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6
페리아와 카넨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분명 외곽이긴 했어도 황궁의 정원이 맞았다. 그녀가 최근까지 일을 하다가 땡땡이치러 이따금씩 왔던 곳이기도 하고, 카넨이 어린 시절부터 자랐던 곳이기도 했으니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곳을 지금껏 몰랐을 수가 있지?”
카넨이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로 씹어 뱉었다. 그가 분노하는 당연했다. 완전 무장한 수백의 성기사들이 황궁에 갑자기 들이닥친다면, 제대로 방어할 수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때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그의 하나뿐인 혈육, 황제일 것이다. 그리고 카넨 역시 제 형을 지키기 위해 마력을 쓰다가 성기사들의 손에 죽을지도 몰랐다.
카넨이 건물 자체를 불태워 버리려고 마법을 시전했다.
“잠시만요, 카넨!”
“왜.”
카넨이 분노에 사로잡혀 존댓말도 집어치워 버렸다.
“건물의 크기가 이상해요! 건물이 너무 작지 않아요?”
눈에 보이는 건물의 크기가 자신이 안에 있을 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문을 열자 다시 나타난 곳은, 커다란 예배당이 아닌 황실의 정원사들이 사용하는 각종 기구들을 모아 놓은 창고였다.
만약 카넨이 이를 불태웠다면 성력으로 연결된 공간만 남고 외부에서 보이는 입구가 사라져 더욱 곤란했을 것이다. 갑자기 공중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것으로 보였을 테니 말이다.
카넨이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마력을 소모해 가며 대형 마법을 시전하는지 무어라 계속 중얼거리자 인근에 번개가 치며 하늘이 까매졌다.
“…카넨, 화가 나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아요.”
“왜지?”
“이곳을 누가 드나드는지 몰라도, 나중에 반격이라도 하려면 우리가 이 공간을 알아챘다는 걸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아요.”
솔직히 국가를 전복시킬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이곳을 들켰다고 다른 곳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조용히 매복하고 있다가 들어오는 사람들을 확 덮치는 게 더욱 편하겠지.
카넨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다시 날씨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카넨의 심난한 마음과 달리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카넨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입구에 덫을 놓고 싶었다. 성력을 가진 이가 밟는다면 곧바로 바닷속 저 깊은 곳으로 이동하게 되는. 아니면 성력을 가진 이가 밟는다면 곧바로 몸에 있는 뼈가 녹아내리는 그런 덫. 그러나 페리아의 말대로 후일을 위해 당장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혹시라도 그들이 입구에 설치된 덫의 마력을 탐지할 수도 있었다.
“하아, 정말 어이가 없군. 언제 이런 걸 설치해 둔 건지. 대체 얼마나 황실을 우습게 봤으면.”
마른세수를 하는 카넨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붉은 눈이 살기를 담고 있었다. 페리아는 그런 카넨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달래 주었다.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으며 화를 가라앉힌 카넨이 정신을 차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형님에게 가야겠습니다.”
“그래요.”
카넨은 페리아가 긍정의 답을 내놓자마자 곧바로 공간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가 함께 갈 때는 집무실로 곧바로 온 적은 없었기에 갑자기 등장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황제가 깜짝 놀랐다.
눈을 끔뻑이며 그들을 바라보는 황제에게, 카넨이 딱 잘라 말했다.
“우리가 집무실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보다 놀라운 일이 있어.”
“썩 달갑지 않은 이야기일 것 같구나.”
카넨의 굳은 얼굴을 보자마자 황제의 표정에 긴장이 서렸다.
“황궁 내에 아공간이 있어.”
“…아공간이라니?”
“그 말 그대로야. 황궁 내에 적어도 수백의 기사가 불시에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이 연결되어 있었어.”
아까 전보다도 훨씬 침착해진 목소리로 카넨이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그것을 들은 황제가 아연실색해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우리도 황궁의 정원으로 연결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황제는 더더욱 놀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손 아래 있다고 생각했던 공간에서 생긴 일이었으니.
“내가 문을 열었을 때는 평범한 창고였어. 그런데 페리아가 열었더니 그 공간이 나타나더라고. 성력이 있어야 열 수 있는 공간인가 봐.”
“…신관들이 그 공간에 대해서 알고 있을 가능성은?”
“햇빛 하나 들지 않는 공간이었는데 곰팡이는커녕 먼지 한 톨 존재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다양한 종류의 무기가 모두 날이 선 채로 도열해 있었어요. 최근까지 관리가 되고 있었다는 증거죠.”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도 위험한 공간을 발견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대체 언제부터 황궁과 연결되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곳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더더욱 위험해졌을 것이다.
우선 나와 카넨이 그곳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내부 구조를 그린 후 각각의 방마다 있었던 것에 대해서 설명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다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런 공간이 또 있을 가능성은?”
“…정말 솔직히 말하면, 없다고는 말 못 해.”
“지금으로서는 신전이 독단으로 그러한 공간을 연결한 것인지, 아니면 국내의 유력 귀족… 어쩌면 우리 바르칸 제국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적국과 손을 잡은 것일 수도 있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내용이었으면 ‘짜잔~ 사실은 이런 것이었답니다!’ 했을 텐데… 원작에는 이런 내용 없었다고! 원작의 작가님이 너무 카넨과 여자 주인공의 연애에만 치중한 나머지 이런 황궁 안에 숨겨진 신전 따위의 정보는 전혀 듣도 보도 못했다.
미래를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겠지만, 이곳이 책 속이고 원작을 다섯 번이나 재탕 뛴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 미래는 불안하기만 했다. 하기야, 이제는 미래라고 해 봤자 대부분이 카넨과 여자 주인공이 얼마나 눈꼴시게 연애하는지가 대부분이구나.
“우선 제 판단하에 현장을 보존해 뒀어요. 우리가 그곳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을 알릴 이유는 없을 것 같아서요.”
“…그래. 일단 어떻게 된 것인지 관련 기록이 있나 찾아보도록 하지.”
“저는 어차피 오늘 신전에 갈 예정이었으니 그쪽에서 관련 기록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할게요.”
황제가 감격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부담스러워……. 카넨과 똑같은 붉은색 눈이 자신을 바라보니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해 버렸다.
