면, 하룻밤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카넨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페리아가 능청스럽게 맞받아쳤다.
“마력석 서너 개 정도는 만들어도 괜찮아요.”
“조만간 드래곤 레어 한 번 더 털어 오겠습니다. 아니면 형한테 내려오라고 하는 건 어떻습니까? 근처에 있는 나라를 모조리 점령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예요?”
“당신이 갖고 싶다는 거 다 사 주려고. 그래야 당신이 저를 계속 귀여워할 거 아닙니까.”
카넨의 뜬금없는 역적모의에 어이가 없어 페리아는 풉 하고 웃고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얼른 마력석이나 만들어요.”
거리를 벌린 페리아의 입술을 다시금 덮치고 그녀의 입 안에 탐욕스러운 혀를 집어넣었다. 그의 혀는 하나라도 놓치기 싫다는 듯 페리아의 입 안 곳곳을 꼼꼼하게 훑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에서는 마력을 모아 마력석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왜 예쁜 모양으로 안 만들었어요?”
“당신한테 신경 쓰느라 바빠서. 예쁜 모양으로 다시 만드는 게 좋습니까?”
“네.”
페리아가 배시시 웃자 카넨이 남아 있던 마력을 모아 혜성과 페리아가 주문했던 태양 모양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신기하게 바라보는 페리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원래 만든 마력석은 다시 흡수하는 게 아니었어요?”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지금 마력을… 70퍼센트 정도 쓴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잘 부탁합니다, 나의 페리아.”
카넨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길 것 같았다.
***
드디어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성녀가 황실의 일원임을 밝히는 중요한 자리이니, 불참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적힌 서신이 왔었다. 마탑에서 황궁이 꽤나 먼 거리였기 때문에 순간 이동으로 하면 되겠지 했는데, 마차를 보내 줄 테니 반드시 마차를 타고 와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대체 어떻게 생긴 마차길래 반드시 타야 하나 했더니, 신전의 색인 흰색에, 신을 뜻하는 금색으로 황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 성녀가 타고 있어요>도 아니고 이게 뭐야…….’
‘허용하지 않으면 뭐 어쩔 건데.’라고 생각했었지만, 결국 카넨을 앞세운 황제와의 치열한 설전 끝에 수도 내에 하사받은 <내 명의>의 저택에서 황궁까지 타고 오는 것으로 결정됐다. 마차만 보내고 순간 이동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반드시 귀족들이 마차에서 우리가 같이 내리는 것을 봐야 한다고 했다.
‘정말 성녀가 황실의 일원인 것으로 생기는 모든 이득을 긁어모으려고 하나 보네.’
그래서 나는 저택 내에서 일할 고용인들을 황실에서 비용을 내주는 것을 조건으로 황제와 극적인 합의를 했다.
‘마차를 타는 시간은 짧지만, 고용 비용은 계속해서 나가니까!’
참으로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래서 나와 카넨은 저택으로 공간 이동을 한 뒤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마차에 탔다.
‘앞으로 황궁까지 약 두 시간…….’
마차는 그래도 성녀와 대공이라는 조합인 덕분인지 엄청나게 화려한 만큼 꽤 안락한 환경을 제공했다. 내가 남작인 시절 타고 다니던 미친 듯이 흔들리는 마차에 비하면 너무나도 훌륭했다. 아직도 다소 흔들리긴 했지만.
그러나 문제는 너무나도 심심하다는 것이었다.
‘보통 소설에서는 남자랑 같이 마차에 타면…….’
카넨의 옆모습을 보니, 침이 꿀꺽 넘어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색 머리카락, 타오르는 것처럼 붉은 눈동자, 저 옷 속에 숨겨져 있는 보기 좋게 갈라진 근육과 질 내부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페니스…….
창밖을 바라보던 카넨이 나의 뜨거운 눈빛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면서 방긋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하하하하하하하하, 너 잡아먹고 싶어서 그런다!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펴서 입을 가리고 웃으며 신고 있던 구두의 끝으로 카넨의 발을 툭 쳤다.
“심심해서 그러는 겁니까?”
심심하지.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 밤일 잘하는 잘생긴 카넨과 단둘이 타고 가면서 고작 창문 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안 심심할 리가 있겠어?
“네.”
“아직 도착하려면 시간이 꽤 남았는데……. 그냥 공간 이동으로 가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고개를 조금이라도 끄덕이면 곧바로 마력을 쓸 것처럼 말하는 카넨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사용인들 급여 전액 제공이라는 좋은 기회를 내가 놓칠까 보냐! 게다가 거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거라고!
“음, 그러면 어떡하지.”
다소 곤란한 듯 미소 짓는 카넨의 다리를, 스타킹을 신은 하얀 다리가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옆자리를 툭툭 치자, 그제야 카넨은 내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채고 잽싸게 옆에 와 앉았다. 아무래도 마차 안에서 심심한 건 나뿐이 아니었나 보다.
“괜찮겠습니까?”
“뭐가요?”
시침을 뚝 떼고 카넨의 허벅지를 손으로 문지르자 그의 눈빛이 조금 짙어졌다. 손을 조금 위로 올리니, 차마 속옷에 다 들어가지 않은 카넨의 커다란 성기가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차가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흔들렸는데 내가 과장되게 ‘아이쿠’ 하면서 그의 성기를 주물렀다.
“어머, 미안해요, 카넨. 마차가 흔들리는 게 익숙지가 않네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꼬리를 접으며 웃자 카넨이 씨익 마주 웃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페리아.”
카넨이 잠시 고민하더니 드레스를 들추고 그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가지런히 모인 다리 사이로 들어온 손이 허벅지를 쓰다듬자, 기대에 부푼 다리가 저절로 벌어졌다. 허벅지를 타고 들어온 그의 손가락이 속옷을 고정하기 위해 묶인 끈을 풀어 버렸다.
“…카넨, 먼저 시작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따가 들어갈 때 내가 속옷도 안 입고 들어가도 괜찮다는 거예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당신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게 너무 많아서 들킬 것 같습니다.”
카넨이 흘러내리는 애액을 손끝에 묻혀 음핵을 문질렀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공기가 만족스러웠다. 이제야 마차에서의 이동이 즐거워질 것 같았다.
‘나도 마차에서 한 번쯤 해 보고 싶었어!’
공간 이동으로 인해 못해 봤던 마차 안에서의 섹스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몸이 더욱 떨려 왔다. 그런 나의 변화를 알아챘는지 카넨의 손이 질구를 지나쳐 곧바로 안쪽을 휘저었다. 카넨의 팔에 매달려 그가 주는 쾌락을 받고 있자니, 여유롭게 움직이는 카넨이 얄미워 그의 바지에 묶인 매듭을 풀어 페니스를 꺼냈다.
부채를 집어 던지고 카넨의 허벅지 사이로 몸을 숙여 그의 페니스를 입에 머금었다. 입으로는 그의 귀두만 간신히 담을 수 있는 정도라 손으로 그의 기둥을 잡아 위아래로 흔들자, 귀두의 끝에서 달큼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당신에게 흘러내려 드레스에 묻힐까 봐 내가 입으로 하려고 했는데.”
“티 날 정도로 묻거나 구겨지면 드레스 새로 가져다주세요.”
“기꺼이.”
“그리고… 내 드레스가 지저분해지는 것보다, 당신 옷이 먼저 젖을 것 같은데요?”
지금도 그의 귀두에서는 쿠퍼액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혀로 할짝일 때마다 더 많은 양의 액이 흘러내려 끝이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꺄악!”
카넨이 무어라 읊조리니 카낸의 손가락이 있던 곳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으응, 뭐예요?”
“당신이 좋아할 만한 것.”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페리아의 몸이 튀었다. 카넨의 손가락이 작은 돌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음핵을 쓸어내리자 수많은 돌기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음핵을 눌러 댔고, 그의 중지와 약지가 질 안을 휘젓자 굵게 난 모양대로 그녀의 질 안을 자극하면서도 마찬가지로 작은 돌기들이 질 벽을 긁어 댔다.
“내 옷이 젖는 것보다, 당신 드레스가 먼저 젖을 것 같은데?”
“아윽, 흐읏… 마법을 쓰는 건 치사해요!”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게 왜 치사한 겁니까?”
카넨이 쿡쿡 웃으면서 손을 더욱 거세게 움직였다. 그녀의 음부에서 애액이 쏟아져 나오다시피 했다. 페리아는 그의 것을 입에 머금기는커녕 신음을 토해 내기에 바빴다.
“드레스 새로 가지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읏, 읏… 카넨, 읏…….”
“방음 마법 설치해 뒀으니까,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읏… 정말?”
“응, 정말.”
카넨이 색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안을 더욱 거칠게 쑤셔 댔다. 찔꺽이는 소리가 마차 안에 가득해질 정도로.
“하앙! 응! 카넨!”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페리아가 다리를 넓게 벌리고 그의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돌기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그녀의 클리토리스와 질 벽을 사정없이 문질러 대니 페리아의 허리가 저절로 들썩였다.
“손가락으로 이럴 정도면, 페니스를 넣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겁니까?”
페리아가 미칠 것 같은 쾌락에 몸부림치느라 그의 것을 전혀 애무하지 못했음에도 그의 페니스는 삽입할 준비가 이미 완료되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카넨이 그녀의 안에 있던 손가락을 빼고 클리토리스를 빠르게 애무하자 페리아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그의 허벅지에 매달리다시피 한 페리아의 음부에서 애액이 길게 쏟아지고서야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
“하윽!! 으, 읏…….”
페리아는 아직 쾌락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건만 당장이라도 분출하고 싶은 카넨은 더 이상 그녀를 기다려 줄 수 없었다.
“올라오십시오.”
페리아는 카넨의 위에 올라가기 위해 힘이 빠진 몸을 겨우 일으켰다. 잠시 휘청했으나 카넨이 그녀의 팔목을 붙들고 요사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위로 안아 올리자 풍성한 드레스 아래에 그의 하반신이 모두 가려졌다. 페리아는 점점 몸을 낮춰 방금 전에 절정을 맞이한 자신의 음부에 그의 것을 갖다 대었다.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단단하게 솟아오른 그의 페니스의 위치를 찾지 못할 리가 없었다.
“흐으…….”
페리아의 음부가 그의 것을 오물오물 삼키며 내려가자, 그녀의 안에 들어온 귀두가 질 벽을 긁으며 파고들었다. 두꺼운 귀두를 삼키자 그의 기다란 페니스가 끝이 없을 것처럼 들어왔다.
“하윽!”
갑자기 끝까지 치고 들어온 그의 페니스 때문에 페리아가 가벼운 절정에 올라 그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미안합니다. 마차가 흔들려서.”
카넨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과 말투로 웃으면서 말했다.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제가 굳이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
허리를 짓쳐 올릴 때는 언제고 페리아가 가늘게 눈을 뜨고 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카넨이 태연하게 거짓을 말했다. 그러면서 ‘마차가 너무 흔들려서 안 되겠다’며 흔들리지 않게 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는 마법을 해제해 버렸다.
“아흑! 읏, 카넨!”
현대와는 달리 고르게 깔리지 않은 도로에는 중간중간 돌멩이도 있었고 푹 파인 홈도 존재했다. 그럴 때마다 덜컹거리는 마차 때문에 굳이 카넨이 허리 짓을 하지 않아도 그녀의 예민한 부분을 페니스가 꾹꾹 밀어 올렸다.
카넨은 자신이 가만히 있어도 충분히 느끼고 있는 페리아가 귀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이제 움직이겠습니다.”
“자, 잠깐만!”
다급하게 외치는 페리아의 말을 듣지 못한 척 그녀의 허리를 잡고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위에 올라와서 깊이 박히는데 마차까지 흔들리고 있으니 평소와 다르게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에 미칠 것만 같았다.
“하읏, 으응! 읏!”
페리아는 뭐라 말도 못 하고 이미 몸을 똑바로 가눌 수도 없게 된 상태로 카넨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에게 기대어 몸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쾌락을 받아들였다.
평소에 하던 침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한다는 것에 대한 긴장감, 하지만 밖에서는 알아채지 못할 거라는 안도감, 마차에서 섹스를 한다는 것에 대한 흥미로움, 게다가 지면에 따라서 덜컹거리고 흔들리는 의외성까지 더해지니 침실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느낄 수밖에 없었다.
“페리아, 하아… 페리아, 좋아.”
그가 좋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카넨은 황궁까지 오랜 시간이 남은 것 같았는데, 그녀와 몸을 섞고 있자니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앞으로 고작 한두 시간뿐이었으니.
황궁에 도착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떨어져야 할 텐데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공간 이동해서 마탑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페리아가 굉장히 분노할 것이 뻔했다. 그녀가 황제와 설전을 벌이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뿌듯해하는 표정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러지 않았다.
대신 마부에게 마력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지금 이곳에서 말해 봤자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페리아가 다른 곳에 신경 쓰게 하는 것이 싫었다. ‘두 시간 정도 천천히 돌아가라.’고. 페리아가 약속 시간 10분 전에는 무조건 도착해야 한다고 했지만, 연회에서 주인공은 누구보다 늦게 도착하는 것이 관례였다. 어차피 그들이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황제도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을 테니 황제보다 늦을 우려도 없었다.
그의 전언을 확인한 마부의 난감해하는 목소리가 카넨의 귀에 들려왔다.
“황궁에 거의 도착한지라, 이곳에서부터 돌아가려면 길이 고르지 못한데 괜찮으십니까?”
카넨이 페리아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녀는 여전히 멍한 채로 마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카넨은 망설임 없이 마부에게 괜찮다고 답했다. 안 그래도 한 번씩 덜컹거릴 때마다 자신의 것을 끊어먹을 듯이 조여 오던 페리아였는데 고르지 못한 길이라니. 수도 내에 자갈길이 있었다면 그곳으로 향하라고 했을 것이다.
페리아와 보낼 시간이 늘어난 카넨은 만족스러워하며 외부에 신경을 끄고 페리아에게 몰두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이전보다 훨씬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아흣! 카넨! 으흣!”
“하아… 좋아, 페리아, 엄청 조여 와.”
마차 안의 더운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카넨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드레스를 불태워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 즉시 이 시간도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참았다.
“큭!”
마차가 크게 덜컹거리면서 그녀의 가장 안쪽, 자궁 입구까지 그의 페니스가 깊이 박혀 들어오자 페리아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절정에 질 벽이 요동을 치며 그의 것을 사방에서 압박해 가자 카넨은 사정감이 몰려왔지만 애써 참아 내며 계속해서 추삽질을 이어 갔다.
이미 절정은 몰려왔으나 끊임없이 그녀를 몰아가는 카넨 때문에, 페리아는 카넨에게 매달려 앙앙대었다. 마침내 그가 그녀의 안쪽 깊은 곳에 뜨거운 액체를 흘려보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페리아, 쉬는 도중에 정말 미안한데…….”
얘는 또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 얘가 이런 말 하는 애가 아닌데……?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습니다.”
마침내 마차가 멈췄을 때 카넨의 바지에는 그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모를 하얀 액체가 뒤섞여 범벅이 되었고, 페리아의 드레스도 구겨진 것이 누가 봐도 마차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울상이 된 페리아를 보고 카넨이 호기롭게 클린 마법을 썼으나, 카넨이 섬세한 마법은 진짜 더럽게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무능해.”
카넨의 어깨가 엄청나게 튀었다. 그리고 무안한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소리쳤다.
“다, 당신이 해 보십시오! 당신도 이제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전까지 클린 마법 해 본 적 없잖아요!”
“…그, 그럼 이번에 해 보십시오!”
“알겠어요!”
페리아가 심호흡을 하더니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냄새 하나 안 나는, 구겨지지 않은 깨끗한 옷. 카넨의 것도, 자신의 것도.
‘내 옷만 하는 게 아니니까 성력은 이 정도는 넣어야겠지……?’
황금빛이 터지고 나서 옷 상태를 확인한 카넨과 페리아는 황궁에 들어서기 전에 마차를 멈추고 공간 이동으로 마탑을 가서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아무 말 없이 펭귄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다시 공간 이동으로 마차에 탔고, 마차의 벽을 두 번 두드리자 다시 마차가 황궁으로 출발했다.
마탑에서는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이 분명한, 온통 번쩍거리는 옷을 펭귄이 옷걸이에 걸고 있었다. 드레스룸에 옷을 건 뒤에도 문틈 사이로 계속해서 빛이 새어 나왔다.