“대공비, 이번에 전염병이 해결된 것도 그대가 크게 활약해 주었다고 들었네.”
아, 맞다. 전염병 다 해결됐는지 황제에게 물어보기 위해 오려고 했는데, 숨겨진 신전이 너무 충격적이라 잊고 있었다. 전염병이 해결됐다고 하니 다행이다. 대신관 그 나쁜 자식도 내가 성녀인 걸 알았으니 성녀인지 확인하겠답시고 허튼 짓을 하지는 않겠지.
여자 주인공이 이 세상에 온다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성력과 성녀라는 직책이지만, 남은 시간 동안 대신관이 더 이상 귀찮게 하는 것은 사양이다.
“그렇죠. 사건이 커지면 좀… 찝찝할 것 같았거든요.”
“신관들이 뒤늦게 나타나기 전까지 대공비가 환자들을 직접 치유했다고. 그런데 그 대공비가 성력을 가진 성녀라고 수도 내에 소문이 자자하네. 덕분에 일반 백성들의 황실의 지지도가 더욱 올라갔어. 아주 고맙네.”
고마우면 말이 아닌 물질로 보여 줬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트라비안 공작이 입궐해서 하는 말이, 대공비가 신의 현신이라던데? 그대를 모시는 신전을 세워 주겠다고…….”
“…저를 모시는 신전이요? 사양할게요. 그냥 성력 조금 쓰는 정도예요.”
그렇다! 내가 신의 현신이다! 내가 바로 만병통치약 제조기다! 하지만 원래 있던 수도 내의 신전으로 가면 되는데 굳이 신전을 따로 세울 필요가 있나.
넓디넓은 신전 안에 내 초상화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을 걸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속마음과는 달리 겸손한 척 답했다.
“그런데 치료소 방향에서 터져 나온 그 황금색의 빛은 무엇인가? 성에서도 보이던데. 게다가 신전에서는 그대에게 신이 강림했다고 하고.”
“신이 강림한 건 잘 모르겠고, 트라비안 공작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서 성력을 조금 많이 모았더니 빛이 나온 거예요.”
“흐음… 대공비, 역시 카넨이 자네 마음에 안 들면 언제라도 내게 와서 말을 하게나.”
“굳이 폐하께 말씀 안 드려도 제 선에서 해결 가능할 것 같은데요…….”
마력도 안 통하는 성력 충만한 내가 뭐가 아쉬워서 황제에게 손을 뻗겠어?
나의 오만한 말에도 황제는 키득키득 웃었다. 카넨이 웃을 때랑 눈꼬리 접히는 게 똑같았다.
“아쉽군. 혹시라도 필요하다면 말이야. 이번에 고생했을 텐데, 신전에 가기 전에 선물이라도 줄까?”
“선물은 언제나 환영이죠! 제가 이따가 숨겨진 신전에 관련된 정보를 열심히 찾아볼게요!”
“그래, 그래.”
황제는 전처럼 종을 울려 시종장을 불렀다. 그리고 그를 따라가서 갖고 싶은 거 아무거나 가져가라고 했다.
“저 그러면, 막 공간 이동하면서 옮겨도 돼요?”
“…집으로 잘 갈 수 있습니까?”
가만히 있던 카넨이 갑자기 폐부를 찌르는 발언을 했다. 갑작스러운 정신적인 타격에 회복이 힘들었다.
“그, 그냥 욕심부리지 않고 들고 올 수 있을 만큼만 들고 올게요.”
그전에 갔을 때 하나만 고르느라 진땀 뺐는데 이번에는 다 가져올 생각을 하니 너무 즐거웠다.
“보물보물, 반짝이는 보물. 으흥흥흥.”
***
“그전에 작위 줄 때도 생각했지만, 대공비는 정말 물욕에 충실한 사람이네.”
“그래 놓고 대공비가 되고 나서 쓴 돈은 거의 없어.”
돈 쓸 시간이 없는 원인을 제공한 카넨이 그런 말을 했다면 페리아가 어이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페리아는 그저 보물을 쓸어 올 생각에 경쾌하게 투스텝을 밟으며 시종장을 따라가고 있었고, 투스텝 밟는 황족을 처음 본 시종장은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라고 되뇌며 빠르게 보물고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
“트라비안한테 대강 들은 거 아냐?”
“진짜 대강만 말하고 사라졌어. 자기 아내랑 시간 보내야 한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너나 트라비안 공이나 아주 황제 알기를 우습게 알지!”
그러면서도 황제는 ‘공작은 서신 보내니까 어쩔 수 없다는 티를 내더라도 왔다가 빠르게 사라지기라도 하지, 대공이라는 놈은 편지를 보내도 받았다는 말도 없고 오지도 않는다’고 웃으며 비난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력은 없고, 사람은 치료해야 하고. 그래서 신관들에게 도와 달라고 하려고 신전에 갔는데 신전에 억류됐었거든.”
“미친 거 아냐? 누가 대공 부부를 억류해? 어느 신관이야?”
“리히엔이라는 신관이었는데, 이제는 신관 아니야.”
“리히엔 신관이면 나에게 대신관의 서신을 전달하러 왔던 작자로군. 그 작자가 왜 신관이 아니야? 대공비에게 파문이라도 당했나?”
장난스럽게 농을 던지며 킬킬대던 카르파에게 진지한 얼굴의 카넨이 말했다.
“어. 페리아가 성력을 가져가던데?”
“…뭐?”
“페리아가 리히엔의 성력을 가져가더니, 성기사들을 시켜서 신관복을 빼앗고 신전 밖으로 내쳤다고.”
“…….”
“놀랐지? 나도 당시엔 그랬어.”
카넨은 그저 신전에 성녀가 자기 손아귀에 있다는 걸 놀리듯 보여 줄 요량이었다. 성녀가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을 알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는 성녀를 오로지 카넨의 마력을 없애기 위해서 한없이 기다려야 할 테니까.
그런데 고위 신관의 성력을 가져갈 수가 있다니. 정말 신의 현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제 카넨은 그녀가 성력이 충만한 게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여기저기서 페리아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녀는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충분했다.
‘처음 결혼하기로 했을 때처럼 그저 놀고먹으며 탑 안에만 있어도 좋은데.’