***
“하만 대공, 하만 대공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입구에서 초대장을 확인하고 있던 시종이 카넨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크게 외쳤다. 역시 이 나라의 황족쯤 되면 초대장을 내밀지 않아도 얼굴이 신분증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카넨의 과한 에스코트를 받아 주변의 시선을 모았는데, 연회장에 들어서니 정말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를 바라보는 게 느꼈다. 시선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내 신분이 더 높은데? 하는 마음으로 그냥 들어갔다.
얼른 디저트나 맛봤으면 좋겠다. 마차에서 너무 힘을 뺐더니 배가 고팠다. 다리가 후들거리던 건 치유 마법을 걸어서 해결했는데, 배가 고픈 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이런 제기랄. 우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황제가 들어오는 바람에 내 배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했고, 황제의 입장과 함께 입구의 문이 닫혔다. 황제는 기나긴 다리로 우아하게 걸어가면서 카넨의 앞을 지나갈 때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안 오는 줄 알았다, 이 새끼야…….”
다 들려요, 폐하…….
황제가 단상에 올라 가벼운 인사를 전하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았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에 대해서 얼마 전에 카넨과 결혼한 내가 성녀였기에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카넨의 이름이 나올 때 그를 선망의 눈빛으로 보던 이들이 나를 성녀라고 하자 분노와 허무함과 불신이 담긴 눈초리가 되어 나를 향했다.
그러면 뭐 어쩔 거니. 그래 봤자 사실은 바뀌지 않는단다.
나는 그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여유롭게 웃어 넘겼다. 인사를 마친 황제가 단상에서 내려와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서 인사했다.
“대공비, 수고 많았네.”
“과찬이십니다.”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유료.”
“어?”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신관만 파견해 주게.”
“최소한은 할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황실의 일원이라 품위 유지비도 나오고 내가 카넨보다 오래 살면 대공이 될지도 모르는데 최소한은 해야지. 하지만 공짜로 부려 먹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미리 선을 그어 놨다.
배고파 죽겠는데 황제는 카넨에게 왜 늦게 온 것인지에 대해서 고상하게 돌려 까고 있었고, 카넨은 공간 이동을 못 해서 그런 거라며 이동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그렇다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이건 다 카넨의 탓입니다. 제 탓이 아닙니다.’를 되새기며 흐린 눈으로 서 있었다.
결국 황제가 한숨을 내쉬고 다른 이들에게도 인사를 해야 한다며 적당히 잘 즐기고 마차를 타고 가라고 신신당부했다. 안 그래도 마차에서 내릴 때 이목이 집중됐는데, 탈 때도 그럴 걸 생각하니… 썩 유쾌하진 않았다.
“페리아, 샴페인 한 잔 하겠습니까?”
“저 너무 배가 고파서 샴페인 원샷 할 것 같은데요.”
“…먹을 것부터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카넨.”
오늘 하루 중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자 카넨이 고개를 위아래로 붕붕 끄덕이더니 뛰듯이 음식을 가지러 갔다. 배고파서 움직일 힘도 없었는데 잘됐다. 문제는 내가 배고파서 날카로워졌는데 사람들이 인사를 하러 온다는 것이다.
내가 만만하냐! 왜 카넨이랑 있을 땐 안 오고 나 혼자 있으니까 오냐!
카넨은 나 안 도와주고 뭐 하냐! 싶어서 쳐다봤는데, 접시 위에 케이크의 산을 쌓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 주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른 사람들은 가볍게 인사하는데 갑작스럽게 무릎을 꿇은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잠시 실례 좀 해도 되겠습니까?”
“아, 예, 뭐, 네…….”
잘생긴 남자가 무릎을 꿇고 손을 내미니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카넨 급은 아니어도 잘생기긴 했다. 어느 정도로 잘생겼냐면, 매일매일 카넨의 잘생긴 얼굴을 보는 내 눈에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손 위에 손을 얹으니 갑자기 손바닥에서부터 성력이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아무 일도 없던 양 내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살짝 대더니 떼었다. 분명 내 손을 얹기 전에 그의 손에 아무것도 없던 것을 확인했는데, 지금 내 손바닥에는 쪽지가 남아 있었다.
“이게 뭐…….”
“내 아내에 대한 경의의 표현도 좋지만 적당히 하지?”
내가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카넨이 끼어들었다. 그의 뒤로는 시종들이 각자 카넨이 음식과 디저트들을 종류별로 쌓은 접시와 샴페인을 들고 따라왔다. 남자는 카넨이 째려보는 것을 웃으며 넘기고는 일어나서 그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한 뒤에 사라졌다.
“지금 대화 중이었는데.”
“배고프지 않습니까? 종류별로 다 가져왔습니다. 더 먹고 싶으면 말하십시오. 대신에 이제는 같이 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들러붙을 때는 빵 모으느라 신경도 못 쓰더니, 잘생긴 사람이 오니까 귀신같이 눈치챈 것이 조금 웃겼다. 그러나 나는 손에 남은 쪽지가 신경이 쓰여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성력이 담긴 쪽지라니……. 이런 것을 보낼 사람은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관.’
쪽지의 내용이 매우 궁금해서 슬쩍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무언가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인가 자세히 살펴보고 싶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신전이 대체 무슨 장치를 해 놨을지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황제와 인사를 마친 트라비안 공작 부부가 우리에게 걸어왔기 때문에 쪽지를 다시 소매 안에 숨겼다.
“안녕하십니까, 대공비 전하.”
“안녕하세요, 공작. 공작 부인.”
“정말 오랜만에 봬요! 공작 부인,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이라기에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아, 공작 부인은 침대에 갇혀 있었을 테니 사람이 반가울 만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다들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가 봐?”
모두가 카넨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나한테만 인사하니 카넨이 헛웃음을 보였다. 공작 부인은 안절부절못하며 카넨의 눈치를 살폈지만, 트라비안 공작은 귀찮다는 듯이 영혼 없이 인사했다.
“마음이 넓으신 대공 전하께서는 저의 아내를 살려 주신 대공비 전하를 저희가 반기는 것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겠죠.”
카넨이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황제는 다른 이들의 인사를 받고 있지만, 이곳에 연회의 주인공인 대공 부부와 권력이라면 황제 다음 가는 권력을 쥐고 있는 공작이 함께 있으니 자연히 시선이 몰렸다. 별로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살펴보니, 예전에 내가 일하던 황궁 도서관에 와서 꽤나 진상이었던 아가씨들이었다.
“페리아, 왜 그러십니까?”
카넨이 내 뺨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하자 그 여자들의 표정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오호라, 이거구나? 그래, 카넨이 세계관 최고 미남이지. 바로 옆에 외전의 주인공인 트라비안 공작이 있어서 몰랐다. 자주 보는 남자라고는 트라비안 공작, 세계관 최고 미남 카넨, 카넨과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는 황제였으니…….
물론 신관들도 자주 보지만 개불이나 멍게같이 생긴 애들이니 논외로 하자.
“조금 피곤해서…….”
카넨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그의 가슴팍에 어깨를 툭 대자 저것들의 표정이 아주 볼만해졌다.
“피, 피곤합니까? 많이 피곤합니까? 많이 피곤한 거 아닙니까?”
“…어지간하면 조용히 있으려고 했건만. 진정하십시오, 대공 전하.”
“아, 아니, 페리아가 피곤하다고 하는데……!”
“꼴사나우니까 진정하라고.”
결국 트라비안 공작이 이를 악물고 낮게 읊조린 뒤에야 카넨이 입을 다물었다. 여자들을 보면서 대놓고 비웃어 주느라 신경 쓰지 못했는데 내 앞에는 트라비안 공작 부부가 있었다. 그제야 내가 많이 실례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미안해요. 제가 실례가 많았네요.”
“아닙니다. 더 하셔도 됩니다.”
트라비안 공작이 이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나?
티 없이 맑게 웃으며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순도 높은 진심인데, 원작을 읽었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저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대공비 전하.”
“네? 공작 부인이 왜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적당히 티 내라고 할게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공작 부인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트라비안 공작은 그마저도 예뻐 죽겠는지 눈에서 꿀이 흘렀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사람들이 내 주변에서 인사를 하고 대화할 때 그랬었지. 트라비안 공작이 아내의 체력이 좋아지는 음식을 찾던 행위를 그만둬서 애정이 식은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정반대였다고.