오히려 그녀를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아쉬웠다. 이제 대신관이 저지른 문제도 해결했으니 자신과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면 좋은데, 신전은 둘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게 두지를 않는다. 이전에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부터 생각했지만, 신전은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너, 대공비한테 잘 보여라.”
“안 그래도 요즘 미칠 것 같아.”
“대공비가 보기보다 성격이 더럽나 보지? 너 같은 인성 파탄자가 대공비 앞에서 성격 죽이려면 고생하겠네.”
형이 킬킬대며 자신을 놀리자 카넨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페리아가 신전에 간다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졌다. 그러니 적당히 원하는 걸 쥐여 주면서 신전에 가지 않게끔 하는 것은 쉬웠다. 그냥저냥 보석이나 드레스를 사 주고, 가끔 꽃이나 보내면 그만일 것이다. 이전까지 그래 왔듯 이번에도.
하지만 카넨은 이전처럼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을 배신하려고 하면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다고. 오히려 그녀에게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매달리라고 하면, 무릎 꿇는 건 힘들더라도 빌어 볼 만할 것 같았다. 물론 황제는 카넨이 그럴 거라고 상상도 못 하지만.
한숨을 삼킨 카넨이 황제에게 툭 내뱉었다.
“형이나 페리아한테 잘해.”
“음, 나는 너랑 달리 황실 보물고 털어서 선물 주는데?”
비아냥대듯 즐겁게 말하는 황제에게, 카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똑똑.
“대공비가 왔습니다.”
마침 페리아가 왔음을 시종이 고하자,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고 문이 열렸다. 해맑게 웃으며 돌아온 페리아는 머리 위에 티아라를 얹고, 목에는 목걸이를, 왼 손목에 두 개의 팔찌, 오른 손목에 또 한 개의 팔찌를 했다. 그리고 결혼반지를 제외하고 새로운 반지 두 개를 끼고 나타났다.
정말이지 물욕에 충실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페리아를 보며 형제가 할 말을 잃고 허허로이 웃었다. 그러다 먼저 정신을 차린 황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걸로 되겠어? 더 가져도 되는데.”
“폐하……!!!!”
페리아가 감격에 찬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자 카넨은 배알이 꼴리는 것 같았다.
“제가 다 사 드릴 테니까 안 가져와도 괜찮습니다.”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예요, 카넨. 네 돈이 내 돈인데. 준다고 하면 그냥 감사히 받는 거예요.”
“…신전 가 봐야지. 신관들이 기다릴 거야.”
황제와 페리아 두 사람의 눈이 모두 동그랗게 뜨였다. 황제의 눈은 신전이라면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어 하는 카넨이 먼저 신전에 가자고 하는 게 놀라워서 그런 것이었고, 페리아의 눈은 보물에 눈이 멀어 신전을 새까맣게 잊고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다, 다음에 가져가도 돼요?”
페리아가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표정으로 묻자, 황제가 흔쾌히 그러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행복에 겨운 얼굴로 손끝에 성력을 모아 황제의 팔을 톡 쳤다.
“감사합니다, 폐하!”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황제도 카넨도 손 쓸 새가 없었다. 페리아의 손에 모여 있던 황금색 빛이 황제에게 스며들자, 황제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 아니…….”
카넨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고, 페리아는 여전히 행복해하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대공비.”
“네?”
“만약 저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자네를 힘들게 하면, 황궁으로 오게. 반드시.”
“그럼 제 편 들어 주실 거예요?”
페리아가 가볍게 물은 질문에 황제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신전에서 무엇을 해 주든 그것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해 줄 것을 약속하지.”
“음… 그럴 거면 떠나기 전에 해 주는 게 아니라 미리 해 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잘해 줄 수 있을 때 미리미리 잘해 주란 말이야. 떠날 것 같을 때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도록 하게.”
“솔직히 지금 부족한 게 없어서……. 혹시 필요하면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황궁에는 편할 때 오도록 하게. 대공비가 머물 궁을 새로 지어 주도록 하지.”
헐. 헐. 헐……. 그래, 나한테는 궁이 없었구나. 아니, 근데 내가 황후도 아니고 황자비도 아니고 황녀도 아닌데 당연히 궁이 없지!
“제가 궁에서 머물 날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요……. 차라리 수도 내에 땅값 비싼 곳에 화려한 저택이나 한 채 지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제 명의로.”
혹시라도 카넨과 이혼하더라도 내가 머물 집 한 채는 있어야지. 카넨과 이혼한 마당에 그의 형인 황제가 있는 황성에 살 수도 없고. 그런 마음을 담아 <내 명의>를 특히 강조했다.
“조속히 처리하도록 하지. 기억하게, 카넨이 싫어지면 황궁으로 와.”
“형,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지금 페리아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바라는 것 같은데?”
황제는 그의 말에 싱긋 미소 지을 뿐 무어라 답하지 않았다.
“형님, 저는 형님께서 오래오래 황제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별로 황제가 되고 싶지도 않고요.”
그 말을 끝으로 카넨이 페리아의 손목을 잡고 예고도 없이 신전으로 공간 이동을 해 버렸다.
집무실에 혼자 남은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그는 페리아를 그저 하나뿐인 혈육인 카넨의 마력을 채워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마력이 다 닳게 되면 죽게 되는 동생이 언제나 안타까웠는데, 그녀의 등장으로 동생이 안타깝지 않게 됐다. 조금 괘씸하기도 했다. 감히 형을 제치고 먼저 결혼하다니. 자신은 일의 요정이라 불리며 일에 치여 사는데.
그런데 이 땅에 몇백 년 만에 성녀가 나타났고, 그 성녀는 신의 현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성력은 진짜였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서류 업무로 인한 허리와 목 등의 통증은 물론 만성적인 피로까지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까.
‘카넨이 페리아를 죽인다고 하면 카넨을 저 멀리 치워야 할 지경이네.’
카넨에게는 마수를 죽이게 하든 다른 여자들을 붙여 주든 해서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 페리아에게는 황궁의 보물고 열쇠를 주든, 자작위가 아닌 공작위를 주든. 아니면 카넨이 함부로 할 수 없게 그녀를 황후로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자작위를 준다고 했을 때 좋아했으니, 공후백이 아닌 이 나라 여성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지위인 황후도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카넨이 반역을 언급하다니. 그녀에게 빠지기라도 한 모양인가?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괜찮았다.