…이제야 알겠네. 치료받은 뒤에 공작 부인의 체력이 더 좋아져서 저렇게 나한테 고마워하는 거였구나? 내가 이렇게 또 한 가정의 평화에 기여했구나! 역시 난 유능해!
“아니에요, 공작 부인.”
나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공작 부인의 얼굴이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만큼 새빨개졌다.
“내 아내가 많이 아픈가 보군.”
“네? 아니,”
공작 부인을 언제쯤 삼켜 먹을 수 있을까 타이밍을 잡기 위해 노력하던 공작이 결국 참을 수 없어졌는지 공작 부인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핑계로 그녀의 허리를 채어 갔다.
‘그런데 왜 아픈 사람을 테라스로 데려가는지 모르겠군요……. 분명 방금까지 피곤하다고 한 것은 나였는데, 먼저 사라진 것은 공작 부인이고…….’
나는 그저 소설에서만 보던 공작의 모습을 실제로 보는 것이 신기해서 손을 흔들어 주었고, 그사이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한 채 공작에게 붙잡혀 간 공작 부인은 테라스 안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들어가자마자 커튼이 내려오고 어디서 알고 나타난 건지 공작의 수하 둘이 나타나 테라스 앞을 지켰다.
‘…분위기로 봐서는 오늘 못 나올 것 같은데.’
공작은 책에서 본 것처럼 참 정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귀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앗!”
고개를 드니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카넨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진상녀들을 골려 먹느라 카넨에게 피곤한 척해 놓고 신경도 안 썼구나. 변명을 하려고 했는데 카넨의 얼굴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빠르게 사과하기로 했다.
“미안해요, 카넨.”
“…피곤한 건 아닙니까?”
“네.”
“피곤해야 집에 가는데…….”
대놓고 아쉬워하면서 한숨을 내쉬는 카넨의 얼굴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근데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여기 오기 전에 마차에서 그렇게 해 놓고!
“집에는 왜요?”
설마 하고 물어본 나의 말에 카넨이 악당처럼 웃었다. 진짜냐…….
내가 성녀라서 갖은 근육통을 성력으로 치유하기에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복상사하고도 남았다. 내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숙이더니 나를 슬쩍 안고는 귓가에 대고 말했다.
“호기심 많은 페리아에게 한 가지 알려 주자면.”
“…….”
“지금 비어 있는 테라스가 두 곳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카넨은…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오늘 마차에서 한 번 했지만 무도회는 또 언제 열릴지 모른다. 그러니 테라스도 한 번 들러 보는 게 인지상정이지! 마차야 사실 그냥 타고 가면 되니 언제라도 할 수 있지만, 섹스 한 번 하자고 무도회를 열 수는 없잖아? 그러니 이 기회에 한번 해 보고 싶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요, 카넨. 지금 우리한테 시선이 엄청 몰려 있는 거 몰라요?”
“언제나 이 정도는 몰려 있어서 모르겠습니다.”
“갈 땐 가더라도 광고하면서 가고 싶진 않아요. 끌어안고 있던 대공 부부가 테라스로 가는 건 완전 광고하는 거라구요!”
카넨이 조금 생각하는 사이에 비어 있던 두 개의 테라스 중 한 곳에 커튼이 내려왔다. 이제 남은 곳은 한 곳뿐이었다. 그 남은 한 곳도 한 연인이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카넨이 보자마자, 페리아의 시야가 뒤바뀌었다.
“광고하지 말라니까!”
내가 뒤늦게 소리쳤지만, 카넨은 이미 비어 있던 테라스로 들어와서 커튼을 내린 뒤였다.
아, 진짜 이렇게 오면 누가 모르겠냐고!! 갑자기 순간 이동으로 사라져 버린 대공 부부에, 빈 테라스에서 갑자기 커튼이 내려오면!!!
다른 사람도 아닌 대공이 마탑주인데 조금의 눈치라도 있으면 곧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그렇게 크게 소리쳤지만, 테라스 사이의 간격이 넓어 다른 연인들의 밤 여흥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트라비안 공작을 방해했다면… 공작이 봐주지 않을지도 몰라. 외전에서는 그의 여행을 방해한 사람이 얼마나 참혹한 꼴을 당했는데……. 그래도 나는 성력을 쓸 수 있으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공작 부부를 바로 공작저의 침실로 보내 버리고 우겨야겠다.
공작님,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공작님,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젠 저한테만 집중하십시오.”
카넨이 페리아의 입술에 입을 맞대며 능숙하게 그녀를 테라스에 놓인 기다란 소파 위에 눕혔다. 종아리에 닿았던 그의 손은 조금씩 타고 올라와 정강이와 무릎, 허벅지를 지나 그녀의 다리 사이에 안착했다.
“아! 맞다, 카넨, 잠시만요!”
“안 됩니다.”
앞으로 다가올 흥분을 기대하며 이미 젖어 버린 페리아의 질구에 카넨의 손가락이 침입했다.
“새로 젖은 건지, 아니면 아까 전에 싼 게 남아 있는 건지. 이상합니다, 분명 클린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카넨이 피식 웃으며 단번에 손가락 두 개를 찔러 넣었으나,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의 손가락을 꽉꽉 삼켰다.
곧 카넨의 중지와 약지가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질을 마구잡이로 쑤셔 댔다.
“흐, 흐아아, 카넨, 잠시만, 으읏.”
“왜 그러십니까? 기분 좋게 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쑤셔 박고 싶은 걸 참고 당신을 기분 좋게 해 주고 있잖습니까.”
카넨의 손가락이 페리아의 예민한 지점을 꾸욱 누르자 그녀의 허리가 튀어올랐다. 페리아는 쾌락에 몸을 맡기고 일단 한번 하고 볼까 하다가, 그러기엔 아까 전에 받은 쪽지가 너무나도 신경이 쓰였다.
“하읏, 카넨! 아앙! 쪽, 쪽지를 받았어요.”
“어떤 새끼가 당신한테 쪽지를 준 겁니까?”
카넨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또 다른 손으로 그녀의 음핵을 살포시 누르고는 원을 그려 갔다.
“아흥! 읏!”
“그 새끼가 누굽니까? 감히 당신한테 찝적대?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걸 보여 주는 건 어떻습니까?”
페리아는 들킬지도 모르는 스릴감이 좋은 거지 누가 보는 게 좋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곧바로 부정했다.
“시, 싫어, 하앙!”
“싫으면 싫어해야지, 이렇게 좋아하면서.”
페리아가 카넨의 목에 팔을 감고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창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테라스의 안쪽에서는 두런두런 말소리와 함께 황실 악단의 선율이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창문이 흔들리자, 페리아의 몸이 바짝 굳으며 그의 손가락을 세게 조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가 들어온다면 그게 누구든지 간에 눈을 뽑아 버릴 테니.”
“폐하가 오면…….”
“형이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으니 다행입니다.”
카넨이 그녀의 안쪽에서 손가락을 꺼내자 투명한 액체가 길게 늘어졌다. 페리아가 질구가 다시 채워지길 바라며 뻐끔거리는 것을 보고 카넨이 거칠게 버클을 풀었다.
“카, 카넨! 잠시만요!”
“이따가.”
그녀가 가는 다리를 벌리며 자리를 잡은 카넨을 가까스로 저지하며 얼른 말을 이었다.
“내가 받은 쪽지에 성력이 담겨 있었어요!”
“…성력?”
페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 전에 받은 쪽지를 꺼내었다. 카넨이 손을 뻗어 쪽지를 만지려고 했으나, 스파크가 튀며 그의 몸에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와 제대로 만지지도 못했다. 그러자 카넨이 조금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지? 나 지금 되게 급한데.”
“내가 직접 볼게요. 나도 지금 되게 되게 급하거든요.”
“그러면,”
일단 하고 나중에 확인하자고 할 게 뻔해서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근데 내가 다른 곳에 정신 팔린 상태로 하는 건 싫을 것 같아요.”
“…그렇겠지?”
그러면 우선 급한 일을 해결하고 쪽지를 확인하자고 말하려던 카넨이 급격하게 시무룩해졌다. 페리아는 그런 카넨의 반응이 왜 이렇게 재밌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낄낄대며 쪽지를 펼쳤다. 카넨 역시 그런 페리아가 마냥 귀여워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페리아는 쪽지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자 ’뭐지?’ 싶으면서도, 성력을 담아서 준 쪽지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성력을 담았다. 그러자 쪽지가 영상석으로 바뀌더니 테라스의 커튼에 영상을 쏘았다.
성력이 있어야 반응하고 마력을 거부하는 것을 보면, 카넨이 보는 것이 싫었나 보다. 그래도 카넨과 같이 보는데 어쩌나, 대신관이 싫어하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즐거웠다.
영상이 나타나자 카넨은 분노가 흐르기 이전에 어이가 없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것은 황제의 집무실에 있는 형님과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감히 황제의 집무실을 영상에 담아?’
황제의 허가가 없을 것이 당연했다. 형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없었으니. 심지어 성력이 담아 보냈다는 것은 신성제국이 관여했다는 것을 자백하는 꼴이었다.
페리아에게 양해를 구해 이 영상석을 황제에게 가져가 이 기회에 신성제국을 뒤엎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페리아, 이것…….”
그러나 영상석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카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카넨,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냥 죽이는 것은 어떠냐.』
그 어느 날, 형제가 했던 대화가 들려왔다.
페리아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그때 형제가 나누었던 대화.
『페리아랑 하고 나니까 생명력이 유지되는 수준이 아니었어. 생명력이 늘었다고. 확연하게.』
『죽이기엔 아깝군.』
당황한 카넨이 마력을 모아 영상석을 부수려고 했으나, 페리아가 그의 손을 막았다. 그의 마력은 페리아에게 통하지 않으니, 카넨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마력이 그녀의 손을 넘어서지 못해 영상석까지 닿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무심하게 했던 말이 비수가 되어 누군가의 심장을 후벼 팠다.
『걱정하지 마, 형. 내게서 벗어나면 내 손으로 죽일 거니까.』
페리아는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이전에 리히엔의 방에 남은 문서를 보고 카넨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원작에서 여자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쓰레기인 모습을 보여 줬던 카넨일지라도, 지금 결혼한 것은 자신이니까 어쩌면 다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최근 카넨은 정말이지 그녀를 아껴주는 것이 티가 났기 때문에 신전에서 자신들을 이간질하기 위해서 그런 문서를 일부러 작성한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생한 영상으로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다니. 역시 대신관이랄까. 이번 전염병 사건도 그렇고 사건을 만들어 내는 데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된 이상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넨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분명 결혼을 다짐할 때만 하더라도 1년 동안 즐겁게 놀다가 이혼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카넨을 재활용해서 쓸 생각이었다.
‘사람은 재활용하는 거 아니라더니.’
실소가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그런 페리아의 반응을 본 카넨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
“페, 페리아. 설명하겠습니다.”
“뭘요? 폐하와 왜 저를 죽이려고 했는지에 대해서요?”
“아니, 분명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걸 제가 어떻게 믿죠?”
카넨이 다급하게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원하듯 말했다. 분명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페리아가 자신의 마력을 채워 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새 마력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도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믿어 달라는 말밖에 없었다.
“페리아, 알다시피 신전에서는 당신이 있으면 나의 마력을 없애서 죽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 겁니다. 믿어 주세요.”
“…그래요.”
“믿어 주는 겁니까?”
“네, 그러니 이혼해 주세요.”
카넨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믿어 준다고 했으면서 이혼이라니.
“믿겠다면서…….”
예전에는 그가 자신의 마력이 소중하다며 그녀의 생명을 위협했을 때, 페리아는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단이 없었다. 하지만 충만한 성력을 갖고 있는 지금이라면 그에게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잘해 줬으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배신감이 너무나도 컸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오히려 성녀가 왔을 때 이 자리를 놓아주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성녀에게서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던 과거가 바보 같았다.
“네. 그때 카넨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돼요.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잖아요.”
“하지만…….”
“처음 결혼할 때 했던 이야기, 기억하죠?”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그동안 사건이 많아서 그렇지 결혼 당시로부터 두어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결혼 생활 동안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분명 결혼할 때, 서로 존중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존중합니다. 앞으로도 존중할 겁니다.”
“존중했으면 죽이겠다고 말씀하지 않았겠죠.”
“…미안합니다, 페리아.”
“이혼해 주세요.”
페리아의 반응은 아주 단호했다. 카넨이 지금 후회해 봤자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은 안 됩니다.”
“저를 죽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살 수 있겠어요.”
물론 지금은 아닐지도 몰랐다. 신전에서 그녀를 이용해 카넨을 죽일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신전에 이용당해 주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신전에 갖고 있는 감정은 한없이 부정적이었으니, 그들의 뜻에 따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카넨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낄 뿐, 그가 실제로 그녀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처음에 그녀에게 성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죽이겠어.’
물리적인 방법으로 죽일 수 있다고 하지만, 도망가 버리면 그뿐이었다. 이제는 공간 이동 마법을 쓸 수 있으니. 게다가 ‘성녀’라고 공표된 이상 제국에서도 함부로 잡아갈 수도 없었다.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것조차 싫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없이 즐거웠던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를 좋게 생각했었고, 신전에서 본 서신이 거짓이라고 믿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기에 배신감이 더욱 컸다.
그래서 페리아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말하려고 했다. ‘싫다.’고.
“제발.”
그러나 발갛게 충혈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제게 비는 카넨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어차피 자신을 죽이지도 못하는데.
마음이 약해지긴 했어도, 페리아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한 번 배신했던 사람이 다시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었고, 그 어디에도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저는 저택으로 갈게요.”
다행히도 황제에게서 받은 저택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마탑에서 나온 뒤 갈 곳이 없어 정처 없이 헤맬 뻔했다. 벌써부터 성력을 이용한 배달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신전은 심리적으로 너무 불편했기에 그곳을 거처로 하는 것은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다.
“페리아!”
“그동안은 이혼을 유보하도록 할게요.”
“…….”
카넨은 계속해서 페리아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가 다시 ‘이혼’이라는 글자를 꺼내자 한없이 작아졌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빨리 답을 내기를 바라세요?”
“아닙니다.”
페리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답을 낼 수 있었다. 카넨이 매달렸기에 답을 내리는 것을 유보한 것뿐이다. 그러니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 전까지는 차라리 유보되는 편이 나았다.
언제 그녀에게 버림받을지 몰라 불안한 나날이 계속될 테지만, 그녀와 이혼하느니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옷을 완전히 벗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서.’
페리아는 다시금 흐트러진 자신의 매무새를 정리했다. 아직 확실하게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 만약 완전히 벗은 상태였다면 카넨과 어색한 상황에서 그에게 옷을 입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해야 할 뻔했다. 그렇다고 펭귄에게 부탁하기 위해 마탑에 제 발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페리아가 테라스에서 나가려고 하자 카넨이 황급하게 그녀를 뒤쫓았다.
“어디 가는 겁니까.”
“폐하께 인사드리러요.”
페리아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황제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황제는 다른 대신과 이야기하는 중이었지만 페리아의 굳은 얼굴과, 안절부절못하는 제 동생의 볼썽사나운 꼬라지를 번갈아 가며 보고 대신을 물렸다.
“다음에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지.”
“예.”
대신이 자리를 벗어나자 페리아가 조용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황제는 황권을 생각하고, 성녀를 이용하고 싶어 하니 굳이 카넨과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공표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그에게서 받을 게 남아 있었으니.
“저택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벌써……?”
아무리 얼굴을 비추라고만 했다지만,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오자마자 트라비안 공작 부처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바로 각자 테라스로 들어가 버리더니, 벌써 간다고?
그러나 더 추궁하기에는 동생 부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마탑이 아니라 ‘저택’으로 간다라. 제 동생의 꼬락서니를 보건대, 저 새끼가 잘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건 저 자식과 20년 이상을 형제로 지내 온 자신의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저택으로 제 거취를 옮길까 합니다. 저와 했던 약속, 잊지 않으셨지요?”
그의 예상대로 거취를 옮긴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아마 카넨은 마탑에 계속 살면서 페리아만 저택으로 가는 것 같았다.
“…사용인들의 급여?”
“네.”
“잊었을 리가 있나.”
저택의 규모가 제법 컸기에 그곳에 있어야 할 사용인의 수가 적지 않기는 했다. 게다가 그곳에 머무는 것은 대공비. 심지어 성녀이기까지 했으니 사용인의 수준도 높아야 했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그리 큰돈도 아니었다.