‘카넨이 괜히 쓸데없이 페리아를 공격하느니, 그녀에게 설설 기는 것을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
황제는 키득키득 웃으며 시종장을 불렀다.
“대공비에게 저택을 하사할 예정이니 가장 지가가 높은 곳으로 알아보도록.”
“예? 위치가 가장 좋은 곳이 아니라요?”
“그래. 그게 대공비의 취향이니.”
시종장은 분부에 따르겠다고 답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황제는 확신했다. 페리아의 취향은 위치 따위가 아닌 값어치일 거라고. 나중에 이것을 알게 된 페리아는 역시 폐하는 성군이라며 그의 안목에 감탄했다.
***
“성녀님!”
“성녀님께서 오셨다!”
…그래, 이래야 신전이지.
갑작스러운 이동에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주변을 돌아보니 분명 지난번에 왔던 그 예배당이었다. 물론 그곳에서의 좋은 기억은 없지만, 도착하자마자부터 기다리다 지쳤는지 그곳의 긴 의자에 앉아 있던 신관들이 벌떡 일어나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반겼다.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걱정했죠? 중간에 일이 좀 있어서.”
“아닙니다! 저희는 성녀님께서 언제 오셔도 괜찮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다른 신관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복창했다.
“그, 그래요. 이번에 전염병이 완전히 해결됐다고 들었어요. 모두 고생해 줘서 고마워요.”
“신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원래부터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신관들이 저마다 대답을 하니 대화가 진행되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얼른 리히엔 신관이 남긴 문서를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조금 초조해하고 있었는데, 카넨이 나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들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리히엔 신관이 남긴 문서를 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카넨의 말에는 귀신같이 침묵을 지켰다. 정말로 신관들이 마법사를 싫어하는구나……. 원작에서는 마법사의 마력을 신관들이 더럽다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자세한 설명은 없어서 모르겠다. 나중에 신관들과 카넨에게 물어봐야지.
“문서를 볼 게 아니라면 저는 이만 돌아가고 싶은데요.”
“아닙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문서를 발견한 것은 접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제가!”
“제가!”
수십 명의 신관이 제각기 주장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나 좀…….”
결국 모든 신관들과 함께 우르르 리히엔의 방으로 가게 되었다. 리히엔의 방에는 하일과 나, 카넨 이렇게 세 명이 들어갔다. 수십 명이 우르르 이동해 보니, 제어하기 편한 하일 한 명 데리고 다니는 게 훨씬 나았다는 것을 깨달은 결과였다.
“이 문서들입니다. 나머지 문서들은 이미 저희가 봤는데, 크게 이상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혹시 성녀님께서 살펴보시고 싶으실 수도 있어 주제별로 분류해 두었습니다. 크게 마수, 전염병, 지방의 신전, 수도의 신전, 신성제국, 신전 운영, 그 외. 이렇게 일곱 가지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보시고 싶으시다면 신전 내 서고로 가시면 시기에 따라 방이 존재하며, 그 방 안에 주제에 따라 다시 나눠져 있으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혹시 서고의 방의 개수는…….”
“어림잡아 30개 정도 됩니다.”
그걸 언제 다 봐……. 일단 리히엔의 방에서 나왔다는 문서만 먼저 봐야겠다.
“그래요…….”
알겠다고 답은 했지만, 내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문서 중 하나는 카넨에게 읽으라고 먼저 주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읽으려고 했다. 아무래도 내가 두 개 다 읽고 설명하느니, 하나씩 바꿔서 읽는 것이 시간이 더욱 절약될 테니까.
“페리아, 이 글자 읽을 수 있습니까?”
“…카넨, 혹시 문맹이에요?”
그럼 못 읽어? 여기에 살게 된 지 이제 3년 차인 나도 읽을 수 있는데?
“아, 성녀님. 이 문서들은 일정 이상의 성력이 있지 않으면 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읽지 못해서 성녀님께 확인해 달라고 말씀드린 거구요.”
아, 하일은 신관인데도 성력이 적어서 이렇게 권력에 아첨하는 사람이 된 거구나…….
카넨을 짠하게 보던 시선을 그대로 돌려 하일을 쳐다봤더니, 그가 헛기침을 했다.
“성녀님께서 보시기에 보잘것없는 양의 성력일 수도 있지만, 저도 성력이 적은 편은 아닙니다.”
“그래요…….”
이런 편지도 못 읽고… 불쌍해라…….
“성녀님… 저희도 혹시 읽을 수 있는 이가 있는지 확인해 봤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일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말했다. 하기야 그도 고위 신관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의 성력은 있겠지.
“그렇다면 이런 편지들은 고위 신관과 대신관만이 읽을 수 있겠네요. 저는 예외라고 치고.”
자동적으로 암호화가 되는 거네. 편리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대신관과 밀접하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고위 신관들은 이미 대신관의 사람이라는 거겠지.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긴장해서 읽어 내려갔다.
첫 번째 편지는 전염병에 관련된 것이었다. 날짜가 적혀 있지 않지만 꽤나 최근이겠지. 우선 성녀라는 존재가 알려진 것이 나의 결혼식 날이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편지에는 신전에서 내가 나서지 않았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적혀 있었다.
수도에서 전염병이 창궐할 것이다. 성녀가 나서지 않을 경우, 첫째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도록 한다. 그 방법은 전염병으로 인한 시신이 발생하여도 정화를 하는 것을 미루도록 한다.
둘째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성녀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는 대공비가 성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수도 및 인근의 신관들이 수도 내의 전염병을 치유하며 신도를 늘리고 최대한 많은 양의 헌금을 걷을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에 관한 세부 내용이 좌르륵 적혀 있었다. 정말이지… 지랄이 풍년이었다. 얘네가 모시는 신이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다. 보통 신이라고 하면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신전과 거리가 멀었다. 아니면 신은 멀쩡한데 신을 모시는 자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인가.