“그리고… 전에 폐하께서 말하라고 하셔서 온 거예요.”
“…….”
황제는 확신했다. 제 동생이 잘못한 것이 맞다고. 자신이 대공비에게 말하라고 한 것은, 카넨이 주제도 모르고 그녀를 힘들게 하면 제게 오라고 했던 것이다.
“황궁에 자리라도 내어 줄까.”
“무슨 자리요?”
“뭐든.”
황제는 그전부터 생각했던 것을 꺼냈다. 어차피 자신은 미혼의 황제고, 각국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혼담이 거추장스러웠다. 그렇다고 황후 자리에 아무나 앉힐 수도 없었다. 다른 나라의 공주를 앉히자니 그 나라와의 관계부터 생각해야 했고, 대신의 딸을 앉히자니 권력이 움직이는 것부터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페리아가 온다면 말이 달라졌다. 어차피 신성제국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러니 페리아가 대신관과 사이가 좋지 않아도 크게 신경 쓸 것이 없었다. 오히려 성녀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페리아가 왔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훨씬 컸다.
‘황후의 자리가 아깝지 않지.’
그때 커다란 파열음이 들리며 그들의 주변에 화살과 같은 얼음이 무수히 많이 쏟아져 내렸다.
“꺄아아악!”
주변에서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카넨이 개의치 않고 제 형을 불렀다.
“형님.”
속을 알 수 없는 황제라지만, 카넨에게는 달랐다. 어려서부터 함께해 온 사이였기에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제 형이 지금 꺼내는 말이 고작 시녀 자리를 주거나 없는 직책을 만들어서 그녀를 대우하겠다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노에 찬 카넨은 저도 모르게 황궁 내에서 공격 마법을 쓴 것이다.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어려서부터 맹세했던 것도 잊을 만큼 이성을 잃었다.
“황제, 오래 해야지.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자리인데. 응?”
제 형을 황위에서 끌어내겠다는 의도가 명백하게 담긴 말이었다. 주변에서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껏 큰 소란 없이 지내 왔던 그들이었는데, 갑자기 반역을 입에 담는다니. 뭇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페리아는 지금 그들의 대화를 여유 있게 듣고 싶지가 않았다. 황제를 끌어내든 어쩌든 그것은 그들의 가정사일 뿐, 자신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도 황족이라지만 카넨과 이혼하면 그뿐이었으니, 언제까지 황족을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문제를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리아는 슬쩍 손을 들어서 손끝에 성력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손에 모여 있던 성력이 황궁 내부에 퍼져 나가자, 그대로 황궁의 바닥이 카넨이 마법을 시전하기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니, 흠집 하나 없는, 궁궐을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페리아는 몸을 숙여 황제에게 속삭였다.
“폐하, 저는 폐하가 저를 죽이려고 했던 것도 알고 있어요.”
영상석에서 처음 나타난 모습은, 황제가 자신을 죽이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워낙에 충격적이어서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허튼소리하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내가 언제?”
“제가 처음 황궁에 입궁한 날, 집무실에서 카넨과 대화하면서요.”
시치미를 떼려던 황제는 페리아가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말하자 더 이상 우길 수 없었다.
“황궁을 수리해 드린 요금은 별도로 청구할게요. 폐하, 저는 가능한 한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
그러니 황제에게 저택으로 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녀는 조용하고 안락한 삶을 꿈꿔 왔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다른 나라로 이미 넘어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황제가 쓸데없는 행동을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로 가야겠지만.
황제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페리아는 싱긋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연회장을 나온 뒤에도 카넨이 계속해서 그녀를 쫓아오려고 했지만, 페리아가 그를 저지했다.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었지요.”
“…예.”
“먼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어째서!”
“그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답해 드릴까요? 저는 그래도 상관없어요.”
“…연락, 기다릴게.”
“…….”
페리아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답이 긍정적이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부정적이었다.
간절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뒤로하고 페리아는 자신의 마차를 챙겨서 그것을 타고 가 버렸다.
그녀가 돌아간 뒤 카넨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제 아내를 욕심내는 형이 있는 연회장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마탑에 돌아가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아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다.
“…….”
신전을 부술까. 아니다. 신전을 부순다면 페리아가 분노할 것이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페리아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나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 카넨.”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제 친우인 트라비안 공작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던가.
“트라비안…….”
“본론만.”
심각한 문제 같으니 보러 오기는 했으나 두고 온 제 아내가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아내를 데리고 와도 되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으니 일단은 그녀를 두고 온 것이다.
물론 아내 곁에 호위가 둘이나 붙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 아내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였고 모든 이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트라비안에게는 썩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페리아가 이혼을 요구했어.”
잠시간 트라비안의 말문이 막혔다. 분명 오늘 연회장에서 인사를 나눌 때만 하더라도 사이가 좋아 보였다. 성녀라더니 저런 모자란 것도 받아 준다고 생각해 내심 감탄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을 요구하기까지 하다니. 성녀가 겉으로 보기에는 성격이 드센 것 같아도 그렇게 홧김에 이혼을 요구할 이는 아닌 것 같아 보였기에 의아함은 더욱 커졌다.
“자리를 옮길까.”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그의 제안에 카넨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비안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 다른 귀부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제 아내를 챙겼다. 아무리 여자라고는 하지만 제 아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영 마뜩 잖았다.
“라비, 혹시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으음, 어쩌다가……? 그렇게 사이가 좋으셨는데.”
아내와 함께 연회장에서 나온 뒤에도 카넨은 멍하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카넨을 부르자 그제야 눈을 돌려 자신을 확인한 그가 공간 이동 마법으로 다 같이 공작저로 이동을 해 왔다. 그리고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제 아내가 준비한 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카넨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냐.”
카넨은 조금 고민하다가 트라비안의 질문에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제 주변에서 가장 훌륭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트라비안 공작이었다. 그리고 이전에 고민을 상담했을 때도 자신의 사례는 물론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방향성까지 제시해 주지 않았는가. 그러니 자신이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그에게 상담을 하고 조언을 구하는 것이 페리아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더욱 효과적일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던 카넨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트라비안 공작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카넨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트라비안 공작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카넨은 상황의 심각성을 트라비안이 인지한 것 같아 허심탄회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혹시라도 이전처럼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까 싶어서.
“…이렇게 된 거야.”
“…….”
트라비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에게 욕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겨우 참아 냈다. 그래도 황족이니까 있는 그대로 욕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욕을 쏟아 내고 싶어서 몇 번이나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서 지금 너는, 네 아내를 죽이려고 했다가 쓸모가 있어서 마음이 바뀌었는데 애초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것을 들켜 이혼당할 위기라는 거냐.”
“그게… 아주 틀리지는 않아.”
카넨이 잘 생각해 보니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지금이야 페리아의 효용보다는 그녀 자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다. 하지만 트라비안의 말 또한, 크게 봤을 때는 맞는 말이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왜?”
“…지금 왜냐는 말이 나와?”
트라비안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카넨이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쩐지 이전에 대공비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카넨 본인이 위협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서, 페리아의 마음을 돌리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카넨.”
“응.”
“지금 너의 상황에서는 어떠한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는다.”
“…….”
아무래도 카넨은 아직 상황의 중대함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카넨에게서 중요한 것은 ‘페리아가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지 ‘페리아가 저를 떠난 이유’가 아닌 듯했다.
“애초에 대공비가 너를 왜 떠났는가. 네가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죽일 생각이 없어.”
“지금은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은 나중에는 그럴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야. 페리아를 죽이다니, 말도 안 돼!”
카넨이 크게 부정하며 소리쳤지만, 트라비안 공작은 눈살을 조금 찌푸릴 뿐이었다.
“그걸 대공비가 어떻게 믿지.”
“…말해도 믿지 않았어.”
“신뢰를 잃었다가 쌓는 것이, 처음부터 쌓아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법이다.”
그러게 왜 그런 말을 했냐고 타박해 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 말을 들은 카넨이 이제야 조금 상황을 이해했는지 표정이 굳어 갔다는 것이다.
“만약 네가 나의 상황이라면,”
“나는 그런 멍청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신경 쓰지. 주워 담을 수 없기에 더욱 조심한다.”
“…만약이라는 말이야. 아주 만약에.”