“전염병에 관련된 내용이네요. 전염병을 조기에 잡았기에 망정이지,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정화를 늦춰 전염병이 더욱 빠르게 번지도록 하려고 했어요. 가만히 있어도 병이 퍼져 나가는 아주 편리한 방법이었네요.”
하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그럼 신의 사자인 내가 거짓을 말하겠니?
물론 내가 거짓말을 굉장히 잘한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첫 번째 문서를 덮어 놓고 두 번째 문서를 손에 들었다. 제일 먼저 적힌 문구는 <성녀 출현> 이었다. 이번에도 내 얘기라니. 얘네는 할 일이 없어서 내 덕질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신성제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끼리 비밀리에 주고받을 만한 내용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리히엔, 에녹 같은 놈들 넷이서 내 사생팬이었다고 하면……. 갑자기 몸이 오싹해져 부르르 떨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얘기가 적혀 있으려나? 이번 건 좀 짧네? 어디 보자.’
나는 사실 성녀 출현이라기에 내가 나타난 것에 대한 경위나 장소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는 보고서일 줄 알았지, 이런 내용이 적혀 있을 줄 몰랐다.
마탑주인 카넨 드 바르칸의 아내가 성녀인 것으로 추정됨. 만일 그녀가 진짜 성녀라면 마탑주가 성녀를 죽이기 전에 다소 강압적인 방법으로라도 신성제국으로 모셔 올 필요가 있음.
“…….”
“왜 그럽니까, 페리아? 뭐라고 적혀 있길래 그렇게 표정이 안 좋은 겁니까?”
네가 나를 죽인다고 적혀 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목숨을 위협하며 결혼하자고 했던 카넨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를 생각하는 것과 당시에 내가 그를 생각하던 것이 달라졌기 때문인가, 새삼스럽게 충격적이었다.
‘근데 얘가 나를 왜 죽이겠어? 하지만 고위 신관과 대신관들이 내가 이 글을 읽을 것을 알고 쓴 것도 아닐 테니, 없는 말을 지어서 쓴 건 아닐 테고.’
머리가 아파 왔다. 차근차근 떠올려 보면, 카넨은 내가 그와 결혼해서 그의 곁에 있지 않으면 신전에 가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게 될 수도 있으니 죽일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서신의 내용을 살펴보면, 카넨이 나를 죽일 것으로 염려하는 시점이 내가 이미 대공비가 된 이후다.
‘카넨과 결혼을 했는데, 그가 나를 죽인다고?’
결혼을 하고 매일 밤 한 이불을 덮고 뜨거운 나날들을 보내왔지만,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요 근래에는 꽤나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같이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그게 다 연기인가? 아니야. 아직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속단하는 것은 일러.’
굳이 카넨이 나를 죽일 이유가 없잖아? 예뻐, 능력 있어, 마력 채워 줘. 뭘 더 바라? 어쩌면 내가 이 문서를 읽을 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보내 둔 건가?
아냐. 내가 성녀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내용인데, 굳이 성력을 써 가면서 번거롭게 증거를 남겨 둘 이유가 뭐가 있겠어? 그리고 고위 신관이 하루아침에 내쫓기고 방에 있던 문서들이 탈탈 털릴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을 거야.
일단 나는 이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을 해 본 뒤에 카넨에게 말을 꺼내 보기로 했다.
“이건 제가 나타난 이후의 이야기네요. 대공비가 성녀라는 것이 확실하면 신성제국으로 데려와야 한다, 뭐 이런 얘기였어요.”
나의 말을 들은 카넨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거세게 말아 쥔 손이 떨렸다. 카넨의 반응을 보면 진짜 분노한 것처럼 보이는데… 얘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렇게 머리로는 생각을 하는데 받아들일 수가 없네. 그래도 티 내지는 말아야지. 빠져나갈 구멍은 미리미리 만들어 놔야겠다. 원작에서도 신전의 편이었던 여자 주인공과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가 눈이 맞았으니, 카넨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럼 일단, 하일. 물어볼 게 있는데요. 카넨이 그전에 말하길, 대신관을 따르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구요. 이곳에 있는 신관들은 어떤가요?”
이제 이곳의 신관들은 나의 얼굴도 알고 있다. 그런데 대신관이 다시금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할 때, 여기 있는 신관들처럼 가까이에서 나의 외모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대신관의 편에 붙는다면 굉장히 귀찮을 게 뻔했다. 차라리 약간의 협박을 이용하여 대신관이 있는 신전으로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성녀님께서 치료소에서 공작 부인을 치료하실 때 나타난 거대한 황금색 빛을 본 이후로 저희 신관들은 성녀님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저희들은 모두 기적을 보았으나, 수도 밖에 있는 대신관님이나 다른 신관들은 그것을 보지 못해 저희와 의견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는 최악의 경우 신성제국에서 적을 옮기는 한이 있더라도 성녀님을 따르기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하일이 자신의 가슴을 팡팡 치며 호기롭게 말했다. 생긴 건 쭉정이처럼 생겨서는, 하는 행동은 기사 같단 말이지.
하일의 말을 잘 뜯어보면 우선 신성제국은 나를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래 신성제국을 이끌어 갔던 대신관을 따른다는 거겠지? 그리고 수도 밖의 신관들 또한 나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수도 내에 있는 신관들은 나를 따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면 성기사들은요? 여기에 성기사들도 있었잖아요.”
우리를 신전 내에 유폐하려고 했을 때 등장했던 그 성기사들 말이에요, 라는 나의 말에 하일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안 그래도 성기사단이 성녀님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그래요, 혹시 지금 가능할까요?”
나의 앞잡이가 되어 버린 하일이 주선해 주는 것이니 아마 성기사단이 내게 해 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지금 내게는 마력도 성력도 통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물리적인 공격은 통할 것이다. 그럴 땐 어디로든 공간 이동을 해야지. 일단 도망치고 보자!
성녀님이 바라시는 것이라면 안 되는 것은 없다며 호들갑 떠는 하일을 따라 리히엔의 방을 나와 신전 밖으로 향했다.
“성녀님!”
…수십 명의 성기사들이 굵고 낮은 목소리로 성녀님을 외치니까 내가 심장이 약한 사람이 아닌데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네, 네.”
“저희는 신성제국 소속 바르칸 수도 주재 제2 기사단입니다!”