“흐음.”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어?”
리첼이 나에게 이혼을 요구한다니……. 상상하고 싶지는 않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장담은 할 수 없었다. 리첼은 누구에게서라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은 그저 운이 좋게 그녀의 마음에 들어서 결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혹자들은 그와 리첼을 두고 세기의 로맨스다 어쩐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자신의 공작이라는 신분이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을 뿐, 리첼에 비하면 자신이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울어?”
“어?”
카넨의 물음에 놀라서 손을 눈가에 갖다 대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수건을 꺼냈는데, 아내가 직접 수를 놓은 것이 보여 더욱 눈물이 흘렀다. 트라비안이 황급히 그것을 닦아 내었다.
“안 되겠군. 내 아내에게 가야겠어.”
“잠시만!”
제 아내가 소중한 것도 모르는 머저리에게 쓸 시간이 아까워 아내에게 가려고 하는데 이 머저리가 거머리같이 들러붙었다.
“트라비안, 만약에 너라면 어떻게 할 건지 그것만 답해 줘.”
“이 답 없는 상황에 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뭔데?”
“빌어라. 무조건 빌어라. 인정에 호소해라. 대공비는 착한 사람이니 그것에 기대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만약 페리아가 들었다면 ‘제가 뭐 어떻다구요?’ 하면서 놀라 팔짝 뛰었겠지만, 적어도 트라비안 공작에게 있어서 아내를 치료해 준 대공비는 하늘에서 내려 준 성녀이자 놀라운 인격자였다. 저런 놈과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엄청난 인격자인 것이 확실했다.
“보석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그것부터 갖다 바치든가. 내가 그전에 했던 조언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을 행해라.”
트라비안은 카넨에게 어차피 공간 이동 마법으로 가니 배웅은 필요 없지 않느냐고, 알아서 꺼지라는 말을 남기고 제 아내에게 달려갔다.
“리첼!”
평소와는 달리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등장한 트라비안 공작을 본 리첼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에도 트라비안은 성큼성큼 걸어가 제 아내를 품에 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비,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아요?”
트라비안은 그저 제 아내를 끌어안고 제 품에 그녀가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려고 했다.
“혹시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께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중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카넨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었지만, 트라비안 본인에게는 전혀 중요치 않은 일이었다. 제 아내와 관련이 없는 일은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연회장에서는…….”
“내게 집중하세요, 리첼. 저는 언제나 당신이 부족합니다.”
***
저택으로 간 페리아는 분노에 차 있었다. 확실히 카넨이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과거에는 제 생명을 위협했을지 몰라도 지금 자신을 죽이는 것은 엄청나게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카넨은 자신이 꽤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당황하던 표정, 울먹거리던 얼굴까지 무엇 하나 거짓처럼 보이지 않았다. 태어나기를 오만방자한 황족으로 태어났고, 넘치는 마력까지 소유하고 있던 카넨이었다. 그러니 그는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거짓을 꾸며 내는 데에 서툴렀다.
‘그런 것은 황제가 잘했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시치미 떼던 모습이란.’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었다. 역시 정치인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페리아를 진짜로 화나게 한 것은 자신을 죽이려 한 카넨과 황제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엔 대신관이 꾸며 낸 대로 자신과 카넨이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점이다.
카넨이나 황제가 자신을 못 죽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엄청나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뿐이지. 그러나 대신관은 정말로 그가 원하는 대로 그녀가 움직이게 하지 않았나. 그것이 가장 화가 났다.
똑똑.
페리아가 침실의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면서 씨근덕대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페리아 님.”
페리아가 저택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호칭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대공과 이혼할지도 모르는데 대공비 전하라고 불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녀라고 불리고 싶지도 않았다. 여자 주인공이 나타났을 때도 자신이 성녀라고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응.”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설마 카넨이 벌써부터 쫓아온 건가.
몸을 일으켜서 손님을 맞이할 응접실로 가야 하나 고민했다.
“예, 연회에서 본 이라고 전하면 아실 거라고 하였습니다. 쫓아낼까요?”
“응, 내가 연회에서 본 사람이 한둘…이…….”
그때 페리아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연회에서 본 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다 작위와 가문을 밝히고 새로운 황족이자 성녀에게 잘 보이려고 할 때, 자신을 밝히지 않은 사람.
“기다려! 응접실로 안내해.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대신관. 대신관 에녹. 그밖에 없었다.
페리아는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 하녀를 불렀다. 어차피 대신관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으니 저를 기다릴 것이고, 드레스는 자신의 전투복이었으니 멋드러지게 꾸며서 갈 생각이었다.
곧이어 들어온 하녀들이 페리아를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히고 머리도 다시 매만지고 화장도 정돈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리아는 일부러 보란 듯이 카넨의 마력석으로 만들어진 귀걸이와 목걸이를 착용했다.
‘좋아. 이제 가도 되겠어.’
마력석으로 만든 장신구를 착용할까 말까 두세 번 들었다 놓았다 했지만, 그것만큼 화려하면서도 대신관의 기분을 상하게 할 효과적인 것을 찾지 못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맨 처음 신전의 기분을 상하게 하겠다며 나와 결혼하려고 했던 카넨의 마음을 알 것 같네.’
페리아가 성큼성큼 걸어가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하녀가 노크를 한 뒤에 문을 열었고, 그곳에는 어제 본 이가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그래요, 뭐라고 부르면 되나요?”
처음엔 그를 대신관 에녹이라고 확신했지만 다짜고짜 그렇게 부를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아닐 가능성이 존재했다. 하지만 빙의하기 전 읽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법칙에 따르면, 잘생긴 사람은 주요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으니 어느 정도 그를 에녹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편할 대로 불러 주십시오.”
“음, 에녹?”
그의 이름을 부르자 남자의 눈썹 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서 불편한 심기가 드러나는 것이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다.
별로 존중해 주고 싶지 않아서 이름을 부른 것이었는데, 그는 나를 ‘성녀님’이라고 이미 칭했으니 호칭에서부터 나와 그의 우위 관계가 드러난 것 같아 즐거웠다.
“…대신관이라 불러 주십시오.”
예상대로 그는 대신관이 맞았다. 나를 사지로 몰아넣고, 수도에 전염병을 퍼뜨렸으며, 지금 내 기분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왜 온 건가요?”
“모시러 왔습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디로요?”
“성녀님께서 계실 곳으로요.”
대신관이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원작에서의 여자 주인공은 갑자기 이 세상에 온 직후에 신전에서 거둬져 그들이 하는 말이 진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온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고, 굳이 신전에 의탁하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즉, 내가 아쉬울 것은 전혀 없다는 이야기였다.
“제가 왜요?”
“성녀님께서는 이곳에 대해서 잘 모르시겠지만…….”
지금 뭐라는 거야?
원작을 봤기에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고, 이곳에서 지낸 지 1년이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신관은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으니 나를 회유하기 위해 시답잖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소설 속에 떨어졌던 원작의 여자 주인공이라면 모를까, 내가 넘어가기에는 감언이설이 분명한 이야기들이었고,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래서 신성제국으로 오시게 되면 저와 함께 다른 나라를…….”
“저기요.”
“예? 저를 부르신 겁니까?”
“결국에 다른 나라 침략하자는 이야기인 건 알겠는데, 다른 건 없어요?”
“그게, 침략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본론을 이야기하니 대신관이 당황했다.
그렇겠지. 신을 모신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 좀 대신 죽여 달라고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민망하겠어.
“신성제국에 가서 성녀로 인정받은 뒤에 전쟁터에 나가 다른 사람들을 죽이지 않더라도, 저는 이미 이곳에서 성녀로 인정을 받았는데요.”
내가 길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얼마나 환호하는 줄 알아?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는 몇몇 귀족 영애들만이 내가 카넨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에 흰 눈 뜨고 보지, 대부분은 나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대공비이자 성녀였기 때문에.
그러나 대신관은 리히엔으로부터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나를 그저 카넨의 손아귀에 들어간 안타까운 여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를 대하는 듯한 말투로, 많은 정보를 숨긴 채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신성제국에 가서 굳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바르칸 제국의 황제 폐하도 제게 황후의 자리를 제안했어요.”
황제가 제 동생의 아내에게 황후 자리를 제안하는 막장 스토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대신관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제시했어야죠.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왔나 했더니.”