“2기사단요?”
기사단이 몇 개라는 거지? 원작에서는 그냥 성기사들, 기사단 이런 식으로밖에 안 나왔는데.
내가 무슨 얘기인지 못 알아듣고 눈을 깜빡거리자, 하일이 재빠르게 끼어들어 설명했다.
“신성제국에 신성 기사단이 있고, 대신관님과 제1 기사단이 항상 함께 움직입니다. 그리고 각 고위 신관이 있는 곳마다 한 개 기사단이 있는데 수도에 있는 이곳에 제2 기사단, 남부에 제3 기사단, 서부에 제4 기사단이 있습니다.”
“동부랑 북부는요?”
“동부는 신성제국과 가깝기 때문에 기사단 및 고위 신관이 주재하지 않고, 북부는…….”
“아, 아니에요.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표정의 하일을 보고 떠올렸다. 북부는… 트라비안 공작이 기사단이 존재하는 게 싫다며 고위 신관의 안전은 트라비안의 이름을 걸고 지켜 줄 테니 안심하라 했지만, 신성제국에서 거절했었지. 그래서 기사단도 없는 대신, 고위 신관 없이 하급 신관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저희 제2 기사단은 제1 기사단에 비해 수가 적을 뿐, 성녀님을 호위하는 데 부족하지 않습니다!”
기사단장으로 추정되는 자가 자신 있게 하는 말에 카넨이 얼굴을 구겼다.
“성녀를 호위한다고?”
“예.”
“왜?”
카넨이 어이없어하며 묻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기사단장이었다.
당연히 호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성기사단이 고작 하급 신관을 호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성녀님 아닌가. 게다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성녀님의 성력은 진짜였다. 대신관님을 대신관 ‘따위’로 만들어 버리는,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진짜 신의 현신.
“그야 성녀님께서 위험하실 수도 있으니 저희가 호위를 하는 게 맞습니다.”
“너희가 무엇으로부터 페리아를 지켜 줄 수 있지?”
카넨의 날 선 말에 성기사들 또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이 분위기에 가장 미칠 것 같은 건 나였다. 성기사들을 아직 믿지 못하기에 호위 명목으로 그들이 주변에 있다가 갑자기 나를 공격할 수도 있으니 그리 가깝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성기사들과 완전히 척을 지고 싶진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데 대체 왜 카넨이 저렇게 나서는 건지!
“더러운 마력을 지닌 것으로부터 지켜 드릴 수 있겠죠.”
“더러운 마력이라. 신전 밖에서도 그 말을 할 수 있나 볼까?”
카넨이 당장이라도 성기사들과 맞서며 신전 밖으로 나가 우위를 가리려고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카넨의 손을 잡았다.
“그만해요.”
그러자 그의 눈에서 일렁이던 분노가 단번에 사라졌다. 오히려 그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연애 처음 하는 애도 아니고, 놀 만큼 놀던 애가 왜 이러나 싶다.
“일단 호위 얘기는 감사하지만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아요. 지금 제가 있는 곳이 마탑이기도 하고, 사실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으니까요. 곧 제게 저택이 내려올 예정이니 그쪽으로 함께 가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서로 견제해라, 이놈들아! 설마 둘이 손잡고 나를 죽이러 오진 않겠지?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데.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다는 얘기를 할 때는 성기사단의 표정이 시무룩했지만, 그들도 이내 수긍했다. 그리고 카넨이 의기양양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마치 ‘너희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지만 저택으로 함께 가자는 얘기를 할 때는 성기사단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카넨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택으로 갑니까? 진짜? 왜?”
“마법사들은 사람들과의 교류가 너무 적어요.”
“우리 마법사들 많습니다! 원하는 사람 잡고 대화하면 됩니다!”
“마법사들만 많아서 싫어요.”
다 카넨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들이잖아! 내가 걔네들이랑 무슨 얘기를 하겠어! 만에 하나라도 카넨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 그들은 절대로 말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 마탑주님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등 떠밀어 준다면 모를까.
“그럼 마법사들 다 내보내면 됩니까?”
“마법사의 탑에 마법사가 없는 게 말이 돼요?!”
“제가 있는 곳이 곧 마법사의 탑입니다.”
그렇겠지. 세계관 최강자님인데… 그러라지. 그래.
“저택에 가서 정원도 가꾸고 티파티도 열면서 놀 거예요.”
“저는?”
너 뭐? 얘가 왜 나를 부담스럽게 봐.
“저랑은 뭐 할 겁니까.”
“당신이랑 할 게… 하나밖에 더 있어요?”
다 큰 성인 남녀 둘이서 티파티 열어서 소꿉놀이 하겠니? 애초에 너랑 결혼한 이유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뭘 것 같니?
순간적으로 카넨의 눈빛이 짙어졌다. 위험! 긴급!
“잠깐만요!!!!! 지금 공간 이동하려고 하는 거죠? 잠깐만요!”
“싫습니다.”
나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내 눈앞에 보이는 건 신전 앞마당이 아니라, 카넨의 집무실이었다.
“…내가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신관들이랑 성기사들한테 할 말도 있고.”
“지금까지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더 이상은 힘듭니다.”
짧게 내쉰 나의 한숨에 눈치를 보던 카넨이 자신의 최고 장점인 얼굴을 내세워서 요염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은근슬쩍 말을 놓았지만 얼굴을 내 손에 비비며 애교를 부리니 일단은 넘어가 주도록 해야겠다. 오늘 새벽까지도 카넨의 품에 안겨 있다가 점심 무렵에나 일어났는데, 밖에서 워낙 충격적인 일이 많아서 그런지 지금은 다 잊고 싶다.
황궁을 습격하려고 준비 중인 신성제국.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카넨이라니.
‘…에이, 그래도 설마 카넨이 나를 죽이기야 하겠어? 설마.’
에라 모르겠다. 신관들과 성기사들에게는 나중에 편지나 해야지.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대는 카넨을 받아들였다. 내 손은 바쁘게 그의 옷자락을 풀어 헤치고 있었다. 잡념이 끊이질 않을 때는, 더욱 자극적인 것을 찾으면 된다. 예를 들면 기분이 엄청나게 좋은 섹스라든지 하는 그런 것.
“아.”
“왜 그러십니까, 뭐라고 말해도 중간에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옷 태우지 말라고요.”
카넨이 민망한 듯 웃더니 다시 입을 맞추며 드레스에 있는 리본들을 풀어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옷들을 죄다 태워 버리기 전에 벗고 싶었다. 하지만 신분이 높다는 것을 티 내기 위해 값나가는 옷은 혼자서 갈아입을 수 없는 등 쪽에 리본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드레스 안으로 그의 뜨거운 손이 들어왔다. 가슴을 짓누르던 코르셋을 벗어 버리니 홀가분해졌다. 가슴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카넨의 손이 유두를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자 몸이 점점 달아올랐다.
“…손가락 말고.”
“그럼?”
“혀로.”
카넨이 씨익 미소 짓더니 페리아를 안아 책상 위로 올렸다. 와, 평소에 카넨이 연구하는 책상 위에 헐벗고 올라가 앉으니… 배덕감이 굉장했다.
“연구할 때마다 생각나면 어떡해요?”
“그때마다 안아도 됩니까?”
“…하는 거 봐서요.”
카넨이 잘 보여야겠다며 키득댔다.
이전 생에서는 진짜 평범한 섹스밖에 안 해 봤는데. 항상 침대. 기껏해야 차 안? 소설 보면 항상 마차에서도 하는데, 우리는 순간 이동으로 다니니 마차에서 할 일이 없어서 아쉽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카넨이 그녀의 한쪽 유실을 천천히 입 안에 굴렸다. 따뜻하고도 축축한 혀가 주는 감촉에 몸이 떨려 왔다.
“하아… 좋아요, 카넨.”
카넨이 페리아의 다리를 넓게 벌리더니 내려간 그의 손가락 끝이 그녀의 음핵을 스쳤다. 그리고 중지가 그녀의 질 안에 들어가 안쪽에서 샘솟기 시작한 애액을 손끝에 묻혀 와 그녀의 음핵을 꾸욱 눌렀다. 물기 어린 그녀의 클리토리스는 벌써부터 붉게 부풀어 그의 엄지손가락을 따라 가볍게 움직였고, 그 가벼운 움직임에 페리아의 목소리에는 점점 물기가 어렸다.
“나만 기대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페리아.”
“…책상에서 하는 건 처음인걸요.”
“처음이면 더 기대되는 겁니까?”
“아무래도……. 이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고…….”
카넨이 색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애액이 흘러내리고 있는 질 안에 중지와 약지를 단번에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잘게 떨고 있는 페리아를 품에 안고 말했다.
“당신에게 있어 처음인 것을 항상 찾아봐야겠습니다.”
카넨은 이래 봬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페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았었다. 그래 봤자 남작에 불과한 이였다. 그러나 페리아가 성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고, 신관들이 그녀를 우러러보며, 성기사들이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할 줄 몰랐으면.’
하나하나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다. 대체 왜 결혼식 날 군중들 앞에서 성력을 쓰게 했던 것일까? 과거의 자신을 본다면 한 대 후려치고 싶다. 신전을 조롱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 페리아를 겉으로 드러나게 했는지. 신전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도 페리아를 경애한다고 한다. 희생심 깊은 성녀님이라고. 차라리 아무도 그녀를 모르던 그때, 그저 황실 도서관의 사서였을 페리아를 아내로 맞아 마탑에서 유유자적하게 살 것을. 그저 나의 아내이던 그때.
그러나 후회해 봤자 이미 그녀는 모두의 성녀였다. 그러니 그녀에게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지. 카넨이 그녀의 질 안에 넣은 손가락을 구부려 질 벽을 긁어내리자 페리아가 파드득 몸을 떨며 그에게 안겨 왔다.
“하읏, 카넨, 흐으…….”
“좋습니까, 페리아?”
계속된 그의 손짓에 페리아가 숨을 헐떡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카넨이 손가락을 하나 더 찔러 넣으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자신과 모든 것을 처음 하는 페리아였기에, 가르칠 것이 아주 많았으니까. 그리고 마법을 사용하는 자신밖에 못하는 것도 있으니, 그런 부분에서 그녀에게 잘 보이기라도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카넨이 페리아의 안에 중심을 맞추고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이런 행위는 그에게 많은 인내심을 요구했지만, 그가 느릿하게 들어갔을 때 페리아가 더욱 느끼니 별수 없었다. 역시나 카넨의 예상대로 페리아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질 벽의 주름 하나하나에 맞닿는 그의 페니스를 느끼고 있었다.
‘이번엔 뭘 해 볼까…….’
하루가 멀다 하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하고 있으니 슬슬 페리아도 익숙해졌다. 그러니 밤 생활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매번 같은 체위나, 장소에서 하는 것을 피해야겠지.
항간에는 마차에서 하는 것을 즐기는 귀족들이 꽤나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공간 이동을 하니 마차를 탈 일이 없어서 할 수가 없다. 무도회와 같은 연회 때 테라스에서 즐기는 이들도 많다고는 하지만, 당장 페리아와 몸을 섞기 위해 형에게 부탁해 연회를 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지…….’
고민을 하던 카넨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여러 가지 도구를 보면서 눈을 빛내던 페리아.
카넨은 페리아를 책상에 눕히고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그녀의 입 안에 넣었다. 그러자 페리아가 마치 그의 페니스를 애무하듯 그의 손가락을 핥았다. 그녀의 붉은 혀가 모습을 드러낼 때면 카넨의 검붉은 페니스가 더욱 힘을 받아 부피를 키워 갔다.
페리아는 그가 자신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자 다리를 교차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제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음핵을 유린하며 쾌락으로 이끌어 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역시나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음핵을 누른 채로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카넨이 클리토리스를 눌러 대며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동안, 그의 페니스 또한 그녀의 질을 파고들어 예민한 부분을 계속 자극했다.
“아흐… 읏, 흐읏!”
방 안에는 페리아의 물기 어린 목소리와, 퍽퍽퍽퍽 하며 그의 페니스가 그녀의 질 안으로 들어가면서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애액이 찌꺽이며 그의 페니스와 마찰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하읏! 뭐, 뭐예요?”