대신관의 말에 따르면 신성제국에 간다 한들 나에게 득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성녀를 전면에 내세우는 듯하지만 실권은 대신관 본인이 갖겠다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런 데다 많은 전쟁을 치르며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그들을 속국으로 삼자는 이야기였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솔직히 바르칸 제국의 황후 자리가 명목상으로는 훨씬 나았다. 굳이 전쟁을 치르지 않더라도 많은 나라를 속국으로 삼고 있는 데다가, 내가 성녀이니 신성제국과의 전투도 어쩌면 쉽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신관이 실권을 지니고 있든, 황제가 실권을 가지고 있든 결국 나에게 실권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기도 했고.
물론 현 황제인 카르파도 카넨과 마찬가지로 나를 죽이려고 한 데다, 전남편의 형과 결혼하는 미친 짓을 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황제가 한 제안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왜 내 주변에 있는 남자는 다 이따위인 거야?’
카넨은 나를 죽이려고 하고, 황제도 나를 죽이려고 하고, 대신관도 나를 죽이려고 마수가 있는 서부의 로테카트에 보내려고 했었다.
그래도 대신관은 전염병을 퍼뜨려서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는 계획을 짰었고, 황제는 황제답게 거짓으로 점철된 능글맞은 인간인 것에 비하면 그나마 카넨이 나은 건가…….
‘제삼자를 찾아볼까.’
그렇다고 하기엔 괜찮은 사람이 없었다. 이 소설의 서브 남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서브 남주를 꼽으라면 트라비안 공작일까?
선택지에 이름을 올리기도 전에 지워 버렸다. 어디서 지 아내밖에 모르는 놈을.
“그래서, 같이 가지 않으실 겁니까.”
대신관이 조금 전까지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너를 위해 가르쳐 준다는 뉘앙스로 말하던 것을 집어치웠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딱딱하게 말했다.
“그쪽 같으면 다른 사람이 병에 걸리든 말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겠어요?”
“저는 성녀님이 치료하실 수 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둘째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성녀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는 대공비가 성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수도 및 인근의 신관들이 수도 내의 전염병을 치유하며 신도를 늘리고 최대한 많은 양의 헌금을 걷을 수 있도록 한다.”
내가 말하는 동안 대신관의 얼굴은 이전보다도 더욱 굳어 갔다. 리히엔 신관에게 성력을 써서 보낸 편지에 있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었다. 아마도 그는 내가 그것을 읽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내가 판단을 잘못했던 모양이군.”
“알았다면 이제 꺼지시죠.”
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카넨과도 이미 별거는 확정이고,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굳이 신전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가진 힘에 비하면 훨씬 조용하게 살 생각이었다.
“성녀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하는데, 맞나.”
“맞아.”
아까 전부터 말이 짧아졌다 싶었는데, 기분 탓이 아니었다. 나에게 반말을 하는 사람에게 굳이 존댓말을 같이 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대신관은 여태껏 남들이 우러러보는 것만 경험해 봤는지, 고작 나의 대답 정도에도 조금 충격받은 듯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도 모르냐!
“…내게 협조한다면, 네가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지.”
“뭐?”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원작에서의 여자 주인공에게는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단 말이야?
“어떻게?”
“그걸 지금 내가 말할 것 같나.”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방법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방법만 알면 나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성력이 대신관보다 많을 테니까.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가지 않아도 괜찮아. 필요 없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관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엄청난 특혜라도 되는 양 말했다. 물론 다른 세상에서 차원 이동해서 왔던 원작의 여자 주인공인 유리나라면 혹해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설 속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대신관이 여자 주인공에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회유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차원 이동한 유리나와 달리, 이전 생에서 깔끔하게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하고 빙의한 것이다. 이전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뼛가루가 되어 유골함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니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낸다면 오히려 곤란했다.
“후회하지 않겠나.”
“돌아가면 후회할걸.”
물론 이전 생에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이 여러 가지 떠올랐다. 하지만 그곳에서 힘들게 살던 반지하 단칸방과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을 사 먹지 못했던 나의 빈 지갑, 취업도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찾으려고 해도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지던 지난날 역시 떠올랐다.
고작 과거에 맛있게 먹던 음식을 추억하고자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멍청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택에 딸린 화장실이 내가 살던 단칸방보다도 컸다. 게다가 이곳의 음식 또한 내 입에 맞았다. 취업 걱정 없는 충분한 성력도 있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저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신관이 내게 성력을 쓰기 전까지는.
“잠시 정신을 잃어줘야겠어. 정신이 들고 나서 다시 설명하도록 하지.”
갑자기 하얀 성력이 내 눈앞을 가리고, 내 몸 안에 있는 성력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분 나쁜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휘젓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뭐 하는 거야?”
다만 대신관이 제게 한 짓은 기분이 더러울 뿐 그 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대신관의 말을 들어 보면 내가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어야만 할 것 같았는데, 전혀? 졸린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너 뭐야.”
“뭐긴 뭐야, 네가 알고 있는 사람이지.”
“마력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성력이 안 통할 수가 있지?”
“글쎄?”
솔직히 말하면 나도 왜 그런지 전혀 모르겠다.
“마탑주 자식인가.”
마탑주… 카넨. 대신관의 말을 듣고 결혼식 날 카넨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서 만든 건데, 이제 당신에게는 성력도 통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카넨이 만들어 준 반지에 눈이 갔다.
‘…카넨.’
비록 지금은 따로 있지만, 카넨이 대신관으로부터 나를 지켜 준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생각이 났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그를 떠올리면서 좋았던 기억을 곱씹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카넨이 그때 이 반지를 주지 않았더라면 대신관의 손에 끌려가 그가 좋을 대로 이용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찼다.
“그럼 네가 할 일은 다 한 거야?”
이제 내 차례네? 굳이 척지고 싶지 않아서 처음 봤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던 것을 참아 왔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다.
나는 이전에 신전에서 리히엔의 성력을 빼앗던 것처럼 손에 힘을 모아 대신관의 성력을 뽑아내려고 했다. 그의 몸에 모여 있던 성력이 덩어리째 뽑혀서 나오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나도 모르게 사악하게 미소 지으며 힘의 우위를 점한 것에 기뻐하던 찰나였다.
‘이전과 다른데?’
몸 밖으로 일부 나올 뿐, 리히엔 때처럼 확 뽑히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당황스러워서 더 확 뽑으려고 하는데도 잘 되지 않았다.
“다음에 보도록 하지.”
그리고 대신관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공간 이동을 한 것이다. 내게 잡힌 성력을 조금 남겨 둔 채 사라진 것을 보니, 완전히 추스르고 갈 수는 없던 모양이다.
***
대신관은 황급하게 공간 이동을 한 신전에서 자신의 성력을 추슬렀다. 하지만 이미 많은 양의 성력을 잃은 뒤였다. 그래도 성력은 자연히 회복되는 성질이 있기에 기다렸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의 성력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대로 내 성력을 빼앗긴 건가?’
성력이 빠르게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 더 많은 성력을 잃기 전에 급하게 공간 이동을 하려고 하다 보니 가까운 신전으로 오게 되었다. 성녀의 산하에 들어간 수도 신전을 제외하니 어쩔 수 없이 황궁 내에 있는 비밀 신전으로 이동해 버렸다.
‘성녀가 따라왔더라면 곤란할 뻔했군.’
그러나 성녀는 다행히도 자신을 따라오지 않았다. 이 신전은 언제든 제국을 침략할 수 있도록 발판으로 삼기 위해 마련해 놓은 곳이다. 성녀가 뒤쫓아 와 이것을 들켰다면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뻔했다.
성녀가 제국의 황후 자리가 신성제국의 성녀보다 좋다는 듯이 말했지만, 제국은 언제든 신전의 침입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성녀가 자신을 장식한 대부분의 장신구를 마력석으로 만들어 착용한 것은 의외였다. 당연히 마법사가 준 것은 가져다 버렸을 줄 알았는데. 그 마력으로 이루어진 기물들이 성력을 더럽히는 것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성녀가 우리 신성제국으로 온다면 곧바로 바르칸 제국을 칠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성녀가 마법사와 완전히 틀어진 것 같아 보이진 않으니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제 성력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 정도밖에 남지 않은 성력이라면 고위 신관은커녕 평신관으로 내려앉게 될 수도 있었다.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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