페리아는 순간적으로 질 안에 무언가 다른 것이 침입하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놀란 페리아가 아래를 급격하게 조이는 바람에 카넨의 미간이 좁혀지며,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이 늦었다.
“…손가락.”
“아니,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요.”
카넨이 허리를 잘게 움직이며 그의 페니스로 페리아가 예민한 부분을 자극하면서도, 음핵을 굴리던 손가락이 그녀의 질 안에 들어와 질 벽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의 페니스로 완전히 가득 차 버려서 그저 애액만이 그녀의 질과 그의 페니스 사이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카넨의 손가락이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다. 하지만 침입에 놀란 것도 잠시, 계속되는 쾌락에 마냥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 3P도 해 본 적이 없기는 하지. 그래도 그건 아니야. 내 안의 유교걸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어!’
페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리기라도 하는 듯, 카넨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셋이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도요.”
“…그래도 당신이 해 본 적 없으니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 같은 사람을 둘이나 감당할 자신은 없어요.”
그녀의 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의 얼굴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리고 카넨이 자신의 성기를 귀두만 가까스로 걸쳐 놓았다가 세차게 찌르자 페리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당신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카넨이 마력을 모아 둥근 막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페니스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밀부에서 손가락을 빼내고는, 둥근 막대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집어넣었다.
“카넨! 느낌이, 이상해요……. 정말 이상해요.”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곧 좋아질 겁니다.”
페리아는 느낌이 이상하다고 말하면서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마치 셋이서 몸을 섞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낯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카넨과 단둘이서 하고 있으니 불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기대감에 몸이 떨려 왔다.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뭐 그런 느낌이지…….’
페리아가 아무런 저항이 없자 카넨이 자신의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집어넣은 막대가 거슬리는 듯 조금 고민하던 카넨이 막대의 크기를 줄였다. 질 입구까지 겨우 나올 정도의 길이가 된 막대는 카넨의 마력에 따라 내부에서 가볍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카넨도 그 이물감이 생경했으나,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페리아가 숨을 들이켜며 제 손목을 세게 잡아 오는 것을 보고 만족스레 웃었다.
“싫은 것 같진 않아 보입니다.”
카넨이 본격적으로 그녀의 골반을 붙잡고 허리를 튕겼다. 그러자 이전까지 느껴지던 어느 정도의 쾌감에 적응하고 있던 페리아가 갑작스럽게 닥쳐온 쾌락에 교성을 내질렀다. 그가 가만히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하악! 아앙! 카넨, 제발! 아응!”
페리아가 자지러지며 그녀가 잡은 카넨의 손목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카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세차게 찔러 넣었다. 페리아는 너무나도 큰 쾌락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뇌가 녹는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 것이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카넨은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그녀가 느끼는 부분을 계속해서 꾹꾹 눌러 자극하며 그녀를 목 놓아 울게 만들었고, 그의 페니스와 함께 있던 막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래에 꽂혀 진동하고 있는 크기가 커졌다.
“이상해, 이상해, 아앙! 카넨, 이상해!”
“페리아, 괜찮아, 그냥 느끼기만 하면 돼.”
카넨이 몸을 숙여 그녀를 끌어안고 자그마한 머리통에 몇 번이나 입술을 맞추었다.
“하앙! 카넨! 아읏, 하… 하읏!”
이제는 막대의 크기가 제법 커져, 카넨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성인 남성 크기가 되었다. 그동안 카넨의 페니스와 함께 그녀의 질 내부를 자극하면서 완전히 자리를 잡은 막대는, 카넨의 것과 교차하여 그것이 빠져나갔을 때는 막대가 찔러 들어오고 그의 페니스가 들어올 때는 주춤하여 뒤로 빠져나왔다. 교대로 안쪽 깊은 곳을 찌르면서도 서로 다른 각도에서 움직이니 페리아는 아무런 생각도 못 하고 교성만 질러 대었다.
계속되는 거센 쾌락에 페리아의 손톱이 박혀 있던 카넨의 손목에서 피가 새어 나왔고, 그녀의 등이 활처럼 굽으며 절정이 찾아왔다. 그리고 카넨은 그녀에게 절정이 찾아오는 것을 깨닫고 그녀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자신의 것을 찔러 넣고 그녀의 음핵을 꼬집었다.
“아앙! 흐아아아아!”
그의 것을 쥐어짜 내듯 주무르는 그녀의 질 안쪽 깊숙한 곳에 그의 페니스에서 따뜻한 액체가 뭉근히 흘러나왔다. 그리고 너무나도 커다란 쾌락의 파도에 휩쓸린 페리아는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숨을 헐떡이기에 바빴다. 그런 그녀가 못내 예쁜 카넨이 페리아가 쾌락의 여운을 즐길 수 있도록 자신의 것과 함께 막대를 빼내자 그녀의 안에서 그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모를 하얀 액체가 흘러내렸다.
지독히도 자극적인 모습을 보는 카넨의 하반신에 또다시 피가 몰렸다. 카넨이 어여쁜 페리아의 손을 잡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등에서 손목, 팔목, 팔뚝을 타고 가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해 그의 키스에 제대로 된 호응도 못 하는 그녀의 모습 또한 만족스러웠다.
짙은 쾌락의 여운에 떨며 호흡을 가다듬는 페리아를, 카넨이 당겨 안아 책상에 엎드리게 했다. 그녀의 등에도 잘게 입을 맞추며 페리아의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양쪽 손에 깍지를 끼어 잡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했습니다. 더 기분 좋게 해 드리겠습니다.”
카넨은 자신의 허리를 능란하게 움직여 단단하게 선 기둥을 그녀의 안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다시금 달아오르는 몸이 쾌락에 부르르 떨었다.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의 품 안에 갇힌 가녀린 여체가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헐떡이는 그녀의 귓가에 못다 한 말을 이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나한테서 떠나려고 하지 마.
하지만 페리아는 멍해진 정신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다. 강한 쾌락에 그저 손에 잡히는 것을 세게 쥐며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비록 그의 것은 계속해서 그녀가 정신을 잃도록 종용하듯 쾌락에 미치게 만들었지만.
“페리아, 하아… 페리아.”
카넨은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페리아의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손을 놓고 싶어 할지라도.